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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뒤에 거대한 비밀조직이 있다.>

영원오늘 2007. 5. 31. 22:53

<사건 뒤에 거대한 비밀조직이 있다.>

이른바 '음모'를 밝히려는 책들과 연구서들이 최근 몇 년 사이에 급증했다.  

 

수많은 반론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핵심층 사람들은 나라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음모에 대해서 쓴 작가들은 다양한 조직에 대해 외교문제평의회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 CFR), 삼극위원회 (Trilateral Commission), 빌데르베르크 회의 (ilderberg Conference) 와 같은 '지역적' 수준으로 문제의 핵심을 좁히려는 경향이 있다는 의견이 대체로 지배적이다.

끔찍한 문제를 폭로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긴 하지만 그 작가들이 충분한 성과를 얻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들은 예외없이 위에 말한 음모조직들에 대해 썼지만, 그것들은 지역적인 조직들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이는 300인 위원회 (the Committee of 300) 가 미국 대중들로부터 성공적으로 정체를 숨길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이유들 중 하나이다.  '지역수준'의 기관활동을 감시 조정하는 중추적인 기구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던 게 분명하다.

런던에 있는 대영박물관에서 연구를 계속하면서 나는 서서히 어딘가에 사령탑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세상을 괴롭히는 수많은 비밀결사들을 지배할 세력을 가진 존재가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프랑스 혁명과 볼셰비키 (Bolsheviki) 혁명을 연구하면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이 두 혁명은 유럽과, 실제로는 세계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나는 프랑스 혁명이 제레미 벤담 (Jeremy Benthan)과 셀번 백작인 윌리엄 페티 (William Petty, the Earl of Shelburne)이 영국에서 조직하여 퍼뜨린 것임을 밝혀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을 조직하고 수행할 수 있는, 주모자급 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더욱 명백해졌다.

프랑스 혁명에서 런던의 비밀결사 콰토르 코로나티 로지 (the secret Quator Coronati Lodge)와 파리의 아홉 자매 로지 (the Nine Sister Lodge)가 맡았던 역할을 연구하면 할수록 나는 이 사건들을 지배한 거대한 조직이 있다는 걸 더욱 깨닫게 되었다.  프리메이슨단 (Freemasonry)의 한 조직인 복면 9인단, 그리고 페티와 벤담의 힘만으로는 프랑스 혁명을 이끌어 나갈 수 없었다.

프랑스 혁명과 볼셰비키 혁명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내자 나는 흥분했다.  두 혁명은 세계의 주요 종교인 기독교를 증오했던 것이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한 일루미나티 (Illuminati)의 주장을 연구하다가 이 교단의 명목상 창립자인 아담 바이스하우프트 (Adam Weishaupt)의 다음 성명서를 접하게 되었다.

"우리의 비밀을 밝힌다.  우리가 유일무이한 종교를 가진 척했던 것은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를 없애기 위해서이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사악한 자가 악한 일을 할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듯 현자도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이는 비밀결사에 의하지 않고서는 달리 이루어질 수 없다."

그들은 각 국가 정부의 요직을 은밀하게 차지할 것이며 사악한 자가 기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듯 이러한 수단을 자신들의 목적에 이용한다.  이 교단의 특별한 목표는 기독교를 말살하는 것이고 모든 시민정부를 전복하는 것이다."  (아담 바이스하우프트, 1776년 5월 1일)

두 나라 혁명의 주요 공격목표가 기독교라는 결론을 내렸을 때부터 나는 로지와 벤담, 페티, 레닌 (Lenin), 트로츠키 (Trotsky), 케렌스키 (Kerensky), 겔판트 (Gelfand)의 배후에는 이러한 충격적인 사건들을 완전히 조종할 수 있는 능력과 수단을 가진 강력한 조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거대한 비밀결사가 있어야만 프랑스 혁명과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을 것이다.  바이스하우프트 같은 사람들은 이런 조직의 존재에 대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얘기했지만 대개 무시당했다.  일반 대중들은 그런 조직이란 있지도 않았고 있을 리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많은 조짐이 있었다.  이스라엘 수상 데이비드 벤 구리온 (David Ben Gurion) 이 1962년에 한 연설보다 더 뚜렷한 조짐은 없다.

"나는 1987년이 되면 세계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 상상해봅니다.  냉전은 과거의 일이 될 것입니다.  러시아는 더 많은 자유를 구하는 지식층과 생활의 향상을 바라는 대중의 압력이 점점 강해지면서 점진적인 민주화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노동자와 농민의 영향력과 과학자의 정치적 중요성이 강해짐에 따라 미국은 계획경제의 복지국가로 바뀌게 되겠지요.  동서 유럽에서는 독립국가들이 연합을 이루어 사회민주주의 체제가 됩니다.  유라시안 연방국가를 이룬 소련 (USSR)을 예외로 하면, 다른 모든 국가들은 세계동맹에 통합되어 국제경찰군을 배치하게 되겠죠.  

모든 국가의 군대는 없어지므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사야의 예언에 따라 예루살렘에서는 UN이 성전을 세워 예언자가 모든 대륙의 연방국가 일을 돌보게 됩니다.  전세계 사람들에게는 고등교육을 받을 권리가 주어질 것입니다.  피임약을 통해 중국과 인도의 폭발적인 인구증가율은 서서히 떨어질 것입니다."

벤 구리온은 단일세계정부 (One World Government) 구상에 저항한 러시아를 분명히 지적했다. 스탈린 (Stalin) 은 그 생각에 굳세게 반대했던 것이다.  벤 구리온이 유럽연합의 예외로 러시아를 지적한 것은 스탈린의 저항이 계속되리라는 걸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누구든 벤 구리온의 연설을 읽으면 그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거대한 비밀결사를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이 관점에서 나는 볼셰비키의 러시아 정권 장악에 미국, 영국, 독일 정부가 보여준 협력을 매우 주목했다.  이른바 기독교 국가들의 절대적인 협조가 없었다면 레닌과 트로츠키와 같은 혁명당원들이 성공할 수 잆었을 거라는 사실은 곧 자명해졌다.  

나는 자문했다.  이를테면 왜 윌슨 (Wilson) 미국 대통령이 캐나다 당국의 토로츠키 체포에 간섭했을까?  대통령은 왜 캐나다 경찰에게 트로츠키를 석방하라고 지시했을까?  미국 대통령이 어떻게 명백히 반기독교적인 혁명당원과 깊이 관련될 수 있었을까?  트로츠키는 러시아로 가서 합법정부를 전복시키겠다고 공언하고 다녔다.

윌슨은 어떤 권력과 권위로 캐나다 경찰에 구속되었던 트로츠키의 석방을 요구하고 관찰시켰던가?  미국 대통령의 권한은 캐나다에 미치지 않을 게 분명한데, 그렇다면 상식 밖의 사태를 초래한 어떤 인물이나 거대한 단체가 있었던 게 아닐까?  이런 일은 아무리 돈을 많이 들여도 할 수 가 없다.  그런데도 이 격정적인 혁명가는 미국 여권과 큰돈을 지닌채 배를 타고 러시아로 떠났다.

체포되었던 그가 기적적으로 석방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내게 거대한 권력기관의 존재를 분명히 증명해주었다.  그것은 국경을 초월하여 자기 휘하의 각국 정부에게 자유로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조직이다.

파르부스 (Parvus) 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겔판트는 어떤 권리와 권위로써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에 독일 정부의 고문이 되었던가?  겔판트는 어디에서 베를린의 최고기관에 소개될 기회를 잡았을까?  독일 정부는 어떻게 그의 제의를 받아들여 볼셰비키 혁명이 한참 진행되는 와중에 레닌을 봉인된 열차에 태워 독일을 은밀히 통과시키도록 했을까?  한낱 '무명에서 입신하여' 이렇게 놀라운 성공을 거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적어도 이 사건은 강력하고 거대한 비밀조직이 있다는 인상을 남겼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았던 것을 훨씬 넘어서는 세력만이 트로츠키와 레닌의 이 서사시적인 여행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연을 믿는다.  이러한 일은 우연히 일언 것이라거나 서로 관련이 없는 일련의 사건들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주의깊게 연구하는 사람들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언뜻 보기에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일들도 그 이면을 살펴보면 어떤 밀접한 관련들이 있다.  그 연결고리들은 언재나 대중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지만 말이다.

거대한 비밀조직의 존재를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증거는 어쩌면 윌슨 대통령에게서 나왔는지는 모른다.  그의 건강이 급속히 쇠약해짐에 따라 민주당 지도층도 그가 차기선거에 출마하는 걸 거리게 되었다.  윌슨은 출마에 대한 생각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아내 엘렌의 죽음으로 그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녀를 간호했던 그레이슨 박사가 윌슨에게 그의 아내가 방금 죽었다고 말했을 때, 그는 백악관 창가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고 한다.

"오, 하나님. 난 이제 어쩌면 좋습니까?"  윌슨은 다음과 같이 거대한 비밀결사의 존재를 암시했다.,

"미국에서 상업과 제조업 분야의 거물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를 , 혹은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것은 잘 조직되고, 매우 은밀하고, 관찰력이 날카롭고, 잘 단결되고, 전파력이 강하므로 그 세력을 소리내어 비난하지 않는 게 좋다."

나는 그런 얘기를 정보업계에서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올림피언(Olympian)'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말을 하더라도 경외심을 품고 했다.  하지만 그 존재를 가리키는 것은 아주 많다.  우리가 잠깐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면 300인 위원회의 선임 대변자인 웰스 (H.G.Wells)의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는 단일세계정보 - 신세계질서 (New World Order)를 목표로 하는 위원회의 계획을 자주 늘어놓았다.  <공개된 음모> 에서 웰스는 이렇게 말한다.

"공개된 음모의 정치적 세계는 기존 정부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그 지위를 빼앗아 흡수 통합해야만 한다.  공개된 음모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전통을 이어받아 뉴욕을 지배하기 전에 모스크바를 지배해야 한다.  공개된 음모의 정체는 이제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그것은 세계종교가 될 것이다.  그룹들과 사회들이 느슨하게 뭉친 이 대규모 집단은 전세계의 인구를 집어삼켜 새로운 인류 공동체를 이룰 것이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내가 '공개된 음모'라고 부르는 이 조직은 궁극적으로 세계를 교육시키고 공공봉사에 직접 나설 것이다.  그것이 급선무이므로 계획된 세계국가가 여려 곳에서 모든 사람들 앞에 실현되지는 않는다.  사회적 혼란이나 공황이 일어나면 그것은 아주 급속히 찾아오게 될 것 같다.  가끔 나는 선전과 교육의 세대가 그것을 선도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인류를 위한 공통된 신앙과 법률이 필요하다."

나는 초거대 비밀조직의 존재를 충분히 입증했다고 생각한다.  그 이름은 '300인 위원회'라는 것도 알게 되엇다.  내가 '위원회'라고 말한 뒤에 나오는 이야기는 신중하게 읽어야 한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많은 일들 중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것을 철저히 연구하면 그게 문제의 핵심을 좇는 열쇠가 된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또한 미국의 대통령이 현실적으로는 우리의 적이 되어야 할 나라들의 지도자들과 손을 잡아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을 계속하여 읽어나가면 내가 300인 위원회에 대한 연구에 들인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지역적'사건이나 '지역적' 비밀 결사를 훨씬 뛰어넘는 의문들을 함께 풀어나갈 수 있다.  이 비밀조직들은 미국이 공식적으로 지지할 수 없는 파괴적 정책들을 미국 정부와 관계없이 대신 추진하고 있다.

참조 :

 

벤 구리온 (David Ben-Gurion 1886∼1973)

요약

이스라엘 정치가·시오니즘 지도자. 폴란드 프론스크 출생.

설명

이스라엘 정치가·시오니즘 지도자. 폴란드 프론스크 출생. 일찍부터 시오니즘 청년조직에 참가하였고, 1906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여 시오니즘운동의 활동가가 되었다. 1920년 노동총동맹을 결성하여 서기장이 되었고, 1930년 마파이당을 조직하여 1965년까지 지도하였다. 1933년 유대기관 집행부의 일원이 되었고, 1935년·1948년에는 의장직을 맡았다. 이스라엘 독립 후인 1948년 5월에는 임시정부의 총리 겸 국방장관이 되었고, 다음해 정식으로 취임하여 1953년까지 있었다. 1955∼1963년 다시 총리와 국방장관을 겸직하였고, 1970년에 정계를 떠났다. 이스라엘 독립의 상징적 존재이다

 

트로츠키 (Lev Davidovich Trotskiy 1879∼1940)

요약

러시아 혁명가. 남우크라이나 야노프카 출생.

설명

러시아 혁명가. 남우크라이나 야노프카 출생. 본명 브론슈틴(Bronshteyn). 부유한 유대인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오데사의 성바울로실업중학교에 입학, 뒤에 니콜라예프로 옮겨가 중등교육을 마쳤다. 이곳에서 <남러시아노동자동맹>을 조직, 1898년 다른 멤버들과 함께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 1902년 국외로 탈출해 런던에서 V.I. 레닌·G.V. 플레하노프 등이 편집하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기관지 《이스크라》의 기고가가 되었다. 1903년 제2회당대회에서 멘셰비키(소수파)에 속하여 레닌의 당조직론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우리의 정치적 임무(1934)》를 썼으나, 조직적으로는 볼셰비키(다수파)와 멘셰비키의 중간 입장이었다. 1905년 제1혁명 때 귀국, <페테르부르크노동자소비에트>를 지도, 나중에 그 의장이 되었다. 혁명 와중에는 H. 바르뷔스와 함께 영속혁명론을 발전시켜 《총괄과 전망(1906)》을 간행, 이 혁명을 총괄·체계화하였다. 같은해 12월 소비에트의 다른 멤버와 함께 체포되어 다시 시베리아로 유형되었으나, 도중에 국외로 탈출해 빈을 거점으로 A. 요페 등과 《프라우다》지를 발간하였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 때는 급진적 반전국제주의자 입장을 지켰으며, 1915년 반전파의 국제주의자가 모인 치머발트회의에 출석해 그 선언서 안을 기초하였다. 1917년 2월혁명 뒤 5월에 귀국, 볼셰비키당의 제6회대회에서 입당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 혁명파의 세력확대와 함께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어 지하 잠행 중이던 레닌과 함께 10월혁명을 지도하였다. 10월혁명 뒤 소비에트정부의 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으로서 세계대전의 모든 교전국에 민주적 강화를 제안, 브레스트 리토프스크에서의 대독일강화교섭 단장을 맡고, 독일쪽의 병합적인 최후통첩에 <전쟁도 않고, 강화에도 조인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1918년 군사인민위원, 당정치국원, 코민테른집행위원 등을 지냈다. 한편, 1919~1920년 노동에 군대적 규율을 도입하는 노동의 군대화와 노동조합의 국가화를 주장하였으나 당내 논쟁에서 패하였다. 1923년 레닌이 질병으로 정치무대에서 물러나자 트로츠키는 당내에서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창당멤버인 G.E. 지노비예프·L.B. 카메네프·I.V. 스탈린 3인조로부터 당반대파로 비판 받고, 1925년 군사인민위원 사임을 강요당하였다. 1926~1927년 지노비예프·카메네프 등과 합동반대파를 결성하였으나, 스탈린과 N.I. 부하린의 연합에 패하여, 1927년 당에서 제명되었다. 1928년 알마아타로 추방되었다가 1929년 국외로 추방당하였으며, 1937년 멕시코로 망명하였다. 1938년 코민테른에 대신하는 제4인터내셔널을 창설하였으나, 1940년 8월 20일 스탈린의 수하에게 암살되었다. 망명중 저서로 자서전 《나의 생애(1930)》 및 《러시아혁명사(1931~33)》, 소련사회를 분석·비판한 《배신당한 혁명(1937)》등을 간행하였다. 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문학과 혁명(1923)》등도 발표하였다.

 

케렌스키 (Alexander F. Kerensky 1881∼1970)

요약

옛 소련 정치가. 심비르스크 출생.

설명

옛 소련 정치가. 심비르스크 출생. 1904년 페테르부르크(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정치사건관계 변호사로 활동하였으며, 1912년 제4국회에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근로당 당수가 되었다. 제1차세계대전 동안에는 조국방위 입장을 취하였다. 웅변으로 유명해져 2월혁명에서 결성된 페트로그라드소비에트의 부의장이 됨과 동시에 임시정부의 법무장관으로서 소비에트에서 유일하게 입각하였다. 2월혁명 후에는 사회혁명당에 소속되었다. 그 뒤 제1차연립정부의 육해군장관이 되었고, <평화를 위한 전쟁>을 병사들에게 설득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제2·3차연립정부에서는 총리가 되었다. 그는 최고사령관 L.G. 코르닐로프 중심의 우파가 주장하는 장교권한과 군율강화를 인정하면서도 소비에트의 의향도 무시할 수 없어 대중운동에 대한 탄압을 신중하게 추진하려 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고 일어난 코르닐로프의 반란을 소비에트의 도움으로 분쇄했으며, 그 뒤 최고사령관을 겸임하였으나 전쟁·식량·토지 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대중의 지지를 잃었다. 10월혁명으로 V.I. 레닌 등이 권력을 잡자 케렌스키는 전선의 병사를 획득하기 위해 수도를 탈출해, L.G. 코르닐로프 장군의 부대와 함께 수도를 공격하였지만 패배하여 1918년 프랑스로 망명한 뒤, 1940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망명 후에는 러시아혁명 회상록과 사료집을 집필 편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