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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타 / 제13장. 삶에 법칙은 없다(2/2)

영원오늘 2007. 6. 19. 15:28

람타 / 제13장. 삶에 법칙은 없다(2/2)

제13장. 삶에 법칙은 없다(2/2)

 

인간이 법이나 계획, 규칙 등 구속하는 의식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때,
그는 자신과 전 인류를 사랑하도록 허용하는 존재의 기쁨과 평화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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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

최근에 두 사람이 나와 가까워졌다. 나와 접촉하여 살아가는 삶에서 그들의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다른 생에서 그들과 함께 살았던 적이 있는지 알고 싶다.

 

람타 : 그들이 당신의 삶에 다가온 이유는 그들이 거기 있기를 당신이 원하고 또한 그들이 원하기 때문이다. 그 이상 어떤 대단한 목적이 있겠는가?

 

마스터 :

그러나 내가 그들을 원했는지 확신을 가지지 못하겠다. 아마도 우리가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업보와 서로에게 무엇인가 배울 것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거기 있다고 생각했다.

 

람타 :

마스터, 당신이 알다시피, 어떤 관계 설정이 부족하면, 아마 전생에 함께 살았을 것이라는 낭만적인 가상을 하여 지금의 관계를 훨씬 아름답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업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간단한 단어 ‘필요’에 대한 종교적 설명일 따름이다. 당신은 생애마다 많은 이들과 함께 있을 필요가 있고, 그것을 즐기며, 또 그러한 것을 원할 것이다. 그러나 삶을 이어 나가면서, 똑같은 친구들만 있다면, 그 삶은 매우 단조롭고, 지루하고 답답할 것이다. 지금 그들과 가까이 지낸다면, 그 사실과 연관지어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마스터, 당신들은 다시 한번 더 함께 있다는 것이다... 오로지 다시 헤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위해서.

 

마스터 :

좋다. 당신이 말하는 바를 이해한다. 업보에 대하여 다른 의문이 있다. 어떤 일, 즉 살인이나 도둑질, 사고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들이 지난 생에서 했던 일을 상쇄시켜야 하는 업보로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배웠다. 이런 인과응보의 법칙에 대하여 당신이 어떻게 말할지 궁금하다.

 

람타 :

당신이 알아야 하고 모두 다 함께 이해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업보’라는 것은 하느님의 법이 아니다. 그것을 믿는 자들의 법이다.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신조를 믿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딱하게도 완성이라는 허황된 깨침을 얻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리고 한 생에서 무엇인가를 하면 다음 생에 다시 와서 그것을 보상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항상 ‘업보’ 탓으로 돌린다! 그것은 삶에 대한 아주 형편없는 설명이다. 마스터, 삶은 그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이다.

 

인과응보의 법칙은 오직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만 하나의 현실이 된다. 실재하는 유일한 법은 당신의 왕국에서 효력을 갖도록 당신이 허용한 것들이다. 법을 만드는 진정한 법제가는 자주적인 실체 개개인이다. 각자는 나름대로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에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진실이라고 하든 어떤 것을 법으로 창조하든 그대로 존재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과 왜곡된 이해를 토대로 스스로 상쇄의 법칙과 완성이라고 하는 이상을 만들었다.

 

업보를 믿는다면 당신은 분명히 자신이 창조한 대상에 의해 지배를 받을 것이다. 당신이 그 믿음에 힘을 실어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당신의 삶에서 유효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지난 생에서 당신이 했던 것들을 무효화하거나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당신은 틀림없이 다시 또 다시 돌아올 것이다.

 

나는 인과응보나 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을 성취가 아니라 한계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업보의 구속을 통하여 완성을 얻고자 애쓰는 이들은 원하는 바를 결코 이룰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업보를 갚는 동안에 다른 업보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여러 번 생을 반복하여도 있음의 상태, 하느님의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 채권자이기보다는 항상 채무자의 입장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완성 따위는 없다. 오로지 있음만이 있다. 생명의 있음 안에서 모든 것은 변화하고 매순간 진화한다. 그러므로, 완성의 상태는 결코 확립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오로지 있음만을 인식할 따름이다. 그것은 하느님 자신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법이나 이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있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외에 꼭 해야할 일은 없다. 업보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선택이고 당신의 창조다 - 당신의 경험을 얻기 위한. 그러나, 마스터, 제한적인 힘과 인과응보라는 환영을 당신 스스로 창조했다는 것을 알라. 업보라는 것을 받아들인 결과로 당신은 자신의 제한된 사고의 틀 안에 갇히게 될 것이다.

 

당신은 자유로운 영혼이자 영성이다. 당신은 어떤 진실, 어떤 현실, 어떤 환상을 선택하든지 간에 그 순간에는 창조하고 경험하는 것이 자유롭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어느 순간에든 그 꿈을 다시 창조할 수 있다. 그럴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업보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으나, 원함은 실재한다. 원함이라는 것은 변덕스럽다. 원할 땐 언제라도,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중에도 마음을 바꿀 수 있다.

 

살인이나, 사고, 강도 등은 형벌이 아니다. 마스터, 당신이 과거에 했던 것에 대한 앙갚음이 아니다. 그것은 심사숙고한 생각과 경험의 결과로서 당신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것도 아니며, 지속되는 상황도 아니다. 좀더 크게 본다면 그러한 일들은 그렇게 끔찍한 것만은 아니다. 되돌아보면 그것들은 훌륭한 스승이기도 하다.

 

당신이 무고한 사람들 일만 명을 죽인 학살자를 보았다고 하자. 당신은 중얼거릴 것이다. “아! 이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이렇게 잔학한 행위를 보고도 천사들은 왜 울지 않는가? 왜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에 대해서만 노래하는가?”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생명에 끝이 있다고 믿음으로써 자신들을 제한하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살된 이들은 당신이 말하는 ‘천국’이라는 곳으로 곧바로 들어 올려져, 그곳에서 더 나은 배움과 경험을 얻고, 그리고 내가 말하는 모험이라는 것을 겪게 될 것임을 천사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일만 명의 시체를 묻고 그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도, 하느님은 슬퍼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내일이 오는 것이다.

 

누가 당신의 운명을 설정한다고 생각하는가? 많은 이들이 모든 사람들을 조종하고 모든 일들이 일어나도록 조장하는 주관자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자기의 어깨에서 내려놓은 사람들이다. 오로지 당신만이 당신의 운명을 다스린다. 당신은 이 순간에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 따라 매순간 당신 삶의 창조자가 된다. 당신이 배워야 할 것은 이 순간 바로 지금이 영원한 것이고 진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지금이 계속됨으로 해서 매순간은 새롭다. 마스터, 매순간은 아주 새로운 것이다! 결코 어제에 의해 구속되는 것이 아니다. 내일을 실현하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당신이 창조한 현재이다. 그러므로, 이 순간에 당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이것이 당신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매순간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당신에게 준 것이다.

 

아무도 과거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방금 전이나 천년 전에 했던 어떠한 일에 대해서도 당신이 갚아야 할 것은 없다. 언제라도! 당신이 어떤 일을 한 순간 그 일을 함으로써 이해를 얻고 의도했던 이익을 실현했다.

 

과거라는 것은 경험해 버린 지금일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현재와 관련지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배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는 당신의 깊은 사고작용과 의도적인 계획에 따라 최선의 능력을 다하여 이 순간을 창조할 수 있는 지혜를 당신에게 제공하였다.

 

과거는 지나갔다. 마스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과거는 당신 안에 지혜로만 남아 있다. 이것이 과거가 당신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의 전생을 모두 통틀어서 현재가 가장 위대하다.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많은 앎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이 축적된 전체이다. 지식은 경험을 통해 얻고, 경험은 삶이라는 행위를 통해 얻은 것이다. 당신이 표현하는 순간마다, 당신은 새로이 창조하고 있다 - 지혜라고 하는 경험의 결정체와 감성을 얻기 위한 새로운 모험을 하고 있다.

 

오직 이 순간의 있음만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순간이다. 당신은 이 순간의 산물이다. 당신의 삶은 이 순간에 존속된다. 당신의 미래는 이 순간에 창조된다. 이 순간에 진정으로 존재하여 살아가려면 당신을 표현하고 확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법이나 규칙, 계율을 버리고 살아야 한다. 있음으로서 살아간다면,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뿐이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이 순간이다 - 바로 하느님이 살고 있는 때이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매순간 당신의 영혼이 추구하고자 하는 모험을 겪으면서 사는 삶, 매순간 당신이 더 위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그전에 겪어 보지 못한 것은 무엇이든지 경험해 보면서 사는 삶, 당신은 이러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떤 일을 해내기 위해서라든가, 아무도 그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당신이 할 것이라고 예정되어 있는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이 지상에 돌아온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완성에 이르기 위해 고군분투하라는 말을 당신은 듣고 있다! 당신이 항상 혼돈 상태에 있다면, 무엇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전적으로 선택에 의해 스스로 선택한 육신을 빌려 이곳에 돌아왔다. 이 창조적인 환영의 지상에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모친의 난자와 부친의 정자로부터 신체를 만들었다. 과거의 일을 보상하기 위하여 이곳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보다는 물질을 통하여 자신을 진화하게 하고 이 지상을 경험함으로써 얻어진 감성 안에서 자신을 완성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여기에 있는 것은,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당신이 그곳에 있기를 원한 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고, 그것은 그곳에 있고자 하는 당신의 의지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이다. 당신은 삶의 무대에서 지혜를 얻고, 그것을 이행하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이다. 당신이 이 환영을 끝까지 연출해 내고, 지혜로 영혼을 충족하는 데 당신의 영혼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경험하기 위해 이 생애에 여기에 와 있다. 당신이 얼마나 더 많은 생을 이곳에서 지내기를 원할지 모르겠지만. 이 지상에서 얻은 경험으로부터 풍부한 감성을 갖추게 되면, 당신은 더 이상 여기에 돌아올 필요가 없고, 돌아오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언제인지는 당신만이 결정하는 것이지, 다른 그 누구도 결정하지 않는다.

 

마스터, 당신은 하느님이 되기 위하여 이곳에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당신 존재에게서 모든 법과 독선적인 믿음, 모든 의례적인 관습을 제거하고, 사고과정에 아무런 제한이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무한한 표현의 자유와 결코 죽지 않는 육신, 그리고 존재의 평화와 기쁨을 얻고 싶다면,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삶이 완전히 무한하다는 것을 알라. 당신이 그것을 알게 될 때, 그렇게 될 것이다. 당신의 존재 안에서 당신이 무엇을 원하든지, 당신이 무엇을 진실이라고 알든지, 그대로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당신의 왕국에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유일한 법이다.

 

당신이 자신을 용서하기만 한다면, 지금이나 다른 어느 생에서나, 생각하고 행했던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당신이 빚을 갚아야 할 필요는 결코 없다는 것을 알라. 자신을 용서하는 것은 당신 자신인 하느님을 표현하는 것을 제한하는 죄의식이나 판단을 당신의 영혼으로부터 제거하는 신성한 행위이다. 일단 당신 자신을 용서했다면, 이제 이 생이나 앞으로 오는 생은 존재를 경험하기 위한 지금 이 순간의 일부일 뿐이고,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모든 것의 미래라는 것을 알라.

 

당신은 영원하며,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과 당신이 유일하게 잘못한 것은 당신이 잘못된 무엇인가를 했다고 믿는 것임을 알라.

 

당신 자신을 사랑하라, 마스터. 자신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무엇을 느끼고 싶어 하는지 귀를 기울이라. 그리고, 지루해질 때까지 온 마음으로 그것을 좇아가라. 지루하다는 느낌은 그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웠고, 이제 다른 모험을 추구할 때가 되었다는, 당신의 영혼으로부터 전해져 온 신호이다. 당신의 내면에 있는 느낌에 귀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당신이 되고자 하는 어떤 것도 자유롭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어떠한 법이나, 가르침, 혹은 어떤 실체에게도 응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라. 지금, 그리고 지금에게서 당신이 얻는 느낌이 언제나 변함없이 중요한 전부이다.

 

법이 없는 상태가 되어라. 그것은 분별없이 무법적으로 행동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당신의 목에서 밧줄을 제거하여 숨을 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당신이 자신에게서 법이나, 교리, 제한된 믿음을 제거한다면, 그때 당신은 스스로에게 하느님 자신인 자유와 무한이 되도록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할 때, 당신은 자신과 생명을 창조하고 거듭나게 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 이제 당신이 여기 있는 이유는 당신이 무엇인가를 했던 누군가에게 보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살아 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험은 순간순간 새롭게 펼쳐진다.

 

살면서 행복하라. 그것은 하느님이 당신에게 늘 요구해 온 유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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