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h Piaf - Non, je ne regrette rien - (original)
Non, je ne regrette rien Non, rien de rien 아뇨, 전혀요 Non, je ne regrette rien 아뇨,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Ni le bien qu'on m'a fait 좋았던 일도 Ni le mal; 나빴던 일도요 Tout ça m'est bien égal 내겐 다 똑같습니다
Non, rien de rien 아뇨, 전혀요 Non, je ne regrette rien 아뇨,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C'est payé, balayé, oublié 마땅히 일어날 일들이었고, 쓸려가 잊혀졌지요 Je me fous du passé ! 모든 과거는 벗어 던졌어요 Avec mes souvenirs 기념품들이나 좀 챙겨다 J'ai allumé le feu 등불을 밝혀야겠군요 Mes chagrins, mes plaisirs 쓰라린 눈물도, 갈채도 Je n'ai plus besoin d'eux 더이상은 필요치 않습니다 Balayées les amours 다 쓸어버렸어요, 사랑도 Et tous leurs trémolos 그 떨림도 모조리 Balayés pour toujours 아주 쓸어버렸습니다 Je repars à zéro 다 비우고 다시 시작하렵니다 Non, rien de rien 아뇨, 전혀요 Non, je ne regrette rien 아뇨,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Ni le bien qu'on m'a fait 좋았던 일도
Ni le mal; 나빴던 일도요
Tout ça m'est bien égal 내겐 다 똑같습니다 Non, rien de rien 아뇨, 전혀요 Non, je ne regrette rien 아뇨,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Car ma vie, car mes joies 나의 삶, 나의 기쁨은 Aujourd'hui, ça commence avec toi 바로 오늘 당신과 함께 시작될 테니
<장미빛 인생 designtimesp=18960>의 작사는 에디뜨 삐아프 자신이었고, 작곡은 삐에르 루이기(Pierre Louiguy)였다. '이 샹송이 태어난 것은 1944년 10월 12일이었다.'고 작곡자 루이기는 말하고 있다. 그는 후에 <장미빛 벚나무와 하얀 사과나무 designtimesp=18961> 등을 작곡한 사람으로, 당시 에디뜨 삐아프와 친교를 맺고 있었다. 그 날은 바로 그의 딸 쟈닌느의 세례일이었고, 대모(代母)는 삐아프였다. 에뜨왈 광장과 가까운 아나똘 들 라 뽀르뜨 거리에 있었던 그녀의 집에서 세례 후의 잔치가 벌어져, 15명 정도의 사람들이 식탁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모두 잘 먹고 잘 마셨다. 잔치가 끝날 무렵에 삐아프는 일어나 루이기에게 '이리 오세요. 샹송을 만듭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옆 방의 피아노로 루이기는 몇 개의 음표를 쳤는데, 갑자기 영감(靈感)에 사로잡힌 것처럼 삐아프는 큰 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나는 장미빛 인생을 봅니다.'로 시작해서 샹송 <장미빛 인생 designtimesp=18962>은 겨우 15분 동안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한편 삐아프 자신의 전기(傳記)에 의하면, 그녀는 이 노래의 작사·작곡을 모두 자신이 했다고 말하고 있다. 작곡자 협회의 회원으로 인정받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루이기의 이름을 빌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는 정설(定說)은 다음과 같다. 1945년 5월 여성 가수 마리안느 미셸이 삐아프에게 새로운 샹송이 필요하다고 부탁하러 왔을 때, 그녀는 이미 <장미빛 인생 designtimesp=18969>의 최초 멜로디를 다 썼으나 가사는 아직 되어 있지 않았다. 겨우 당일 마음에 떠오른 '그가 나를 껴안으면, 나에게는 사물이 장미빛으로 보이네'라는 가사를 보여 주었는데, 미셸은 '나에게는 인생이 장미빛으로 보인다.' 라고 고쳤다. 이리하여 불후의 명작 <장미빛 인생 designtimesp=18970>이 태어났다. 마르그리뜨 모노는 가사가 시덥지 않다고 혹평했으나, 이것을 가지고 돌아간 마리안느 미셸은 1945년 11월 에뜨왈과 가까운, 자기가 경영하는 꺄바레에서 이 노래를 초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삐아프 자신도 46년에 녹음했고, 악보는 47년에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