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통의 의미를 알고 싶다면 [하도겸 칼럼]
[뉴시스] 입력 2014.03.19 07:06
【서울=뉴시스】하도겸 박사의 ‘삶이야기 禪이야기’ <82>
사람들은 흔히 불교이야기를 할 때,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증거 가운데 하나로 육신통(六神通)을 말하곤 한다. 한자의 의미로는 신통력의 신(神)은 불가사의한 것이고, 통(通)은 걸림이 없는 무애(無礙)를 뜻하므로 신묘하고도 걸릴 것이 없는 신통력을 말한다. 삼국유사 어산불영조에도 “그 때 석가여래는 여러 비구에게 영을 내려 여섯 신통력을 얻은 이에게 자기의 뒤를 따르게 했다”라는 보도가 있었다. 결국 석가모니 생전에도 비구들이 육신통을 가졌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불경 가운데 구사론(俱舍論)에 의하면,
첫째 신족통(神足通) 또는 여의통(如意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어디든 왕래할 수 있으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할 수 있는 신통을 말한다.
둘째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구애됨이 없이 무엇이나 꿰뚫어 밝게 볼 수 있는 신통을 말한다.
셋째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무슨 소리를 잘 분별해서 들을 수 있는 신통을 말한다.
넷째 타심통(靑心通)은 중생의 마음속에서 생각하는 바를 다 알 수 있는 신통이다.
다섯째 숙명통(宿命通)은 자신뿐만 아니라 육도(六道)에 윤회하는 모든 중생의 전생과 금생, 내생의 일을 다 알 수 있는 신통이다.
마지막으로 누진통(漏盡通)은 번뇌와 망상이 완전히 끊어지고 소멸하여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신통을 말한다.
제1통에서 제5통까지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불교외의 외도(外道)나 신선, 천인(天人), 귀신들도 얻을 수 있고 약을 쓰거나 주문을 외워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오직 제6통 누진통만은 아라한이나 불보살만이 지닐 수 있다.
이에 대해
선종의 임제 스님은 육신통은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여섯 가지 경계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전혀 미혹당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결국, 육신통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신비능력과는 달리 불교적으로 해석할 부분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땅인사람’의 저자 현일 박재봉은 지금까지 견해와는 전혀 다른
신족통은 축지법이 아니라 더럽고 추하고 힘든 곳에도 갈 수 있는 실천입니다.
천안통은 안목입니다.
천이통은 겸손입니다.
타심통은 타인에 대한 배려입니다.
숙명통은 만족을 알고 자신의 길을 무쏘의 뿔처럼 가는 것입니다.
누진통은 고통과 번뇌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견디고 인내해 감내해야 할 일을 완성하는 책임감입니다.
신비하고 초자연적 능력은 배제합니다.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신비능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도 마음 닦기입니다. 능력을 생각하지 말고 왜 그런 능력이 있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나 왜 내가 그런 능력을 바라는지를 아는 게 먼저라고 봅니다.
즉 보이면 왜 보아야 하는지, 알면 왜 알아야 하는지 항상 자신 내면의 성찰입니다”라고 육신통을 설명한다.
천안은 나의 욕심이 아니라 하늘이 보는 것인데 단순히 사물을 보는 것이겠는가? 법을, 이치를, 세상을, 나를, 남을, 그 사이를, 그 뒤를 보아야 하는 결국은 안목이며 관법이며 견성이며 인식의 확장을 말하는 깨우침이다. 어떻게 볼 것인가? 왜 그렇게 보는가? 왜 무슨 의도로 그렇게 봅니까? 이것을 보고 알고 또 행동하면 천안통이 열린 것이다. 하늘처럼 세상을 볼 수 있다면 더 이상의 눈은 필요 없고 오직 행동할 것만 남는다. 부처님과 같은 보리행만 필요할 뿐이다.
천이통은 말을 듣고 손짓을 듣고 몸짓을 듣는 것이다. 아이의 말을 듣고 아랫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다. 말대꾸한다고 나무라거나 대화를 거부하거나 비판을 수용 못 하고 억지로 따르게 하거나 의견이 다른 상대방을 통제하거나 다른 사상과 종교를 허용 못 하는 것 모두 듣지 못하는 것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이순(耳順)과 같다. 관세음처럼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듣는 것이고 이해해 주는 것이다. 귀를 기울이면 너무도 많은 것이 들릴 텐데, 누구나 듣지만 정말 듣는 이는 없다.
타심통은 대학의 혈구지도(絜矩之道)나 불가의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하는 것이다. 내 마음을 비쳐 남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내가 싫은 것은 대개 남도 싫어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도 좋아한다. 때론 아닌 것도 있지만, 그것까지 알면 제대로 열린 것이다. 말 그대로 남의 생각을 알고 싶다면 차라리 다른 사람의 생각을 거울이라고 생각하고 타인의 마음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음을 알면 된다. 내 마음속에 비친 타인의 마음은 내 마음의 그림자다. 타인의 마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내 마음을 보는 것이다. 내 마음의 빛이 상대를, 세상을 비치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와 나를 비추는 것이다. 회광반조(廻光返照)의 뜻이 여기에 있다.
운명은 개척하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따르는 것도 아니다.
내가 원하며 바라왔던 것이며 내가 이루어냈고, 이루어야 하는 업이다.
능동적, 긍정적으로 뜻을 가지고 살면 운명은 숙명이 된다.
숙명은 다른 사람이 아닌 오직 내가 알고 가야 하는 길이다.
타인의 명에 간섭하거나 알려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남의 운명은 남의 운명이고 나는 나다.
스스로 뜻을 세우고 이루고 하늘 아래 오직 홀로 가는 것이 명이며 이걸 아는 것이 숙명통이다.
신족통은 원효보살 소성거사가 전염병이 도는 마을에 직접 들어가 치료를 하는 것이다. 전염될까 봐 아무도 두려워서 가지 못하는 자기를 너무 위하는 마음을 넘어서 더럽고 힘들고 굴욕적이라도 그곳에 겸허하게 갈 힘이다. 소성거사가 스스로 선택한 삶이다. 소성거사는 자기를 속이고 세상을 속이며 부질없는 생각이나 이론을 들어 변명하면서 현실에서 도망가지 않았다. 두려워서 도망가려는 마음이 드는 그 순간에 그가 있어야 하는 것을 바로 그곳에서 깨닫고 그렇게 실천한 것이 바로 신족통이다.
우리 주변에는 육체적 고통과 자존심과 뜻의 능멸과 마음도 버리는 상황의 고난도 이겨내며 세상을 밝히는 분들이 있다. 번뇌로 망상으로 힘겨워하지 않고 윤회를 이겨내는 것이 누진이 아니다. 그렇게 힘들고 괴로워도 보살행의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이 누진이고 윤회의 고통도 막지 못하는 그 서원이 누진이다. 지장보살도 지옥에서 여러 중생 고통의 전이로 스스로 힘들고 같은 아픔을 느끼면서도 이겨내고 그들을 극락으로 인도하고 있다. 보살도 부처는 아니라서 불퇴전은 아니니 순간순간 퇴보의 위험에 노출되고 있지만, 오직 서원만을 지킬 수 있다면 이게 바로 누진통이다.
부처님의 육신통은 현일 박재봉의 견해대로 모두 마음공부인데 동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박재봉은 1972년 태어나 영동군 양산면 근처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여동생과 서울로 왔다. 중학교 2학년 때 소설 단을 읽고 도의 길을 걸었다. 1998년 외삼촌과의 만남으로 수련이 급진전했다. 개인적으로 득도의 순간은 없었지만, 작은 결실이 생겨 왕성하게 블러그(http://gusdlfwp.blog.me/)와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하늘공부’ 1·2·3과 ‘땅인사람’ 1·2, ‘제라울’(가마오출판사 : www.gamao.co.kr) 등이 있다. 이글의 후반부는 모두 박재봉의 『하늘공부』1의 내용을 편의상 요약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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