(역사 바로 알기)
“ 역사적으로 유구(오끼나와)는 한국의 속령”
소설가 : 김 용 필
100년 전 만 하여도 오키나와(유구국)는 일본 영토가 아니고 조선의 지배한 숙령이었다. 유구국은 6세기 가야가 망하고 그 후손들이 유구를 장악하여 해동8상국을 만들었고 고려 말 삼별초군의 이문경 장군이 유구로 피신하여 중산 왕을 도와 유구 통일의 기초를 다졌다.
고려 공양왕 땐 유구 중산국은 고려와 동맹을 맺었고 1429년 쇼하이 왕이 조선수병의 힘을 빌려 유구 3국을 통일하고 조선의 목수 120명을 불러들여 15세기 유구국의 수도인 수리성(首里城)을 지었다.
이성은 조선의 건축양식으로 지은 목조 건축물이었다. 그 후 1453년 광해군 때 유구는 조선과 정식 동맹을 맺은 조선의 속령이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은 유구에 원병을 청했으나 조선의 동맹국이기에 원병을 할 수 없다고 하자 1609년 임진왜란이 끝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부 장군인 가고시마의 요시히로 시마스가 유구를 치고 식민지 화 시켰다.
그리고 일본은 계속 반항하는 유구를 그냥 둘 수 없다며 1879년 유구 쇼하시 왕을 체포하여 도쿄로 끌고 와서 항복을 받아냈다. 마침내 1908년 메이지 유신 정부는 유구를 침탈하여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2차 대전 때 미국의 속령이었으나 전쟁이 끝나고 1972년 미국은 오키나와를 다시 일본에 이양하였다.
그러나 지금 유구인 들은 주권을 자긴 자조 국임을 들고 일어나 독립을 선언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유구는 가야의 후손들이 정주한 열도에 고려의 삼별초군이 들어가서 국가 기틀을 만들어 마침내 나라를 세웠다. 유구국은 조선은 맹방으로 국력을 키워왔던 것이다. 따라서 유구(오키나와)는 조선이 만든 나라이기에 역사적으로 우리의 속령이었다.(끝)
-(역사적 근거)-
1404년 쇼하시 왕은 삼별초군의 힘을 빌려 36개 섬을 장악하고 비로소 위대한 유구제국(諸國)을 탄생시켰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하자 정식 국교수립을 위해 무녕 왕자가 다시 1392년 태조 원년에 조선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조선의 반대로 수교를 받아주지 않았다.
쇼하시가 주잔 왕을 멸하고 통일 유구의 왕이 되면서 조선에 사신을 다시 보내 수교를 요청하였다. 산남왕 온사도는 쇼하시 정복군을 피해 15명의 사람을 거느리고 배를 이용해 조선으로 들어와서 국교를 청했다.
이렇게 산남, 쥬산, 중산의 3국의 유구왕국은 1429년 3대 쇼하시(상파시1422-1439)왕 때 중산국 왕으로 미야마 통일(三山統一)을 이룩하고 나하에 수도를 정하고 수리성을 축성하였다. 수리성은 조선의 성을 그대로 모방하여 만들었다.
‘선왕조실록’ 에 실린 기록에 의하면 수교차 온 이들에게 태조왕이 의복과 식량을 내주고 조정에 불러 조회에 참석시켜 선진 조선의 문물을 익히고 배우게 배려했다. 1409년 태종 9년 쇼하시 왕은 남사 왕자를 사신을 보냈고 마침내 1418년 태종 때 중산왕 하통이 찾아와서 조선과 튼튼한 국교를 수립하였다. 이제부터 유구는 조선의 우방으로 해상의 교역권을 부여받았고 조선은 유구에 조선의 제도와 문물을 전수하였다.
1429년 쇼하시가 천하통일 전쟁으로 삼국을 통일하고 중국과 동남아시아에 대한 무역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쇼하시 왕은 이무일 장군과 1429년 남산과 북산 왕을 폐하고 3국 통일을 통일하였다. 유구 왕국은 비로소 제3대 쇼하시 왕때부터 국가다운 국가를 건국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오래가지 못하고 1431년 승하하고 말았다.
1431년 세종 13년 아버지 쇼하시 왕의 뒤를 이은 상파지 왕이 조공을 들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고하려고 조선을 찾아와서 수교를 다짐하였고 1471년(성종)엔 조선의 조정은 신숙주를 중산국에 파견하여 국교를 강화하였다.
신숙주는 유구에 다녀와서 여행기인 ‘해동제국기’를 집필 하였고 계유(1453, 단종 1)에는, 유구국 중산왕 상금복현(琉球國中山王尙金福見)이 사신을 보내왔고, 1455, 세조 1년에도, 유구국왕 상태구(琉球國王尙泰久)가 사신을 보냈고 천순 2년 무인(1458, 세조 4)에는, 유구국왕 상덕(琉球國王尙德)왕이 성화 2년 병술(1466, 세조 12)년에 사신 자단서당(自端書堂)을 보내 본격적인 선린 수호국이 되었다.
이로부터 유구는 조선의 우방으로 조선의 문물을 인수받는 국가가 되었다.
1504년에 ‘오야케 아카하치’ 가 이야코지마(궁고도)에 나타나 파조간도(坡照間島 )에서 세력을 구축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고 반란을 일으켰다. 마침 유구는 천리나 떨어진 곳이라 중앙왕권 통치력이 미치지 못해 방치상태로 있었다. 이틈을 이용하여 일본은 1610년 유구국왕 상영을( 가고시마 사쓰마번의 시마즈씨가) 항복시켰다.
그는 유구를 정복하고 일본의 유력한 봉건 가문으로 중세의 판권을 장악하였다. 일본의 유구 정벌은 바로 큐슈의 호족 시마즈씨로부터 시작되었다. 시마즈 씨는 본래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총애하는 가신들 중에서 가마쿠라 바쿠후에서 많은 공을 세운 바 있는 시마즈 다다히사(島津忠久)가 이룩한 가문이었다.
그는 다이묘로서 존속은 했지만, 전쟁에 잃은 후유증으로 재정난에 처해 있었다.
그 대책으로 시마즈 씨는 유구 왕국을 공략하는 결의를 하였다. 도쿠가와 바쿠후는 해외 교역을 금하였기 때문에 시마즈 씨는 무역을 할 수가 없었다.
시마즈 씨는 이들 나라를 병합하지 않고 괴뢰 정권으로 조종하여 자신들의 무역 기지로 활용하였다. 병합하면 일본 땅이 되어 중앙 히데요시 정부 바쿠후의 명령을 받으며 무역 금지령이 내려 이익을 얻을 수 없기에 유구를 존치하고 무역 권만 차지하였다.
이렇게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하자 분풀이로 유구를 공격하여 정복해 버렸다. 이유는 유구가 조선과 동맹 관계에 있었고 조선 침략시 병사 파견 요청을 거절한 보복이었다. 요시히로의 부하들은 조선을 정벌하러 갔던 용맹스런 무사들이기 때문에 이들 작은 섬나라들은 순식간에 점령당했다. 마침내 쇼타이왕은 항복문서에 조인하고 일본의 속령이 되었다. 1609년 가고시마의 요시히로 시마르 장군이 유구를 침공하여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그 후 조선 침략의 중심에서서 나중에 메이지(明治)유신을 이끈 사쓰마(가고시마)현의 군세들이 18세기 말부터 경제가 악화되어 혼란스런 틈을 타서 1879년 일본 제국은 무력으로 유구왕국을 침입하였다. 유구 왕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쇼타이 왕은 메이지 정부에 의해 강제로 도쿄로 이주당해 후작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일본은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여 사실상 유구를 몰락시켰다. 유구처분으로 유구 왕국은 멸망하고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오키나와 인들은 스스로 일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일본과 오키나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엄연히 다른 민족이고 다른 문화를 가졌다. 그러니까 100여 년 전만 하여도 오키나와는 유구국이라며 독립을 해야 한다고 외친다. 우린 절대 일본 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유구는 고려의 삼별초 후손들이 만든 나라죠. 삼별초의 피난군이 유구에 와서 가야 후손들의 배려로 만든 나라라고 말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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