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의 한자로보는 세상>
안 하면 안 하고, 하면 끝까지 간다. (一不做 二不休)
신념 없는 철학만으로 성과를 얻을 수는 없다.
漢子(한자)는 뜻글자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게 매력인 동시에 난제다. 「사람 인(人)」자는 「사람과 사람」이 의지한 형상이라고들 한다. 사람과 사람이 아니라, 「사람과 영혼」이 서로 기대고 있는 꼴이라고 풀이해도 오답은 아닐 것이다.
「忽見祥暾映槿域 還邦馳逐群雄(홀현상돈영근역 환방치축군웅)」을 직역하면, 「무궁화가 핀 곳에 상서로운 기운이 홀연히 비쳤다. 나라로 돌아와 뭇 영웅들과 달리다」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작자와 글의 주인공, 시대상황 등을 종합해야 비로소 무릎을 칠 수 있다. 빨치산 토벌대장 車一赫(차일혁) 경무관의 생애 중 특정 시기를 읊은 漢詩(한시)라는 사실을 모르면 이해 난망일 수밖에 없다.
「一不做 二不休(일부주 이불휴)」첫째, 하지 말라. 둘째, 했으면 멈추지 말라는 얘기다. 「안 하면 안 하고, 한 번 하면 끝까지 한다.」는 풀이다. 「一不做 二不休」는 여느 고사성어와 달리 익숙하지 않은 文句(문구)다. 이 고사의 배경은 「安史(안사)의 난」이다. 중국 唐나라 중기에 安祿山(안녹산)과 史思明(사사명) 등이 일으킨 반란 이후 널리 퍼진 말이다. 唐 왕조는 玄宗(현종) 때 국력이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한꺼풀만 벗겨 보면 사정은 달랐다. 국가를 지탱해온 시스템인 「律令制(율령제)」는 변질됐고, 均田制(균전제)와 租庸調(조용조) 稅制(세제)는 느슨해졌다. 왕조의 기반인 자립 소농민층이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혼란의 와중에 국왕 못지않은 실력을 키운 자가 安祿山이다. 그는 유주, 평로, 하동 절도사를 겸할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휘둘렀다. 왕 부럽지 않았다. 견제가 절실했다. 그래서 揚國忠(양국충)이 나섰다. 玄宗을 사로잡은 절세미녀 양귀비의 일가친척 출신 재상이다. 揚國忠은 「安祿山이 모반을 꾀하니 잡아들이라」고 玄宗을 부추겼다. 그러나 安祿山은 너무 커 있었다. 고분고분 꼬리를 내리긴 커녕 범양에서 20만 대군을 거병했다. 명분은 「간신 揚國忠 토벌」이었다. 安祿山 군대의 파워는 대단했다. 破竹之勢(파죽지세)로 수도 長安(장안)까지 쳐들어왔다. 피란했던 玄宗은 아들 숙종에게 왕위를 넘겼고 揚國忠은 피살됐으며 양귀비는 목을 매 죽었다. 安祿山도 최후의 승자는 되지 못했다. 아들 경서가 아버지 安祿山을 암살한 것이다. 이후 안경서는 사사명에게, 사사명은 자기 아들 조의 손에 죽고 말았다. 사조의 또한 唐의 구조요청을 받은 위구르軍에 의해 목숨을 다 했다.
9년에 걸친 安史의 난에서 조연도 못되는 단역이 만들어낸 회한의 금언이 「一不做 二不休」다. 작자는 張光晟(장광성)으로. 唐 조정의 중앙관리였다. 시골로 좌천되자 딴생각을 품었다. 마침 安史의 난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위기는 곧 기회」라는 순간 포착으로 일신의 도약을 꿈꿨다. 개국공신 권좌를 그리며 반란군 참모를 자청했다. 처음엔 뜻대로 되는 듯 했다.
張光晟의 내밀한 고급정보 덕에 叛軍은 승승장구했다. 叛軍의 기세는 唐의 조직력에 의해 차츰 허물어져갔다. 張光晟이 다시 흔들렸다. 이번엔 叛軍을 버리고 정부軍에 투항했다. 난이 평정되자 張光晟은 안도했다. 틀림없는 정부군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끼 사냥시즌은 이미 끝난 뒤였다. 사냥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펄펄 끓는 솥뿐이었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張光晟이 한탄했다. 『一不做 二不休』라고. 이어 해설도 덧붙였다. 『第一莫作 第二莫休(제일막작 제이막휴)』라고. 晩時之歎(만시지탄)이었다. 「疑人莫用 用人勿疑(의인막용 용인물의)」, 즉 「의심스러우면 쓰지 말고, 썼다면 의심하지 말라」는 人事, 채용의 진리와도 일맥상통하는 후회다. 「용서했으면 때리지 말라. 때렸으면 용서하지 말라」고도 할 수 있겠다.
「一不做 二不休」의 군상들
「一不做 二不休」해서 목적을 이룬 경우는 주변에 널려 있다. 고 盧武鉉 대통령과 李海瓚 柳時敏 등 열린우리당 시절 사람들이 그들이다. 金泳三 前 대통령도 우회로를 택했을지언정 一不做 二不休해 청와대를 차지했다. 金大中 前 대통령도 1970년대 이래 언제나 一不做 二不休였다. 가치 판단을 유보한 채 성패 여부만 보면 위화도 회군, 5.16 쿠데타, 12.12 쿠데타도 一不做 후 二不休 과정을 거쳐 목표를 달성했다.
거꾸로, 一不做 二不休하지 못해 날개를 꺾인 이들이 적잖다.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될지 몰라 두 다리를 걸쳐야 했던 재벌, 역시 같은 이유로 이리 저리 메뚜기처럼 소속을 옮기다 철새로 낙인 찍혀 재기 난망인 정치인도 한 둘이 아니다. 학식은 둘째가라면 서럽고 친화력과 재력까지 탁월한 어느 인사는 주변에 「형」, 「동생」이 수만 명이다. 그런데 이 형님과 아우들 대부분도 그 인사에게 一不做 二不休하지 않는다.
「一不做 二不休」권하는 사회
대개 양손에 하나씩 쌍알을 쥐고 해당 인사의 움직임을 살핀다. 리더도, 추종자 무리도 이 모양이니 산이 그에게 頂上을 허락할 리 만무하다. 뜻을 품고 말 잔등이에 올랐다면 중도에 갈아타지 말아야 한다.
한국인은 一不做 二不休 마인드가 강하다. 一不做 二不休는 대한민국 특유의 「의리」와 자연스럽게도 접목된다. 「사나이다움」을 요구하는 견고한 사회적 가치체계가 「맨 콤플렉스」라는 강박관념을 불러오는 수가 많다. 一不做 二不休 쪽으로 기우는 남자는 대부분 30代 중반~40代 후반이다. 괜히 한국 40代 남자 사망률이 세계 1위인 게 아니다. 이들에게 一不做 二不休란 헤어나고픈 멍에에 다름 아니다. 「남자란 때가 되면 가정을 갖고 책임을 지고 그래야 어른」이라는 속박적 의미의 사회적 틀에 대해 과감히 다시 생각하는 남자들에게 一不做 二不休는 오류일 수 있다. 그래도 우리는 「一不做 二不休 권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친구와 형제, 고향, 인간적인 면, 무책임과 무질서, 의리와 우정, 公보다 私, 법보다 인연, 나보다 우리, 이성보다 감정 등이 우월한 토양이다. 따라서 공정성이나 도덕심은 먹혀들 틈이 없다. 책임감과 질서 대신 무사안일을 선호하게 돼있다.
一不做 二不休는 신념이라야 한다. 가능성만 믿고 一不做 二不休하면 이는 신념이 아니라 철학일 뿐이다. 신념 없는 철학만으로 성과를 얻을 수는 없다. 시험 삼아 一不做 二不休를 시도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뼈아픈 경험으로 귀결될 개연성이 짙다. 一不做 하기 전에 꼼꼼히 따져야 한다. 의심 없는 一不做는 죽은 一不做다. 무엇이 진리인지 알고 싶지도 않은 상태로 一不做한다면, 二不休는 있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