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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이야기(PJ) - 26, 27, 28부, etc 멀린

영원오늘 2010. 7. 15. 22:59

.[펌]


오늘의 세상이 지배엘리트의 독재에 의해 억압되어 왔는데 그 연원은 그네들의 의도적인 대중문화에 대한 조작행위에서 비롯됨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섬뜩한 일이 아닐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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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개성

인간들이 “죽음 속으로 사라진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와 같은 문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갖게 되는 가장 큰 어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자신들의 불멸성에 대한 이해 부족에 기인한다. 만약 한 인간의 육체가, 보이지는 않으나 불멸인 자아, 영혼 또는 개체성에 의해 중심잡히지 않는다면, 시각화되어진, 즉 보이는 육체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인간은, 개인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긴 하지만, 무엇이 자신의 개성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개념이 모호한 상태에 있다. 인간의 개성이란, 부지불식간에 그 당사자가, 자신의 불멸의 자아가 누구인지(무엇인지)에 대해 스스로 해석하는 바에 해당하는 것이다.

자아, 또는 영혼(Soul)은 결코 변하지 않으며, 결코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지만, 그 개성은, 자신의 불멸의 자아가 누구인지(무엇인지)에 대해 스스로 해석하는 바에 해당하는 개념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에 맞춰서, 영구적으로 끝없이 변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자아의 빛에 대해 서서히 알게 되고, 그의 개성은, 자신 속에 중심을 잡고 있는 이 전지(全知 omniscience)의 증대되는 앎으로 향하게 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한 끝없는 고양(uplift) 속에서 변화해 나가는 것이다.

우주적 자아의 빛에 대한 보다 더 큰 앎에 이르게 될 때, 인간은 서서히 자신의 개성을 잃게 되고 그러한 우주적 자아에 보다 더 근접하게 된다. 한 인간이 자기자신 속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완전히 알게 되었을 때, 지구라는 당신들의 행성에서의 연극은 끝나게 되며, 그의 목적은 성취되었기에, 그 개별적인 인간은 존재를 멈추게 된다.

인간은 물질 속에서의 삶의 표현은 잃지만(육체적 죽음 있지만) , 빛 속에서의 영원한 삶을 찾게 된다.

그 어떤 죽음도 없다!


Gyeorgos Ceres Hatonn ,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3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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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권 문화 대 대중조작문화

충돌의 장을 가리는 구름들

“인류의 진보[human progress]”라고 불리는 이 혼동스러운 주제는, 두 문화의 주창자들 간에 벌어지는 이 의미심장한 충돌을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새롭게 제작된 기계 장치들’에 초점을 두게 만들어, 인간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조작된 대중 문화의 대변인들은 이를 통해 인간의 역사를 왜곡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새로운 기계 장치들’을 갖다 놓고, 문명의 수준의 척도인 양 자랑하고, 미국의 학생들에게, 2천년 전 북유럽에는 “야만인들[barbarians]”만이 살고 있었노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 고고학적 발굴들은, 세계에서 가장 일찍, 세련된 수준의 제작품들이 개발되었던 것은 유럽 지역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들은, 단지 논리적인 역사적 추론을 통해, 북유럽인들은 인공품들[man-made things]을 거부하고, 그들만의 가치 기준을 따라, 자연으로 되돌아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지만, 이야기의 초점을 딴 곳으로 돌리게 될 수도 있을 것이기에, 우리는 이에 대한 설명에 더 매달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구전된 역사[the verbal history], 혹은 “신화[mythology]”는 당신들이 사는 곳이 지금껏 체계적으로 파괴되어 왔으며, 완전히 뒤틀려 왔다는 사실을 말해 주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은 오직, B.C. 60년경,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가 북유럽인들에 대해서 서술한 것에 대해서만 알고 있으나, 그의 글에 묘사된 ‘개인 주권 문화’는, 그 보다 앞서, 언급되지 않은 무수한 세기들에 걸쳐 존재해 왔었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개인 주권 의식을 가진 자들만을 선별적으로 양성해 내던 이 문화의 정수는, 시저의 침입 시도에서 불구하고, 이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땅[the no-man’s land]’ 속에서 효과적으로 보호될 수 있었습니다. 일방적인 통행만이 허용되었습니다. 북유럽인들이 바깥으로 나갈 수는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 땅 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결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격리된 문화를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의식적으로 개인 주권을 지지하는 개개인들로서[as individuals], 그들은, ‘잠재적인 대중 조직체들[potential mass organisms]’, 즉 그들이 ‘용들[dragons]’이라고 부르던 대상들과 맞서 싸워 왔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외부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는, 그러한 충돌도 그저 통상적인 집단과 집단간의 전쟁, 즉 외부인들인 자신들의 문화의 본질적인 요소를 구성하는 타입의 전쟁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만 여겼던 것입니다.

이처럼 상반되는 두 문화를 대표하는 사람들 간의 충돌이, ‘충돌의 본질’을 이루었던 것으로, 당신들이 찾아 볼 수 있는 기록 상에 등장하는 가장 최초의 사례는, 초기 바빌로니아인들[the early Babylonians]과 이란 고원[Iranian plateau]을 점유하고 있던 사람들 간의 충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 기록 속에는 오직 그들 간의 충돌의 “외양[color]”에 대한 묘사만이 남아 있을 뿐이라서, 문화를 축으로 한 사람들 간의 분열 양상이, 북유럽 문화의 중핵을 이루던 개인 주권 문화인들이 다른 곳으로도 퍼져나가서 그렇게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란 대 바빌로니아 간의 투쟁이 그러한 분열의 기원을 이루었던 것인지에 대해서, 오늘날의 당신들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다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 자신들이 스스로를 뭐라고 부르든 간에, ‘하자르인들[the Khazars]’이라 불리는 자들에 대해서도 보다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고, 그렇게 함을 통해서, 우리는 이 탐구에 있어서 보다 나는 토대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두가지 문화를 분명하게 이해하려면, 당신들은 이 반대되는 문화를 주창하는 자들 사이의 뚜렷한 차이를 찾아보고 이를 식별해 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당신들은 그저 ‘문화의 쓰레기통’을 이리저리 뒤지는 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각각이 대척 지점에 있다고 할 만큼 정반대되는 이 두가지 문화들은 결코, 단일한 사람들[one people] 속에서 섞일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의 인간 문화가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은 오직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자연의 포괄적인 (진화) 방향[Nature’s overall direction] 혹은 그 반대 방향.

동시에 두가지 반대되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단호한 진술이 어쩌면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문화들’에 관한 한, 오늘날 그러한 진술은 점점 더 분명히 요구되고 있는데, 왜냐하면, 오늘날 두가지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의 강요된 혼재 상태를 두고, “문화 융합을 통해 달성된 풍요[the richness achieved by mixing cultures]”라고 부르는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언어 도단은 혼동을 증대시키기 위한 수작의 일환인 것입니다.

—자, 그럼 누가 혼동을 야기시키는 달인들일 것 같습니까? ‘문명’의 조각들은, 반대되는 문화들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혼재로 인해 파괴되어 왔으며, 마치 렌즈가 깨진 만화경[kaleidoscope]을 통해 조각난 상들을 바라다 보는 것처럼, 시야를 흐리게 하는 조각난 단면들만을 갖고 있을 뿐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문화를 ‘문화’라는 잣대만으로 보게 될 때, 문화란 ‘자연 선택에 대한 인간 의지의 투입(반영)[an injection of human will into natural selection]’인 것입니다.

자연 선택은 오직 탄생과 죽음의 문제만을 다룹니다. 인간 의지에 의해 형성된 문화들 역시, 탄생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갖게 되는 ‘살과 피’는, 생존을 위해 ‘인간 의지’가 선택한 방식에 따라 얻게 되는 것으로서, ‘자연 선택 상에 투입된(반영된) 문화[injecting cultures into natural selection]’로 인해, “성취되는 풍요(혹은 오염)[richness (or pollution) achieved]”에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의도적인 대중 조작자들[mass manipulators]은 고의로 혼동을 야기시켜, 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흐리게 만듭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야를 가리는 구름들’을 꿰뚫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역사에 걸쳐, 개인 주권 문화 속에 양성된 사람들과 대중 조작 문화 속에 양성된 사람들이 혼재되어 살던 지역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향하는 문화 방향이 반대였기에 이들 사이에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충돌에 대해서, 광범위한 역사적 관점 속에서의 통찰력 있는 분석이 이루어지지 못해 왔습니다.

잘 알려진 역사 학자들 가운데, 슈펭글러[Spengler](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 : 1880-1936, 독일의 사학자, 철학자. ‘인간과 기술’, ‘서구의 몰락’ 저술—역주) 정도가 가장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긴 했지만, 그 조차도, 이 ‘혼재된 상태’를 두고, 단순히 “문화”라고 지칭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구에서의 생을 살아 나가면서, 빈약한 역사 자료들을 근거로, 상당한 지적 추론과 이해를 펼쳐 보였던 이러한 인물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역사적인 사실들은 개인 주권 문화 속에 양성된 일군의 사람들이 인도로 이동해 갔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인도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원시 문화(대중 조작 문화)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개인 주권 문화권 사람들은 이 엄청난 숫자에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속에서 그들만의 문화를 세워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그들의 이상을 행동으로 바로 옮길 수는 없었고, 대신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 일은 기록된 역사가 남겨지기 이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이 두 문화들 간의 충돌은 말로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두 가지 반대되는 문화권의 사람들이 혼재되었던 또 다른 예는 그리스에서 있었는데, 개인 주권 문화의 정수를 이어받은 사람들이 반대 문화에 젖어 있던 그리스로 흘러 들어 갔을 때,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이들 간의 의도적인 분리는, 임의로 사람들을 “시민”과 “노예”로 나누는 작업을 통해 수세기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매일같이 접촉을 가지면서 철저히 섞여 있는 한, 이러한 의도적인 분리는 분명코 제대로 작동될 리가 없었습니다.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두 가지 다른 문화적 사고 패턴을 가진 자들을 “합리적으로” 결합시킨 “과학적인(이상적인) 상태[scientific state]”를 만들어 보려는 시도는, 결국 “그리스의 황금기[golden age of Greece]”로 불리는 시대가 무너지면서, 함께 종료되었습니다. 하지만, 대중 조작 문화 속에 길들여진 지중해 연안의 사람들에게 (그리스적 경험의) “통치술[the science of government]”을 전파해 줄 수 있을만한 제국을 건설해 보려는, 다소 무모한 시도 속에서, 그리스인들은 ‘유형의 문명[a tangible civilization]’을 만들어 냈는데, 이는 두 가지 혼합 문화 속에서 탄생된 것으로, 잘 익은 과일만큼이나 무르익어 있었습니다. 그리스 시대에 보다 강건하고 통솔력을 갖췄던 정력적인 몇몇 사람들(교사들)은, 이러한 혼재적 메커니즘 속에, 이해와 지혜와 통찰력을 불어 넣으려고 계속해서 애를 써 왔습니다.—이 시대, 지금 이 순간, 당신들 가운데 몇몇은 계속된 좌절을 맛보면서도, 대중을 일깨우기 위해 반복적인 시도를 지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중 조작 문화[the culture of mass manipulation]에 완전히 동화되어 왔던 로마인들은, 두 가지 반대되는 문화들의 혼재 속에 혼동을 겪고 있던 사람들(그리스인들)을 집어 삼킬만큼, 충분히 강한 군사력까지도 보유한 상태에 있었고, 결국, 이들은 그리스인들과 그리스 제국을 점령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에 대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하지만, 정작 당시에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해 부족 상태에 있습니다.

조작된 대중 문화에 걸맞게 “교육받은” 자들이 기록한 역사 속에는, ‘전면 전쟁[mass warfare]’(하지만 이것은 인간들과 몇몇 퇴보해가는 곤충들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살아있는 생명체들도 하지 않는 행동입니다.)이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기술한 역사는 그저 대중 조작자들의 연구물들이자, 이들 대중 조작자들의 “권위”아래 행동해 온, 전장의 우두머리들에 대한 기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들의 역사 기록에 따를 것 같으면, 인류 역사상 조작된 대중 문화 이외의 다른 문화는 결코 존재한 적도 없고, 또 앞으로도 존재할 리가 없을 것만 같은 암시를 줍니다. 그들은 ‘원시 문화’를 ‘인간 문화’로서 받아들이면서, 이를 인간들에게 적용시켜 표현할 때, “문화”라는 단어가 갖는 참뜻을 제거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그 말의 뜻을 왜곡시켜, ‘문화’가 “교육을 통한 발전이나 진보, 혹은 그러한 발전의 결과로서 얻게 되는 세련됨”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 문화들 간의 충돌에 따른 방향성’의 문제는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 문화들’은 ‘인간 의지의 특화된 사용[a specialized use of human will]’으로서, 바람[wind]을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바로 그 바람과 같이 그 효과는 엄연히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당신들의 역사학자들은 오직 그 효과들만을 서술합니다. ;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와 로마 제국이 지중해 인근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동안 존재했었던, 두가지 반대되는 문화들을 지적해 내지도 못하고, 심지어 그런 게 있었던 것인지를 인식하지 조차 못하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주의깊은 재검토를 통해, 당신들은 현재 진행 중인 문화 충돌의 시발점이 어디였는지를 식별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전체 인간 종들의 운명에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띨 것입니다.

—인간들의 운명은 궁극적으로 두 가지 문화 가운데 어떤 문화가 지배하느냐에 따라 판가름 날 것입니다. 이 대척점을 이루는 두 가지 반대되는 문화들은 거의 간파되지 못했으며, 전적으로 무시되어 왔습니다. 만약 당신이 제 3자적 관점을 가지고 살펴 본다면, 큰 그림이 눈에 들어 올 것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거국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과정을 밟아 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마 당황스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 두가지 다른 방향성을 띤 문화들의 만남은 두 개의 바람들의 만남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그런데, 반대되는 두 방향성을 띤 바람들이 만날 때, 파괴적인 폭풍이 형성됩니다. 자, 그런데 바로 이 두 바람들이 만난 바로 그 때, 한 명의 그리스도적인 존재[a Christed being](당시의 시대 흐름 상으로 보자면, 그는 당신들이 ‘예수[Jesus]’라고 부르는 자였습니다.)가 왔고, 그는 이 “폭풍의 눈[eye of the storm]”에 의미심장하게 자리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거대한 폭풍은, 전체 인간 종들로서 당신들 모두의 사활이 걸려 있는 폭풍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충돌

지금 현재 인간 종들에게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알려진 역사[known history]’로부터, 의미있는 사건들을 잘 ‘걸러낸’ 다음, 이들을 의미있는 순서로 재배열해 봐야만 하는 것입니다. 문화적 ‘폭풍’ 체계[the cultural storm system]는, 그 “폭풍의 눈[the eye of the storm]”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전체적인 조망아래 관찰해 볼 수 없는 문제입니다.

나는 이 특별한 “존재”에 대하여, 영적인 측면에 있어서의 논리적인 설명이나 차이점들을 제시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이 ‘존재’ 주변의 환경에 대해서, 그리고 이와 수반된 것들에 대해서는, 주의의 끈을 놓지 않고 다룰 것입니다. 혼재된 문화들로 된, 오늘날 당신들의 삶의 영역 속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이 “폭풍의 눈”에 대하여, 가장 공통된 관점들을 견지해 왔고, 또 그 특징을 잘 요약할 수 있었던 역사가들이 지금껏 늘 있어 왔습니다.

한편으론, 다음과 같이 언급되기도 했습니다. : “그것이 좋은 이야기든, 나쁜 이야기든 간에, 그것이 사실이든, 허구이든 간에, 예수의 이야기는 인간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아마 엄청난 영향일 것입니다.)을 미쳐 왔다.” 미국에는 예수의 이야기에 관한 두 가지 뚜렷한 관점들이 존재합니다. 우선, 한가지는, 예수는 “초자연적인” 존재였다고 믿는 사람들이 견지하는 관점으로, 이에 따르자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원죄[sins]”를 갖고 있고, 예수는 사람들의 “원죄”에 대한 희생(대속)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앞선 관점의 사람들 모두를 싸잡아 “다시 태어난 바보들”로 폄하하는 자들이 갖는 관점으로, 이들은 예수와 관련된 전체 이야기는 결코 애당초 일어났던 적도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자, 내가 당신들에게 확실히 말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이 유명한 “예수” 엠마누엘[ Emmanuel of “Jesus”]은, 자신이 존재했었다는 사실마저 부인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또한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전체 인류에 대한 속임수나 미몽으로 변질되는 것 역시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믿건 말건 간에.—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 단순히 신화적인 이야기들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다른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작가들 혹은 분별력을 지닌 작가들은(그 중 몇몇은 그렇게 애매한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제 3의 관점을 제시해 보였습니다. 그들의 관점이란, 예수의 이야기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가, 완전한 사실들만으로 구성되었을 때,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진술은 대부분의 당신들에게 한가지 놀라운 소식이 될 것입니다.—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예수의 “실제” 이야기 버전[one “straight” version]’을 담은, ‘미국 기독 성경[the American Christian Bible]’을, 자신의 서평을 담아 출간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당시 에릭 홀덴[Erik Holden]이라는 한 역사학자는, 존 할랜드[John Harland]로부터 시작된 작업을 이어 받아, ‘의미있는 사건의 조각들’을 걸러내는 일을 계속적으로 수행해 오기도 했습니다. 홀덴은 ‘실제 이야기가 갖는 의미’를 많은 제도권 종교 단체들로부터 받아들여지는 이야기의 의미와 대조해 나갔던 것입니다.

제퍼슨이 편집한 성경 내역에는, 사도 바울[Paul]의 글은 모두 빠져 있었습니다. (나는 이자리에서 당신들이 “그리고 그들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불렀다[AND THEY CALLED HIS NAME IMMANUEL]”(피닉스 저널 제 2권—역주)라는 책을 다시 참조해 보고, 바울에 관한 사실들을 확인해 보기를 권합니다. 하지만, 사실상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바울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지금 현재, 자신이 전파한 잘못된 정보들을 수정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완전히 180도 왜곡된 이야기들이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the Council of Nice]에서 채택되었던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제퍼슨 성경[Jefferson Bible]은, 모두 진실만을 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대개 발매 금지 처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 그 보다 앞선 시점에 출간되었던 모든 성경 판본들에는, 하자르인들(유태인들)[Khazars(Jews)]과 유대-기독교인들[Judaeo-Christians]에 대한 변명에 가까운 언급들이 넌지시 들어 있었는데, 제퍼슨은 바로 이러한 부분들을 자신의 판본에서는 배제했었던 것입니다.

홀덴이 ‘예수의 이야기’에 대해 가졌던 관점은 제퍼슨의 시각과 아주 유사했습니다. 제퍼슨은 미국 독립 선언서[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의 저자이자, 제도권 기독교[institutional Christianity]를 거부한 사람이기도 했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진정한 기독교인[a real Christian]이라고 단언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홀덴은 자신의 작업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출발점’을 골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 기독 성경[The American Christian Bible]’은 오늘날의 미국인들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개인 주권 문화이자, 이 문화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으로, 개인 주권에 입각한 국가 주권을 지향하는 문화와, 조작된 대중 문화 간에 벌어지는 오늘날의 충돌 양상은 지난 2천년 간 지속되어 온 충돌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기독주의[Christianity]’라고 불리는 어떤 것을 북유럽인들에게 억지로 강요했던 것이, 현 충돌의 근원적인 시발점이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땅[no-man’s land]’을 주의깊에 보존하며, 격리된 상태를 지켜오던 북유럽인들은, 외부에서 온 어떠한 ‘조작된 대중들’이 휘두르는 무력 앞에서도 결코 정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적들은, 교활한 방식으로, 조작된 대중 문화를 북유럽에 침투시켰고, 그런 다음, ‘이 문화에 휩쓸려 버린 북유럽인들’로 구성된 ‘조작된 대중’을 이용하여, 그들 자신들의 문화를 스스로 파괴하도록 만드는 한 편, 다른 북유럽인들, 말하자면, 개인 주권 문화 속에 길러진 수백만명에 이르는 북유럽인들에게 ‘조작된 북유럽 대중’의 강권을 휘둘렀던 것입니다.

믿기지 않는 일처럼 보이겠지만, 이 동일한 전술은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효과적입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은, 개인 주권 문화로 길러진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개인 주권 문화로 길러진 사람들과 싸우도록 만든 전쟁이었습니다. 대중 조작자들이 “문화 융합으로 구가되는 풍요”라고 부르는 것은 ‘합성 약물’과 같은 것입니다. ; 이 약물은 모든 분별력을 파괴시켜 버립니다. ; 그리고 이것은 사람들을 부추겨, ‘제정신이 아닌 행위들’에 쉽사리 뛰어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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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명사회의 구성원의 주권의식에 관한 글이 계속됩니다. 주권은 헌법용어이기도 하고 정치 쟁점이기도 한데 여기서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주권자여야만 영적 수준에서 온전한 생활을 할수잇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주권의식을 충분히 발달시킨 국민이 얼마나 될가요? 미국은요? 전세계에 걸쳐서는요?

제가 접한 2007년도 서한에는 세계적으로 주권자라고 말할수 있는 인류가 3억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2년의 세월은 상당한 인원을 더 깨워서 추가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제생각에는 우리 대한민국은 주권국가라는 노래가 불리울 정도이고 노짱 조문행렬에 중고등학생이 서있다는 갸륵한 뉴스를 보는대요,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수준의 주권자를 많이 보유한 나라임에 틀림없습니다. 주권은 잘살고 잘되는 것과 아무상관이 없죠. 특히 영적인 주권은 고통속에서 탄압과 방황을 이겨낸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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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개인 주권 문화 vs. 대중 조작 문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

수세기 전 교활한 방식으로 북유럽에 주입되었던 문화는 여전히 현재의 충돌 양상의 초점으로 남아 있습니다. 당신들 가운데 많은 자들은, 당시에 주입되었던 것은 단지 종교였을 뿐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가 실생활에 있어서 더 이상 그렇게 대단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고 말하며, 위에 언급된 진술에 동의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해야만 하겠습니다. : 우리 말을 끝까지 들으십시오! 우리는 ‘종교’라는 ‘거짓된 카테고리’로 분류된 어떤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중세 가톨릭 교회에 의한 대중 조작 문화는, 한편으로, 대량 살육과 고문과 공공장소에서의 화형이라는 ‘문화적 행위’의 단면을 띠면서, 강요되었던 것입니다. 그 또 다른 단면으로, 교회는 결혼을 “통제”했고, 신앙을 강요했으며, 아이들은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이 자손을 갖는 일이 허락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을 선별적으로 살해하고, 원치 않는 방식의 출산과 양육이 강요되는 가운데, 대중 조작 문화라는, 이 외부 문화가 지향하는 노선은, 북유럽인들에게 익숙한 개인 주권 문화와는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며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 외부 문화는, 북유럽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이 ‘용의 모습’을 띠고 있음이 밝혀졌고, 성공적으로 반대 기류가 조성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 ‘용의 모습’이 제대로 식별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단순히 이에 대한 ‘분별력의 씨앗’만을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개별적인 파괴자들이 이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땅’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여권을 소지해야만 했습니다.

할랜드[Harland]는, 외부 문화 주창자들에게 부여하는 통과 허가권이 된 여권을,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이 동전의 한 면에는 ‘예수의 가르침’이 들어 있었고, 다른 한 면에는 ‘유랑 하자르인들(소위 말하는 유태인들)의 처세술’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설교를 위해 북유럽으로 들어가고자 했던 목사들은, 운좋게 동전을 던져서 좋은 면이 나오면 통과 허가권을 얻는 것이고, 아니면, 거부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이와 똑같은 속임수가, 하루 종일, 그리고 매일 같이, 사용되고 있는데, 바로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들에 대한 위헌적인[unconstitutional] 통제력을 쥐고 있는 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양면 동전’에는, 두 단어를 이어 붙인, 다음 말이 쓰여 있기도 합니다. : 유대-기독주의[Judaeo-Christianity]

우리는 개인 주권 문화권에서 대소동을 벌여 온, 이 ‘양면 여권’을 대단히 주의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오기 전에, 이 유랑 하자르 민족[the Nomadic Khazar Nation]은 로마 제국 안에서 사소한 잡음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반대되는 문화들이 예수, 즉 “폭풍의 눈”을 만나게 되었을 때, 단지 이들이 한 쪽 문화권 ‘날씨 형성의 최전선’에 있었기에, 전세계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요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 전체 폭풍우 체계’ 자체가 이 글의 중요 관심사가 될 것입니다.


‘신’ 만들어 내기[INVENTING GOD]

지난 2천년에 걸친 역사를 한꺼번에 고찰하는 이점을 안고서 본다면, 당신들은 예수가 “단지 우연히” 유대인들[the Judeans] 사이에 태어나게 되었던 바로 그 땅이, ‘반대되는 두 문화 바람들’이 만난, 정확한 교차 지점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하자르인들이 로마 제국 안에서 사소한 마찰만을 불러 일으켰을지라도, 그들은 ‘조작된 대중 문화권 날씨 전선’ 형성에 있어, 세상에서 가장 뚜렷하게 부각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자르인들은 지구 상의 어떤 다른 민족들 보다가도, 너무나도 분명하게, 조작된 대중 문화가 만들어 낸 전형적인 사례에 부합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지구상의 어떤 다른 민족들 보다가도 훨씬 노골적으로 이 문화를 옹호했습니다. 그들은 이성적인 판단력을 가진 상태에서도, 의도적으로, 자연에 반대되는 “신”을 만들어 내어[inventing a “god” who opposed Nature], ‘원시 문화’가 지향하는 중핵적인 방향성을 공식화해 나갔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하자르인들(오늘날 스스로 자신들을 소위 유태인들이라 지칭하는 자들)은 더 이상 그러한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진 그들의 목표는, “자연을 눌러 이기는 승리[victory over nature]”이자, 자신들의 반-자연적인 “도덕률”[anti-Nature “morality”]의 옹호이며, 이러한 목표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신”에 의해 주어졌다고 주장합니다. 혹은 이러한 목표들이 그들이 지향하는 ‘무신론적 공산주의[atheistic communism]’에 논리적으로 부합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목표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잘 조화를 이루는 그들만의 행위 원칙들로서 여전히 핵심적인 사항들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의 “신”을 옹호하는 대변인들에 따르자면, 그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신”에 의해 선택된 민족이며, 그들이 이 세상 전체에 대한 “조작하는 자들”로서의 역할을 맡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자연과의 접촉[contact with Nature]’의 필요성도 거부합니다. 그들의 대변인들에 따르자면, 그들의 “신”은 그들에게 어떠한 ‘자연과의 접촉’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생산해 낸 ‘젖과 꿀’로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문화는 그처럼 자연에 대한 완전한 ‘경외심 부족’과 ‘인식 부족’ 상태의 사람들을 양성해 왔고, 그들이 목표로 삼는 “자연을 눌러 이기는 승리[victory over nature]”라는 것은, 퇴보해 가는 곤충들이 “성취해 내고자 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것을 성취하려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해, 그들은 완전한 무지 상태 속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궁극적으로 ‘돌아올 수 없는 지점’ 너머로 전체 인간 종들이 퇴보해 나가도록 밀어 붙이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문화적 폭풍우’가 형성되었을 때, 하자르인들의 문화와 대척점을 이루던 문화는 북유럽에 격리된 채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그리스인들이 개인 주권 문화 속에 길러진 자들이었다고는 하나, 대중 조작 문화 속에 양성된 자들을 통제해 나가려는 노력 속에, 그들은 이 문화와 타협해 왔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문명의 모범적인 예에 따라 설계된 13개의 도시국가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도시들이 바로 예수가 태어난 지역을 둘러싼 주변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원래의 정신이 얼마간 퇴색되거나, 혼재적 성격을 띠었던 도시들, 또 특정의 색깔이나 경향이 더 가미된 도시들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조작된 대중 문화에 맞서는 대안적인 문화들이 이 지역에 전반적으로 스며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문화적 색상’을 감지해 내고, ‘가벼운 미풍’을 느끼고, 또 이 ‘가벼운 미풍’으로 인식되는 문화가 완전한 힘을 얻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시각화시켜 볼 수 있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소위 말하는 유태인들(하자르인들)이 가진 것보다 훨씬 더 예리한 분별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의 타협으로 상당히 약화되어 온 문화지만, 대중 조작 문화에 대한 대안 문화로서의 힌트가 될 수 있었던 ‘가벼운 바람들’이자, 개인 주권 문화와 같은 방향성을 띤 문화들은, 전체 자연의 큰 흐름이라는 맥락 아래 판별될 수 있었습니다.

이 ‘가벼운 문화적 바람들’은 자연을 지지하는 문화이자, 또 자연으로부터 지지받을 수 있는 문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해줄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 정도가 미소하다고는 할지라도, 대중 조작 문화와는 전혀 다른 문화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제안들’은, 당시 지배권을 두고 다툼을 벌이던 두 개의 다른 문화 세력들(이 때, 이 지역에 존재했던 두가지 다른 문화 세력들은 모두 대중 조작 문화의 다른 형태들에 불과했습니다.)의 주창자들이 펼쳐내던 갖가지 ‘잔 기술들[squeeze play]’ 속에 둘러싸여 있던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분별력을 불어 넣어 줄 수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하자르인들을 상대로 지배력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하자르인들은 공개적으로는 로마인들 앞에 고개를 숙였지만, 비밀리에는 이들과 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the Judeans] 사이에 태어났던 예수는, 대개 로마인들에 맞서는 하자르인들의 편에 설 것을 요구하는 압력을 받았지만, 그는 양쪽 모두가 같은 문화적 방향성을 띤 채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에, 양쪽 모두에 반대했던 것입니다!

대중 조작자들이 “비폭력[non-violence]”으로 해석하는 예수의 가르침들은, 사실 상당히 다른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주창하고 실제로 행했던 정책은 둘 중 어느 편도 들지 않는 태도였습니다. 왜냐하면, 둘 모두 ‘대중 조작’이라는 동일한 방향성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이러한 태도는 후에 에세네파[the group of Essenes]와의 접촉 시에도 마찬가지로 견지되었습니다. 에세네파는 예수의 지지를 부탁하며, 그가 자신들의 특정 공동체에 함께 참여하기를 요구했던 것입니다.—바로 이 때, 예수는 신속하면서도 완전하게, 그리고 또 철저하게, 그들을 떠나면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그들은 자신이 그들 중의 하나가 되기를 요구하기에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이와 더불어 당신들이 한가지 더 이해해야 할 사항이 있다면, “예수[Jesus]”라는 명칭은 사실상 그에게 붙여진 이름이 전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엠마누엘[ Emmanuel ], 이.수.[Esu] 기타 등등의 이름으로 불렸지, 예수[Jesus]라고 불렸던 적은 없습니다. 이는 바울[Paul]이 나중에 그리스 여행을 다녀 온 후, 이 마스터 스승에게 붙일 타이틀로서 만들어 낸 것이었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역사에 대해서, 또 실제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면, 당신들이 찬양하는 대상이 누구인지조차 어떻게 제대로 알 수 있겠습니까?—너무나도 자주, 당신들은 거짓된 것들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제 1계명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건네는 첫번째 계명이 “내 앞에 다른 신들을 갖지 말라”인 것은(‘하나님과 창조의 법칙’ 참조—역주)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삶, 그 자체의 정수로서, 그 분은, 경험의 시작 지점부터 경험의 끝 지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너머 영원에 이르기까지, 각자각자의 안에 살아 계시며, 그 안에 머물러 계시는 것입니다.—당신들이 어떤 명칭을 취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숭배하지 않을 때, 그 때 비로소, 언어 조작자들에게 휘둘려 판단의 착오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수.[Esu]는, 둘 중 어느 쪽에 대해서도, 어떠한 능동적이고 물리적인 조력을 건네는 일을 옹호하지 않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둘 중 어느 쪽에 대해서도, 어떠한 능동적이고 물리적인 반대를 행사하지도 않음을 의미했습니다.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이.수.는 유대인들의 문화에 대해서 큰 염려를 표했는데, 왜냐하면 하자르인들/유대인들[the Khazars/Judeans]이 형성해 왔던 문화는 대중 조작 문화이자, 말로서[in WORDS], 자연에 반대되는 “도덕률”[Nature-opposing “morality”]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문화가 갖는 ‘공식화된 언어적 진술들’에 대해서, 이.수.는 ‘인간들의 말들’을 이용하여 반박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약 3년간 이러한 일을 행했습니다.

하자르인들은, 자연에 반하는 행동을 부추기는 말들, 바로 이 문화권의 특색이 가장 뚜렷하게 반영되는 말들을 했습니다. ; 그들은 실제로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그들이 만들어 낸 상상의 “신”이 세상을 창조했고, 그런 다음, “신”은 자신이 한 창조에 대해 “후회했다”고 말했습니다. 적어도, 이에 반대되는 문화적 바람의 미풍을 느낄 수 있었던 자들, 바로 미풍에 따라 흐르는 자연의 옮은 방향성을 인식할 수 있었던 자들은, 이러한 진술이 분명코, 반-자연의 “신”[an anti-Nature “god”]을 떠받드는 “예언자들과 그들이 만든 법률”에서 주장되는 방향성을 띠고 있는 것임을 판별해 낼 수 있었고, 또 그 방향성은 궁극적으로 그러한 문화를 지지하는 모든 옹호자들을 불가피한 파멸의 길로 이끌 것임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원시 반-자연 문화[the primitive Nature-opposing culture]는 단순히 공고화된 형태를 띠고 있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이 문화는 하자르인들이 만든 복잡한 법률 체계를 통해, 또 말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그리고 그들이 자랑스레 지켜 왔다고 주장하는, 교활한 속임수의 역사 속의 무수한 행동 사례들을 통해, 대단히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수.는 이들에 대항하여, 가장 단순한 방식의 말들로 설파하며, 이들과는 뚜렷이 대조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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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가 말하는 주권

이수는 자연[Nature]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며, 들판에서 백합의 옷을 입고 계신 ‘하나님[God]’이자, 가장 작은 참새 속에 깃들어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수는 예언자들과 율법들을 비판했으며, 창조물 바깥에 존재한다고 하는 하자르인들의 상상의 “신[god]”을 무시했습니다. 이수는 모든 것 안에 내재해 계신 다른 신(하나님)[God]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며, ‘창조물들의 아버지[Father to His creations]’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수는 사람들이 분별력을 가지고, ‘자신들이 아버지의 자녀들임[they were of the Father]’을 깨닫길 요구하는 메시지들을 남겼습니다.

그는,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s in me]”고 말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그들이 율법을 따르지 않아도 되고, 그러한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또 그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반하여 행동해도 되고, 그러한 문제 역시 중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들이 ‘자신들 안에 내재해 계신 신성한 영혼(정령)[the Holy Spirit that was WITHIN them]’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영원히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단순하고, 투박하며, 부정확한 인간들의 언어로는, 결코 개인 주권에 대한 보다 명쾌한 언급이 제시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수는, 메시아를 찾던 대중들, 조작된 대중의 지도자이자 그들이 만들어 낸 상상의 “신”에 대한 새로운 대변인을 찾고 있던 대중들, 바로 이들에 의해 형성된 ‘날씨 전선’의 한 복판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대중 조작 문화 가운데 한가지인 로마 문화에 맞서 싸울 생각만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자기 자신들의 문화는 로마 문화보다도 더 극단적인 대중 조작 문화였던 것입니다. 인간들의 언어는 이수가 말하고자 했던 중요한 어떤 것들을 담아내기에는 너무나도 부적절했습니다.

그가 부정확한 인간들의 언어를 사용하여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다 말하고 났을 때, 그는 언어만으로는 하나의 문화를 일으켜 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이 ‘쓰디 쓴 잔’을 받아 마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용감하게 이를 포기하고, 현실을 직시했습니다.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그들을 파멸로 이끌 수 밖에 없는 문화에 반대되는 문화(개인 주권 문화)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지만, 그는 ‘신성한 영혼’으로부터 오는 것에 대하여, 혹은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에 대하여, 곧 ‘자신 안에 내재해 계신 그 분’으로부터 오는 것에 대하여, 온 세상 사람들에게, 여전히 ‘완전한 진술[full statement]’을 펼쳐 보일 수 있었는데,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언어’로[in the language of the REAL GOD]—‘자연의 신의 언어’로[in the language of Nature’s God]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시간은 다되어 가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시간이 더 남아 있노라고 말했습니다. 이수는, 제자들이 자신과 함께 편을 이뤄 싸울 수 있는, 어떤 전투에 뛰어들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가서 너희 외투를 팔아, 검을 사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할 때, 그는 ‘자연과 자연의 신의 언어’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수는 대중 조작자들이 세워둔 구체적인 법률들 가운데 어떠한 사항도 어기지 않았지만(그렇지만, 그는 그들의 전체 문화를 늘 비판해 왔습니다.), 향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완전히 인식하는 상황에서, 이 대중 조작자들에 공개적으로 맞섰습니다. 그는 개인 주권을 공공연히 주장하면서, 자기 자신을 한 명의 개인의 위치에 둔 다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중 조작 문화들 가운데 가장 첨예한 대중 조작 문화를 상대로 의도적인 대결을 펼쳤던 것입니다. ‘예언가들과 그들의 율법’을 거부하는 자를 결코 관용하지 않는 문화이자, ‘내재해 계신 신성한 영혼[the Holy Spirit within]’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 문화를 상대로 ‘결전’을 벌였던 것입니다.

이수는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리게 될 일이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 속으로 일부러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 상황들은, 공존할 수 없는 두 문화들 간의 운명적인 대립을 너무나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황들이었습니다. ‘자연과 자연의 신의 언어를 이용하여’,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모습을 통하여, 온 세상 사람들에게, 두 문화들 간의 대립은, 영원한 문제이자, 모두의 생사가 달린 문제임을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두 문화들 간의 타협이란 있을 수 없고, 극단적인 대칭을 이루는 두 가지 방향성 가운데, 반드시 어느 한가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문제임을 그는 ‘그러한 언어’로 주장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이 저널이 플레이아데스 커넥션 제 2권으로 명명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하지만, 플레이아데스 커넥션 시리즈(총 8권 : 피닉스 저널 제 30-37권)와는 별도의 책(피닉스 저널 제 28권)으로 출간됨—역주) 이 저널은 ‘문화’에 관한 한, 그 어떠한 조작도 없이 진실에 대한 가르침만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여기 나와 있는 내용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온 형제들’로부터 전해지는 가르침들입니다. 나아가, 이제쯤 당신들은, 왜 조작자들[the manipulators]이 진실전달자들[the Truth-Bringers]의 입을 가로막는 일을 그렇게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특히,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 이러한 정보는 조작자들에게는 대단히 위험한 내용이 될 것인데, 왜냐하면, 오늘날 당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는, 개개인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국가, 즉 개인 주권이라는 기반 위에 건립된 국가임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조작자들은 당신들을 노예화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강제적 조치들을 아직 다 완수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달성하려는 목표를 향해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당신들은 주권 국민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개개인들이지만, 그런 식으로 행동해 나갈 가능성은 거의 다 차단되었습니다.

반면, 중앙 정부에 의해 통제되는 ‘단일 세계 질서[One World Order]’ 내의 부속품들과 같은 존재들로 전락해 가고 있으며, 이 일은, 그 배후의 조작자들에 의해 거의 ‘완성된 역사’로서 기술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인간들은 ‘11시’가 넘어서도 깨어날 수 있을 것이기에, 결코 너무 늦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인간들은 우선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할 것입니다.

조악하고 부정확한 인간들의 언어들로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부터가 수월찮은 일이며, 완전하게 이해시킨다는 것은 좀처럼 힘든 일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이수는, ‘자연과 자연의 신의 우주적 언어’를 이용하여, 전체 인간 종들 모두를 상대로, 가장 의미심장하고, 가장 웅변적인 ‘진술’을 했던 것입니다.

하자르인들은 이수의 그러한 진술을 무시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렇지만, 곧 그들은 단순히 이를 무시해 버리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 ‘진술’의 의미를 지적하는 자라면 누구라도 모조리 죽여 버리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로마인들 역시 그 진술의 의미를 알게 되어, 하자르 갱단들에게 기독교인들은 모두 제거해도 좋다는 ‘면허증’을 발급해 줬던 것입니다.—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하자르 ‘도살자들’ 가운데 하나였던, 타르소의 사울(사도 바울)[Saul of Tarsus]은 이야기들을 거꾸로 왜곡시켜, 이를 오히려 하자르 대중 조작 문화를 지원하는 용도로 삼으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바울[Paul]이여. 허나, 아들이여, 오늘날 ‘테이블’ 위에 올려져야 할 것들을 정작 가지고 왔던 자가 바로 당신임을 알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지금 현재, 인간들로서 경험을 겪어 나가고 있는 대중들에게 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형태, 모든 방식의 반박과 비난들이 당신 위로 쏟아질 것이고, 이는 당신을 더더욱 옭아 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당신도, 단지, 사람들이 끊임없이 쏟아낼 비난의 융단 폭격의 가혹함으로 인하여, 속박감을 느끼는 상황을 벗어나게 될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을 평화로 인도하고, 또 그 속에 머무르게 만들어 줄 다른 상황들도 맞게 될 것입니다. 저마다가 이제는, 제각각, 경험의 역사 속에 저질러 온 오류들을 바로잡는 일에 임함에 있어, 능동적인 역할을 맡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몇몇은 또다시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는 자들은 반드시 성공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르인들이 만들어 냈던, 상상의 산물이자 원시의 “신[god]”은, 그들의 “원죄[sins]”를 용서해 주기에 앞서, 그 대가로, 가장 먼저 태어났고, 가장 훌륭한 자를, ‘피흘림의 희생물’로 요구한다고 주장되었습니다. 한편, 모든 사람들은, 이수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라고 했던 말을 다 들었었고, 이를 두고 많은 자들은, 이수가 자신이 하나의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 이해해 온 터였습니다. 이를 통해, 사울은 이수가 바로 하자르인들이 만들어 낸 상상의 “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의 십자가에 못박힘은, 상상의 신이 정해 둔 법률에 따라, 이 법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구원에 대한 대가로서, 일종의 희생에 해당하는 것임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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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개인 주권 문화 vs. 대중 조작 문화

한 송이 장미...?

이제 나는, 지금껏 내가 계속해서 ‘하자르[Khazar]’라는 표현을 사용해 왔다는 사실에 당신들이 주목해 봐 주었으면 합니다.—그런데 이 표현은 사실상 이 글 안에서는 적절한 명칭이 아닙니다. 이수가 왔던 시기에, ‘하자르인들(정확히 이 명칭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유럽 지역에만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당신들이 짚고 넘어가야 될 사항이 있다면, “하(카)자르[KHAZAR]”는 그 의미상, “가즈[gaz]” 혹은 “돌아다니다[to wander]”라는 뜻으로, 달리 말하자면, “유목민들[nomads]”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두고, ‘하자르인들’이라고 지칭하는, 그 첫번째의 실제적인 언급은 “제카리아 렉터[Zacharia Rhector]”의 ‘시리아 연대기[Syrian chronicle]’에 등장하는 것으로, 시기적으로는 6세기 중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자꾸만 ‘하자르’라고 할 때, 무슨 뜻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일까요?

나는 바로, 이 하자르인들의 “문화[culture]”가 이미 그들의 등장 이전부터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심지어 당신들이 “그리스도[Christ]”라고 부르거나 받아들이는 자가 오기 이전부터도, 그들의 이 “문화”는 ‘적그리스도[the anti-Christ]’의 문화로서 기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에는 이 이야기 속의 ‘그들’이 뭐라고 불렸을까요? 어떤 이들은 그들을 ‘가나안 사람들[Canaaites]—저주받은 카인의 후예들[descendents of Cain]’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부르면, 정작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흐름에 혼선만이 생기기에, 다른 주제로 빗나가지 않기 위해 그랬던 것입니다. 또한 당신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이 사람들은, 당신들의 교회에서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바리새인들[Pharisees]’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음 기회에 다시 다루게 될 것입니다.—다만, 당신들이 명확히 이해해야 될 부분이 있다면, 내가 ‘하자르인들[Khazars]’이라고 말할 때, 나는, 오늘날 스스로 자신들이 소위 “유태인들[Jews]”이라고 ‘자처하는[self-styled]’ 자들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어쨌거나 이들은 이수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사울(바울)이 떠올린 아이디어는 그의 ‘정신(영혼)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crucifying the spirit]’이었습니다. 니체[Nietzsche]는 ‘적그리스도[The Anti-Christ]’(니체의 저서, 1888년작.—역주)에서 바울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 “유태인 사제로서의 본능은, 역사를 향해, ‘그 동일한 전문가다운 범죄’를 한 번 더 수행하게 만들었다.—그는 단순히 기독교의 어제와 그보다 더 먼 과거의 유산을 파괴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기독교사’의 출발점을 만들어 냈다. 이 복음 전도사(바울, 타르소의 사울[Paul, Saul of Tarsus])가 증오 앞에 희생시키지 않은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실상, 구세주의 모습 너머로, 그는 자기 자신을 ‘자신의 십자가’ 위에 못박았던 셈이다.” (이수가 남긴) ‘정신’이라는 측면에 있어서[In spirit], 이수는 여전히 십자가에 못박혀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과 제리 팔웰[Jerry Falwell](그는, “나는 내가 시오니스트[Zionist]임을 밝힐 수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자르/엘리트[KHAZAR/ELITIST]입니다.)과 같은 저명 인사들은, 오늘날의 조작된 대중들로 하여금, 그 위에 더 많은 못을 박도록 조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종한” 바울은, 자신이 만들어 낸 “예수” 이야기를 선전하기 위하여, 그리스 각지에 교회 ‘분점들’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인들은, 이수가 남긴 ‘진술’이 갖는, 분명하고도 위엄있는 웅변의 가치를 알아 봤고, 또 이를 잘 이해했습니다.그들은 이것이 소크라테스[Socrates]가 남긴 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극적인 영향력[dramatic impact]’에 있어서도, ‘의미의 명확함’에 있어서도, 분명히 더 위대했던 것입니다. 그리스인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그들이 과거 일구어 왔던 ‘개인 주권 문화’를 새롭게 중흥시키고자 다짐했습니다. 그들 자신들의 문화의 씨앗을 새롭게 파종했던 것입니다.

불가피하게 두가지 다른 이야기(해석)들 간에는 충돌이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논의들, 반대편의 평판을 떨어뜨리려는 시도들, 화해할 수 없는 자와 화해하려는 시도들, 이런 모든 양상들은 엄청난 수준의 언어 폭력들이 난무하는 상황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수,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지 백 년이 지났을 때, 이미 백 개도 넘는 기독교 교파들이 생겨났고, 저마다가 자신들을 기독교인들이라 불렀습니다.

언어 폭력들은 교리의 명분을 얻어 내기 위한 준비 작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교리’를 수용한다는 건, 대중 조작 문화를 수용하는 셈이기도 했습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틴[Roman Emperor Constantine](274-337, 콘스탄티누스 1세—역주)은 “예수”에 대한 관점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이 ‘충돌의 쓰레기장’ 속에서, ‘대중 조작의 잠재력[the potential for mass manipulation]’을 알아 봤습니다. (나는 여기서 잠깐만 내 역사담당 (자료검색) 업무를 맡고 있는 노라[Nora]에게 묻고 싶습니다.—내 설명들이 괜찮은 것 같습니까? 내가 사건들의 선후 관계를 나열함에 있어서, 큰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깊게 보조해 주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나 하톤은 큰 빚을 지고 있군요. 나는 당신들의 역사가 지루하고, 또 얼굴을 찌푸리게 만드는 내용들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만, 어쨌거나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A.D. 314년, 황제는, 저마다의 가르침들을 검토해 보기 위해서, 다양한 “기독교” 분파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는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A.D. 325년, 이어지는 회의에서, 그는 ‘공인용 기독교’를 만들기 위해, 몇몇 교리들의 추종자들을 선발했습니다.—이는, 그들이 나머지 교파들을 흡수하거나 제거해 버릴 수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통과권

기본적으로 “공인 기독교[official Christianity]”라는 것은, 한 로마 황제가, 유순하면서도, 교리를 이용하여 통제하기 쉬운 백성들을 형성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으로, ‘적그리스도 도살자[the anti-Christ butcher]’에 의해 꾸며지고, 완전히 거꾸로 왜곡된 예수 이야기에 바탕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두가지 인간들의 인간 문화들’ 사이에 펼쳐지는, ‘생사가 걸린 대립’에 관한, ‘가장 웅변적인 진술’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수의 ‘뜻깊고도 웅변적인 진술’은 ‘자연과 자연의 신의 언어’를 이용하여 했던 것으로, 여전히 살아 남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들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던 그 진술’에 대해서 잘 아는, “공인 기독교”의 사제들은, 이를 ‘여권’ 삼아, 북유럽, 개인 주권 문화가 지켜지는 땅에 진출 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북유럽인들에게 있어서, 이 ‘극적인 진술’은, 자기 자신들의 문화를 지탱해 주는 것이자, 자신들이 비판하는 문화를 비판하는 것으로, 한 영웅적인 개인이, 자신들의 땅에서도 아닌 외국의 땅에서 이뤄낸 것이기에, 더더욱 믿기지 않는 ‘진술’이었습니다. 이 진술이 갖는 웅변성은 ‘개인적 영웅주의[individual heroism]’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는데, ‘개인적 영웅주의’는, 그것이 어느 땅에서 펼쳐지는 것이든 간에, 그들에게는 감탄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로마 사제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이 ‘영웅’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할 때, 감히 아무런 무기도 없이 ‘용’(혹은, 이수가 공명정대하지 못한 하자르인들을 부를 때 쓴 표현인 ‘뱀’도 될 것입니다.)에 맞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뱀 혹은 용에 치명적인 대치를 이루는 ‘개인 주권’이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보여준 그러한 영웅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할 때, 가공되지 않은 진솔한 예수의 이야기는 ‘여권’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단 통과권을 얻어 낸 다음, 이 사제들은 서서히, 이수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에 입각한 기독주의를, 바울의 적그리스도적 “기독주의”라는 혼동스러운 오물로 슬그머니 바꿔치기 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른 후엔, ‘원시 대중 조작 문화’ 전파를 위한 하자르의 공식화된 교리를 조금씩 조금씩 더 주입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결국 북유럽인들은, 비록 개인 주권 문화 속에서 의도적으로 길러졌고, 또 그 문화를 위해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들 자신들의 손으로, 수백만에 수백만을 더한 자신들의 동포들에 대한 학살행위들을 감행하게 되었고, 이러한 일은 소위 말하는, “유대-기독주의[JUDAEO-CHRISTIANITY]”가 “동전의 앞면”에 등장했을 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혼동스러운 사람들’ 사이의 ‘조작된 전투’는 너무나 많은 단면들을 갖고 있었는데, 그 속에서 적군과 아군을 구분해 내기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졌던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그 똑같은 전투는 서구 세계 전역에 걸쳐서 여전히 진행 중에 있습니다. 개인 주권 문화 속에 길러진 자들로 하여금 그 동일한 문화 속에 길러진 자들을 파멸시키도록 조장하고 있는 요인은, 지금도 여전히 그 똑같은 ‘양면 동전’인 것입니다. 대중 조작자들은 그들의 노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혼돈과 파괴를 조장하여, 이러한 상황이 계속 되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이 ‘혼동스러운 오물’이 건네진 후, 억지로 떠먹여지는 상황을 두고, 로마의 우두머리 조작자들에 대항했습니다. 교묘히 북유럽인들에게 주입되었던 이것, 이 도저히 ‘양립불가능한 외부적 요소’를 도처에서 토해 내려고 하는 시도가 벌어지고 있음을 바라보면서, 루터는,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자칭 유태인들, 바로 문제의 근원이 되었던 자들의 ‘공식화된 원시적 교리[the formalized primitive dogma]’일 뿐만 아니라, 그 동일한 ‘기독교 동전’의 다른 한 쪽 면은 하자르인들 (소위 말하는 유태인들) 자신들에게 ‘훌륭한 여권’으로서 기능하고 있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큰 환멸을 느꼈습니다.

처음엔 가톨릭 교회가 수행했었던, ‘이 새롭고도 영리한 속임수’에 대해, 소위 말하는 유태인들은, 부러운 눈으로 감탄해마지 않았었는데, 교회가 반대되는 문화권에 속한 자들을 제거할 때 썼던 이 방식은, 바로 유태인들 자신들의 대중 조작 방식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형상’대로 만들어 내었던 이 반자연의 “신”[the anti-Nature “god”]을 다시금 자신들의 소유로 삼고 싶어 했습니다. 말하자면, 유태인들은 가톨릭 교회 뒤를 따라다니면서, 가톨릭 교회가, 자부심 높고, 역량 있으며, 자연을 사랑하는 북유럽인들을 상대로 얻어낸 권력을 빼앗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북유럽인들이 “하자르의 신” 앞에 고개를 숙이게 만듦으로써 그렇게 하길 바랬던 것입니다. 하자르인들, 소위 말하는 유태인들은, ‘사자의 먹이’ 주위로 몰려들어 배를 채우는 재칼들[jackals]과도 같았습니다. 루터는 이러한 방식에 대해 격렬히 비난하였고, 또 이렇게 뚜렷이 식별되는 행태를 가진 유태인들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개인과 국가의 주권을 회복하길 원하는 ‘개인(주권)주의자들’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느냐 하는 문제에 달려 있습니다. 조작자들은 끊임없이 힘을 그러 모으고, 패거리를 만들어 당신들 위에 군림하고자 합니다.—하지만 당신들에게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그들은 최고의 ‘우두머리 조작자[head manipulator]’가 되고자 하는 욕구를 결코 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당신들로 하여금, 행동과 변화를 취할 시간을 벌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

‘인간[MAN]’이 자신의 “이성[REASON]”을 되찾는 한, ‘그’는 모든 악조건들에도 불구하고, 분연히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길을 잃었던 건, 바로 ‘그 인간 개인[THAT INDIVIDUAL MAN]’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럼, 그리 될 것입니다.


Gyeorgos Ceres Hatonn,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2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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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다음 진술은 대부분의 당신들에게 한가지 놀라운 소식이 될 것입니다.—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예수의 “실제” 이야기 버전[one “straight” version]’을 담은, ‘미국 기독 성경[the American Christian Bible]’을, 자신의 서평을 담아 출간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당시 에릭 홀덴[Erik Holden]이라는 한 역사학자는, 존 할랜드[John Harland]로부터 시작된 작업을 이어 받아, ‘의미있는 사건의 조각들’을 걸러내는 일을 계속적으로 수행해 오기도 했습니다. 홀덴은 ‘실제 이야기가 갖는 의미’를 많은 제도권 종교 단체들로부터 받아들여지는 이야기의 의미와 대조해 나갔던 것입니다.

제퍼슨이 편집한 성경 내역에는, 사도 바울[Paul]의 글은 모두 빠져 있었습니다. (나는 이자리에서 당신들이 “그리고 그들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불렀다[AND THEY CALLED HIS NAME IMMANUEL]”(피닉스 저널 제 2권—역주)라는 책을 다시 참조해 보고, 바울에 관한 사실들을 확인해 보기를 권합니다. 하지만, 사실상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바울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지금 현재, 자신이 전파한 잘못된 정보들을 수정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완전히 180도 왜곡된 이야기들이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the Council of Nice]에서 채택되었던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제퍼슨 성경[Jefferson Bible]은, 모두 진실만을 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대개 발매 금지 처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 그 보다 앞선 시점에 출간되었던 모든 성경 판본들에는, 하자르인들(유태인들)[Khazars(Jews)]과 유대-기독교인들[Judaeo-Christians]에 대한 변명에 가까운 언급들이 넌지시 들어 있었는데, 제퍼슨은 바로 이러한 부분들을 자신의 판본에서는 배제했었던 것입니다.

홀덴이 ‘예수의 이야기’에 대해 가졌던 관점은 제퍼슨의 시각과 아주 유사했습니다. 제퍼슨은 미국 독립 선언서[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의 저자이자, 제도권 기독교[institutional Christianity]를 거부한 사람이기도 했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진정한 기독교인[a real Christian]이라고 단언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홀덴은 자신의 작업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출발점’을 골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 기독 성경[The American Christian Bible]’은 오늘날의 미국인들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개인 주권 문화이자, 이 문화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으로, 개인 주권에 입각한 국가 주권을 지향하는 문화와, 조작된 대중 문화 간에 벌어지는 오늘날의 충돌 양상은 지난 2천년 간 지속되어 온 충돌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기독주의[Christianity]’라고 불리는 어떤 것을 북유럽인들에게 억지로 강요했던 것이, 현 충돌의 근원적인 시발점이었던 것입니다.

>> 진실만이 담겨져 있다는 제퍼슨 성경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보통, 대중에게 알려진 제퍼슨과 프랭클린을 살펴보면..


토머스 제퍼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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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  
미국의 제3대 대통령
임기 1801년 3월 4일 ~ 1809년 3월 3일
부통령 에런 버
조지 클린턴
전임: 존 애덤스(제2대)
후임: 제임스 매디슨(제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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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2대 부통령
임기 1797년 3월 4일 ~ 1801년 3월 3일
대통령 존 애덤스
전임: 존 애덤스(제1대)
후임: 에런 버(제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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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1대 국무장관
임기 1789년 9월 26일 ~ 1793년 12월 31일
대통령 조지 워싱턴
전임: -
후임: 에드먼드 랜돌프(제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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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주의 제2대 주지사
임기 1779년 6월 1일 ~ 1781년 6월 3일
전임: 패트릭 헨리(제1대)
후임: 윌리엄 플레밍(제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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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1743년 4월 13일
출생지  영국 버지니아 구치랜드 카운티
사망일 1826년 7월 4일(1826-7}-4) (83세)
사망지  미국  버지니아 주 샬러츠빌
정당 민주공화당
종교 유니테리언, 이신론
배우자 마사 웨일스 스켈턴 제퍼슨
자녀 마사, 제인 랜돌프, 유산한 아들, 메리 웨일스,
루시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 (이상 적자)
해리엇 헤밍스, 우드슨 헤밍스, 비벌리 헤밍스,
메디슨 헤밍스, 이스턴 헤밍스[1]
서명  
역사 들머리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년 4월 13일 ~ 1826년 7월 4일)[2]은 미국의 정치인으로 제3대 미국 대통령(재임 1801년 ~ 1809년)이자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이다(1776년). 제퍼슨은 영향력 있는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으로, 미국 공화주의의 이상을 논파하기도 하였다. 또한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 존경을 받는 대통령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일어난 큰 사건은 루이지애나 매입(1803년)과 루이스와 클라크의 서부 탐험(1804년 ~ 1806년)이었다.

제퍼슨은 영국과 프랑스의 계몽 지식인들에게 큰 감명을 받아 그들이 쓴 저서를 통하여 계몽 사상을 배웠고 계몽 사상을 자신의 평생 정치 철학으로 삼았다. 폭넓은 지식과 교양, 재능으로 그는 줄곧 벤저민 프랭클린과 더불어 18세기 미국 최대의 르네상스식 인간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제퍼슨은 반연방주의를 지향하여 독립 자작농을 공화주의 미덕의 모범이라 이상화하였고 도시와 자본가를 믿지 않았으며 각 주의 독립적인 권한과 강력히 그 권한이 제한된 연방정부를 지향하였다. 그래서 미국은 농민이 주도하는 농업국가로 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제퍼슨은 또한 인권을 중요시하고 계몽주의의 기본 원칙인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 ‘모든 사람은 신 앞에 평등하다’고 역설하였으나 사실 그는 200여 명의 노예를 가지고 있던 농장주였고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을 부정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제퍼슨은 국가는 종교와 분리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져서 정교 분리법을 지지하였으며[3] 버지니아 종교자유법을 쓴 사람이기도 하다(1779년, 1786년). 제퍼슨은 제퍼슨 민주주의의 창설자이자 역시 25년간 4명의 대통령을 배출하고 상·하원을 장악하여 미국의 정치를 좌지우지한 민주공화당의 공동 설립자이며 총재였고 미국 독립 전쟁 시기 제2대 버지니아 주 주지사를 역임하였고,(1779년 ~ 1781년) 초대 미국 국무부 장관을 지냈으며(1789년 ~ 1793년) 제2대 부통령으로도 재임하였다(1797년 ~ 1801년).

제퍼슨은 박학다식한 사람으로 대통령 외에도 여러 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원예가였고 정치인이었으며 그 외에도 법률가, 건축가, 과학자, 고고학자, 고생물학자, 작가, 발명가, 농장주, 외교관, 음악가, 그리고 버지니아 대학교의 창립자였다. 1962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백악관 연회장에서 열린 만찬에서 49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환영할 때, 케네디가 “나는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이곳에서 혼자 식사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역대 백악관에서 열린 만찬 중 재능과 지식의 총집합체에서 여러분들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4]라고 할 정도로 제퍼슨은 여러 분야에서 다재다능하였다는 평가가 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8년의 재임 기간 동안 한 번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이며, 현재까지도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훌륭한 대통령 중 하나로 인정받으며 역대 대통령 조사순위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5] 그러나 흑인 여성인 샐리 헤밍스와의 불륜관계로 5명의 사생아가 제퍼슨의 서자녀일 가능성이 있다는 논란이 있다.



[편집] 초기 생애와 교육

[편집] 유년 시절
토머스 제퍼슨은 1743년 4월 13일에[2] 버지니아에서 가장 저명한 가문 중 하나에서 여덟 명의 아이 중 셋째, 그리고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제인 랜돌프(Jane Randolph)로 농장주이자 선주인 이스암 랜돌프의 딸이었다. 토머스 제퍼슨의 외할아버지인 이스암 랜돌프는 사촌으로는 페이튼 랜돌프가 있었고 이스암 랜돌프의 5촌 조카로는 훗날 제퍼슨의 후임 국무장관이 된 에드먼드 랜돌프가 있었다. 토머스 제퍼슨의 아버지 피터 제퍼슨(Peter Jefferson)은 알버마를 군의(Albemarle County, 셰드웰(Shadwell)[6]) 대농장주이자 측량기사였고 제퍼슨은 웨일스 사람의 후손이었다. 1745년 피터 제퍼슨의 절친한 친구인 윌리엄 랜돌프 대령이 죽자, 피터 제퍼슨은 랜돌프의 유언 집행자로서 터카호(Tuckahoe)에 있던 그의 토지와 그의 어린 아들인 토머스 만 랜돌프의 양육도 맡게 되었다. 그 해에 제퍼슨 일가는 다시 알버마를로 돌아가기 전까지 7년 동안 살 터카호로 이주하였고 얼마 안 되어, 피터 제퍼슨은 터카호 군의 군수로 임명되었다.[7]그리고 피터 제퍼슨은 치안판사와 버지니아 주 의원을 지내는 등 많은 요직에서 활약하였다.


[편집] 교육
1752년 제퍼슨은 스코틀랜드 출신 목사인 윌리엄 더글라스가 운영하던 학교에 입학하였다. 9살에 제퍼슨은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나 1757년 제퍼슨이 14살 때, 아버지 피터 제퍼슨이 죽었다. 제퍼슨은 5,000 에이커(약 20 km²)와 수십명의 노예를 상속받았으며 상속받은 땅에다 집을 지었는데 그곳은 훗날 바로 몬티첼로로 불렸다.

아버지가 죽은 후, 제퍼슨은 1758년에서 1760년까지 교육받은 목사인 제임스 모우리의 학교에서 공부하였다.[8] 학교는 고든스빌 근처의 프레드릭스빌 교구(Fredericksville Parish)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 곳은 섀드웰에서 12마일(약 19 km) 떨어진 곳이었다. 제퍼슨은 모우리의 집에서 하숙하면서 고전 교육과 역사, 과학을 공부하였다.

1760년, 제퍼슨은 만 16세의 나이에 윌리엄스버그에 있던 윌리엄 앤드 메리 대학에 입학하였다. 제퍼슨은 그곳에서 2년을 공부하였는데 1762년에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제퍼슨은 철학대학에 들어가 수학과 형이상학, 그리고 윌리엄 스몰 교수가 가르치던 철학을 공부하였다. 스몰 교수는 배움에 열성인 제퍼슨에게 경험주의를 알려주었는데 그는 경험주의에서 프랜시스 베이컨, 존 로크, 아이작 뉴턴의 이론까지 배웠다. 훗날 제퍼슨은 이들을 “세상이 이제까지 만들어낸 3명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며 칭송하였다.[9] 또한 그는 자신의 프랑스어 수업을 완전히 끝냈고 자신의 그리스어 문법책을 항상 들고 다녔으며, 바이올린을 연습하였고 타키투스와 호메로스의 책을 감명깊게 읽었다. 예리하고 부지런한 학생이었던 제퍼슨은 모든 분야에서 학구적인 궁금증과 욕심을 보여주었고 가족의 전통에 따라, 종종 하루에 15시간씩 공부를 하였다. 제퍼슨의 가장 친했던 대학 동창인 로스웰의 존 페이지는 제퍼슨을 두고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뿌리치고 떠나 자신의 학업에 열중하였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봐도 제퍼슨은 그리 사교성은 많지 않고 성격이 내성적이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학에 재학 중일때, 제퍼슨은 납작한 모자 클럽(Flat Hat Club)이라는 비밀 조직의 회원이었는데 지금은 이 클럽이 윌리엄 앤드 메리 대학 학생 신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제퍼슨은 대학의 건물 중 영국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의 이름을 딴 렌 빌딩에서 기숙하였고 본관에서 동창들과의 단체 식사에도 참석하였으며 렌 예배당의 아침, 저녁 예배에도 참석하였다. 제퍼슨은 왕립 주지사 프랑시스 파우키에(Francis Fauquier)의 호화 파티에 자주 참석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와인을 마시기 시작하여 이내 와인 마시는 것을 매우 좋아하였다.[10] 1762년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조지 위트 아래서 법학을 배웠으며 1767년 버지니아 주 법정에서 자신의 변호사 인생을 시작하고 위트에게 자신의 변호 실력을 인정받았다.


[편집] 변호사로서의 생활

렘브란트 필이 그린 제퍼슨의 초상화 (1805년)1765년 10월 1일, 토머스 제퍼슨의 큰누나인 제인이 25세의 짧은 생애를 일기로 요절하였다.[11] 제퍼슨의 누나와 여동생은 큰언니 제인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한 제퍼슨은 혼자 외롭게 슬픔의 나날을 보냈다. 제퍼슨의 작은누나인 메리는 토머스 볼링과 결혼하고 여동생 마사는 그해 7월에 다브니 카에게 시집갔으나,[11] 친정인 섀드웰에서 멀리 떨어진 각자의 남편의 집에서 살아 오기가 쉽지 않았다. 제퍼슨의 다른 여동생들인 엘리자베스와 루시, 그리고 아직 유아인 애너 스콧과 랜돌프가 그의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제퍼슨은 엘리자베스나 루시가 있을 때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엘리자베스와 루시가 제퍼슨의 누나들처럼 제퍼슨에게 지적인 영향을 끼치거나 격려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11]

제퍼슨은 버지니아 식민지의 변호사로서 많은 법적 소송을 다루었고 1768년에서 1773년까지 주 의회에서 해마다 100개 이상의 소송을 도맡아 변호하였다. [12] 제퍼슨의 소송 의뢰인 중에는 많은 버지니아 주 출신 명문가들이 많았고 제퍼슨 외가인 랜돌프 가문도 포함되어 있었다.[12]

1772년 제퍼슨은 23세의 젊은 과부 마사 웨일스 스켈턴과 결혼하였다. 제퍼슨 부부는 6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마사 제퍼슨 랜돌프(1772년 ~ 1836년), 제인 랜돌프(1774년 ~ 1775년), 사산된 아들(1777년), 메리 웨일스(1778년 ~ 1804년), 루시 엘리자베스(1780년 ~ 1781년), 그리고 엘리자베스(1782년 ~ 1785년)가 있었다. 부인 마사는 1782년 9월 6일에 사망하고 제퍼슨은 다시는 재혼하지 않았다. 제퍼슨은 샐리 헤밍스(Sally Hemings)라는 자신의 노예가 낳은 자식들의 아버지라는 설이 있었으나, 1998년의 유전자 검사로 이들의 아버지가 제퍼슨 또는 제퍼슨의 남자 친척 중 한 사람임이 밝혀졌다.



[편집] 1774년부터 1800년까지의 정치 인생

[편집] 독립운동 대열 합류

루돌프 에반스가 만든 제퍼슨의 동상과 제퍼슨이 쓴 독립 선언서의 인용문제퍼슨은 법을 다루는 변호사를 직업으로 삼았지만, 1769년에 버지니아 주 자치의회에 알버마를 군을 대표하는 의원이 되었다. 당시 식민지는 영국 본토의 인지법으로 영국에 반감을 품는 식민지인들이 많아지기 시작할 때였다. 1774년, 고압법(Coercive Acts)이 영국 의회에서 통과되자, 제퍼슨은 이 법에 대한 여러 대책들을 썼는데 이것이 그가 출판한 첫번째 팜플렛인 《영국령 아메리카의 권한에 대한 간결한 관점》(A Summary View of the Rights of British America)이었다. 이전의 고압법에 대한 비판은 법과 헌법에 맞추어져 있던 것이었으나 제퍼슨은 식민지인들은 모두 자연권이 있으며 스스로 다스릴 수 있다는 급진적인 생각을 표현하였다.[13] 또한 제퍼슨은 영국 의회는 말그대로 영국만의 의회이며, 식민지의 입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주장하였다.[13] 이 팜플렛은 제1차 대륙회의의 버지니아 선언의 초안으로 쓸 계획이었으나 대륙회의에서 제퍼슨의 생각이 너무나 과격하였음이 증명되었다.[13] 그렇지만 팜플렛은 미국 독립의 이론상 뼈대가 되었으며 제퍼슨을 가장 유식하고 생각이 깊은 독립파 정치인의 한사람으로 각인시키게 해주었다.


[편집] 독립 선언서 작성
제퍼슨은 1775년 6월부터 제2차 대륙회의 위원으로 재직하였는데 대륙회의가 열리고 얼마 안 있어 미국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 1776년 6월, 대륙회의에서는 독립 선언 결의의 공포를 숙고하기 시작하였는데 독립 선언 결의는 그리 문체가 깔끔하고 설득력있지 못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제퍼슨은 새로 창설된 5인 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어 이 결의를 바탕으로 독립 선언서를 쓰기 시작하였다. 위원회는 제퍼슨이 초안을 작성하도록 하였는데 제퍼슨이 문필가로서의 실력과 명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제퍼슨은 자신이 굳게 믿던 계몽 사상을바탕으로 초안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작업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며 얼버무리고 아무도 이 독립 선언서 작업이 중요한 사명감을 가지고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14] 제퍼슨은 5인 위원회의 다른 위원들의 도움과 버지니아 헌법의 초안과 조지 메이슨의 버지니아 인권 선언, 그리고 다른 자료들을 참고하여 완성하였다.[15]


존 트럼불이 그린 《독립 선언서》(Declaration of Independence)에서 5인 위원회가 독립 선언서를 대륙회의에 제출하고 있다. 책상에 선언서를 놓는 중앙의 키가 큰 사람이 제퍼슨이다.제퍼슨은 5인 위원회에게 초안을 보여준 뒤 최종적으로 교열하였고 1776년 6월 28일, 7월 2일에 발표할 예정이었던 독립 선언 결의 찬반 투표 직후, 독립 선언서를 공개대륙회의에 공개하였다. 이것이 완성되자 대륙회의는 독립 선언서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며칠 간의 논쟁 뒤, 대륙회의는 선언서의 1/4을 지우거나 고쳤는데 우선 당시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노예 무역에 관한 조항은 빠졌으나 제퍼슨은 계몽 사상에 어긋난다며 이를 완강히 반대하였다.[16] 1776년 7월 4일, 결국 독립 선언서가 대륙회의에서 승인되었다. 독립 선언서는 제퍼슨의 업적 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의 설득력있고 논리적인 머릿말은 인권을 수호하며 인권의 가장 기본적인 사상을 담은 유명한 글귀가 되었다.[16]


[편집] 버지니아 주 하원의원 시절
1776년 9월, 제퍼슨은 버지니아로 돌아와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정식 출범된 버지니아 주 의회 하원에 들어갔다. 의원 재직 기간 중 제퍼슨은 버지니아의 사법 제도를 바꾸고 강화하여 민주적인 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려 하였다. 그는 3년동안 무려 126개의 법안을 작성하였는데 이 중에는 장자 상속권을 폐지하는 법안과 버지니아 종교 자유법, 그리고 사법 제도를 합리화시켰다. 1778년, 제퍼슨은 “더 많은 지식의 보급을 위한 법안”(Bill for the More General Diffusion of Knowledge)이라는 교육법을 작성하였는데 이 법안은 최초로 미국의 대학에서 이루어진 선택과목제를 도입하여 기존의 대학 제도 등을 바꿨다.

주 하원의원으로서 제퍼슨은 사형 선고를 반역이나 살인을 제외하고는 선고하지 않는 법안을 제출하였으나 이 사형 선고 개정법은 겨우 1표 차로 부결되었고[17] 버지니아 주는 이후로 이 의견을 보류하여 1960년대까지 강간과 같은 죄도 사형으로 다스릴 수 있었다.[18]


[편집] 버지니아 주지사 시절
1779년부터 1781년까지

 

[편집] 버지니아 주지사 시절
1779년부터 1781년까지 제퍼슨은 버지니아 주 주지사로 재직하였다. 본래 군인이 아니었던지라 조지 워싱턴같이 정면에서 싸우지 않고 후방에서 미국 대륙군과 독립 세력을 지원하였다. 주지사로서 그는 1780년 주도를 협소한 윌리엄스버그에서 리치먼드로 옮기는 일을 감독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학생 감찰 하의 우수성적자 규약 등을 미국 최초로 만든 윌리엄 앤드 메리 대학의 교육 정책 개혁을 극찬하였다. 1779년, 제퍼슨의 명령에 따라, 윌리엄 앤드 메리 대학은 조지 위트를 미국 대학 최초의 법학 교수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가 주도한 교육 정책 변화의 성과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제퍼슨은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버지니아 대학교를 세우는데 이 대학교는 종교적 학문을 배제하고 고등 교육을 가르친 미국 최초의 대학이다.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에 있는 프랑스 공사 공관 터 기념 명판. 이곳에서 제퍼슨은 프랑스 공사로 4년간 기거하였다. 이 명판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버지니아 대학교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놓았다.제퍼슨이 주지사로 재직하는 동안, 미국 독립 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버지니아는 제퍼슨의 임기 동안 두 번 영국군의 침략을 받았다. 1781년 6월, 제퍼슨은 영국군의 급습을 받아 패트릭 헨리, 다른 버지니아 유지들과 함께 영국군 대령 바나스트레 탈레턴의 기병대에게 붙잡힐 뻔했으나, 영국군이 들이닥치기 10분 전에 리치먼드를 빠져나가 화를 피했다.[19] 주지사로서의 직분을 망각하고 도망가려 했다는 점은 공공에게 실망감을 안겨줬고 그의 미래의 정치적 전망도 어둡게 만들었다. 또한 제퍼슨은 다시 버지니아 주지사로 당선되지 못하였다.[20]


[편집] 프랑스 공사 시절
제퍼슨은 1784년부터 1789년까지 벤저민 프랭클린의 후임으로 프랑스 공사에 임명되었다. 프랑스 공사에 재직 중인 1787년에는 미국 제헌회의가 열렸는데 프랑스 공사로 해외에 있어 참석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제퍼슨은 아직 자신이 지향하는 반연방주의의 색채가 드러나 있는 권리장전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연방주의적인 미국의 헌법을 대체로 지지하였다. 그러나 연방을 지향하고 자신이 독립선언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개인의 인권에 대하여 아무런 조항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 터라 버지니아 주 출신 후배인 제임스 매디슨과 연락을 주고 받으며 영국의 권리장전을 모델로 한 새 권리장전을 헌법의 추가 조항인 수정헌법으로서 집어넣으라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파리에 있으면서, 제퍼슨은 유명한 거리인 샹젤리제에 위치한 공관에서 살았다. 그는 많은 시간을 도시의 고고학적 유적과 파리의 거리 예술 등을 감상하며 보냈다. 그는 파리의 살롱 문화를 좋아하며 도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만찬 파티에 자주 초대되어 프랑스와의 친밀감을 쌓고, 더욱 프랑스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의 뛰어난 프랑스어 실력은 프랑스의 유명한 인사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더욱 그들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었다. 프랑스에 활동하며 그는 많은 사회적 엘리트와 귀족들과 친분을 쌓았으나 정작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였을 때, 제퍼슨은 혁명군 손을 들어 혁명을 열렬히 지지하였다.


[편집] 국무장관 시절

국무장관 시절의 제퍼슨제퍼슨이 프랑스에서 귀국한 후, 이미 아메리카 합중국은 건국되어 있던 상태였다. 제퍼슨은 곧 조지 워싱턴 대통령 아래서 초대 국무장관(1789년 ~ 1793년)을 맡았다. 제퍼슨과 알렉산더 해밀턴은 오랫동안 국가의 재정 정책에 논쟁을 벌였는데 특히 전쟁 때 빌린 빚을 처리하는 일에서 마찰을 빚었다. 해밀턴은 빚을 모든 주가 똑같이 나누어서 갚아야 한다 주장하였으나 제퍼슨은 각 주가 자신들의 빚을 알아서 갚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당시 제퍼슨이 주지사로 있던 버지니아 주는 독립 전쟁 때 많은 빚을 꾸지 않았는데 공업을 중시하는 뉴잉글랜드 지방의 많은 주들은 엄청난 빚을 떠안고 있었다. 그리고 뉴잉글랜드 출신의 재무장관 해밀턴은 그 빚을 똑같이 나누어 갚자 하니, 자연히 빚을 많이 꾸지 않은 버지니아 주, 노스캐롤라이나 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등의 불만을 샀다. 이렇게 엄청난 반대에 부딪히자 해밀턴은 제퍼슨에게 협상을 요구하여 연방의 수도를 남부 쪽에 양도하는 대신 주들이 똑같이 빚을 나눠 갚는 법을 통과시켜 달라하였고 제퍼슨이 받아들여 수도는 그렇게 뉴욕이 아닌 워싱턴 D.C.로 정해졌다.

제퍼슨과 해밀턴은 아메리카 합중국 은행을 세울 때에도 마찰을 빚었는데 제퍼슨은 은행 설립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역설하였으나 해밀턴은 수정헌법 제10조에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연방정부가 행사할 수 있다’라는 조목을 들어 합중국 은행 설립을 논리정연히 설명하였다. 워싱턴은 해밀턴의 손을 들어주었고 1791년에 합중국 은행이 설립되었다. 제퍼슨은 연방주의자들과의 논쟁이 격화되자 해밀턴과 다른 연방주의자들을 보고 공화주의를 무너뜨리려는 토리당 당원 또는 왕당파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연방주의가 “왕당주의”와 같다고 설명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 해밀턴의 추종자들은 왕관, 주교관를 쓰는 군주제를 갈망하고, 이것들을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이다.[21][22] ”

또한 해밀턴은 영국을 국가 정치의 모범으로 삼아야한다 했고, 제퍼슨은 프랑스를 정치의 모범으로 삼아야한다 했을 만큼 이들 둘의 정치적 사상과 견해는 달랐다. 제퍼슨은 제임스 매디슨과 함께 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총재가 되어 당을 이끌어나갔다. 제퍼슨은 매디슨, 선거 전략가인 존 J. 베클리와 같이 일하며 연방주의자들에게 맞서기 위해 국가적인 민주공화당의 세력과 통신망을 갖추려 하였다.

제퍼슨은 1793년에 영국과 프랑스가 전왕인 루이 16세의 처형을 빌미로 전쟁을 벌였을 때, 프랑스를 강력히 지지하였다. 역사학자 로렌스 S. 카플란은 제퍼슨의 “프랑스에 대한 본능적인 지지”는 워싱턴 대통령이 유럽의 전쟁에 끼어들어서는 안된다는 의지를 확고히 하였다 하며 제퍼슨 역시 워싱턴의 중립 선언에 동의하였다.[23] 1793년, 급진적인 신임 프랑스 공사 에드몽 샤를 주네(Edmond-Charles Genêt)가 도착하자 제퍼슨에게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으나, 곧 제퍼슨과 국무부를 매우 난처하게 만들었다. 주네는 미국이 중립을 풀고 프랑스를 지원해야 한다 큰소리쳤고 여론을 조종하여 선동하였으며 심지어는 사람들에게 호소하며 이 호소장을 워싱턴에게 주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미국 정부를 전복한 힘이 있다 큰소리쳤으며 또한 워싱턴이 교수형당한 그림이 그려진 판화를 뿌리는 등 계속 분란을 조장하였다. 제퍼슨은 주네의 대외 활동을 금지하여 소동을 막으려 하였으나. 제퍼슨은 자신의 정치적 성공이 유럽에서의 프랑스군의 승리에 달려있다고 믿을 만큼,[24]


타데우스 코스치슈코가 토머스 제퍼슨을 그린 판화제퍼슨은 아직 프랑스에 대한 호의를 잊지 않았고 프랑스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과 프랑스와의 맹약을 희망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적들, 즉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독재정치를 지향하고 정부에 대하여 무제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두려워 하였다. 또한 1793년 여름까지 프랑스의 상황이 좋지가 않고 연전연패하면 개혁적이고 진취적인 민주공화당의 세력이 의회에서 의기소침해 질지도 모른다 믿고 있었다. 한편 미국 정부는 주네가 계속 난동을 피우자 프랑스에게 그의 소환을 요청하였고 후임자 포쉐가 그를 체포하러 왔으나 워싱턴은 주네의 인도를 거부하고 뉴욕 주에서 살게 해주었다.


[편집] 국무장관 사임과 정치 공백 기간
제퍼슨은 1793년 12월 31일, 국무장관 직을 사임하고 자신의 저택이 있는 몬티첼로로 돌아가 워싱턴과 해밀턴에 대한 정치적 대립을 총지휘하였다. 그러나 1794년의 해밀턴의 압력으로 맺어진 제이 조약은 영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무역을 재개하게 만들었으나 해밀턴에 반대하고 제퍼슨의 신임을 얻은 매디슨은 전쟁으로 가지 않고 과거의 모국인 영국을 압박하는 것을 원하였다. 사실 제이 조약에는 모순점이 많았는데 제대로 영국과의 타협을 마무리짓지 못했고 아직까지 영국이 당시 세계 최대의 강대국이었던 만큼, 영국의 눈치를 봐야 했던 불평등 조약이나 다름없었다. 매디슨은 제이 조약을 보고 ‘상업 무기’로 영국을 미국에 끌어들여 독재의 길로 가게 만드는 데 충분한 명분을 명시한 문서라고 혹평하였다. 한편, 은퇴한 제퍼슨은 아직까지 막후의 지도자로서 당을 통제하였으나, 대외적으로는 매디슨을 내세웠고 그를 강력히 지지하여 그에게 정치적 발판을 마련해주었다.[25]


[편집] 1796년 대통령 선거와 부통령 재임 기간
1796년 국민들과 장관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물러난 조지 워싱턴 대통령 다음으로 워싱턴 아래에서 부통령직을 수행했던 존 애덤스가 연방주의자당 후보로 나왔다. 또한 제퍼슨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선거인단수에서 더 많은 인원을 확보한 애덤스에게 패배하였다. 그러나 최고득표자가 대통령, 차점자가 부통령이 되는 당시의 선거 방식에 따라 차점자였던 제퍼슨은 제2대 부통령이 되었다. 또한 같은 당에서 정·부통령이 나오지 않고 각기 다른 당에서 정·부통령이 나오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제퍼슨은 대통령인 애덤스를 부통령으로서 도와주기는 커녕, 애덤스의 정책을 방해하고 반대하였다. 제퍼슨은 의회에서 지켜야 할 것들을 명시한 의회 의사 절차를 썼으나, 아직 연방주의자들이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확보한 상원에게도 적용하려 하였으나 완강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램브란트 필이 1800년에 그린 토머스 제퍼슨의 초상화XYZ 사건으로 발발한 프랑스와의 모조 전쟁(Quasi-War)은 딱히 싸울만한 명분도, 실리도 없던 전쟁이었다. 애덤스 아래의 연방주의자들은 해군을 창설하고 육군을 정비하였으며 세금을 걷어들여 전쟁 준비를 하고 1798년에 애덤스는 외국인 규제법을 승인하였다. 이 법은 미국 시민권을 따려는 이민자들의 미국 체류 기간을 5년에서 14년으로 대폭 늘리고 프랑스에 대한 간첩·배신 행위를 막는다는 명분 하에 만들었으나 실제로는 국민들의 정치적 발언 기회를 뺏는 비민주적인 법이었다. 제퍼슨은 이 외국인 보안법이 자신의 정당인 민주공화당을 목표로 삼은 것을 알고 이것을 국외의 적보다 정적이며 프랑스에 우호적인 민주공화당에 대한 정면 공격이라 비판하였다. 민주공화당 소속의 버몬트 주의 하원의원 매튜 라이온이 이 법을 비판하자, 애덤스는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제퍼슨과 민주공화당원들은 이러한 정치적 보복 공격에 크게 반발하였다. 분개한 제퍼슨과 매디슨은 버지니아-켄터키 결의안을 썼는데, 여기서 그들은 연방정부는 주들이 인정하지 않은 법안을 집행시킬 권한이 없다고 명시하였다. 다시 말하면, 연방정부는 주와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 법과 국민들의 정당한 권리를 해칠수 없다는 뜻이다. 이 법안은 주의 권한을 보장하는 이론의 첫번째 문장으로 쓰여져 있으며 뒷날 주권 우위설과 주의 연방법 거부설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편집] 1800년 대통령 선거
제퍼슨은 해밀턴의 출신지인 뉴욕 주의 표 분산을 위해 같은 뉴욕 주 출신인 에런 버(Aaron Burr)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곧 민주공화당 당원들을 모아 새 세금에 대한 공격을 퍼붓고 18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본래 제퍼슨이 연설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제퍼슨은 정식으로 대중 앞에서 선거 운동을 하지 않았다. 수정헌법 제12조가 훗날 제퍼슨이 대통령이 되고 난 뒤, 발효되나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라, 여전히 최고득표자는 대통령, 차점자는 부통령이 되는 방식이었다. 1800년 대통령 선거는 선거인단의 문제를 떠안고 있었다. 제퍼슨과 에런 버가 대통령 선거인단 득표에서 각각 73표로 공동 1위를 한 것이다. 분명 같은 당에서 나오고 제퍼슨을 대통령으로, 버를 부통령으로 뽑은 민주공화당은 적잖이 당황하였다. 그리고 대통령 결정권은 헌법에 따라 아직 연방주의자들이 득세하던 미국 하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하원에서 해밀턴은 같은 주 출신의 버를 두려워하여 그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이 독재 정치의 길로 내달릴 것이라 비판하였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명망도 높고 오랫동안 정치를 한 그의 정치적 라이벌인 제퍼슨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게 낫다 판단되어 그의 추종자들을 조종하였다. 1801년 2월 17일, 새 대통령 취임 15일 전에, 하원은 제퍼슨을 대통령으로, 버를 부통령으로 선포하였다. 제퍼슨과 버는 정치적 협약을 서로 맺어 민주공화당 정권을 세워서 버는 자신의 공이 크다 여겼다. 그러나 제퍼슨은 그에게 아무런 대가를 주지 않았고 버가 계속 대가를 요구하자 제퍼슨과 버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었다. 또한 일부 연방주의자들과 북부 연합을 만들고 1804년 해밀턴을 결투에서 사살하자, 워싱턴 행정부의 국무장관 시절 해밀턴과 논쟁을 벌였으나 그래도 해밀턴을 인정하였던 제퍼슨은 현직 부통령이 기가 막힌 일을 저질렀다며 이에 크게 분노하였고 뒤이어 1804년 수정헌법 제12조가 선포된 후, 그를 러닝메이트로 지명하지 않고 대신 조지 클린턴을 지명하였다.



[편집] 대통령 재임 기간 (1801년 ~ 1809년)

[편집] 취임과 내각 구성
소란스러웠던 1800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정치적 관계로 제퍼슨이 해밀턴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제 그는 해밀턴과 강경 연방주의자들에게 빚을 졌고 행정부에서 할 것이 아무것도 없던 부통령 에런 버 곁에서 떠나 그와는 일체 정치적인 논의를 하지 않았다. 전직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이미 1799년에 서거하고, 존 애덤스는 대통령 선거에서 진 뒤 고향인 브레인트리로 돌아가자 제퍼슨은 이제 마음대로 국가에 그의 공화주의 정책을 세우고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제퍼슨이 이끄는 민주주의를 제퍼슨 민주주의라 이름붙이고, 신임 대통령 제퍼슨은 농업주의와 제한된 연방정부를 기초로 한 자신의 정치적 믿음을 바탕으로 정책을 만들었다. 우선 내각을 민주공화당 인사로 바꾸었는데, 에런 버가 힘을 쓰지 못하는 이상, 정권의 실질적인 2인자나 다름없었던 국무장관에는 오랜 정치적 동지이자 같은 주 출신 후배인 제임스 매디슨으로 임명하고, 재무장관에는 스위스 출신의 앨버트 갤러틴을 임명하였다. 제퍼슨은 의회에 민주공화당 출신 상·하원 의원들이 자신들의 주관적인 정치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민주공화당 지도자로서 그들에게 막강한 대통령의 권위를 행사하였다. 정권이 민주공화당으로 넘어간 이후, 연방주의자들이 해밀턴파와 애덤스파로 분리되자 이것은 제퍼슨에게는 의회를 장악할 호기가 되었다. 그의 8년 임기 동안, 제퍼슨은 한개의 거부권도 행사하지 않았다.


[편집] 제퍼슨의 국내 정책

[편집] 계속되는 연방주의 정책
1800년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은 정치적으로 고전을 치뤘던 하원을 장악하고, 제퍼슨은 해밀턴에게 중요한 하가권을 내주어 제퍼슨 행정부의 승인을 얻으려 하였다. 제퍼슨은 기초적인 해밀턴의 정책이었던 합중국 은행이나 관세 정책을 계속 이어나갔다. 1801년, 민주공화당이 그토록 악법이라 비난하던 외국인 규제법의 허가기간이 끝나자 미국 시민권을 따기 위해 이민자의 체류기간을 5년에서 14년으로 늘린 외국인법은 폐지되었고 보안법으로 체포된 기자들과 국민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해밀턴의 정책이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 지속되자 연방주의자들은 제퍼슨에게 그의 내각 구성원과 다른 정부 요직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임명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편집] 국채와 군대 문제
제퍼슨은 작은 정부를 원하였기 때문에 정부의 국채를 보상하려고 하였다. 대개 국채는 큰 정부가 졌으며 작은 정부를 지향하던 제퍼슨은 작게 되면 그만큼 정부의 예산과 지출이 줄어들기에 국채 보상에 공을 들였다. 제퍼슨은 해외의 신용을 얻기 위해 빚을 도로 그들에게 갚을 필요까지는 없다 생각하였는데, 이러한 발상은 워싱턴 내각에서 해밀턴이 강력히 주장한 것과 일치하였다. 재무장관 갤러틴은 위스키 반란 때 민주공화당 지지자들을 목표로 삼았던 세금 등 연방주의자들이 만든 고압적인 세금을 철폐하였다. 갤러틴은 연방정부가 관세의 큰 이익을 독점으로 관리해야 하며 직접 과세가 필요하지 않다고 믿었다. 처음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을 때, 이 정책은 훗날 그 결과과 순전치 못하였는데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과 프랑스로 인해 미국의 무역에 타격을 주었다.

제퍼슨은 자신의 반연방주의 사상에 따라 군주제의 중요 수단인 상비군같은 막강한 군대가 민주 공화국에는 필요없다 여기고 군대의 숫자를 줄였다. 애덤스 행정부 당시 해군으로 들어간 상당수의 연방주의자들은 해직되었다. 연방주의자들은 제퍼슨의 이 정책이 만약 외국에서 침략을 하면 적은 군대가 큰 약점이 된다고 비판하였으나 제퍼슨은 그런 상황이 되면 미국 독립 전쟁처럼 민병대들이 스스로 일어나 국가와 국민을 위해 싸울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제퍼슨은 민간인들을 전쟁에 투입하면 군대의 장교들이 이를 통제하기가 더 어려워 질것이라 여겨 1802년, 육군공병사령부(Army Corps of Engineers)와 웨스트포인트에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하였다.


[편집] 임명권과 연방주의자

대통령 재임 때의 제퍼슨1796년 존 애덤스가 대통령직을 승계하였을 때, 애덤스는 전임 대통령 워싱턴이 임명한 각료들을 유임시켰다. 그 결과, 미국의 첫번째 정권이양 시기에서는 연방 정부에 작은 변화밖에 없었지만 1800년 대통령 선거 이후, 연방주의자당과 민주공화당 사이에 정권이 이양되었는데 이것은 단순한 이양이 아닌 정권의 완전교체였다. 대통령으로서 제퍼슨은 연방주의자들이 독점한 정부 요직을 갈아치우고 민주공화당 인사들로 바꿀 힘을 가지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임명권이 정권을 장악한 정당과 그 정당 소속의 대통령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라 예상하였으나 제퍼슨은 모든 연방주의자들을 임명된 자리에서 내보낼 것을 주장하는 민주공화당 당원들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대신 그는 애덤스가 임명하였던 정부 각료와 요직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심복들을 앉혀야 한다 생각하였다. 해밀턴의 연방주의자 강경파보다 온건한 애덤스 연방주의자들은 민주공화당 당원들의 요청으로 해직될 수 있었으나 민주공화당 총재인 제퍼슨은 그들을 계속 유임시켰다. 제퍼슨의 연방정부 인사 전원 해직 거절은 1828년 선거 이후 앤드루 잭슨이 대통령이 된 후 모든 측근 인사들을 자신의 사람들로 바꿀 때까지 계속 지켜졌다.

제퍼슨이 연방주의자들에게 온건한 태도를 취하고 있을 때, 연방주의자들은 당내의 내분에 휩싸여 분열되었다. 아직 민주공화당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지, 연방주의자들은 민주공화당의 정치 선거운동 참여를 거부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민주공화당의 대중적 지지에 매우 놀랐다. 연방주의자들의 정신적 지주인 전임 대통령 애덤스와 존 제이는 공직에서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또다른 지도자인 알렉산더 해밀턴은 1804년에 부통령 에런 버와 결투를 벌였으나 그에게 사살당하여 사실상 연방주의자당을 이끌 마땅한 지도자가 없었다. 미국이 점점 영토를 넓혀가자,[26]제퍼슨의 반연방 민주주의적 사상이 높은 세금과 강력한 중앙 정부를 지향하던 연방주의자들을 제치고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1805년까지, 연방주의자들은 뉴 잉글랜드 지방과 델라웨어 주에서만 강세를 보였고 연방주의자 온건파들은 민주공화당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연방주의자당에서 가장 손해를 끼친 탈당 사건은 바로 존 애덤스 대통령의 아들 존 퀸시 애덤스가 연방주의자당을 탈당하고 민주공화당에 입당한 것이었다.


[편집] 사법부와의 갈등

연방 대법원장 존 마셜제퍼슨은 그의 전임자들이 임명한 판사들을 좋아하지 않고 매우 의심하였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판사는 현실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는데 그가 반연방주의적인 권리장전에서 주장한 것 중 하나는 바로 판사가 사법부에서 가질 수 있는 권한이었다.[27] 그의 주장에 동조한 민주공화당이 지배하고 있던 의회는 애덤스 행정부 때 통과된 1801년의 사법법을 무효로 하여 애덤스 행정부 말기 만들어진 연방주의적인 많은 지역법원들을 없애버렸다. 그러나 사법법 폐기는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연방주의자들은 “헌법에 한번 법원이 만들어지고 판사가 임명을 받으면 중죄를 저질러 탄핵을 받지 않는 이상, 판사는 죽을 때까지 재직이 가능하다”라고 제퍼슨의 이러한 행동에 반발하였다. 민주공화당의 제퍼슨은 법원에 대한 정치적 대책을 연방주의자들에게 설명하지 않고, 대신 그들에게 법원이 국가에 끼치는 부담을 이유로 들며 공격을 퍼부었다. 이미 종신 연방주의자 판사들이 지배하던 사법부가 자신들 세력 하의 많은 법원을 만든 뒤부터 전혀 법원이 필요없다는 상황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민주공화당 당원들은 이러한 법원의 부당한 행동은 사법법을 무효시키기 위하여 법원이 정부에 과도한 걱정을 끼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헌법에 대한 약간의 해석이 필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퍼슨은 미국 제1 합중국 은행 창설 당시 반대하였던 당원들을 모두 규합하여 상·하원 모두에서 1801년의 사법법을 무효로 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사태는 애덤스 행정부가 끝나기 바로 직전에 임명된 “심야 판사”들이[28] 제대로 임명을 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민주공화당 인사로부터 사법부를 연방주의자당으 세력권 안에 넣기 위해 “심야 판사”들이 임명된 뒤부터, 제퍼슨은 새 연방 판사들을 임명은 하였으나, 정작 그들에게 자리를 주는 것을 꺼려하였다. 그가 유일하게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애덤스 행정부 말기 국무장관을 지냈던 존 마셜이 연방 대법원장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마셜은 본래 제퍼슨의 5촌 조카로 당숙인 제퍼슨과 같이 법학을 전공하였으나, 사상은 당숙과 매우 달랐는데 그는 존 애덤스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열렬한 연방주의자였다. 마셜이 사법부에 끼친 영향은 매우 대단하여 사법부가 주의 권한을 보호하는 대신 연방정부의 권한과 권위를 더 중시하도록 하였다. 가장 중요한 사건인 마베리 대 매디슨 사건은 “심야 판사”중 하나로 임명받은 윌리엄 마베리가 판사로 임명은 받았으나 정작 임명장은 받지를 못하였다. 마베리는 당시 임명장을 가지고 있던 정권의 2인자 국무장관 제임스 매디슨에게 항의를 하여 소송을 걸었다. 마셜을 비롯한 대법관들은 직무집행 영장을 내려 당장 매디슨에게 임명장을 줄 것을 권고하였다. 이 사건은 비록 의회나 정부가 만든 법률은 무엇이든간에 헌법에 합법한가 아닌가를 따져야 하며 연방대법원은 이러한 법률을 위헌으로서 무효화할 수 있도록 하여 오늘날의 사법심사의 시초가 되었다.

민주공화당 인사들은 1801년의 사법법을 무효로 하는 것과 “심야 판사”들을 해직시키는 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참에 연방주의적인 연방 판사들을 대법원에서 해직시키려고 하였다. 첫번째 소송은 미친 행동을 보이며 공공에서 음주를 하여 기소된 연방주의자 지역 판사 존 핑커링에 관한 소송이었다. 제퍼슨의 조종으로 하원은 1804년에 핑커링을 탄핵하고 상원 역시 탄핵에 찬성하여 얼마 안가 핑커링은 대법원에서 해직당하였다. 그리고 제퍼슨은 이제 연방대법원을 주시하기 시작하였다. 연방주의자 대법관인 새뮤얼 체이스(Samuel Chase)는 대배심원에게 “민주공화당 인사들은 ‘평화와 질서, 자유와 소유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체이스가 자신을 비난하는 것을 안 제퍼슨은 의회의 지도자들에게 다시 탄핵을 올릴 것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많은 민주공화당 당원들, 특히 상원 의원들은 이러한 정당한 반박에 대한 규탄은 이미 제퍼슨 행정부 초기 무효화된 연방주의자당의 외국인 규제법을 생각나게 한다고 제퍼슨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정치적 비판으로 대법원 재판관을 해직하는 것을 바라지 않던 상원은 1804년 체이스가 모든 혐의에서 죄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새뮤얼 체이스 사건은 미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연방 대법관 탄핵 사건이었다. 당의 최고 지도자인 제퍼슨의 의견에 반대한 민주공화당 소속 연방 상원의원들은 사법부의 독립은 정치적으로 어찌 할 수 없다는 의견을 제퍼슨에게 보냈다.


[편집] 재선과 민주공화당의 분열
제퍼슨은 18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인단 표 162표를 확보하여 불과 14표밖에 확보하지 못한 연방주의자당 소속 찰스 핑크니를 손쉽게 물리치고 재선에 성공하였다. 뉴 잉글랜드 지방에서 제퍼슨에 대한 반대가 형성되자, 연방주의자들은 이 곳을 제퍼슨 행정부 반대파의 기점으로 삼아 계속 반제퍼슨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온건한 공화주의를 내건 제퍼슨에게 반대하는 연방 하원의원인 존 랜돌프와 존 테일러는 탈당하고 제퍼슨에게 본래 자신이 주장하던 작고 힘없는 연방정부를 지향하는 “1798년의 원칙”으로 돌아가라고 요청하였다. 이들은 “구민주공화당”(또는 제3당, Tertium Quids)의 당원으로 불렸고, 민주공화당이 유약해 진것은 모두 국무장관 매디슨과 재무장관 갤러틴 때문이라고 강도높게 비판하였다. 제퍼슨이 조지아의 서쪽의 야주 랜드(Yazoo Land) 문제로 혼란에 빠져있을 때, 랜돌프는 하원에서 대통령인 제퍼슨을 정면으로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랜돌프의 이러한 행동은 민주공화당 출신 의원들이 제3당을 멀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마셜의 연방대법원이 플레쳐 대 펙 사건에서 야주 랜드 문제를 종결짓도록 요구받았다. 마셜은 제퍼슨의 야주 랜드 문제에 대한 설명을 지지하는 것에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어쨌든 제퍼슨을 지지하였고 마셜은 헌법에 대한 주의 법의 적합성을 따짐으로서 사법부의 권한을 한층 강화하였다.


[편집]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관계
제퍼슨이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미국 서부 오하이오 계곡에서는 원주민 부족 중 하나인 쇼니족의 추장 테쿰세(Tecumseh)와 그의 남동생 텐스콰다와가 원주민들을 이끌고 미국 정부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하이오 ·일리노이 등의 노스웨스트 지역에서 미국에 대항한 인디언 연합을 만들었고 테쿰세·텐스콰다와 형제는 서부로 향하려는 미국인들을 막는 강력한 존재가 되고 있었다. 제퍼슨은 인디언들에게 미국 문명화를 강요하였다. 일부의 견해는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그리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었으나 테쿰세 형제를 백인 문화로 문명화시키거나 그들을 서부에서 몰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느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한편 인디언 등에 대한 그의 입장에는 이견이 제기되어 있다.[29] 제퍼슨은 미시시피 강 동부 지역을 미국의 영토로 선언하고, 테쿰세를 비롯한 동부 인디언들을 백인 문화로 편입시키고, 일부는 미시시피 서부로 몰아내는 정책을 추진했다. 제퍼슨의 대통령 재임 기간 남부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이주가 시작되었다. 5개의 문명화된 부족인 체로키 족, 촉타우 족, 머스코지 족, 치카사우 족, 세미놀 족은 그들의 영토를 지킬 수 있었는데 바로 이들이 백인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머스코지 족과 한 핏줄인 크릭 족이 앨라배마에 있는 자신들의 영토에서 나가기를 거부하자, 앤드루 잭슨이 이끄는 테네시 민병대가 원정을 펼쳐 호스슈 벤드 전투에서 저항하는 원주민들을 가차없이 살육하고 그들을 서부로 몰아냈다. 한편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가리켜 쓰레기라고 했다는 혹평도 존재하고 있다.[30]


[편집] 노예 무역 제재
제퍼슨의 두 번째 임기 중, 의회에서 제정하고 헌법에 명시한 노예 무역 금지 법안의 기간이 만료되었다. 제헌회의에서 노예 무역 조약으로 만들어진 이 제재는 1808년까지 의회에서 다시 노예 무역에 관한 논의 자체를 막았다. 1807년 북부 출신 연방 하원의원들이 미국에서 노예 무역을 영원히 금지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였다. 이 법안은 대통령인 제퍼슨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 법안의 제정을 놓고 의회가 두 개의 파로 갈라졌다. 북부 출신 하원의원들이 노예 무역을 반대하였으나 정작 자신의 땅에서 잡혀 미국으로 밀수입된 노예들을 자유 시민으로 만들어 북부 자유주에서 살게 해준다는 요구는 없었다. 남부 출신 하원의원들은 노예 무역 제재는 무시될 것이며 노예들을 규제하는 건 의회가 아닌 각 주에게 달려 있다고 반박하였다. 1808년 북부와 남부 사이에 협상안이 타결되어 노예 무역을 금지하였으나 연방정부는 노예 제재에 손을 때고 잡혀온 노예들은 각 주가 관장하도록 하였다. 주 정부는 잡혀온 노예들을 경매에 내보내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사람에게 노예들을 팔았다. 그러나 노예 무역 제재는 말 그대로 노예 무역만을 금지한 것이었을 뿐, 모든 노예 제도마저 폐지시키지는 못하였다.


[편집] 제퍼슨의 대외 정책

[편집] 루이지애나 매입과 버의 음모

1804년 루이지애나를 표기한 지도첫번째 취임사에서 제퍼슨은 광활한 루이지애나 영토를 미국의 세력권 안에 집어넣으려는 자신의 비전을 피력하였다.[31] 당시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할 무렵, 루이지애나 영토는 파리 조약에 따라 스페인이 영유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의 정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제1통령에 올랐으며 1801년에 스페인을 합병하자, 자연히 스페인의 영토였던 루이지애나는 도로 프랑스가 가지게 되었다. 1802년 뉴올리언스 항이 미국과의 무역을 할 수 없게 되자, 제퍼슨은 서부의 주와 영토를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깨달았다. 제퍼슨은 제임스 먼로와 로버트 리빙스턴을 파리로 보내 프랑스와 뉴올리언스 매입에 대하여 협상을 하도록 하였다. 당시 나폴레옹은 아이티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던 투생 루베르튀르(Touissant L'Overture) 장군과 싸우느라 막대한 군비를 지출하고 있었다. 국고에 돈이 없자 나폴레옹은 자신의 협상 대표로 외무상인 탈레랑을 보내 뉴올리언스는커녕 루이지애나 영토 전체 값을 1500만 달러로 제시하였다. 본래 미국이 뉴올리언스를 샀던 가격이 2,000만 달러였으나 뉴올리언스 면적의 수백 배에 해당하는 루이지애나를 미국의 제시가보다 500만 달러나 싸게 주었다. 제퍼슨은 협상 소식에 매우 기뻐하였으나 곧 그는 땅을 살 법적인 권한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본래 헌법을 신봉하던 제퍼슨은 땅을 살 권한을 의회에 주는 것을 골자로 하는 수정헌법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루이지애나 편입에는 반대의견이 있었고, 매입에 반대하는 이들은 “사람도 살지 않고, 있는 것은 기껏해야 늑대와 떠돌이 인디언, 엄청난 쓰레기뿐인 땅을 가뜩이나 부족한 돈으로 사들였다”며 제퍼슨을 비난하였다.[32] 제퍼슨 본인도 “미주리 강 상류에는 매머드와 큰땅늘보를 비롯해 선사시대 생물들이 존재하고, 소금으로 이뤄진 산이 펼쳐져 있다”고 믿기도 하였다.[32]

그러나 미국의 땅값 지불 지연과 프랑스의 국고가 아이티의 반란에 들어갈 군비로 인하여 갈수록 비자, 나폴레옹은 탈레랑에게 만약 미국이 루이지애나 영토의 값을 빨리 지불하지 않으면 프랑스는 영국에게 줄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라고 지시하였다. 먼로와 리빙스턴이 고심하고 있을 때, 제퍼슨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새 수정헌법의 이익도 따지지 않은 채 상원에게 병합 조약을 승인할 것을 요구하였다. 연방주의자들의 적은 반대를 제외하고 대다수 상원의원들이 이를 찬성하여 미국은 루이지애나 영토를 미국에 준주로 편입시켰으니 역사학자들은 이것을 바로 루이지애나 매입이라고 부른다. 이 매입으로 미국의 영토는 하루아침에 두 배로 늘어났으며 새 영토가 셍긴 제퍼슨은 이제 그 곳에 살고 있는 프랑스인과 스페인인, 멕시코인,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곰곰히 생각하였다. 각 민족 간의 다툼을 막기 위해 제퍼슨은 루이지애나 정부법을 만들어서 루이지애나 준주를 다스릴 정부를 만들고 세금을 걷을 체계 또한 갖추게 하였다. 하지만 제퍼슨은 미국 독립 당시 ‘대표없는 곳에 과세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의회에 의원들을 보내지도 못하는 준주인 루이지에나에 과세를 하였다.

1803년 7월 4일 제퍼슨은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사들였다고 공표하였다.[32] 이후 루이지애나 매입이 끝나자 제퍼슨은 새 영토에 무엇이 있는지 관찰하기 위해 서부 탐험대를 만들어 보냈다. 메리웨서 루이스와 윌리엄 클라크가 대장으로 임명되어 새 영토에 있는 과학적인 자료 수집과 분석, 원주민의 민족사 기술, 원주민과 미국 간의 무역망 설립과 새 영토의 자연 탐험을 목적으로 삼아 미지의 서부로 떠났다.

루이지애나 준주에 있는 프랑스인, 스페인인 등 주민들의 불만은 전 미국 부통령 에런 버가 나폴레옹에게 접근하고 다시 루이지애나를 빼앗아 새로 친프랑스적인 국가를 만들려는 버의 음모를 낳았다. 버는 워싱턴 D.C.에서 부통령으로 뽑히지 못하고 출신주인 뉴욕 주에서도 주지사로 당선되지 못하자 크게 분노하던 버는 루이지애나 준주에서 민병대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친구인 제임스 윌킨슨과 멕시코를 공격하고 자신을 “멕시코의 황제”라 참칭하였으나 윌킨슨은 도중에 버를 배신하고 제퍼슨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전임 부통령이 이러한 반역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것에 격노한 제퍼슨의 군사적 행동으로 버는 연방군에게 체포되어 워싱턴 D.C.로 호송되었다. 버가 구속된 후 제퍼슨은 버에게 내란반역죄 혐의로 기소하고 재판을 열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에서 판결을 내릴 때, 대법원장 마셜은 당시 반역 도모를 했던 모임에 버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설명하였다. 이를 들은 제퍼슨은 크게 놀랐고 마셜과 대법관들은 버가 반역죄 혐의를 받을 자격이 없다 하며, 그가 무죄임을 판결하였다.


[편집] 제1차 바르바리 전쟁
조지 워싱턴 행정부 당시 미국은 지중해에서 해적들의 노략질을 받을까 두려워 북아프리카에 있는 오스만 제국의 자치국 중 하나인 바르바리 제국에 일정한 조세를 내고 보호를 요청하였다. 제퍼슨은 점차 바르바리가 조세를 올려서 국고가 바닥이 날 지경이 되자 이에 항의하여 1801년 미국 해군과 해병대를 트리폴리로 보냈다. 미국의 함대와 스웨덴에서 파견한 약간의 함대가 바르바리의 해군과 맞서 싸웠다. 4년간 계속된 제1차 바르바리 전쟁은 ‘트리폴리 해안으로 진격한’ 미국 해병대가 승리하였다. 미국군의 전함이 침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805년 승리자로서 바르바리와 평화 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당시 미국의 사망자는 35명, 부상자는 64명이었으나 바르바리군의 사망자는 800명, 부상자는 1200명이었으니 미국의 최초의 해외 원정으로서 꽤 큰 성과였다.


[편집] 유럽과의 관계
제퍼슨의 두 번째 임기 중,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세계의 패권을 놓고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되었다. 워싱턴이 중립법을 발표하자, 제퍼슨은 미국이 어느 편에 들지도 또는 어느 나라와도 무역을 해서는 안된다는 워싱턴의 견해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나폴레옹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영국 정부는 분명 중립을 선언하던 미국의 선박들을 약탈하고 그 선원들을 붙잡아 영국의 군대에 강제로 징용하였다. 영국 의회는 긴급 칙령을 공포하여 유럽과의 모든 무역을 금지하였다. 나폴레옹은 1806년의 베를린 칙령과 1807년의 밀라노 칙령에서 효과적으로 유럽으로부터 영국 무역을 고립시키고 이를 무시하는 중립국의 선박을 마음대로 침략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제퍼슨은 이러한 영국과 프랑스의 행동에 미국의 중립성이 흔들리다며 심각하게 동요하였다. 이 긴장은 버지니아 주 해안에서 일어난 체서픽-레퍼드 사건에서 절정에 다다랐는데 영국의 전함 레퍼드 호(The Leopard)가 미국의 선박 체서픽 호(The Chesapeake)를 수색하겠다는 것이었다. 체서픽 호의 선장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레퍼드 호는 체서픽 호에 대포를 발사하여 미국인 선원 3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소식을 들은 여론은 제퍼슨에게 강력한 조치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를 받은 제퍼슨은 의회의 협조를 얻어 1807년 출항금지법에 서명하였다. 이 법안은 영국과 프랑스에게 어느 국가든 다 무역할 수 있는 미국의 중립성을 존중해 줄 때까지 영국 또는 프랑스와의 무역을 일체 금지하였다. 배를 출항시킬 수 없자, 많은 미국인들은 즉각 유럽과 위험한 밀무역을 하기 시작하였다. 제퍼슨은 이에 크게 노하여 연방정부의 권한을 이용, 연방군을 동원하여 미국의 해안을 지키고 캐나다와의 무역로를 차단하였으며 의심스러운 밀무역업자의 선박을 공격하여 침몰시켰다. 또한 수송선을 포함한 모든 배는 군대나 정부 관료의 승인을 받지 않고는 승객이나 짐을 실어 나르지 못한다고 명령하였다. 출항금지법은 민주공화당에게 매우 불리한 결과를 낳았다. 경제에서 무역을 많이 의존한 뉴 잉글랜드 지방은 다시 연방주의자당을 지지하기 시작하였다. 제퍼슨은 출항금지법을 지지하는 도중 연방정부에게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당하였다 주장하는 지지자들의 지지를 잃었다.[33] 심지어 영국과 프랑스는 출항금지법 적용 후, 자신들의 경제가 그리 심각하게 나빠지지 않았다며 이러한 제퍼슨의 정책을 크게 비웃었다. 1808년 제임스 매디슨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그의 평판은 출항금지법으로 매우 나빠졌고 민주공화당의 여당으로서의 지위 역시 흔들리게 되었다.


미국 2달러 지폐에 그려져 있는 제퍼슨의 초상
[편집] 행정부와 내각

직책 이름 임기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 1801년 ~ 1809년
부통령 에런 버
(Aaron Burr) 1801년 ~ 1805년
조지 클린턴
(George Clinton) 1805년 ~ 1809년

국무장관 제임스 매디슨
(James Madison) 1801년 ~ 1809년
재무장관 새뮤얼 덱스터
(Samuel Dexter) 1801년
앨버트 갤러틴
(Albert Gallatin) 1801년 ~ 1809년
육군장관 헨리 디어본
(Henry Dearborn) 1801년 ~ 1809년
법무장관 레비 링컨 1세
(Levi Lincoln Sr.) 1801년 ~ 1804년
존 브레킨리지
(John Breckinridge) 1805년 ~ 1806년
시저 A. 로드니
(Caesar A. Rodney) 1807년 ~ 1809년
해군장관 벤저민 스토더트
(Benjamin Stoddert) 1801년
로버트 스미스
(Robert Smith) 1801년 ~ 1809년


[편집] 재임 기간에 임명된 대법관
제퍼슨은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3명의 연방 대법관을 임명하였다.

윌리엄 존슨(William Johnson) - 1804년
헨리 브락홀스트 리빙스턴(Henry Brockholst Livingston) - 1807년
토머스 토드(Thomas Todd) - 1807년

[편집] 재임 기간 연방에 가입한 주
오하이오 주 - 1803년 3월 1일


[편집] 버지니아 대학교의 아버지
대학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버지니아 대학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버지니아 대학교의 더 런대통령에서 물러난 후, 제퍼슨은 계속 공직에서 일하였다. 그는 더욱 수준높은 교육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지만 다른 대학들처럼 교회의 영향을 받지 않는 대학을 짓기를 매우 희망하였다. 제퍼슨은 교육받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드는 데에 크게 일조할 것이라 믿었고, 또한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대학이 특정 계층이 아닌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하였다.[34] 1800년 1월에 조지프 프리스틀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퍼슨은 대학을 짓기 전 십수년간 대학 건축과 운영 계획 등을 만들어 놓았다고 썼다.

1819년 마침내 버지니아 대학교의 설립이 이루어지면서 그의 꿈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정식으로 개교하지는 않아 1825년에야 대학에 학생들이 편입되었는데 버지니아 대학교는 학생들에게 원하는 선택과목의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허락한 최초의 대학교였다. 당시 버지니아 대학교 설립은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건축 사업 중 하나로 제퍼슨의 교육 이념에 따라 교회보다는 도서관을 중요시하였다. 사실 대학 캠퍼스 예배당은 그의 본래 계획에는 없었으나 설립하도록 허락하고, 대신 예배당이 대학교에 관한 모든 교육적인 정책에 철저히 관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1826년에 죽을 때까지, 제퍼슨은 많은 학생들과 교수들을 자신의 집인 몬티첼로로 초대하였는데 이 중 훗날 유명한 소설가가 되는 에드거 앨런 포도 있었다.

제퍼슨은 버지니아 대학교의 교정을 만들면서 교육과 신생 공화국의 농업 중심의 민주주의를 강하게 나타내는 디자인을 채택하였다. 전문적인 학생을 육성하려는 제퍼슨의 교육 이념은 그의 교정 설립 계획에서도 잘 드러났는데 전문적인 학생을 육성하기 위해 만든 교정을 더 런(The Lawn)이라고 이름붙였다. 대학생들은 여러 개의 교정 별관에서 독특한 자신들만의 전문 분야를 개척해 나갔는데, 별관은 사각형의 건물로 교실, 실험실, 교무실, 그리고 기숙사 등으로 사용되었다. 매우 특이한 것이, 정면에서 보면 별관들의 크기가 같아보이지만 사실은 크기가 약간 다르다. 또한 별관들은 각 학생용 시설과 여러 개의 회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큰 정원과 텃밭은 뱀 모양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제퍼슨이 주창한 농업 중심의 생활방식을 강조하고 과학적 농업 기술을 가르쳤다.

제퍼슨의 매우 질서있고 꼼꼼한 교정 설립 계획은 중앙의 더 런이라 불리는 사각형 건물을 놓고 좌우에 서로 연결되는 회랑과 학생 전용 건물들을 세워놓아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안뜰은 지식의 보고인 도서관과 같이 평지에 에워싸져 있었다. 도서관의 맞은편에 있는 부지는 훗날 세워질 건물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잔딧밭으로 내버려두었다. 더 런에 있는 건물들의 크기는 중앙의 도서관에 가까워질수록 크기가 달라지는데 계속 가까이 갈수록 건물이 차이가 나며 건물의 위치 역시 계속 도서관으로 다가갈수록 약 1m 씩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중앙의 도서관은 가장 높은 위치에 있으며 이러한 디자인은 미래로 향해 끊임없이 올라가면 정상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제퍼슨은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 스타일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그는 과거 민주주의 국가들의 건축 스타일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가장 잘 나타낼 것이라 생각하였다. 각각의 건물들은 모두 고대 2층의 신전의 정면으로 디자인하였고 도서관은 로마의 판테온을 모델로 삼아 건축하였다. 이 소박한 벽돌로 쌓은 교정 건물들의 조화는 종교와 교육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공공 교육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질서정연한 건축학적 결정체였다. 이러한 교정 설립 계획과 건물 건축은 오늘날까지 지적인 생각과 염원을 표현하고 있는 인간이 만든 건축물의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미국 건축가 협회 회원 간의 투표에서 제퍼슨의 버지니아 대학교 설립이 미국 건축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고 칭송하였다.

버지니아 대학교는 버지니아 주의 교육 체계의 결정체로 만들어졌다. 제퍼슨은 모든 주의 주민들이 이제 자신의 능력에 따라 대학교에 들어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편집] 죽음

제퍼슨의 무덤 위에 세워져 있는 그의 묘비제퍼슨은 미국 독립기념일인 1826년 7월 4일에 사망하였는데 그 날은 미국 독립선언 5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독립 선언서를 같이 쓴 동지이자, 부통령 재임 당시 대통령으로 가장 큰 정적 중 하나, 그러나 화해하고 다시 좋은 친구로 지냈던 존 애덤스도 사망하였는데 애덤스는 제퍼슨이 죽고 몇 시간 뒤에 세상을 떴다. 애덤스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토머스 제퍼슨은 아직 살아 있는데……”라고 하였으나, 이미 그 시간 제퍼슨은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35]

제퍼슨은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에서 태어났으나, 정작 죽을 때에는 엄청난 빚에 시달리고 있었다. 제퍼슨의 장인이 죽을 때, 제퍼슨과 그의 처남이 땅을 나누었는데 당시 빚이 있던 장인의 몫까지 제퍼슨과 처남이 다 맡아야 하였고 그 빚의 이자까지 불어나 엄청난 빚을 떠안았다.

제퍼슨은 빚을 갚기 위해 미국 독립 전쟁 이전에 땅을 팔았으나 당시 그가 받은 지폐는 전쟁이 끝난 뒤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돈 가치가 매우 떨어져 쓸모없게 되었다. 콘월리스는 전쟁 때, 제퍼슨의 농장으로 쳐들어가 농장을 파괴하였고 영국인 채권자들이 전쟁이 끝난 뒤 제퍼슨에게 와서 돈을 당장 갚으라고 요구하였다. 그 뒤로 대통령이 된 뒤, 국가에서 주는 수당으로 조금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1819년 경제 불황 때, 빚을 갚아달라는 친척의 말에 돈을 꾸어주었으나 갚지를 못하자, 다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빠져들었다. 제퍼슨에게 돈을 꿔 준 채권자들은 몬티첼로에 들이닥치고 몬티첼로를 압류하여 경매에 부치려 하였으나 다행히 제퍼슨은 몬티첼로를 끝까지 지켜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땅은 경매로 넘어갔다. 1831년 제퍼슨의 552 에이커(223 헥타르)에 달하는 영지는 제임스 T. 바클레이라는 사람에게 7000달러로 팔렸다. 토머스 제퍼슨은 샬러츠빌에 있는 몬티첼로 영지에 묻혔다. 그는 유서에서 몬티첼로를 정부에 헌납하고 모조 전쟁이나 바버리 전쟁에서 죽은 해군 장교들의 아이들을 가르칠 학교로 쓰기를 희망하였다. 제퍼슨의 묘비문은 그가 스스로 쓰기를 고집하였는데 묘비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HERE WAS BURIED THOMAS JEFFERSON
AUTHOR OF THE DECLARATION OF AMERICAN INDEPENDENCE
OF THE STATUTE OF VIRGINIA FOR RELIGIOUS FREEDOM
AND FATHER OF THE UNIVERSITY OF VIRGINIA

묘비 아래에 있는 사각형의 기둥에는 또 이렇게 쓰여져 있다.

BORN APRIL 2 1743 O.S.
DIED JULY 4 1826

한국어로 번역한 제퍼슨의 묘비문은 다음과 같다.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이자
버지니아 종교 자유법의 제안자,
그리고 버지니아 대학교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 여기 잠들다.
구력 1743년 4월 2일 생
1826년 7월 4일 졸

그는 자신이 한 일에서 미국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제외시켰는데 자신이 한 일 중 가장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묘비문 밑에 쓰여있는 이니셜인 O.S.는 구력, 즉 율리우스력을 뜻하는데 제퍼슨이 태어날 때 영국은 아직 율리우스력을 썼고 1752년에 가서야 영국 정부는 신력법을 선포하여 쓰는 달력을 율리우스력에서 그레고리력으로 바꾸었다.[36]



[편집] 기타

[편집] 외모와 성격
많은 사람들은 제퍼슨이 홀쭉하고 매우 큰 키를 자랑한다고 설명하였다. 실제로 제퍼슨의 키가 6인치 4피트(190cm)로 파티 등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언제나 돋보였다고 한다.[37]

“몬티첼로의 성인”으로 불리던 제퍼슨은 새로운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 사람들로부터 또다른 별명인 “인민의 사람”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가 평생 국가보다는 국민을 중요시여겼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여졌던 것이다. 그는 백악관에서 손님을 맞을 때 매우 검소하고 싼 옷을 입고 맞아 이러한 대통령의 근검절약 정신에 국민들 역시 감명받았다.제퍼슨의 국무장관 제임스 매디슨의 아내인 돌리 매디슨과 제퍼슨의 딸들은 제퍼슨의 이러한 백악관 의례를 완화하고 검소하기 그지없던 백악관의 만찬을 호화스럽고 흥미로운 파티의 장으로 만들었다.[38] 비록 제퍼슨은 자유 언론의 강력한 수호자라 자처하였으나 급진적인 언론과는 마찰을 빚어 국민들에게 급진적인 성향으로 가지 말 것을 촉구하였다.[39]

제퍼슨은 매우 실용적으로 글을 썼으며 글에서 자신의 지식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으며 여러 언어에 능하였다. 그는 아일랜드의 시인 오시안의 작품들을 아일랜드어에서 영어로 번역하고 그것을 제임스 맥퍼슨에게 보내 감수를 요청하였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의회의 의원들 앞에서 일반교서를 연설하는 대신, 일반교서를 써서 그 서한을 의회에 보내 의회가 제퍼슨을 대신하여 대외에 발표하도록 하였다. [40] 그는 8년의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두 번 연설하였는데 하나는 1기 대통령 취임사, 다른 하나는 2기 대통령 취임사였다. 제퍼슨은 혀가 짧아 발음이 부정확하였는데[41] 그로 인하여 구두로 연설하는 대신 글을 쓰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제퍼슨은 성격이 매우 내성적이고 폐쇄적이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제퍼슨은 아내 마사의 죽음 때, 그와 그녀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들을 붙태우고, 당시 외롭고 쓸쓸한 자신의 모습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혼자 일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였다.[42]


[편집] 취미와 활동
제퍼슨은 당시 영국의 휘그당 귀족들에게 인기가 있던 신팔라딘 양식을 미국에 처음으로 소개한 뛰어난 건축가였다. 이 건축 양식은 정치적 자유와 공화주의식 미덕을 아우르는 계몽 사상을 연상시켰다. 제퍼슨은 샬러츠빌에 자신의 유명한 저택인 몬티첼로를 지었는데 이곳에는 자동문, 최초의 회전의자, 그리고 제퍼슨이 발명한 발명품 등 당시 최신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근처에는 미국 대통령이 유일하게 세운 대학교로 제퍼슨이 손수 설계해서 만들어 세웠으며 미국에서 최초로 종교적인 학문을 배제한 순수한 고등 교육을 가르친 버지니아 대학교가 있다. 오늘날, 몬티첼로와 버지니아 대학교는 미국에 4개밖에 없는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에 같이 등재되어 있다. 제퍼슨은 버지니아 주 베드포드 군 린츠버그 근처에 포플러 수목원을 디자인하였는데 공직으로 심신이 지쳐 있을 때, 잠시나마 안정을 되찾아줄 휴양지로 삼았다. 또한 그는 버지니아 주 의사당을 지을 때 로마 제국 시대에 남부 프랑스 님에 세워진 메종 카리를 모델로 삼아서 설계하였다. 제퍼슨은 연방 건축 양식이 미국에 그 기반을 다질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제퍼슨은 어릴 때부터 고고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제퍼슨은 때때로 발굴 작업을 한 층 더 발전시킨 공을 높이 사 “고고학의 아버지”로도 불렸다. 1784년 버지니아에 있는 그의 영지에서 아메리카 인디언의 무덤이 발견되었을 때, 제퍼슨은 무언가 발견될 때까지 단순히 밑으로 계속 파는 방식을[43] 피했다. 대신 쐐기를 토굴에서 제거하여 토굴 안의 무덤으로 들어가 그 곳의 지층 등을 세밀히 관찰하고 관찰 기록을 적었다.


몬티첼로토머스 제퍼슨은 몬티첼로의 연못을 좋아하였다. 대략 깊이가 3피트(1 m)로 석회반죽으로 연못을 지었다. 그는 낚시에서 잡은 물고기나 장어 등을 가져와 이곳에 놓아 주었다. 제퍼슨이 죽은 뒤, 없어졌으나 지금은 다시 복원되어 몬티첼로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1780년 제퍼슨은 벤저민 프랭클린이 만든 미국 철학 협회에 가입하여 부통령으로 재임하기 시작한 1797년에서 1815년까지 회장으로 재직하였다.

제퍼슨은 와인 애호가이자 미식가이기도 하였다. 프랑스 공사 시절(1784년 ~ 1789년), 그는 프랑스와 다른 유럽의 와인 명산지를 돌아다니며 최고의 와인을 사서 자신의 공관이나 버지니아의 집으로 보냈다. 그는 와인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 우리 미국은 유럽과 같이 다양한 와인을 만들지 못하며 그와 똑같이 만들 수도 없지만, 질은 유럽의 것과 다르지 않다.[44] ”

제퍼슨은 몬티첼로에 넓은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그는 유럽에서 와인용으로 자주 쓰이는 포도인 비티스 비니페라(Vitis vinifera)의 씨앗 등을 심었으나 미국의 포도 풍토병으로 포도 농사가 수포로 돌아갔다.

1801년 제퍼슨은 현재 미국 의회에서도 쓰이고 있는 의회 의사 절차 설명서를 발간하였고 1812년에 개정판을 새로이 발간하였다. 1802년부터 흑인 노예 샐리 해밍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의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그는 이를 부인하거나 대응하지 않았다.[45]

미영 전쟁 기간인 1814년 8월, 워싱턴 D.C.가 영국군에게 함락당하고 미국 의회도서관이 불타자, 제퍼슨은 평생 자신이 수집한 책들을 국가에 헌납하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1815년 1월, 의회는 제퍼슨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제퍼슨에게 23,950 달러를 주고 그의 6,487개의 귀중한 책들을 헌납받았는데 그의 헌납은 의회도서관이 다시 일어서서 명실상부한 국립도서관이 되는 기틀이 되었다. 오늘날 의회도서관 웹사이트에서 연방 의회 정보를 알려주는 도우미를 ‘토머스’(THOMAS)라 이름붙였는데, 바로 의회도서관에 자신의 책을 아낌없이 기증한 제퍼슨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46]1764년 발간되어 제퍼슨이 소장하다가 의회도서관에 기증한 두 권의 쿠란은 2007년 미국 최초의 무슬림 출신 하원의원이 된 케이스 엘리슨이 하원에서 선서할 때에 쓰이기도 하였다.[47]


[편집] 정치 철학

1818년 5월 28일, 모르데케이 매뉴얼 노아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퍼슨은 인간의 본성과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하여 설명하였다.제퍼슨은 미국에 공화주의를 뿌리내리는 데 매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영국의 귀족적 정치 독점 방식은 단점이 많고 시민 사회에 대한 미국인들의 열정이 독립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역설하였다. 1790년대 그는 해밀턴과 존 애덤스가 영국의 군주제를 도입하여 공화제를 없애버리려 한다고 여러 번 경고하였다. 또한 미영 전쟁을 지지하여 미국이 영국군을 몰아내고 영국이 지배하던 캐나다를 압박하여 캐나다까지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제퍼슨이 생각한 미국의 공화주의 이상은 자유 농민이 자신들의 뜻에 따라 다스리는 농업 국가로의 발전이었다. 제퍼슨이 이러한 사상은 상업과 공업을 중시한 알렉산더 해밀턴과 크게 비교되어, 워싱턴 행정부에서 같이 장관으로 일할 때, 많은 마찰을 일으켰다. 제퍼슨은 특이하고 예외적인 것에 큰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여 후세의 미국인들은 그를 “미국 경험주의의 아버지”라고 이름붙였다. 특히 제퍼슨은 아직 인구가 적지만 단결된 미국이 산업화되었으나 각 민족으로 분열된 유럽에서 발생한 후유증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하였다.

제퍼슨의 공화주의적 정치 사상은 17세기에 영국 작가들이 창당한 국가당의 이념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개인권을 양도할 수 없다고 역설한 존 로크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다. 또한 역사학자들은 제퍼슨과 동시대 사람인 장-자크 루소도 제퍼슨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48]

그는 미국 은행 설립에 강하게 반대하고 자신의 의견을 존 테일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 나는 국립 은행 설립이 상비군 설립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자네의 의견을 존중하고 또 그렇다 생각하네. 그리고 국립 은행 설립으로 야기된 이러한 국고 낭비를 모두 우리의 후손들이 다른 나라에게서 빌린 차환으로 갚아야 할 것이고 후손들에게 희망도 없는 가짜 미래를 물려주는 것일세. [49][50] ”

그러나 매디슨과 의회는 미영 전쟁 당시 경제 불황에 빠진 이유가 국립 은행이 설립되지 않았다 하여 1816년 제퍼슨의 충고를 무시하고 헨리 클레이의 주도로 미국 제2 합중국 은행을 세운다.

제퍼슨은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자신들만의 “절대권”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또한 절대권은 정부 설립 여부와 상관없이 사라지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그 절대권을 줄 수도, 받을 수도, 혹은 뺏을 수도 없다 역설하였다. 절대권은 바로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의 권한이라고도 설명하였다. 제퍼슨은 절대권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 올바른 자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고 스스로 조절하면 아무도 막을 수 없다. 나는 ‘법의 규제 아래’라고 쓰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법은 폭압자의 뜻이지 우리의 뜻이 아니며, 언제나 우리의 사생활과 인권을 침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51][52] ”

그리고 제퍼슨은 정부가 자유권을 만들 수 없으며, 이를 위반해선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정당한 자유의 제한은 법에 쓰여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똑같은 자유를 침범하지만 않으면 되는 간단한 것이라고도 말하였다. 제퍼슨은 정부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범하는 사람들을 규제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정부 자체도 개인의 자유는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고도 얘기하였다. 그는 당시 버지니아에서 장자에게만 토지를 상속하는 장자 상속권에게 반기를 들어, 모든 아들들에게 공평히 유산을 분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53]

제퍼슨은 인간이 다른 사람과 좋은지 나쁜지 구별할 수 있는 타고난 도덕성과 스스로 자신을 제한할 수 있는 선천적인 자연권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또한 도덕성이 무정부주의적 사회를 움직여 오로지 사람의 도덕성만 있어도 정부가 필요없다 하였으나, 그에 대하여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하였다.제퍼슨은 여러 번 부족 안에서 스스로 다스리는 아메리칸 원주민의 생활과 제도를 극찬하였다.[54] 또한 이러한 이유로, 일부 학자들은 제퍼슨을 보고 감상적, 철학적 무정부주의자라고도 부른다.[55]

제퍼슨은 케링턴 대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정부 없이 사는 인디언들이 엄격하고 막강한 정부 치하의 유럽인들보다 행복지수가 높다고 설명하였다.[56] 그러나 제퍼슨은 무정부주의가 귀족, 평민 등 어느 계급에게나 모순적이라고 믿었다. [57] 또한 제퍼슨은 국민들로부터 통치에 대한 찬성을 얻고 미국의 세력 확장을 위하는 미국 정부를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칭송하였다.

독립 선언서의 서문에서 제퍼슨은 이렇게 썼다.

“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떠한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변혁 내지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그러한 형태로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인 것이다.[58] ”

“인민의 동의”를 주창한 제퍼슨은 사람들이 과거 조상들의 행동으로 인하여 정신적으로 나뉘어 질 수 없다 굳게 믿었다. 또한 여기에는 빚과 법도 포함되었다. 제퍼슨은 “어느 사회던 간에 완벽한 헌법이나 법을 만들 수 없다. 지구는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59] 라고 말하였다. 또한 제퍼슨은 법학 혁명의 순환을 계산하였고 “모든 헌법과 모든 법은 19년 뒤에 자연적으로 만료된다. 그리고 법 효력 기간이 그보다 길게 효력되도록 강요받으면 이것은 강압이지, 권리가 아니다”[60]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계산을 통하여 삶의 자연적 순환 기간이 19년임을 알아내었으며 이 19년의 기간 뒤에는 자신이 믿는 “성숙”[61]의 시대가 온다 생각하였다.[62] 또한 제퍼슨은 국채가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 역설하였다. 그는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전 세대의 빚을 져야 하는 정신적 의무를 부정하였다. 그는 빚을 갚는 것을 보고 “권리에 대한 질문이 아닌 관대함에 대한 질문”이라고 비꼬았다.[63]

제퍼슨은 주의 권한을 지키는 데 앞장을 서서 특히 1798년의 켄터키-버지니아 안에서 연방 정부의 권한이 커지는 것을 크게 우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책 중 일부는 오히려 연방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그의 정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803년의 프랑스인과 인디언이 살고 있던 거대한 영토인 루이지애나를 사들인 루이지애나 매입이었다. 그가 만든 출항 금지법은 외교 정책으로서는 크게 실패하였으나 연방 정부가 전쟁으로 이끌 수 있는 무역 분쟁을 조종할 수 있는 긍정적인 면도 보여주었다.


[편집] 총기 소지에 대한 견해
자유에 대한 제퍼슨의 의견은 개인의 자유로까지 그 범위가 넓어져서 제퍼슨은 이러한 개인의 자유를 크게 주창하였다. 그의 “비망록”(Commonplace Book)에서 제퍼슨은 총기 소지와 관련하여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베카리아 후작 체사레의 글을 인용하였다. 체사레는 “총기 소지를 금지하는 법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나 정부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그리고 일부 법은 법을 어긴 공격자에게는 이득이 되고 공격을 받은 피해자에게는 해악이 된다... 혹여 비무장한 사람들이 무장한 사람들보다 큰 자신감과 분노를 느끼고 공격할 수 있기에 정부는 이들의 살인을 막으려 하지 말고 오히려 독려를 해주어야 한다.”[64][65][66]라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제퍼슨은 대체로 총기 소지에 관하여 체사레의 견해와 뜻을 같이 하였다.


[편집] 경제와 재벌에 대한 견해
제퍼슨은 경제와 재벌에 대하여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 나는 우리가 정부에 자신의 힘을 믿고 도전하며 우리의 법도 어길 수 있는 주식회사의 재벌이 생겨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67][68] ”

이것은 제퍼슨이 미국 정부와 사회를 크게 위협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재벌에게 내릴 수 있는 대통령으로서의 엄중한 경고이기도 하였다.


[편집] 사법부에 대한 견해
제퍼슨은 변호사로서 사회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결코 좋은 연설자는 아니었으며 법정에 있는 것이 그리 탐탁지 않았다 한다. 오히려 그는 훌륭한 글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제퍼슨은 판사는 반드시 법에 능통한 법률 전문가가 되어야 하지만 정책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주장하였다. 제퍼슨은 1801년 연방 대법원의 마베리 대 메디슨 사건 판결을 보고 민주주의의 위반이라고 강도높게 비판하며 의회를 조종하여 연방 대법원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수정헌법을 통과시키려 하였으나 정작 의회에서는 그를 지지하는 충분한 지지 세력을 얻지 못하였다. 제퍼슨은 계속해서 연방 대법원의 사법심사권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 재판관들을 헌법 문제에 관한 최고의 중재인이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며 이러한 생각을 계속 가진다면 재판관들은 우리를 과두정치의 독재 체제로 몰아놓을 것이다. 우리들의 재판관은 우리들만큼 정직하지만 우리들보다 결코 더 정직하지는 않다. 그들은 정당을 위해, 권력을 위해, 특전을 위해 우리들과 같은 열정을 가지고 있다. 재판관들의 표어는 “좋은 판결은 더 넓은 사법부의 권한이다.”(boni judicis est ampliare jurisdictionem)라 하지만 그들의 권력은 그들이 평생 그 자리를 유지하는 만큼 매우 위험하며 자신의 입맛에 맞추려는 다른 정부 직원들 만큼 책임감이 있지도 않다. 우리의 헌법은 단 한 개의 법원을 세우지 않았고 우리의 헌법은 어떤 것이라도 신뢰받아도, 시간과 정당이 맞지 않으면 그 정당의 당원은 독재자가 되어 군림할 것도 알고 있다. 헌법은 우리 안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모든 사람이 권리를 쥐고 있다는 그 신성한 원칙 하에 빈틈없이 만들어졌다.[69][70] ”


[편집] 정치 폭력에 대한 견해
제퍼슨은 유혈 사태인 셰이스의 난에 관한 소식을 듣고 난 뒤, 존 애덤스의 사위인 윌리엄 W. 스미스에게 다음 의견이 쓰여져 있는 편지를 보냈다.

“ 한두 세기에서 몇 명이 목숨을 잃는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인가? 예나 지금이나 ‘자유의 나무’는 독재자와 애국자의 피로서 다시 살아난다. 그 피가 바로 ‘자유의 나무’의 천연 비료인 것이다. [71][72] ”


[편집] 자존에 대한 견해
1789년 3월 13일, 제퍼슨은 프랜시스 홉킨슨(Francis Hopkinson)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73]

“ 나는 내 자신의 의견을 가지기 두려워 한번도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의견을 표명한 적이 없다. 나의 이러한 우유부단한 의견은 나에게 개인인 내 자신을 존중하는 것보다도 전체를 더 존중하고 중요히 여기게 만들었다.[74] ”


[편집] 어록
토머스 제퍼슨의 종교관이 리처드 도킨스의 저작 만들어진 신에 소개되어 있다. "각 종교의 사제들은 마녀가 빛을 두려워 하듯 과학의 발전을 두려워 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과학적 선구자들의 도래에 눈을 찡그리며,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사기극의 분파를 만들어 간다." -만들어진 신 4장 도입부, 리처드 도킨스


[편집] 사생활
제퍼슨은 평생에 걸쳐 여러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샐리 해밍스 등 외에 절친한 친구인 잭 워커의 아내인 베치 워커에 반해 계속 찾아갔고, 한 번은 워커가 사업상의 이유로 출장을 가자 그는 곧장 베치를 찾아가 구애하였다.[75] 1784년 프랑스 공사로 재직할 때는, 부임 초인 1784년부터 당시 프랑스 미술계에서 이름을 알리고 있었던 유명인사인 마리아 코스웨이(Maria Cosway)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마리아는 기혼여성으로 마리아의 남편은 제퍼슨과 친구였다. 마리아의 남편은 자신의 아내와 제퍼슨의 관계를 인정하고, 이를 인정하고 이를 허용하기도 했다.[75]

제퍼슨은 그의 여자 흑인 노예였던 샐리 헤밍스(Sally Hemings)의 아이 아버지 여부를 놓고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45] 샐리 해밍스는 제퍼슨보다 28살 연하의 흑인 여성이었다.[76] 그 외에 영국 여인인 코스웨이 부인 등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77] 이는 그의 사후 영화화 되어 대통령의 연인들의 소재가 되었다.[77]

1802년부터 흑인 노예 샐리 해밍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의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그는 이를 언급하지 않거나 회피하였다. 하지만 제퍼슨의 반대파 정치인과 노예제도 폐지론자들, 그리고 미국 정부 출범초기,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영국 등에서 이를 계속 문제삼아 왔다.[45] 그뒤 매디슨 헤밍스는 자신이 제퍼슨의 아들임을 주장하였으나 이를 입증하지 못해 생전에 인정받지 못하였다.[78] 그 뒤로도 샐리 해밍스의 후손들 역시 제퍼슨 가의 일원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논란과 공방은 백년 이상 지속되다가 1998년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 유전자 감별법을 실시하였다.[45] 감별 방법으로는 부계로만 유전되는 Y 염색체를 이용한 친자확인법으로, 제퍼슨의 아들로 이어지는 남계 후손들은 후손이 끊어졌고 제퍼슨의 남동생 거의 모두가 영·유아기에 사망하였으나 토머스 제퍼슨의 막내남동생이었던 랜돌프 제퍼슨은 60세까지 살며 후손을 이어갔다.

첫 유전자 검사에서 임상 병리학자인 유진 포스터 박사는 톰 우드슨의 셋째 아들의 후손으로 현재 오하이오주 데이턴에 살고 있는 토머스 우드슨 목사의 유전자를 감식한 결과 제퍼슨 가문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Y염색체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하였다.[79] 포스터 교수는 이전에 샐리 헤밍스의 막내아들 이스턴 헤밍스의 후손에 대한 DNA 조사에서 혈연 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고 발표, 샐리 헤밍스의 자식 중 한 명 또는 전부가 제퍼슨의 후손이라던 토머스 제퍼슨 기념재단과 우드슨 후손들의 주장을 반박했다.[79] 그러나 1998년 제퍼슨의 남동생 랜돌프 제퍼슨의 직계후손 5명과 샐리 헤밍스의 막내아들 이스턴 헤밍스(Eston Hemings)의 자손 1명을 대상으로 이들로부터 얻은 Y 염색체의 유전정보를 비교하였다. 유전자 검사 결과, 이스턴 헤밍스는 사후 제퍼슨의 아들로 판명되었다.[45][80][76], 2007년 11월 학술잡지 '네이처'(Nature)에 발표되었다.[45] 1998년 매디슨 헤밍스의 후손들은 제퍼슨가의 남성들과 DNA 유전자 검사를 한 결과 제퍼슨 가의 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판명되어, 제퍼슨 가의 자손으로 인정되었다.[78] 샐리 헤밍스의 자손들 중 일부는 제퍼슨 가의 후손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를 소재로 한 소설 《클로텔 제퍼슨 대통령의 딸》이 출간되기도 했다. 이는 30여년 뒤 탈출 노예였던, 윌리엄 웰스 브라운이 제퍼슨 사생아 의혹을 소재로 지은 소설로, 클로텔은 가공의 인물이다.[81][82]



[편집] 평가와 비판

[편집] 긍정적 평가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 중 가장 혁명적인 인물로서, 신의 이름을 빌어 미국 혁명을 정당화하는 주장을 하였다. 군주제에 저항(영국에 반발하는 것)은 신에 대한 복종이라는 그의 발언에서 이를 알 수 있으며, 권리장전 헌법을 제정할 때에도 이런 종교적인 관점을 많이 강조하였다.


[편집] 부정적 평가
하지만 인간의 권리를 백인의 부르주아나 중산층 이상의 계급에 한정 지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생전 흑인 노예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둔 것이 1998년 유전자 검사결과 사실로 판명되면서 이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한편 그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주장을 하였으며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 ‘모든 사람은 신 앞에 평등하다’,‘자유는 하느님의 선물로 이를 침해하는 것은 그의 분노를 일으킬 수 밖에 없다’, ‘하느님이 공정하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조국을 위해 몸이 떨린다’라는 어록을 남겼다.[83] 하지만 그는 200여 명의 노예를 가지고 있던 농장주였고 자신의 노예들을 해방하지 않고 죽기 전까지도 그는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84][85] 또한 쇼니 족 추장 테쿰세 형제 등에게 강제로 미국문명을 주입하는 과정에서의 마찰도 존재했다. 일부에서는 그가 부성을 가장한 인종차별주의적, 백인우월주의적 가치관을 지녔다는 시각도 존재하고 있다.[29] 노예 제도가 미국인들의 도덕적 성격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노예 제도의 폐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86] 또한 노예 제도로 인하여 참혹한 유혈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 예언하기도 하였다.



[편집] 가족
부인 : 마사 웨일스 스켈턴 제퍼슨(Martha Wayles Skelton Jefferson)
자녀 : 마사 제퍼슨, 제인 랜돌프 제퍼슨, 아들 1명 유산, 메리 웨일스 제퍼슨, 루시 엘리자베스 제퍼슨, 엘리자베스 제퍼슨
정인 : 마리아 코스웨이(Maria Cosway)
정인 : 샐리 헤밍스(Sally Hemings, 1771년 ~ ?), 부인 마사 웨일스 스켈턴 제퍼슨의 이복여동생[87]
자녀(?) : 해리엇 헤밍스, 우드슨 헤밍스, 비벌리 헤밍스, 메디슨 헤밍스[88], 이스턴 헤밍스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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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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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프랭클린의 초상화, 1776년
벤저민 프랭클린이 그려져 있는 미국의 100달러 지폐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년 1월 17일 ~ 1790년 4월 17일)은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중 한 명이자 미국의 초대 정치인 중 한 명이다. 그는 특별한 공식적 지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군(軍)과의 동맹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해, 미국 독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계몽사상가 중 한 명으로서, 유럽의 과학자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피뢰침, 다초점 렌즈 등을 발명하였다.

달러화 인물 중 대통령이 아닌 인물은 알렉산더 해밀턴(10달러)과, 벤저민 프랭클린(100달러) 두 명뿐이다.



[편집] 전기

[편집] 조상
대장장이이자 농부인 토마스 프랭클린과 제인 화이트의 아들이자, 프랭클린의 아버지인 조시아 프랭클린은 1657년 12월 23일 영국의 노샘프턴셔 주 엑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아비아 폴저는 제분업자이자 교사인 피터 폴저와 전에 계약 하인 (Indentured servant)이었던 메리 모릴의 딸로서 1667년 8월 15일 메사추세츠 주 난터켓에서 태어났다. 폴저의 자손 J.A. 폴저는 19세기에 폴저스 커피를 설립했다.

조시아 프랭클랜은 2명의 부인과 함께 17명의 자식이 있었다. 그는 엑튼에서 대략 1677년 그의 첫번째 부인, 앤 차일드와 결혼했고 1683년 보스톤에 그녀와 함께 이주했다;그들은 이주하기 전에 3명의 아이가 있었고 이주 후 4명을 더 갖는다. 그녀의 죽음 후, 조시아는 사무엘 윌러드의 주례로 올드 사우스 미팅 하우스 (Old South Meeting House)에서 1689년 7월 9일 아비아 폴저와 결혼했다. 그들의 8번째 아이인 벤자민은 조시아 프랭클린의 15번째 아이이자 10번째 막내 아들이었다.


벤자민 프랭클린 백과사전 정보



☞ 출처: 프랭클린 플래너의 유래




프랭클린 플래너라고 할 때 프랭클린이라는 이름은 미국의 역사적 인물인 벤저민 프랭클린으로부터 온 것이다. 벤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18세기 미국 독립전쟁 시기에 활약한 정치가이자 과학자로서 미국 실용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출판 인쇄업자로서 성공하였고, 피뢰침의 발명, 번개의 방전 현상의 증명 등 과학 분야를 비롯하여 고등 교육 기관의 설립 등의 문화사업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그의 자서전도 전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프랭클린은 자신의 자서전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50년 이상을 나의 수첩에 13가지 덕목을 항상 기록해 왔다. 그리고 이 항목들을 실행했는가, 하지 못했는가를 체크했다. 게다가 1주일마다 13가지 덕목 중 한가지를 집중적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 내가 항상 행복한 인생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이 수첩 덕분이었다. 후손들에게도 알려주고 싶다.'

현 프랭클린 코비사의 공동설립자인 하이럼 스미스가 시간관리 수첩을 개발하고 이것을 프랭클린 데이 플래너라고 이름붙인 동기가 바로 이 프랭클린의 수첩의 현대판이라는 취지였다.


참고로 벤자민 프랭클린이 평생을 두고 인생의 지침으로 삼았던 13가지 덕목은 다음과 같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13가지 덕목

벤자민 프랭클린은 50년 이상을 자신의 수첩에 13가지 덕목을 항상 기록해 왔다. 그리고 자신이 그 항목을 실행했는가, 하지 못했는가를 체크했다. 게다가 1주일마다 13가지 덕목 중 한가지를 집중적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후에 그는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절 제 폭음 폭식을 삼간다.
침 묵 타인 또는 나에게 유익한 일 이외에는 말하지 않는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규 율 모든 물건은 위치를 정해 놓고, 일도 시간을 정해 놓고 진행 한다.
결 단 해야 할 일은 실행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결심한 일은 꼭 실행한다.
절 약 타인과 자신에게 유익한 일을 모색하고 낭비하지 않는다.
근 면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는다. 언제나 유익한 일에 힘을 쏟는다. 불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성 실 타인에게 폐가 되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정 의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중 용 생활의 균형을 지키고 화내지 않으며, 타인에게 관용을 베푼다.
청 결 몸과 의복, 주변을 불결하게 하지 않는다.
평 정 하찮은 일, 피하고 싶은 일이 생겨도 평정을 잃지 않는다.
순 결 타인의 신뢰와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행동은 피한다.
겸 손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본받는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헌법안 지지연설


필라델피아 협의회에서의 연설 (1787년 9월 17일)

의장님, 저의 생각을 말쓰드리자면, 이 헌법안을 지금은 전적으로 찬성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이에 찬성하지 않겠다고 확산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래 살다보니, 중대한 사안에서조차 저의 생각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사태의 내박을 보다 상세하게 알게 되고 생각을 더 깊이 해보면, 제가 옳다고 믿었던 일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이를 먹으면서 저의 판단을 스스럼없이 비평적으로 돌이켜보게 되고, 다른 분의 판단을 더욱 존중하게 되었습니다. 종교의 대부분의 종파가 그렇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이 진실을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생각의 차이가 나는 그 만큼 잘못되었다는 것이지요. 영국 개신교도인 스틸리가 교황으로의 봉헌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카톨릭교회와 개신교 교회가 각자 교리의 확실성을 믿음에 있어 유일한 차이는 전자가 불가류성의 교회임에 반하여 영구개신교는 결코 잘못하는 일 없다는 점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많은 개인들도 자신의 불가류성이 그들이 속해있는 종파의 불가류성 만큼이나 대단한 것이라고 믿고 있지요. 언니와 사소한 말다툼을 하던 프랑스의 한 여인은 말했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항상 옳은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말이예요.' 자신의 불가유성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사람은 적지요.

이런 맥락에서, 의장님, 저는 자가당착적으로 이 헌법안의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찬성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연방정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상적인 정부의 형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잘만 운영하면 국민에게 축복이 될 수 있는 정부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서 이 연방정부는 그 연륜이 쌓이면 운용의 묘를 터득할 가능성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다만 국민이 너무 부패하고 타락하여 달리 어찌할 도리없이 전제주의 정권이 필요할 지경에 이르면, 과거의 다른 정권들처럼 이 연방정부도 전제주의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보다 더 훌륭한 헌법을 제정할 수 있는 별도의 제헌회의를 우리가 과연 개최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 왜냐하면 대중의 힘을 모으기 위해 사람을 모으면 자연히 그들의 편견, 야심, 편협한 지역의 이해득실, 이기적 동기와 생각도 함께 모으는 결과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모임에서 완벽한 헌법이 제정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이유로 여기에 짜여진 정부의 틀이 이처럼 완벽에 가까울 수 있는가하고 저는 오히려 놀랍기만 합니다. 우리의 적들은 바벨탑을 지으려다 망했던 자들처럼 우리의 모임도 낭패를 보리라고 굳게 믿으며 망조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각 주가 분열되고 서로 반목하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어 오직 서로를 죽이기 위해 다시 만날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지만, 결국 우리의 연방체제에 놀라고 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의장님, 저는 이 헌법안에 찬성합니다. 왜냐하면 이보다 더 좋은 헌법을 기대할 수 없고, 이 헌법안이 최고가 아니라는 의심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헌법에서 잘못된 점들에 대해 품었던 비판적 견해는 공동의 선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하겠습니다. 저는 저의 견해를 일언반구도 국외에 나가서 누설한 일이 없습니다. 비공개리에 진행된 이 모임에서 떠오른 생각들은 이 회의실안에서 비밀로 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 모두가 대의원들에게 돌아가서 각자의 의견만을 얘기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반대파를 만들기로 나선다면, 이 헌법이 널리 수용되는 것을 저지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진정한 또는 최소한 표면상의 만장일치에서 생기는 좋은 효과와 큰 힘을 잃게 됩니다. 여러 외국과의 관계에서뿐만이 아니라 우리자신을 위한 효력이자 힘입니다. 국민을 위하여 행복을 마련하고 이를 보장해 줌에 있어서 한 정부의 효율성과 그 힘의 뒷부분은 민의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바라고 있습니다. 국민의 한 사람인 저희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후손을 위하여 우리의 여향이 미치는 한, 이 헌법을 지지함에 있어서 충심으로 만장일치를 이루어 함께 행동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이 헌법이 올바르게 운용되도록 앞으로 우리의 미래에 대한 생각과 노력이 잘 관리되어야 하겠다. 제 뜻을 다시 요약하자면, 아직도 이 헌법안에 반대하시는 모든 참가자들은 이 자리에서 저와함께 자신의 불가유성을 의심해 보시길 바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만장일치를 공표하는 의미에서 이 문서에 서명을 하시길 바랍니다.
 


이 연설의 역사적 의의


미국의 국회는 하원과 상원 양원체제로 되어있다. 하원의원은 각 주에서 인구비례로 뽑는 반면에, 상원의원은 각 주가 동등하게 한 주에서 2명만을 선출한다. 그 만큼 추천받아 당선되기가 어렵지만, 일단 상원의원이 되면 집행력과 영향력은 엄청 세다. 캘리포니아 주의 인구의 50분의 1인 와이오밍 주의 상원의원 투표자는 그 전국적인 참정권 비중이 캘리포니아에 비해 50배나 높게 된다. 그 만큼 그렇게 선택된 상원의원은 출신주를 대표하며 무거운 책임감으로 국정에 관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1787년 채택된 미헌법에 의한 것이다.

1787년, 헌법제정에 참여했던 12개주(미국독립선언 총 13개주 중 로드 아일랜드 주 불참) 가운데서 비교적 작은 뉴저지 주가 선동하여 미국식 지역 등권주의를 주창했다. 모든 주가 크기나 인구에 상관없이 동등한 참정, 사법 및 행정집행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버지니아 등 큰 주들은 반발했다. 두 그룹이 격론을 벌인 끝에 이른바 역사적 타협이 이루어 지게 된다. 큰 주들은 인구비례로 대표자를 뽑는 하원에서, 작은 주들은 크기에 관계없이 동등하게 참여하는 상원에서 각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면서, 미국독립선언 12년만에 참가자 만장일치로 헌법이 공표되었다.

그 때, 82세의 프랭클린이 건강악화로 제임스 윌슨 변호사에게 대신 읽게한 이 연설은 반대자들을 무마하고 설득해서 미헌법제정을 만장일치로 가져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정치에서 원칙도 중요하지만 운용의 중요함을 간파하고, 굳은 소신과 독선의 함정을 경계하고 바른 자기 비평과 자기반성이 정치가에게 얼마나 중요한 지를 관록있게 부드러운 비유와 달래는 듯한 표현들로 논리정연하게 말하고 있다.

현명한 원로 정치가의 뛰어난 관용과 실용주의가 돋보이는 연설이다. 국민을 위한 실용주의 정치...정치가도 그저 국민의 한 부분이라는 말, 의역해서 정치가도 국민의 한 사람일뿐이라는 말을 벤자민 프랭클린이 벌써 220여년전에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