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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定과 參禪의 核心方法 -남회근 선사님

영원오늘 2021. 5. 29. 17:31

修定 參禪 核心方法

선해여측에서 발췌

 

 

  

 

 

정은 계와 혜의 중심이자 또 어떠한 불법이라도

그것을 닦아 직접 몸으로 느끼게 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바꾸어 말하면 불법을 닦으려면

먼저 정 공부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이 이루어진 뒤에야 비로소

장엄한 계의 본체에 이를 수 있으며

그런 후에야 혜를 개발하여 밝게 통할 수 있다.

그러나 견지가 부정확하거나 불철저하면

수행이 자칫 엉뚱한 길로 빠질 수 있다.

 

 

 

비로자나불 七支坐法

 

 

1. 가부좌에 능하지 못한 사람은

금강좌(오른다리를 왼쪽 넓적다리에 올림)

혹은 여의좌(왼쪽다리를 오른쪽 넓적다리에 올림)를 한다.


2. 은 삼매인(오른손바닥을 위로 보도록 하여, 왼손바닥 위에 놓는다.

두 엄지손가락은 서로 마주 붙인다)을 한다.


3. 의 척추는 곧게 세워서 동전을 포개듯 한다.

(신체가 건강치 못한 사람도 오래하면 자신도 모르게 바르게 된다)


4. 어깨는 평평하게 하여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5 .머리를 바로 하고 턱을 당긴다.

(뒤쪽 뇌를 약간 뒤로 하고,

턱을 안으로 당겨 좌우 대동맥을 압박한다)


6. 는 입천장에 붙인다.

(혀를 가볍게 위의 치아에 침이 나오는 곳에 붙인다)


7.  은 반쯤 감는다.


이외의 주의사항

 

 

1. 좌선할 때 허리띠 넥타이 등 몸을 속박하는 물건은

모두 풀고 몸으로 하여금 완전히 휴식하게 한다.


2. 날씨가 서늘할 때는

반드시 양 무릎과 뒷머리를 따뜻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풍한이 침범하여 약으로 치료할 수가 없게 된다

 이것은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3. 처음 타좌를 행하는 사람은

공기와 광선을 잘 조절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광명이 너무 강하거나 어둡게 하면

쉽게 마음이 산란해지거나 혼침에 든다.

또 앉은 자리 약 1미터 정도에서 공기가 흐르게 한다.

 

 

4. 배가 너무 부르면 타좌를 말아야 한다.

혼미 하거나 졸음이 올 때도 타좌를 하지 말아야 한다.

충분한 수면을 취한 뒤에 다시 앉아야 정을 얻기가 쉽다.


5. 초학자나 오래된 이나

넓적다리에 이삼촌 높이의 방석을 괴고 앉는다.

초학자가 양다리에 아픔이 심하면

사오촌 높이의 방석을 괴고 앉고

점차 익숙해지면 차츰 높이를 줄인다.

(방석을 괴지 않으면 신체의 중심이 뒤로 가서

반드시 뒤로 치우치게 된다.

그래서 기맥이 막혀서 애쓴 만큼 공이 없다]


6. 타좌를 마칠 때에는 두 손을 비벼서

얼굴과 양 다리를 마찰하고 기혈을 유통시킨 후에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적당한 운동을 한다.


7. 앉았을 때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머금어서

얼굴신경을 이완시키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

 

 

8. 처음정좌를 할 때 짧게 여러 차례 한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자세에 주의하여 오랜 습관을 들인다.

잘못된 자세가 되면 나중에 고치기가 어렵다.

 

 

 

칠지좌법의 규정은 매우 깊은 뜻을 지니고 있으며

심리와 생리의 자연법칙에도 부합하는 것이므로 꼭 따르도록 해야 한다.

인간의 생명은 정신의 왕성함에 의존한다.

정신을 배양하는 방법은

먼저 마음에 항상 망념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몸을 편안히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을 편안히 하면 수명을 다 할 수 있고

생각을 적게 하고 욕망을 끊으면 정신을 배양할 수 있다.

 

 

 

밀교와 도가는 비록 삼맥을 수련할 것을 주장했지만

도가는 앞뒤의 임독맥을 주로 하였고

밀교는 좌우 두맥을 주로 하였다.

그러나 둘 다 중맥을 관건으로 삼았다.

 

선종도 비로자나불 칠지좌법을 채택한 것으로

좌선의 기능과 효과 면에서 사실은 이미 기맥의 문제가 이미 내포되어 있다.

결가부좌는 기를 단전에 내릴 뿐 아니라 기식을 편안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마음이 안정되면 기도 안정되어

점점 각 기맥을 따라 유동하여 중맥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기가 중맥으로 들어가서 맥이 통하고 마음이 열리면

망념이 일어나지 않고 몸과 마음을 잊을 수 있는 데

이때가 되어야 대정에 도달할 수 있다.

기맥이 안정되지 않으면 절대 대정에 들 수가 없는 것이다.

정을 닦는 방법이 정확하면 몸과 마음에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

 

 

禪定 입문방법
 
정혜의 학문을 닦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결심과 원력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발심이라고 한다.

그다음 중요한 것은 수행에 필요한 복덕과 자량이다.
현교와 밀교를 막론하고 다 4무량심으로 무게를 둔다.

선정을 닦는 도구는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다.

우리의 육근이 가장 좋은 입문도구이다.

우리의 육근은 밖에 있는 육진에 항상 헛되이 이끌려서

우리의 진실한 성품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성품을 회복하려면 바로 이 육근을 도구로 해서 이루어진다.

어떻게 육근을 도구로 하는가?

, , , , , 의 육근 중 임의로 하나를 택해

거기에 온 마음을 묶어 두면 된다.

이렇게 계속 연습하다보면 초보적인 지의 경계에 이른다.

그러나 하나의 근마다 수없이 많은 다른 방법이 있어

일일이 말하자면 대단히 복잡하다.

 

 

부처는 한 생각 속에도 8 4천 가지의 번뇌가 있다고 했다. 

든 사람은 각각 성품, 습관, 기호 등 근기가 다르기에

자기에게 적합한 방법을 선택해 수행해야 한다.

즉 우리들의 근기에 계합하는 한 가지 방법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1.顔色法門:

 

안색법문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1), 물체와 연관된 법문

 

하나의 물체를 응시하면서 정을 닦는 것이다.

이 방법은 눈에 보이는 범위 안에 하나의 물체,

불상이나 다른 물건(약간의 빛을 발하는 것이 좋음)을 놓고 정좌수련할 때

이 물체를 주시하듯 바라본다.

빛의 색깔은 각 개인의 생리와 심리에 맞도록 하는데

예컨대 신경이 과민한 사람은 녹색광선,

쇠약한 사람은 홍색광선,

성격이 급한 사람은 약한 청색이 좋다.

단 이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므로

개인의 실제적 상태에 맞게 취해야 하며

한번 결정했으면 바꾸지 않는 것이 좋다.


2), 빛과 연관된 법문

 

이 방법은 눈으로 빛을 응시하는 방법이다.
정좌수련을 할 때 보이는 곳에 기름등 혹은 향, 또는 해,

 

 

, 별의 빛 (최면사들이 사용하는 수정구의 빛도 좋다)

을 눈의 정면에서 약간 비키도록 놓는 것이다.

이 밖에 허공이나 거울을 본다든가 불이나 물을 보는 것도 모두 이 방법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거울속의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신경분열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가벼이 실험하지 말아야 한다.

이 방법들은 불교나 도교, 외도들도 같이 채용하는 것이다.

단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수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런 방법은 다만 초학자를 쉽게 수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에 불과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이것만이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마경외도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마음을 정지 시키지 않고

도리어 방법에 사로잡혀 마음을 혼란시킨다면

자연히 지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련하는 과정에는 항상 여러 가지 경계가 나타날 수 있다.

예컨대 광색을 수련하는데 환상이 나타나거나

안신통의 현상이 나타나기 쉽다.

만약 뛰어난 스승의 지도가 없으면 대단히 위험하며

바로 마도에 빠질 수도 있다.

상근기의 사람은 광색의 경계 속에도 활연대오하지만 일반사람은 기대할 것이 아니다.

 

 

 

예컨대 석가가 새벽별을 보고 도를 깨달은 것과 같고,

이 밖에 홀연히 어떤 물체를 보고 본성을 통견한 예도 있다.


2.耳聲法門

 

안팎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내적인 소리를 듣는 법문

 

이것은 자기의 체내에서

즉 염불, 염주, 독경 소리 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염의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큰소리로 외우거나,

작은소리로 외우거나,[금강념이라 한다],

마음의 소리로 외우는,[유가념이라 한다] 방법이 있다.

염 할 때는 귀로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

한 편으로 외우면서 한편으로 그 소리를

자기내면에서 듣는 것이다.

점차 일념 일성에 마음에 집중되어

드디어 마음이 고요해 진다.


2), 외적인 소리를 듣는 방법

 

이 방법은 외부의 소리가 대상이 된다.

가장 좋은 것은 물이 흐르는 소리나 폭포소리를

또는 바람이 불어서 풍경이 울리는 소리를

또는 범패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 방법은 가장 쉽게 을 얻을 수 있다.

 

 

능엄경에 있는 25분의 보살들의 圓通법문중에

관세음보살의 법문이 가장 좋은데

그것이 바로 소리를 듣는 법문으로 入道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참으로 가르침의 본체이니

청정함이 소리를 듣는 것에 있느니라 라고 말한 것이다.

 

처음으로 마음이 소리에 완전히 집중하여

능히 졸지 않고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 않으면

자연히 이런 경지를 계속 지켜 나갈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정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라고 하겠다.

항상 이렇게 하도록 수행하면

어느 날엔가 홀연히 적정에 들어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는데

이것이 고요함이 극치에 도달한 경계이다.

경에서는 이것을 淨結이라고 한다.

 

정결의 경지에 들어갔을 때

그것에 마음을 빼앗겨 탐착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움직임이 하나의 현상이라면

정결도 하나의 현상임을 깨달아

움직임과 고요함 두 현상에서 벗어나야 하며

움직임과 고요함에 집착도 떠나지도 않는

중도를 깨달아야 한다.

이때가 의 경지에서

지혜를 보는 觀慧의 경지로 들어가는 시기이다.

 

 

지혜를 보고 을 듣는 것은

움직임과 고요함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어지는 것도 계속되는 것도 아니다.

나지도 죽지도 않는 무생무멸한 본체이다.

그러나 이것도 아직 점수의 단계이다.

선종의 조사들 중 많은 사람이

이러한 점진적 단계를 거치지 않고

소리를 듣는 순간 돈오하여 해탈했기 때문에

선문으로 입도 한 사람들은 모두 관세음보살의 소리 듣는 법문을 매우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이를테면 향엄은 대나무소리에 悟道하고,

원오는 닭이 날개 치는 소리에 悟道하고

백장 휘하의 한 스님은 종소리에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움직임과 고요함의 두 현상은

궁극적으로 불생임을 깨닫지 못한 사람도 적지 않다.

소리를 떠나 조금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면

자연히 고요한 정에 들 수 있다.

단 이 고요함도 움직임과 고요함의 한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 점을 알지 못하고

고요함이 곧 본체자성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로 외도의 견해이다.

반대로 이 단계를 뛰어넘었으면

이미 입문의 단계를 지났다고 할 수 있다.

 

 

 


3. 鼻息法門


 이 방법은 호흡하는 기를 통해서 정을 얻는 방법이다.

호흡이 능히 점점 미세해지면서 정지되는 것을 이라 한다.

기맥수련, 기공의 단련 및 數息, 隨息의 방법이 모두 비식에 의한 방법에 속한다.

천태종과 밀종은 이 방법을 가장 중요시 한다.

이 방법의 최고 법칙은 心息相依이다.

생각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나 산란한 사람은

이 방법을 써서 호흡에 의해서 마음을 절제하면

비교적 쉽게 효과를 볼 수 있다.

정을 얻은 후 세밀히 관찰하면

마음과 호흡이 원래 서로 의지함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생각은 기식에 따라 생겨나는 것으로

기식의 작용은 사람의 생각이 바깥으로 표현된 것이다.

기가 정에 이르러 생각이 고요해 지면

크게 고요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모두 본성의 작용일 뿐 도의 본체는 아니다.

도가에서는 先天一氣가 흩어지면 기가 되고

모이면 형체가 된다고 하고,

일반적으로 외도는 기가 性命의 근본이라고 하지만

이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만약 어떤 하나의 대상은 인정하고 자기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본체인 이 곧 이 되는 이치를 이해할 수 없다면

이것 역시 외도와 정법으로 갈라지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만약 능히 자성을 먼저 깨닫고 점차 공부가 心息相依

 

 

이르러 마음과 물질이 하나의 근원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되면

비로소 일체의 법문이 모두 공부하는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4. 身觸法門


이법문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두 가지가 있다.

 

광의의 신촉법문이란

일체의 육근법문을 모두 포괄하는 법문이다.

왜냐하면 이들 육근법문은 모두

육체의 근에 의지해 닦아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협의로서 신촉법문은

주의력을 신체의 어느 부분, 예컨대 양 미간, 머리 정수리, 배꼽아래

 足心, 尾閭미려, 회음 등에 집중하는 것이다.

타좌시 관상의 방법을 쓰거나 기식을 지키는 방법을 쓰거나

혹은 기맥을 수련하는 것 등은 의식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으로 모두 이 법문에 속한다.

 

신촉법문은 수습하는 사람이 쉽게 신체상의 반응,

촉각, 서늘하거나 뜨거움, 부드러움, 매끄러움, 막힘 등등의 신체적인 반응과 감각을 알게 해준다.

그러므로 이법문은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현상에 집착하게 만든다.

예컨데 기맥의 현상으로 도력의 깊고 얕음을 결정하게 하고 마침내 현상에 집착하는 경계에 빠진다.

이것이 곧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 , 중생, 수자상이다.

 

 

밀종과 도가의 수련법은 이러한 오류에 빠지기 쉽다.

이것을 법집이라 한다. 가장 떨쳐버리기 어려운 것이다.

수행인에게서 가장 어려운 것은 신견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황벽선사도 항상 이 일을 탄식하여 신견이 가장 잊기 어렵다고 하였다.

원각경에도 망령되게 사대를 자기의 몸이라고 여기고

육진에 인연한 그림자를 마음이라고 여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림자를 참된 것으로 인식하지 않아야

借假修眞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노자도 말하길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데

나에게 몸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거니와

선종의 고덕들은 절대로 기맥의 문제를 말하지 않아서

학인들이 상에 집착하지 않게 한 것은 대단히 고명한 학풍이라 하겠다.

 

 

5. 意識法門

이 법문은 모든 법문을 포괄한다.

확대해서 말하면 팔만 사천 법문이요,

대략 말하자면 백법명문론에 열거된 것들이다.

앞에서 말한 법문들은 모두

오근, 오경, 오식에 의해 관계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오식의 주체는 바로 의식이며 심왕인 것이다.

모든 존재는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문은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관심, 지관, 참선 등은 모두 의식법문에 속한다.

 

관심법문을 시작할 때 보이는 마음은 자성진심이 아니다.

바로 생멸심인 것이다. 의식하는 망심인 것이다.

정좌하여 마음을 볼 때 이 점을 안으로 관찰하여

자기의 의식속에서 생멸하는 망심을 찾아서

이 마음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종적을 주의 하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생멸하는 마음을 內觀하면

어느 땐가 생멸하는 마음의 흐름이 홀연히 끊어진다.

이때는 앞생각은 이미 끊어졌으니 상관할 수 없으며,

뒷생각은 아직 생기지 않았으니 그 본체는 바로 공적이다.

이러한 경지를 본체가 공적한 상태를 알았다고 하는

의 상태라 한다. 불교에서는 사마타라 한다.

그러나 이같은 지의 경지는 궁극적인 본원의 경지는 아니다.

단지 공과 유사한 靜止의 경지일 뿐이다.

본체의 관점에서 보면 있음은 공이 일으킨 것이요,

공은 유에서 세워진 것이다.

생멸은 진여의 표현된 작용이고,

진여는 바로 생멸의 본체임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을 간파하여

어느 한 쪽에서도 중도를 보아 낼 수 있고

그리하여 변견도 버리고

중도마저도 던져 버릴 수 있을 때

바로 지혜를 보는 경계에 이를 수 있는데

 

 

이를 불교에서는 비파사나라고 한다.

지관을 닦아 이룬 뒤 이것을 계속 수지해나가면

자연 정과 혜를 모두 갖춘 열매를 얻게 된다.

여기서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계속 닦아 나가는 것이

십지 보살의 一地 一地 상승이요

마침내 원만한 보리를 증득하게 된다.

천태학, 밀교, 황교의 菩薩道炬論, 中觀正見 등은

모두 止觀을 수습하는 범주에 속한다.


참선법문은

 

초기의 선종에서는 어떤 법문도 학인에게 주어진 것이 없다.

언어도단, 심행처멸의 선종에선 어떤 법문도 주어질 수 없는 것이다.

후대의 참선수행인들이

화두를 참구 한다던가

의정을 일으킨다든가

공부를 하는 방법을 써서 참선을 하였는데

이러한 방법들은 모두 의식을 쓰는 방법이다.

그러나 선종의 방법은 기타의 법문과는 다르니

그것은 疑情을 쓰임으로 하는 것이다.

의정이란 무엇인가?

의정은 결코 지관법문에서처럼

마음을 관하는 혜학도 아니고,

百法明門論에서 말하는 도 아니다.

 은 서로 연결되어서 제팔 아라야식에 깊이 들어가서

 

 

과 함께 발생한다.

그러므로 육체와 마음은 본래 서로 결합되어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은

마치 가슴속에 무언가가 가로 놓여 있는 것 같아서

뽑아낼라고 해도 뽑혀지지 않다가

어느 순간 적당한 기회와 환경이 되면

홀연히 돌파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靈光이 홀로 빛나 육근, 육진에서 떨어져 나간다.

무릇 모습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고 말한 것이다.

 

 

定慧影像

 

소승불교는 계로부터 입문한다.

능히 계를 지킬 수 있어야 을 얻을 수 있고

정이 있어야 혜를 열어 해탈에 이를 수 있다.

대승불교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으로부터 나아가서

선정에 이르고 최후에 반야지에 도달한다.

불법에서 말한  은 어느 것도 모두

정혜를 얻기 위해 하는 수행의 첫걸음이다.

육근을 쓰는 것에서부터

팔만사천의 법문이 파생하는 것이다.

모든 법문은 의념을 정지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생각이 정지된 상태가 곧 정이며,

정의 정도는 공력의 심천에 따라 다르다.

정을 닦는 방법은

 

 

어떤 사람은 유위법에서 공으로 들어가고,

어떤 사람은 공에서 시작해서 일체의 유를 제거 함으로써 묘유의 작용을 알기도 한다.

법문은 비록 한 없이 많지만 목적은 오직 정을 얻음에 있다.

 

이제 정의 현상에 대해 알아보자.

무릇 마음이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의 경계라 하는데

이것이 정에 들어가는 기초이다.

 

무엇을 정이라 하는가?

정은 산란하지도 혼침하지도 않으며

성성하면서(깨어 있으면서) 적적하고

적적하면서 성성한 것(깨어 있는 것)이다.

마음은 고요하면서 결코 죽어 버린 것이 아니다.

그래서 깨어 있다고 한 것이다.

깨어 있으면서도 고요한 경계가 바로 정이다.

마음에 의지하지도, 육체에 의지하지도,

의지하지 않는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하여

마음이 마음에 집착하지 않으며 육체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경지가 정이다.

 

정의 수행을 하는 단계에서는 대개

산란하지 않으면 혼침하거나,

산란하다가 혼침하기를 계속한다.

 

 

사실 우리 인생은 이렇게 살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1.산란(散亂)

 

 

생각이 조잡한 것이 산란(散亂)이며

비교적 약간 산란한 것을 도거(掉擧)라 한다.

정을 닦는 사람이 어느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오히려 망상이 생겨서 머릿속 가득 사상, 연상, 기억, 攀緣 등이

 가득 차서 마음을 한 곳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것을 粗雜 散亂이라 한다.

마음이 그다지 산란하지 않아서 어는 한곳에 집중된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조금은 산란한 상태를 도거라 한다.

수행인들은 대개 이 도거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왜냐 하면 자기 자신은 약간의 산란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고

이미 정을 얻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처음수행을 시작한 사람이 만약 망념이 그치지 않고

또 마음이 어지럽고 기가 요동치는 상태라서 안정이 안 된다면,

먼저 운동을 한다든가 절을 해서 육체를 조절하고 기식을 유순하게 해서

다시 자리에 앉아 정을 닦아 가는 것이 가장 좋다.

망념이 날뛰는 것을 쫓아가지 말고

 

 

오직 하나에만 마음을 집중하도록 오랫동안 수행하면

자연히 집중될 것이다.

그런데 망념이 막 정지 되려는 때에 자기가 이제

지의 경계에 들어가려 한다는 생각이 떠오르게 되는데

이것이 또한 망념이다.

이 망념이 그치면 다른 망념이 생기고 이런 식으로 계속되어

지의 경계에 도달하기가 매우 어렵다.

정을 닦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 을 닦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입정에 집착하지 않아야 점차 지의 경계에 들어간다.

선정을 닦을 때 망념이 평소보다 많은 것 같지만

이것은 본래 자기에게 허다히 많은 망상을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것이니 고민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망념이 너무 많고 산란이 심해서 고요해지지 않는다면

數息 또는 隨息의 방법을 이용하거나 혹은 觀想의 방법을 쓰는 것도 좋다.

관상법은 배꼽 아래 단전이나 족심에 흑색의 광점이 있다고 관상하는 것이다.

이밖에 아미타불을 소리 내어 염송하는데

불자를 염할 때 이 불자와 함께 자신의 몸과 마음이 모두 끝없이 깊은 곳으로

떨어져 내린다고 생각하는 방법도 있다.

 

 

 

 

 


2.혼침(昏沈)

 

 

거칠은 혼침은 잠이 오는 것이고,

미세한 혼침이라야 혼침이라 할 수 있다.

몸이 피곤하면 잠이 오듯

정신이 피곤해도 수면의 욕망이 생긴다.

잠이 올 때는 억지로 정을 닦지 말고

잠을 푹 잔 후 다시 시도 해야한다.

만약 좌선 한 채로 잠자는 습관이 들면

영원히 성공할 수 없다.

혼침은 마음이 적적한 상태와 비슷하지만

어느 하나에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다.

어떤 망상도 별로 없는 듯 하나 혼미하며

심지어는 몸도 마음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이다.

혼침의 현상이 처음 생길 때는

마치 꿈속에 있는 듯 일종의 환상이 있을 수도 있다.

바꾸어 말하면 환상은

모두 이 혼침의 상태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의식이 분명치 않고

잠재의식만 활동하기 때문이다.

정을 닦는 사람은 혼침에 빠져들기 아주 쉬운데

만약 그것이 혼침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정을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쫑가파(宗喀巴)대사도

만약 혼침을 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죽은 후에 축생도에 떨어질 것이다.

어찌 조심하지 않겠는가? 라고 말한 바가 있다.

혼침을 극복하는 방법도 관상을 쓰는데

배꼽가운데 하나의 홍색 광점이 있고

이 광점이 점차 위로 올라와

정수리에서 흩어진다고 관상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전신에 힘을 모아 소리를 지르거나,

코를 쥐고 호흡을 참았다가

참기 힘들 때 코로 숨을 세게 내쉬는 것도 좋다.

혹은 찬물로 목욕을 하던지 운동을 하는 것도 좋다.

기공을 수련하는 사람은 혼침에 잘 빠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혼침을 완공이라고 해석하는데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완공은 나무나 돌처럼 생각이 전혀 없는 백치상태이다.

산란과 혼침이 없어지면

홀연히 마음이 어느 하나에 집중되어 흔들리지 않게 되는데

이때에는 반드시 경안의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경안현상은 어떤 사람은 머리끝에서 시작하고

어떤 사람은 족심에서 부터 일어나기도 한다.

정수리로부터 경안현상이 시작되는 사람은

정수리가 시원해지는 느낌 후에 전신이 시원한 느낌이 퍼지고

마음은 고요해지고 몸도 가볍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이때에는 몸이 마치 곧게 뻗은 소나무처럼 곧 바르게 된다.

 

 

마음과 인식대상이 모두 분명해지고

어떤 동정이나 혼침, 산란의 현상도 없게 된다.

이러한 경안의 경계에 도달하면 자연히 무량한 기쁨이 생기는데

단 깊고 짧은 차이는 있지만 이 상태는 쉽게 사라진다.


족심부터 경안이 시작하는 사람은

먼저 뜨겁거나 혹은 찬 느낌을 느끼게 되고

이것이 마치 하늘을 꿰뚫을 듯이 점차 정수리로 상승한다.

족심에서 시작된 경안현상은

정수리에서 시작된 경안현상보다 지키기도 쉽고 잘 사라지지도 않는다.

 

경안의 경계에 도달한 후에

고요한 곳에 홀로 거처하면서

더욱 수행에 노력을 하여야 한다.

만약 번잡한 곳에서 이곳저곳 신경을 쓰면

수행을 지속할 수 없고 경안도 점차 소멸된다.

만약 계속 노력해서 수행해 나가면

자기도 모르게 경안현상이 담박해지는데

사실상 이 현상은 경안이 소멸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경안에 머물었기에

처음처럼 강력히 느끼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이 경안에서 쉬지 않고 수행을 더하면 정력이 더욱 견고하게 된다.

 

 

이때에는 그지없이 맑고 밝은 느낌을 얻고 전신의 기맥도 갖가지 변화를 일으키는데

신체가 따뜻해지고 안락해지는 등 형용하기 어려운 미묘한 느낌이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안으로 묘약을 접촉한다는 것이다.

이 정도가 되면 세속적 욕망을 끊을 수 있다.

몸 안에 기기가 최초로 발동했을 때 생기가 활발해져서 체내에서 양기가 전신을 두루 흐르게 된다.

만약 이때에 마음이 하나에 집중한 것을 잊게 된다면

성욕이 왕성하게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각별히 조심하고 근신해야 한다.

이 위험한 과정을 극복하고 다시 수행에 매진해 나가다 보면

 이 발생하게 되고 또한 의 경지를 지나서 진일보 하게 된다.

이때에는 기식이 근원으로 돌아가고 마음이 지에 머문 적적한 경계에 들어가게 된다.

이 경계는 三昧戒가 설명을 금하는 범위이기에 언어와 문자로 설명하기 어렵다.

 

정을 닦는 사람이 이 정도의 경지에 도달하면 氣住脈停의 현상을 체험할 수가 있다.

소강절의 시중에 天根 月窟이 항상 왕래하니 三十六宮

다 봄이다 라는 구절이 이것이다.

듣기는 매우 쉬운 것 같아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참으로 이 경지에 도달하고 다시 계속해서 정에 머물러

 

 

있으면 다섯 가지 신통이 생긴다.

가장 어려운 것은 안통인데 일단 안통이 발생하면

나머지 네 가지도 계속 발생한다.

단 사람마다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단지 한 가지 신통만 나타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동시에 여러 가지 신통이 발생한다.

안통이 생겼을 때 눈을 뜨든 감든

시방허공, 산하대지, 미세한 먼지 속까지를 유리처럼 투명하게 볼 수가 있고,

자신이 보고자 하는 사물도 마음만 일으키면 즉시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신통에 미혹된다면 바로 마도에 빠진다.

 

그러나 불법의 중심은 定慧이다.

정을 기초삼아 정을 얻은 후에 그 얻었다는 생각조차 버려

생멸이 소멸되어 적멸이 현전 한다는 경계에 머무는 것이다.

이때에는 몸과 마음에 나타난 경계는 모두 소멸된다.

왜냐 하면 이러한 얻을 수 있는 경계는 心所가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生滅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엄경에 지금 비록 九次第 定을 얻어도 漏盡을 얻지 못하면

아라한을 이루지 못해 이 生滅變化하는 현상을 집착하여 진실한 것이라 오인한다.

만약 능히  을 버리고 적멸 속에 머물 수가 있다면

性空의 경계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소승이 목표하는 과위로서 我執을 버리고 人空에 도달한 경계이다.

 

 

여기에 대승은 소승의 공적마저 버리고

일체의 假有 實幻의 생멸과 왕래를 살피며

연기가 무에서 생겨 묘유의 을 이룬다는 것을 살펴야 한다.

최후에는 어떤 경계에도 머물거나 집착하지 않고 유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중도마저도 떠나 머물지도 떠나지도 않는 경계에서 등각과 묘각의 열매를 증득한다.

등각과 묘각의 열매를 얻고서야 비로소 일체의 중생이

본래부터 정속에 있어 근본적으로 정을 닦을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

비록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 없으면 기초가 없으므로

단지 그 이치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고승이 말하길

一尺을 말할 수 있는 것이 一寸을 실천하는 것만 못하다.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통렬히 자신을 반성해서 실천 수행을 최상으로 삼아야 한다.

 

 

 

參禪指月

[출처] 修定과 參禪의 核心方法|작성자 무극진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