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영이 없는 인간들 (Spiritless Humans)

영원오늘 2019. 10. 12. 08:46

영이 없는 인간들 (Spiritless Humans)

2009년 4월 27일

 

공허한 사람들(Empty people), 허수아비 사람들(Puppet people), 등신대들(Cardboard cutouts/等身大), 드론들(Drones), 생체 포털들(Organic Portals), 배경 인물들(Background characters). 왜 이런 용어들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공식적으로는 하나의 명칭이 없는 동일한 곤혹스런 현상을 주목했던 사람들 각자가 독자적으로 만들어 낸 용어들이기 때문인데, 어떤 사람들은 내면에 매우 중요한 뭔가가 누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반드시 일반인들보다 지능이나 사회적인 성취도 혹은 신체적 건강이 열등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의식에는 보다 상위의 요소들을 있다는 아무런 조짐이 없다.

지난 수년에 걸쳐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독자들로부터 이메일을 받게 되었다. 그 독자들은 어떤 사람들이 이상하리만큼 일 차원 적이며 내면이 비어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이는 알아채기 쉬운 관찰은 아니지만, 자연스런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특히 환경적, 유전적, 그리고 가장 중요한 형이상학적 요소들로 인한 각 개인의 기능적인 차이점들은 도외시 되고, 모든 사람들이 모든 방면에서 전적으로 평등하다는 비현실적이지만 정치적인 논리로 심각하게 세뇌되어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관찰의 배경

내게 있어서 공허한 사람들에 대한 최초의 관념은 정신의학적으로 APD또는 ‘반사회적 인격장애 (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 로 알려져 있는 공포증 환자와 정신병자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이후인 1999년도부터 시작되었다. 이 주제에 대한 나의 관심은 모든 반사회적 인격장애자의 특성들을 나중에 내게 가르쳐 준 어떤 사람으로부터 수년 간 고통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무정함, 무자비함 등 단지 서술적인 표현에 불과한 말들이 문자 그대로 진실임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나는 그 사람의 눈 뒤에 있는 공허함과 그 사람에게서 파악된 행동들의 근원인 극히 얕은 의식의 본질을 주목하게 되었다.

나는 이와 동일한 본질이 표면상으로는 반사회적이 아니지만 가슴의 결여가 잘 적응된 사회적인 겉모습에 의해 가려져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정신의학에서 APD 로 진단하는 것은 단지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그 혐의가 인정되는 보다 극단적이고, 범죄적이고, 엉성하게 드러난 징후들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모집단에서 공허한 사람들에 존재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정확하게 어떤 것이 그들에게는 결여되어 있다는 것인가? 그 해답은 그들의 일반적인 행동들과 의식의 질적인 측면들을 보면 분명해진다.

 

행동 및 정신적인 특성들

그들의 행동은 입에 발린 말, 피상적, 자기중심적, 나르시시즘적(narcissistic, 自己愛的), 세속적, 약탈적 그리고 물질적인 성향을 띤다. 때로는 이러한 특성들이 세련된 사회적 겉모습으로 위장되어 있지만, 분별력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가식적인 이면을 꿰뚫어 볼 수 있다. 그들은 개성과 독립적인 사고가 결여되어 있으며 집단적 사고방식(군중심리) 에 심하게 편향되어 있다. 그들은 오감의 물질적인 영역을 넘어선 그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하며, 사회적 이미지를 향상시키기 위한 화려한 액세서리들을 제외하고는 그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은 관심이 없다. 또한 그들은 공감, 자기성찰 그리고 자발적인 희생을 전적으로 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면전에서는 사교적인 조작을 위한 목적으로 근심을 보이는 화려한 쑈, 비통 또는 이타주의를 보여줄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동정심을 이끌어 내는 악어의 눈물을 흘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죄책감을 뒤집어 씌우고 난 후 뭔가 좋은 일을 하여 인기를 편취한다.

그들의 의식을 심리적으로 스캐닝 해 보면 어떤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고도로 발달한 지성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들의 본질에는 어떤 단순함, 무미건조함, 그리고 지루함이 존재한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들의 의식 에너지는 견고하고, 번뜩이며, 명확하고, 집중적이지 못하고 산만하고, 따분하고, 일시적이고, 무정형적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의 마음은 진짜 성 이라기 보다는 모래 성과 같다. 그들의 육체를 조종하고 있는 동물적이면서도 기초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들은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자각적인 의식이 아닌, 단지 동식물들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지각(awareness)와 자각(self-awareness)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영 : 누락된 구성 요소

누락된 요인으로는 자각, 의지, 초월적인 이상에 대해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 이는 단순히 뇌의 결여된 구성 요소들, 결함 있는 유전자들 또는 열악한 양육 환경과 같은 육체적인 특성들을 넘어선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생물학적 기계의 하드웨어와 프로그래밍의 결함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면, 여기서 문제는 그 기계를 운영하는 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직관적이거나 통찰력 있는 인지는 의식에서 형이상학적인 요소와 관련된 그 무엇을 끄집어 낸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 부재된 이 보다 높은 상위 요소를 무엇으로 부를까? 통상적으로 그것을 영혼(soul) 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과거에 너무 많은 혼란을 야기했다. 예를 들어, ‘영혼이 없다(soulless)’ 에 대한 올바른 정의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적인 독자들은 그것이 실제로는 ‘개체화 된 의식이 결여되어 있음’을 의미하고 있음에도 ‘의식이 전혀 없다’ 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아니다, 그들도 살아있는 덕분에 어떤 종류의 혼(soul) 에너지를 가지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 혼은 진정한 감각과 자각의 더 높은 불꽃으로 고양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이 더 높은 불꽃을 ‘영(spirit)’이라고 부르며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자 한다: 영은 개체화 된 의식의 핵심이며, 일생을 통해 경험과 영적인 지혜를 축적하고, 육체적인 죽음 후에도 생존하여 그것의 잠재력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성장을 계속할 수 있도록 윤회를 통해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있는 한 존재의 진정한 자신을 대표하는 영속적인 측면이다. 그것은 신성한 신적인 불꽃, 자유의지의 터전, 인간 존재의 중심에 있는 창조주의 홀로그램 단편, 스스로 자기관찰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내면의 의식 관찰자이다.

모든 인간이 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각, 개성, 지혜, 공감, 창조적인 지성이나 양심을 갖지 못한다. 이 가설을 확인해 주는 그 무엇은, 아래에서 계속 논의될 것이다시피, 그들의 삶에서 운명, 동시성, 상징적인 꿈, 영적인 교훈, 혼의 성장, 그리고 카르마의 전적인 부재를 관찰할 수 있다. 영 만이 그러한 것들을 통해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죽음 후에도 생존하고 윤회하는 영원한 그것이 그들에게 없다면 사망 후에는 이렇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영 없이는, 그들은 출생 직전 지각(awareness) 이 형성된 일시적인 존재들이며 죽자 마자 바로 해체된다. 그리고 그게 그렇다면, 영적인 인생 교훈은 어떤 목적에도 기여하지 못하며, 과거 삶의 카르마는 존재하지 않으며, 샤프롱 (chaperone ; 젊은 여성을 보살펴 주는 나이든 여성) 역할을 하는 상위 자아가 없으며, 현재 필사자인 그들의 존재를 넘어 선 소용없는 그 어떤 것에도 진정한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야심 가운데 특별히 유물론적이고 세속적이며 속물적인 인간들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또한 확인된 관찰이다.

 

기타 구성 요소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다양한 구성요소들과 그것들이 어떻게 결합하여 한 존재의 전체를 형성하는지에 대해 이해함으로써, 영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의 수많은 차이점들과 유사점들을 파악할 수 있다.1

영(spirit) 을 제외한다면, 나머지 구성 요소들은 육체(body) 와 혼(soul) 이다. 혼은 육체와 영 사이의 비 물질적인 에너지 인터페이스이다. 오컬티스트들은 혼을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로 나눈다. 앞서 언급했던 ‘공허한’ 사람들은 육체와 혼을 가지고 있지만 영은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어떤 종류의 의식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환생을 통해 연속성을 유지하는 영속적인 핵심은 없다.

혼은 에테르와 아스트랄의 두 가지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에테르 요소는 물리적인 육체를 엔트로피적인 해체 로부터 보호하는 양자 바이어스 장 (quantum biasing field) 이다. 또는 더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신체가 부패되지 않도록 하는 생명력 에너지이다. 아스트랄 요소는 보다 추상적이고 무형적이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경험된 감정들과 정념들이 머무르는 곳으로서 기능을 한다. 감정들은 단순한 뇌의 화학 반응이 아닐 뿐만 아니라 마음 속의 추상적인 생각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중간 지대의 그 어디엔가 있는 생생한 에너지들이며, 완전히 육체적인 것과 완전히 형이상학적인 것 사이의 그 완충 지대가 혼의 아스트랄 요소다.

 

육체와 에고(ego, 自我)

육체는 우리가 물리적 환경과 상호 작용하는 생물학적 도구이다. 육체에는 고유의 유전적인 배열들, 생물학적 드라이브들과 본능들이 있으며, 사회 프로그래밍을 통해 행동 알고리즘이 기록된다. 이러한 결정된 영향들은 기본적으로 항공기를 운행하는 오토 파일럿 컴퓨터처럼 사람이 인공 지능을 생성하게끔 집결된다.

이로써 이 인공 지능은 ‘에고’ 라 불리운다. 그것은 근본적인 목적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육체와 사회적 환경에 대한 행위를 최적화하여 육체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외부 조건화는 그 반응이 비롯된 환경에서 생존을 달성하기 위해 에고를 프로그래밍 한다.

그러나 에고는 그 자체로서는 진정한 의식이 없다. 그것은 한 생명의 정체성을 시뮬레이션 하는 신경 (그리고 에테르의 대리로) 하드웨어로 작동하는 컴퓨터에 불과하다. 그것의 주요 장점은 단지 컴퓨터에 불과하기 때문에, 깊이 있고 의식적으로 반영하기 보다는 기계적으로 계산하고 상황에 따라 반응하며, 따라서 외부 상황들에 대해 훨씬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에고는 영을 위해 다른 인간들과의 상호 작용을 자동화하고 출생 시 프로그래밍 된 현지 환경에 적합한 정체성의 가면을 제공하는 소프트웨어 장치로서 기능한다. 심즈 (the Sims)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지시하지 않을 때는 자신의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플레이어의 아바타와 다소 유사하게 사람처럼 행동한다.

문제는 에고가 전적으로 과거의 산물이며, 영은 선형적인 시간과 전적으로 무관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전자는 완전히 결정론적이고, 후자는 완전히 비결정론적이다. 전자는 물질의 발현적 속성이며, 후자는 의식의 영속적인 결정체이다. 이 둘은 종종 정반대의 충동을 가지고 있는데, 전자는 물질적으로, 후자는 영성 쪽으로 끌어 당긴다. 하위 자아 라고도 알려진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은 그 둘의 혼합체인데, 즉 운전에 몰두하는 운전자가 자동차를 그의 몸의 확장으로 여기 듯 에고의 가면을 통과하여 빛나며 그것과 동일시 하는 영의 부분이다.2

 

혼에 미치는 육체적 혹은 영적 영향들

혼은 육체와 영 사이에 거주하면서 그 두가지를 중재하며, 둘 모두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혼은 영과 신체의 자극에 따라 그 조직과 기능을 수행한다. 예를 들어, 신체를 통해 행복감을 유발하는 화학 약물과 영적 기쁨의 고양을 불러 일으키는 영성이 아스트랄에 미치는 영향이 비록 동일하지 않더라도 아스트랄체는 두가지 모두에 대해 반응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테르체는 물리적인 육체에 약간의 상처가 있거나 그 영향이 에테르 수준까지 내려 와서 파급되는 아스트랄체의 막힘이나 이상으로 인해 그 구조가 변경될 수 있다. 육체와 영에 의해 어떤 영향들이 혼에 가해지면, 마치 차를 휘젓고 난 후에도 찻잔 속에서 계속 순환되는 차 같이, 그 영향들은 혼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에고는 신경 및 에테르적인 하드웨어 둘 모두에서 작동한다고 내가 말했던 이유다. 에고는 육체에서 유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건화의 모멘텀을 에테르로 전달한다.3

 

영이 결여된 결과들

먼저 염두에 둘 것은 누군가가 육체와 에고와 혼을 지녔지만 영이 결여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숙고해 보라. 무엇보다 먼저, 그들의 기질은 유전 및 환경과 같은 물질적 영향의 결과가 전부일 것이다. 그들의 표면적인 지능이 머무르는 곳은 에고일 것이다. 그리고 영의 평형추가 없다면, 에고가 왕으로서 통치할 것이다. 따라서 에고의 기능에 따라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생존에만 전적으로 몰두할 것이다.

영적인 욕구로 인해 잠에서 깨어나는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종종 재정적, 사회적 또는 이기적인 것과 무관하고 다윈의 진화론에 따른 기대에도 어긋나는, 오직 영적인 목적만을 위해 기꺼이 봉사 한다는 점을 주목하라. 영이 없는 사람들은 그러한 욕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물리적 세계에서의 생존을 위해 엄밀히 최적화 된다. 양심, 공감이나 에고와 영 사이의 내면적인 전투가 없다면, 타인에게 치르는 대가는 무시한 채 세상에서 더 빠르고 쉽게 성공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인 차이점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죽음에 있어 영이 있는 자와 없는 자에게 각각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숙고해 보라.

영과 혼은 서로 중첩되어 함께 육체를 떠나게 된다. 잠시 후 혼의 에테르적 요소가 분해되어, 아스트랄체 내에 중첩된 영만 남게 된다. 아스트랄체 또한 그때 분해된다. 해체 혹은 혼의 버려짐을 의미하는 에테르와 아스트랄체의 분해는 비전(秘傳) 기독교에서 둘째 사망4 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된 영은 환생을 앞두고 사후 세계로 나아 가게 된다.

윤회는 영이 하나의 새로운 혼을 형성하고 하나의 새로운 육체를 형성하는 것을 포함한다. 일련의 환생 과정에서 이전의 생에서 얻은 재능들, 기질들 그리고 부조화들은 새로운 육화에 영향을 미친다.

영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삶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태아의 육체가 자궁에서 태어날 때 해변의 모래가 성 모양을 이루는 것처럼 혼이 처음 형성되어 육체에 합류하게 된다. 이 조합은 가장 기초적인 지각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런 사람은 영이 없기 때문에 태어난 후에는 유전과 환경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린다. 영의 평형추가 없으면 생물학적인 동인들과 사회적 프로그래밍이 그들 인생에서 주요한 충동들이 된다.

육체가 사망하게 되면 그들의 혼은 육체로부터 탈출하며, 어쩌면 잔존하는 에고의 흔적을 머금고 있을지도 모를 그들의 혼은 얼마 후 분해되어 원래 형성된 에너지의 호수로 재흡수 된다. 그들의 어떠한 정체성도 존속하지 못한다. 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현생 만이 유일하다. 그들은 올 때 형성되었다가 떠날 때는 해체된다. 그들에게 개체적인 의식의 핵심이 결여되었다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영이 있는 어떤 사람이라면 자신의 육화의 연속성 덕분에 가지는 모든 것이 영이 없는 어떤 사람의 인생에서는 누락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영이 없는 사람들은 인생 교훈이나 영적인 학습 경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살아있을 때 얻은 것이 무엇이든 죽고 나면 사라질 바에야 그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영이 없는 사람들은 영적 교훈을 배울 수 없으며, 삶의 시련에서 영적인 보람을 얻을 수 없으며, 살아있을 때 얻은 그 무엇을 연속되는 육화를 통해 전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겸손, 공감, 연민, 이해 또는 용서의 교훈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인생의 영적 성숙을 통해 변화하기 보다는, 조건화를 통해 삶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방향으로만 변화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영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방식의 잘못된 점을 이해하고 겸손하게 성장할 수 있지만, 영이 없는 사람은 단순히 다음에는 같은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한다.

카르마는 영이 없는 사람들의 삶에서 누락되어 있는 또 하나의 형이상학적 요소이다. 카르마에 관해서는 많은 그릇된 견해들이 있기에, 그것의 부재가 영이 없는 사람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기에 앞서 그것에 대한 나의 이해부터 먼저 설명하겠다.

카르마 (부정적인 유형) 는 자신 스스로의 혹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했을 때 얻게 되는 단순히 영적인 빚 혹은 불균형이다. 당신의 자유 의지를 위반하는 일은 당신이 영적으로 냉담한 상태에서 에고와 동일시 하고 충동에 따라 행동할 때와 비슷하게, 무지한 상태에서 선택을 할 때 발생하게 된다.

자유 의지에 대한 위반을 하게 되면, 영과 관련된 의식의 보다 높은 측면에서는 그 실수를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비록 에고와 관련된 낮은 측면에서 이를 무시 하려고 하더라도 그것을 교정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러면 카르마 적인 불균형은 이번 생 에서든 다음 생 에서든 그러한 무지를 바로잡을 수 있는 교훈을 가르치는 경험으로 이끌게 된다. 배우게 된 교훈은 보편적이며, 그것을 야기했던 원래의 선택을 곱씹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단지 그 교훈에 대한 이해일 뿐이다. 카르마 적인 경험은 그 자체로서 운명 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교훈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때로는 반드시 경험을 통한 어려운 방법으로 배우지 않더라도 예방적인 이해와 용서를 통해서도 카르마가 조정될 수 있다.

그러나 영이 없이는 진정한 자유 의지가 없으며 배울 수 있는 진정한 교훈도 없다. 그러므로 영이 없는 자들은 카르마를 가지지 않는 대신에 전적으로 우연의 법칙과 정글의 법칙에 따라 산다. 영이 있는 개인은 카르마적인 핸디캡들을 갖고 태어날 수도 있는 반면, 영이 없는 사람들로서는 이러한 핸디캡들이 순전히 우연이나 유전의 문제이며 보다 높은 형이상학적인 목적을 수행하지 못한다. 그들의 죽음의 타이밍과 방식과도 동일한데, 영이 있는 사람들은 육화 이전에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포함한 삶의 계획들을 느슨하게 나마 계획할 수도 있는 반면, 영이 없는 사람들은 영이 있는 어떤 사람의 육화 전 대본에 그들의 죽음이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 한 목적이나 의미가 없는 무작위적인 상황들에 의해 죽는다.

다른 누락된 구성 요소들은 의미 있는 상징적인 꿈들, 동시성들, 보다 높은 직관적인 지침 및 그것들의 운명의 개인적 도움이 포함된다. 영이 없는 사람들은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거나 필요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경험하지 않는다. 이것은 영의 역할을 이해하면 명백한 것이 틀림없지만, 명확성을 기하기 위해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의미 있는 꿈들은 주로 한 개인에게 교정해야 할 영적 불균형을 경고하는 역할을 하지만, 영이 없는 개인에게는 그러한 메시지가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그러한 메시지들을 보낼만한 보다 높은 존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개인의 영속적인 핵심이 없다면, 선형적인 과거에 있는 자기 자신의 연장선을 돕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가는 영의 완전한 미래의 모습인 ‘상위자아’ 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상위자아가 없다면, 인생에서 어떤 자극과 보호를 제공하는 내면의 직관적인 지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하여, 영이 있는 사람은 기이한 동시성들과 불의의 죽음으로부터 그들을 구하기 위한 현실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을 경험하는 반면, 그러한 지휘와 보호가 결여된 영이 없는 사람은 우연에 의해 비명횡사 할 것이다.

 

영이 있는 자와 영이 없는 자의 차크라 차이들

영이 있는 자와 영이 없는 자는 차크라에 있어서도 하나의 차이가 있다. 차크라는 혼과 육체를 연결시키고, 혼을 통해 영과 육체를 연결시키는 소용돌이 형 에너지 센터이다. 각 센터는 물리적인 육체의 주요 땀샘과 위치가 일치하며, 각기 다른 행동적 기능에 기여한다.

하위 차크라들은 육체적 본능, 성적 충동들, 기본 감성들, 개인적인 힘, 지적 활동과 같은 행동 양상들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들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영이 없는 자들은 보다 상위의 차크라들, 즉 심장, 크라운, 그리고 제3의 눈 차크라가 필요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오직 영에만 연결되어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연민, 공감, 영적 기쁨과 같은 더 높은 정서들의 센터인 심장 차크라는 영이 없는 사람에게는 누락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서들과 관련된 영이 없기 때문이다. 보다 직관적인 이해, 독창성과 창조성 그리고 객관적인 진리와의 연관성을 나타내는 크라운 차크라도 마찬가지로 누락되어 있다. 양 눈썹 사이에 위치한 제3의 눈 차크라는 물질적 영역을 넘어선 현상과 개념의 인식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며, 오감의 세계에 국한된 영이 없는 사람들은 그 또한 필요 없다.

결과적으로, 영이 있는 자와 영이 없는 자의 차이는 전자는 후자에게서 누락되어 있는 그 세가지의 보다 상위의5 것들인 심장, 크라운 그리고 제3의 눈 을 포함한 일곱 개의 차크라들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는 나아가서 직관적이거나 통찰력 있는 인식에 이바지 하는데, 영이 없는 사람들은 에테르 혹은 황금 진동 스펙트럼이 누락되어 전체 해상도가 낮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얼마나 생기가 있든지 간에 따분하고 무기력한 내면을 가지고 있다.

위의 모든 것은 하나의 단순한 상정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영이 결여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상위의 차크라들도 마찬가지로 결여되어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고찰해 본다면, 이 상정이 어떻게 이른바 ‘공허한’ 사람들에 대한 전반적인 관찰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영이 없는 인간들과 영적으로 잠 들어있는 사람들의 차이

여기서 영이 없는 인간들과 영적으로 잠 들어 있거나 미성숙한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해 할 것이다. 결국, 양자 모두 삶의 목표가 세속적이며 ‘메트릭스’ 의 환영에 철저히 사로 잡혔을 수 있다. 양자 모두 꿈 또는 동시성에 대한 인식이 없거나, 혹은 큰 공감을 표시하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적으로 자신의 에고와 외부의 부정적인 세력의 영향 아래에서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폭력적인 범죄와 대량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 모두가 영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그러한 비인간적인 행위들에 개입될 때 영의 영향을 받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이 결여되어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영적으로 잠 들어 있다.

영이 있긴 하지만 영적인 유아 혹은 영적으로 잠 들어있는 사람은 영적 잠재력이 여전히 잠복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래서 그들은 위에서 언급했던 영적 요인들과 역동성의 존재를 미약하게나마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들은 어리석은 선택에 의해 비롯된 카르마에 의한 빚으로 여전히 고통받을 수 있으며, 스스로 그것을 무시하더라도 인생의 영적 불균형을 경고하기 위해 나타나는 상징적인 꿈을 여전히 꿀 수 있으며, 스스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역경에 맞서 삶을 꾸려 나가는데 있어 동시성 적인 도움이 여전히 발생할 수 있다.

영이 없는 사람들은 그러한 잠재성이 완전하게 결여되어 있다. 그들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 이는 하나의 이론적인 선언이 아닌, 개선의 도움과 기회가 아무리 많아도 성장이나 진보의 흔적을 결코 보이지 않았던 그와 같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배운 고통스런 교훈이다. 그들은 실제적인 이해보다는 기껏 조건화와 이해타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영이 있는 자들은 그들의 영적 필요성들에 적합하게 산다. 그래서 그들의 영적 성숙도와 삶의 형태 사이에는 어떤 일치가 있다. 영적인 유아들은 기초적인 삶이 그들이 필요로 하는 전부이기 때문에 미숙한 삶들로 인도될 것이고, 더 이상의 것들은 그들이 다루기에는 과분 하거나 무의미 할 것이다. 한편 영이 없는 자들은 거지, 기업 경영자 또는 유명한 저자 등 어떤 인생을 살든 그들은 모두 마찬가지로 주어진 환경과 자신들의 교활성에 의해 이끌려 살게 된다. 영적 필요성들에 의한 제약이 없다면, 영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체계화 하는 영적인 제재들이나 교육과정들을 갖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공허한’ 사람들이 단순히 영적으로 잠들거나 유아가 아닌 이유인데, 왜냐하면 삶의 형태, 사회적 지위, 지적 능력 그리고 육체적인 외양과는 무관하게 눈 뒤에 그 동일한 무기력함을 공유하는 어떤 계층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신병자들,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들, 자기애적 인격장애자들

영의 결여와 관련된 보다 극단적인 증상들은 심리학에서 정신병적, 반사회적 혹은 자기애적 인격 장애로 알려져 있다. 이 조건에 부합되는 영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에고에 의해 잘못 인도되어 인질로 잡혀 있긴 하지만 재활 가능하다. 공감이 부족한 대신 억압되거나(suppressed) 전치된다(displaced). 이들은 진짜 정신병자들은 아니지만 성격 장애를 가진 영적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진짜 정신적 질환과 반사회적 질환은 그런 인물들의 핵심에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기 때문에 치유될 수 없다. 그들은 공감과 자책감이 모두 결여 되었으며, 이러한 자질들은 처음부터 결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복될 수 없다. 태생적으로 타고 난 불치의 정신질환은 심리학에서 기정 사실화 된 것이다. 그것은 두뇌의 통증과 두려움을 관할하는 영역의 이상에 기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게 그렇다면, 영의 균형 잡힌 영향력이 없이는 그와 같은 비정상적인 증상들은 앞으로 법조계와 의료계의 주목을 받게 될 듯 한 통제 불가능한 에고 프로그래밍의 오류를 야기 할 수 있다. 의료계에서 진단할 수 있는 것은 인구 전체적으로 보다 폭넓게 퍼져 있는 극단적이고 조잡한 징후들일 뿐이다. 적절하게 기능하는 에고를 가진 영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공감과 자책감의 결여를 보다 세련된 사회 프로그램으로 위장한 채로 지내는 편이 낫다.

 

왜 영이 없는가? 다른 사람들의 말

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의식에 보다 높은 구성 요소가 결여되어 있으며 그들은 무슨 목적으로 보다 큰 계획에 기여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이 무성하다. 나는 이 관찰을 최초로 한 사람은 아니므로 당신들이 사용 가능한 선택사항들에 가중치를 둘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이 말했던 것을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존 베인즈 (John Baines) 는 자신의 저서 ‘뛰어난 사람 (The Stellar Man)’ 에서 인간 종은 모든 동물 종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고유한 집단적 혼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했다 . 이 집단적 무의식은 인간들에게 군중정신, 군중심리 그리고 대세를 좇는 방향으로 영향을 끼쳐 비 개체화에 권력을 행사한다. 루퍼트 쉘드레이크 (Rupert Sheldrake) 는 이를 ‘인간형태발생령(the human morphogenetic field, 人間形態發生領)’ 이라고 불렀다. 그들 자신의 의식적인 개체성을 개발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하나의 정신적 고리의 연장선들 마냥 집단 무의식의 최면적인 영향을 추종하는 단순한 로봇들일 뿐이다. 비전(秘傳) 적인 훈련의 목표는, 무리에서 분리시키고서, 자기의 자유의지를 발전시켜서 그리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도 유사한 견해를 표명했다. 그의 초기 저서인 자유 철학 (Philosophy of Freedom) 은 이 문제를 다루었다. 슈타이너는 인간이 외부의 권위, 생물학적 본능 혹은 인간의 나머지 부분들과 공통된 동물적인 부분들에 복종하는 한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고 말했다. 자유는 각각의 선택에 수반되는 것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직관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선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유의 행위는 내적 성찰과 영적 통찰력이 진실된 이해의 바탕에서 행동하도록 요구한다. 슈타이너는 모든 사람이 지적인 자유의지의 선택을 하는데 필요한 수준의 내적 성찰을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개인적인 토론에서 슈타이너는 의견을 조금 더 덧붙였다:

슈타이너 박사 : 1 학년의 그 어린 소녀 L.K. 는 내면에 정말로 매우 잘못된 뭔가가 있음이 틀림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아이들이 인간의 형상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그들의 ‘가장 높은 나 (the highest I)’ 와 관련해서는 실제로는 인간들이 아닌데, 그 대신 그들은 인간 계층에 속하지 않는 존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1890 년대 이후 많은 사람들이 ‘나(I)’ 없이 태어났습니다. 즉, 그들은 환생하여 태어났던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연적인 악령들로 가득 찬 인간의 형상들입니다. 돌아 다니고 있는 꽤 많은 노인들이 실제로는 사람들이 아니라 단지 자연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단지 겉모습과 관련해서만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악령들을 위한 학교를 만들 수 없습니다.

교사 :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슈타이너 박사 : 우주적인 실수는 분명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지상의 존재로 오게 되는 인물 관계는 오랫동안 결정되어 왔습니다. 지상에 와서 육체와 연결되고 싶은 생각이 없거나 혹은 애당초 바로 떠나는 세대들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들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다른 존재들이 들여디디게 됩니다. 이는 요즘 상당히 흔한 현상인데, 그러한 인간들은 ‘나’ 없이 돌아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의 형상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 다니고 있어 우리가 알아 보지 못하는 그들은 자연의 영들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또한 영적인 모든 것과 관련해서 인간들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문장 같은 것들을 결코 기억할 수 없는데, 문장이 아닌 단어에 대한 기억력만 가지고 있습니다.

삶의 수수께끼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런 존재가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시체는 부패하지만 에테르체의 실질적인 해체는 없으며, 그 자연적인 존재는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자동 인간 같은 뭔가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완전한 인간 생체가 존재하고, 뇌를 자동화하여 일종의 사이비 도덕성을 개발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종종 그들 없이도 공격 당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인간이 아닌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사람들이 듣게 된다면 뭐라고 할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은 사실입니다. 돌아 다니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무자비 하기 때문에 인간이 아닌 인간의 형상을 한 악령들이라는 사실을 보다 뚜렷하게 느낀다면 우리 문화가 이처럼 쇠퇴하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1923년 7월 3일, 루돌프 슈타이너와 함께 한 교수 모임 제2권 649-650 페이지)

 

G.I. 구르지예프 (G. I. Gurdjieff) 또한 동일하게 말했다. ‘진정한 세계 (the Real World)’ 에서의 강의가 그의 입장을 요약하고 있다. 인간은 자각이 없는 생물학적 기계처럼 백지상태로 태어난다.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 사람은 ‘나’를 발전 시키거나 자신에게 당면해 있는 기계화와 부패로 향한 길의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구르지예프에 따르면, ‘공허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해야만 했던 만큼의 자각을 결코 발전시키지 못했지만, 우리 모두는 동등한 입장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나는 이를 사실로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유아들과 어린이들은 분명히 높은 지각력과 자각의 행동을 보이는 반면, 다른 유아들과 어린이들은 그러한 면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윤회의 요인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영의 잠재력을 비롯한 전적인 영의 부재를 시사한다.

 

보리스 모라비예프 (Boris Mouravieff) 는 영이 없는 사람들의 주제에 대해 가장 광범위하게 기록했다. 그의 3권의 영지주의 (Gnosis) 시리즈, 특히 제 2권 및 제 3권을 보라. 그의 접근은 비전(秘傳) 기독교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 자체로서 수피교의 가르침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이는 구르지에프의 ‘제 4의 길 (the Fourth Way)’ 과 공통점을 지니면서도 성서를 많이 인용한다. 모라비예프의 창세기에 대한 해석에 따르면, 아담과 하와 이전에도 인간들이 있었지만, 아담과 그의 대리인 하와 및 그녀의 자손들 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의 숨결을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요즘 인간들은 영이 없는 종전의 아다믹스(Adamics) 와 이를 보유한 아다믹스의 두 가지 형태의 인류 종이 혼재한다. 모라비예프는 종전의 영이 없는 아다믹스가 영이 있는 아다믹스의 에너지를 우주의 먹이 사슬의 일부로 수확하는 목적에 일조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또한 차크라와 유사한 어떤 ‘센터들’이 누락된 종전의 아다믹스와 관련하여 두 인류 종 사이의 형이상학적 차이점을 탐구한다. 모라비예프는 종전의 아다믹스가 자신의 집단에 고유한 집단 혼을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영겁의 진화의 시간이 지나야만 그들의 집단 혼이 영이 있는 아다믹스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처럼 개체적인 영으로 분화할 것이라고 믿는다.

 

헤르메티쿰 문서 (the Corpus Hermeticum), 거의 이천년 전에 작성된 유명한 헤르메스 주의 및 영지주의 문헌인 헤르메티쿰 문서 또한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이 그들 안에 신성한 이성의 불꽃 (‘Nous’ 로 부름) 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며, 어떤 인간이 Nous 가 없으면 그의 동기들, 제한된 지각 및 삶의 방식에 있어 ‘비이성적인 생명체’ (동물) 와 같다고 언급한다. 올바른 맥락을 이해하려면 전체 문언을 읽어야 한다. ‘The Way of Hermes: New Translations of the Corpus Hermeticum (Inner Traditions, 2000)’ 영역본을 참조하라.

 

마지막으로, 카시오페이아인과의 채널링 기록에서는 모라비예프의 저서들을 다루고 있으며 현재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핵심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채널링 내용에서 통일된 오라를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들은 다른 지능들이 통해서 일하기 위한 공허한 포털들이며, 보다 상위의 차크라들이 없으며, 그들 자신의 혼 에너지를 반영하여 영이 있는 (souled ; spirited) 사람들을 모방하는 데 매우 능숙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우리의 에너지가 초 차원적인 (hyper-dimensional) 부정적인 존재들에 의해 끌어 모여져서 빼돌려지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모든 것은 내 관찰과 모라비예프와 구르지예프의 저술들과도 일치한다. 다만 내 관찰은 두 사람의 전통주의자들의 견해들보다는 조금 더 현실적이라는 점은 빼고서 말이다. 존 베인즈는 일부 인간들이 인간 집단 혼의 연장선들이라고 말하지만, 카시오페이아인들은 그들이 특정 동물 집단 혼의 연장선들이라고 말한다. 카시오페이안들은 이른바 ‘생체 포털들’ 이 그들의 진화를 가속화하기 위해 더 높은 인류 에너지를 이들 동물 집단의 혼들로 이전시키는 것을 도와서 인류와 동물계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기능은 상위 차원의 부정적인 세력들에게 에너지 수확의 목적으로 가로채이게 된다

 

그래서 내가 이 글에서 말하는 것은 전례가 없지는 않다. 나는 단순히 1999-2001 년에 ‘공허한’ 사람들을 독자적으로 관찰한 다음, 이 글에서 설명한 현재의 이론을 확정하기 전에 다양한 개인적 추측들과 기존 이론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기를 반복했다.

나는 사람들이 영이 없게 된 것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아무도 표를 사지 않아 극장 좌석이 비어있는 것과 같이 영이 뿌리를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태어났다. 다른 사람들은 처음에는 영을 가지고서 시작했지만,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학대나 갑작스런 극심한 트라우마를 피해 영이 대피했거나 수십 년 동안 일상적으로 영혼을 죽이는 과정에서 서서히 사라졌을 수도 있다. 모든 죽는 사람이 반드시 급사하지는 않는다. 한때는 자신에게 불꽃을 주었던 영이 이제는 비어 비린 채 예전 자기자신의 메아리처럼 속이 빈 껍데기로 존재할 수 있다. 선진 기술을 가진 외계인들, 복제 인간들 그리고 다른 유형의 영이 결여된 인공 휴머노이드 등으로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그 밖의 보다 어두운 현상들이 세상에는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상대적으로 드물기 때문에 이 글에서 논의할 만한 가치는 없다 [그 대신 ‘Human Simulacra (인간 복제품)’ 에 대한 나의 글을 보라].
* PDF 문서 바로가기링크 : http://www.montalk.net/HumanSimulacra.pdf

여기서 나는 그들의 약탈적이고 세속적인 본성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최상위 층들을 오염시켜 왔고, 세상을 영적인 욕구에 대해 적대적으로 만들어 왔던 역사를 통틀어 항상 존재해 왔던 인구에서 보다 더 큰 부분을 차지하는 자연적으로 영이 결여된 사람들에 대해 주로 이야기 한다.

 

이해의 이점들

살펴본 바와 같이, 어떤 사람들은 영이 결여되었다는 이 아이디어는 인간성의 로봇식이며, 동물적이며, 약탈적인 측면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한다. 우리들 중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면 그들의 동기를 완전히 이해할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 모두는 동일한 내면을 가지고 있다는 그릇된 가정 하에 있다. 그러나 모든 비인간적 행위가 단순히 환경 변수들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들의 입장이 되더라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그들의 동기부여의 원인이 환경문제가 아닌 형이상학적인 문제, 즉 영의 부재 및 에고의 최고통치이기 때문이다.

영이 없는 사람들의 잠재된 성향을 얕잡아 보는 사람들은 단순히 예측불허의 행동들에 대한 좌절감으로 머리를 저으며 무시하거나 합리화 하기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영이 없는 정신병자를 다룰 때 그러한 사람들은 쉽게 기만되고 조종된다.

그들은 계속 반복적으로 당하고 난 후에만 비로소 어떤 인간들은 다른 종류의 동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 인간들은 영이 없는 약탈적인 본능에 따라 완벽하고 건강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치료가 불가능하다. 이는 감옥 행성을 운영하는 정신병자 엘리트에게 특히 그러하다. 즉 그들은 갱생 되거나, 자신들이 하는 방식의 오류를 깨닫게 되거나, 호소력 있는 공감을 통해 설득 될 수 없다.

 

주의사항 및 결론

그런데 영이 없는 자를 업신여기는 투로 멸시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 주어진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야성적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야생 동물처럼 다루어 져야만 한다. 좌절감이 제어되는 보다 높은 영적 수준에 이르기까지는 영이 없는 자들을 견뎌내기 위해 노력하는 수 밖에 없다. 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고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이해한다면, 좌절감은 사라지고 평온한 통찰력이 찾아 온다.

또한 당신이 영이 없는 자를 찾으려는 시도는 무가치 한데, 망상적인 애매모호함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영이 없는 자의 행동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의 행동들 과도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기 때문에, 오직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행동들 만이 신속하고 확실한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척도가 된다. 한 명의 영적인 인격체로서 당신의 파장과 가장 편안하게 반응하는지를 분간하는 것 만이 정상인 임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다. 당신은 그들의 눈에 나타나는 삶, 그들이 하는 말 배후에 있는 명확하고 독특한 에너지, 그리고 그들의 사고방식의 배후에 있는 독창성과 독립성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부록 I : 일반적인 질문들

 

질문> 내가 영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답변> 만약 당신이 영의 독특한 특징 중 한 가지라도 경험했다면 영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를 불확실하게 여기면서 확실히 알고자 궁금해 하는 사실 자체가 바로 영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특징인 자각과 자기성찰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어째튼 당신은 그동안 내내 자신의 저급한 이기적인 충동들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억제함으로써 직감, 공감, 명료성과 같은 자질들을 개발하는 일을 영과 함께 해 왔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질문> 나는 나의 (친구, 배우자, 부모)가 영이 없는 사람으로 미심쩍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변> 그들이 영이 있는 사람들인지 없는 사람들인지의 여부에 대한 의문은 잠시 제쳐두고, 오로지 앞으로 계속해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에만 초점을 맞추십시오.
그들이 지나치게 교활하고, 지치게 하고, 학대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행복에 해로운 수준입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영이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그들과 잘 지내게 되어 친하고 잘 어울립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영이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용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당신의 삶에서 그들에게 잘 대처하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영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를 구분하는 게임에 참여하는 일은, 심지어 변화를 약속한 후에도 이전의 잘못된 방식들로 돌아가는 정신병 환자를 다루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단지 어떤 시점에서 잘못 인도되었을 뿐이며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필요로 한다고 합리화하기 보다는, 그들이 정말로 자신들이 누구인가에 따라 그대로 완벽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더 낫습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좋은 내면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순진한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합리화 하면서 혹사를 당하게 될 것이지만, 더 높은 이해력을 가진 사람들은 보다 빨리 그 무익함에 대한 경고 신호를 인식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것입니다.

 

질문> 영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개념이 어째튼 분열적이며, 인종 차별적이며, 박해하는 것이며, 또 인간평등, 화합, 조화 그리고 형제애의 개념들과 상반되는 것은 어떻게 하구요?

답변> 어떤 사람들이 영이 결여되었다는 이론이 사실이라면, 정치적 정당성 때문에 그 문제의 진상이 무시되어서는 안됩니다. 지식이란 적절하게 적용되기만 한다면 장기적으로 더 큰 안정성과 조화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시도되었던 모든 유토피아 사회는 그 시민권의 구성에 대한 순진한 가정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실패했는데, 이기적이며 정신병자이며 약탈적인 개인들은 결국 유토피아를 부패 시키게 마련입니다. 유토피아가 그러한 유형의 시민들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 기반을 두었더라면, 부패 방지를 위한 조치들이 취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어떤 이론은 그 악용의 결과에 대해서는 비난 받아서는 안됩니다; 악용한 사람들은 그것을 영적인 관점에서 적용하기 보다는 자신의 이기적인 만족을 위한 방편으로 이용합니다. 악용 때문에 그 이론을 폐기하기 보다는 악용을 막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일체중생의 합일은 각 구성원의 기능적 다양성을 유지하면서도 인정될 수 있으며, 또한 그 합일의 각 부분을 바르게 이해함으로만 단순하고 무지한 행복 보다는 완전한 명료성으로 인식되는 전체가 될 수 있습니다.

 

 

부록 II : 관련 출처

존 베인즈 (John Baines) – 뛰어난 사람 (The Stellar Man)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 신학 (Theosophy )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 자유 철학 (The Philosophy of Freedom)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 오컬트 과학 개요 (Outline of Occult Science)
G.I. 구르지예프 (G.I. Gurdjieff) – 진정한 세계에서의 관점 (Views from the Real World)
P.D. 우스펜스키 (P.D. Ouspensky) – 기적을 찾아서 (In Search of the Miraculous )
클레멘트 살라먼 외 (Clement Salaman et al…) – 헤르메스의 길 ; 헤르메티쿰 문서 (The Way of Hermes ; Corpus Hermeticum)
디온 포춘 (Dion Fortune) – 초자연적인 자기방어 (Psychic Self-Defense)
보리스 모라비예프 (Boris Mouravieff) – 영지주의 I-III (Gnosis, Volumes I-III)
LKJ 외 (LKJ, et al…) – 카시오페이아인과의 채널링 (The Cassiopaean Transcripts)
아밋 고스와미 (Amit Goswami) – 자각의 우주 (The Self-Aware Universe)

이들 출처들의 일부에서의 인용은 이 PDF를 참조.
*PDF 문서 바로가기링크 : http://montalk.net/opsources.pdf

 

부록 III : 형이상학적 구성 요소들의 순열들 (permutations, 順列)

정신, 몸, 에테르 및 아스트랄과 같은 개념의 필요성을 보여주기 위해 이들 구성 요소들이 결합되어 다른 종류의 존재들을 형성하는 방법에 대한 목록이 있다. 보시다시피, 이러한 존재들 간의 차이점은 저 구성 요소들이상으로 설명 될 수 있다.

 

기초적인 물질 :

크리스탈 및 식물 :
몸 | 에테르

일반적인 동물 :
몸 | 에테르 | 아스트랄

영이 없는 인간 :
몸 | 에고 | 에테르 | 아스트랄

영이 있는 인간 :
몸 | 에고 | 에테르 | 아스트랄 | 영

영이 있는 인간이 육화를 선택한 후 첫 번째 단계 :
아스트랄 | 영

영이 있는 인간이 육화를 선택한 후 두 번째 단계
에테르 | 아스트랄 | 영

출생 직전의 영이 있는 인간 :
몸 | 에테르 | 아스트랄 | 영

유년기 이후의 영이 있는 인간 :
몸 | 에고 | 에테르 | 아스트랄 | 영

육체적인 죽음 이후의 영이 있는 인간 :
에고 | 에테르 | 아스트랄 | 영

사후 세계에서 ‘둘째’ 사망 이후의 영이 있는 인간 :

태아 형성 후의 영이 없는 인간 :
몸 | 에테르

출생 직전의 영이 없는 인간 :
몸 | 에테르 | 아스트랄

유년기 이후의 영이 있는 인간 :
몸 | 에고 | 에테르 | 아스트랄

육체적인 사망 이후의 영이 없는 인간 :
에고 | 에테르 | 아스트랄

‘둘째’ 사망 이후의 영이 없는 인간 :
(아무 것도 없음)

인공 휴머노이드 :
몸 | 에고 | 에테르

에테르 의식 형태 및 아스트랄 야생 동물 :
에테르 | 아스트랄

천사적 존재 :
아스트랄 | 영

악마적 존재 :
에고 | 에테르 | 아스트랄

영이 있는 유체이탈자 :
에고 | 아스트랄 | 영

에테르 외계인 및 초월한 인간 :
에테르 | 아스트랄 | 영

 


 

각주

1 우리가 영, 혼, 아스트랄, 에테르와 같은 용어들을 왜 필요로 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고 싶은 말은, 이러한 것들은 오컴의 면도날 (Occam’s razor) 에 의하여 알려진 관찰들의 큰 몸통을 설명하는 가장 단순한 모델을 구성하기 때문에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분류들의 필요성을 비웃고 단지 육체 또는 육체 & 혼 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결정적인 관찰들을 빠뜨리는데, 그들의 작은 그릇에는 그 지나치게 단순한 모델이면 충분하다. 그렇지만 모델은 투시력, 날카로운 통찰력, 그리고 초자연적인 경험이 있는 모든 사람의 관찰들을 포함하도록 확장되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영, 혼, 아스트랄, 에테르에 대한 추가적인 개념들이 그 그림에 들어간다. 나는 이것이 영이 없는 사람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구성 요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훨씬 많은 것을 설명하는데, 부록 III 만 보게 되더라도 그러하다. 또한 이 용어들은 즉석에서 나온 설명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이론적으로 되기 보다는, 에테르 및 아스트랄 체들은 유체이탈 및 투시력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다.

2 아밋 고스와미 (Amit Goswami) 는 비 결정론적인 의식이 물질적 육체의 조건화를 통해 결정론적 특성을 습득하는 방법과 양자 시스템이 고전적 특성들을 습득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대단한 통찰력으로 설명한다. 그의 저서 자각의 우주 (The Self-Aware Universe) 13장과 14장을 보라.

3 에고가 혼의 에테르적 요소에 스스로를 각인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그것은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가 우리의 영적인 행복에 대해 적대적인 우리 자신의 미스터리 한 그림자 측면인 도플갱어 (doppelganger) 인 에테르적인 이중성 (double) 과 관련하여 썼던 그 무엇과 많은 관련이 있다. 또 그것은 조상 숭배가 일반적인 아시아에서 제사를 지내는 동안 사악한 존재들이 죽은 자들의 벗어버린 에테르적인 껍데기를 걸치고 그것에 의하여 그 인물에 부여된 모든 초자연적 에너지를 그들 자신이 받을 수 있다는 슈타이너의 언급과 관련도 있다. 더군다나, 사망 이후에도 에테르적인 형태로 지속되는 에고는 부정적인 존재가 접신에 의해 사망한 친척을 흉내 낼 수 있는 아스트랄/에테르 적인 사기꾼들의 문제뿐만 아니라, 특정한 유형들의 유령들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현상들은 어떤 사람의 세속적인 정체성 (에고) 의 일정 부분은 사망 후에 살아남을 것이며, 그것은 물질적인 육체를 통해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다음으로 가장 가까운 것, 즉 혼의 에테르적 요소임이 분명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자 컴퓨터들과 사이버네틱스들의 진정한 인공 지능에 관해서는, 이것들이 단순히 유사 무작위 출력의 결정론적인 기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식물이 에테르 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일정 수준의 ‘생명’ 을 가지고서 인공 지능을 보조하는 하나의 에테르 장을 수반할 것임을 예상해야 한다.

4 ‘둘째 사망’이라는 용어는 성경적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요한계시록 2:11.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요한 계시록 20:14-15. 보리스 모라비예프 (Boris Mouravieff) 와 카시오페이아인들은 이것을 대략 다음과 같이 해석했을 것이다 : ‘이긴다’ 는 것은 진보된 영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고, ‘둘째 사망’ 은 혼의 에테르 및 아스트랄 적인 구성 요소들의 해체이며, ‘불못’는 혼이 해체된 미분화의 집단 혼을 묘사한다. 그렇다면 불은 태워서 재로 변화시키는 것을 외에 이전 신원에 대한 식별 가능성의 흔적을 모두 제거하는가? 둘째 사망은 첫째 사망 이후에 발생한다. 첫째 사망이 물리적 육체의 사망이라면 둘째 사망은 비 물리적인 것의 사망인 것이어야 한다. 이게 이치에 맞기 때문에 나는 이 해석을 믿는다.

5 ‘보다 상위’ 란 신체의 위치 상으로 높다는 것은 아니라, 기능적으로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목 차크라는 단지 말하기와 지적 기능들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보다 상위의 차크라가 아니다. 제4의 길 시스템 (the Fourth Way system) 에서 ‘보다 하위의 지능 센터’ 와 관련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대부분의 동물에는 결여된 그 무엇인 인간의 언어능력과 추상적 사고와 함께 발달했거나 진화했을 것이다. 그게 바로 영이 없는 인간들 역시 목 차크라를 가지고 있는 이유이며, 또한 그들이 날카로운 지성과 무한정의 언어구사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것은 기능면에서는 보다 하위의 차크라들 중 하나이다.

 

 

Original Text

 

Spiritless Humans

montalk.net » 27 April 09

(This article replaces Matrix Agents: Profiles and Analys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