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정로 (禪 門 正 路 )
1. 見性卽佛 2. 衆生佛性
3. 煩惱妄想 4. 無上正覺
5. 無生法忍 6. 無念正宗
7. 保任無心 8. 寤寐一如
9. 死中得活 10. 大圓鏡智
11. 內外明徹 12. 常寂常照
13. 解悟漸修 14. 分破分證
15. 多聞知解 16. 豁然漏盡
17. 正眼宗師 18. 玄要正偏
19. 消滅佛種
退翁 性徹 著
緖言
靈鷲山頂에서 世尊이 拈花함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함이요, 少林岩窟에서 二祖가 三拜함은 모난 나무로 둥근 구멍을 막음이니, 古今 善知識들의 玄言妙句는 모두 눈속에 모래를 뿌림이다.
熱喝과 痛棒도 衲僧의 본분이 아니거늘 어찌 다시 눈 뜨고 꿈꾸는 客談이 있으리오마는, 진흙과 물속에 들어가서 자기의 性命을 不顧함은 古人의 落草慈悲이다.
正法相傳이 歲久年深하여 種種 異說이 橫行하여 祖庭을 황폐케 하므로 老拙이 감히 落草慈悲를 云謂할 수는없으나, 萬世正法을 위하여 眉毛를 아끼지 않고 正眼祖師들의 垂示法門을 採集하여 禪門의 正路를 指示코자 한다.
禪門은 見性이 근본이니 見性은 眞如自性을 徹見함이다. 自性은 그를 엄폐한 根本無明 즉 第八阿賴耶의 微細妄念이 永絶하지 않으면 徹見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禪門正傳의 見性은 阿賴耶의 微細가滅盡한 究竟妙覺 圓證佛果이며 無餘涅槃 大圓鏡智이다.
이 見性이 즉 頓悟이니, 寤寐一如·內外明徹·無心無念·常寂常照를 내용으로 하여 十地等覺도 禪門의 見性과 頓悟가 아니다. 따라서 悟後保任은 究竟佛果인 涅槃妙心을 護持하는 無碍自在의 不思議 大解脫을 말한다.
見性 방법은 佛祖 公案을 參究함이 가장 첩경이다. 佛祖 公案은 極深難解하여 自在菩薩도 茫然不知하고 오직 大圓鏡智로써만 了知하나니 公案을 明了하면 自性을 徹見한다. 그러므로 圓證佛果인 見性을 할 때까지는 公案 參究에만 盡力하여야 하나니, 圓悟가 항상公案을 參究하지 않음이 大病이라고 苛責함은 이를 말함이다.
公案을 타파하여 自性을 徹見하면 三身四智를 圓滿證得하고 全機大用이 일시에 現前한다. 이것이 殺活自在하고 縱橫無盡한 正眼宗師이니 正眼이 아니면 佛祖의 慧命을 계승하지 못한다. 馬祖 제자八十名 中에 正眼은 數三人이라고 黃檗이 지적함과 같이 正眼은 極難하다. 그러나 箇箇가 본래 毘盧頂上人이라 自輕自屈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면 正眼을 豁開하여 出格大丈夫가 되나니 참으로 妙法中 妙法이다.
무릇 異說 中의 一例는 頓悟漸修이다. 禪門의 頓悟漸修 元祖는 荷澤이며 圭峯이 계승하고 普照가 力說한 바이다. 그러나 頓悟漸修의 大宗인 普照도 頓悟漸修를 詳述한 그의 [節要]벽두에서 荷澤은是知解宗師니 非曹溪嫡子라고 斷言하였다. 이는 普照의 독단이 아니요 六祖가 授記하고 叢林이 공인한 바이다. 따라서 頓悟漸修思想을 信奉하는 者는 전부 知解宗徒이다.
원래 知解는 正法을 장애하는 최대 禁忌이므로 禪門의 正眼祖師들은 이를 통렬히 배척하였다. 그러므로 禪門에서 知解宗徒라 하면 이는 衲僧의 생명을 상실한 것이니 頓悟漸修 思想은 이렇게 可恐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렇듯 異說들의 피해가 막심하여 正法을 성취하지 못하게 되나니, 參禪高流는 이 책에 수록된 正傳의 法言을 指針 삼아 異說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勇猛精進 廓徹大悟하여 古佛도 未到하는 超群正眼을 圓證하여 荷澤·圭峯과 같은 知解宗徒가 되지 말고 馬祖 * 百丈과 같은 本分祖師가 되어, 曹溪嫡子로서 佛祖의 慧命을 계승하여 永劫 不滅의 無上正法을 宣揚하기를 祈願하는 바이다.
허허, 구구한 잠꼬대가 어찌 이렇게 많은고!
억!
둥근 달 밝게 비친 맑은 물결에
뱃놀이 장단 맞춰 금잉어 춤을 춘다.
辛酉 仲秋佳節 伽倻山 白蓮庵에서
退翁 性徹 識
一. 見性卽佛
재得見性하면 當下에 無心하야 乃藥病이 俱消하고 敎觀을 咸息하느니라(宗鏡
錄 一 標宗章)
見性을 하면 卽時에 究竟無心境이 現前하여 약과 병이 전부 소멸되고 敎와
觀을 다 休息하느니라.
* 眞如慧日의 無限光明은 항상 法界를 照耀하고 있지마는, 三細六楸의 無明
暗雲이 掩蔽하여 衆生이 이를 보지 못한다. 雲消長空하면 靑天이 現露하여
白日을 보는 것과 같이, 三細의 極微妄念까지 滅盡無餘하면 廓徹大悟하여
眞如本性을 洞見한다. 이에 一切妄念이 斷無하므로 이를 無念 또는 無心이
라 부르나니, 이것이 無餘涅槃인 妙覺이다.
그러므로 起信論에서 見性은 遠離微細한 究竟覺이라 하였으며, 元曉 賢首도
그들의 起信論疏에서 金剛已還의 一切衆生은 未離無明之念이라 하고 또한 佛地는 無念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金剛 즉 等覺 以下의 一切衆生은 有念有心이니 等覺도 佛陀의 聖敎와 法藥이 필요하며,
藥病이 俱消하고 敎觀을 咸息한 無念無心은 無明이 永滅하여 自性을 徹見한 妙覺뿐이다.
古人이 말하기를 [佛說一切法은 爲度一切心이라 我無一切心커니 何須一切法이리오]하였으니, 과연 그렇다.
諸佛의 一切法門은 群生의 衆病을 치유하기 위한 處方施藥이다.
無病健康한 者에게는 起死回生하는 神方妙藥도 필요없는 것과 같이,
凡夫心 外道心 賢聖心 菩薩心等 無量衆生의 本病인 一切 心念을 斷然 超脫한
究竟無心地의 大解脫人에게는 아무리 深玄奧妙한 佛祖의 言敎와 觀行이라도 소용없다.
그리하여 法藥과 衆病이 俱消하고 聖敎와 妙觀을 咸息한 究竟無心地만이 見性이니, 이것이 無上大道를 徹證한 絶學無爲閑道人의 心境이다.
如楞伽經偈에 云하되 諸天及梵乘과 聲聞緣覺乘과 諸佛如來乘에 我說此諸乘은
乃至 有心轉이니 諸乘은 非究竟이라 若彼心滅盡하면 無乘及乘者하야 無有乘建
立이니라 我說爲一乘이나 引導衆生故로 分別說諸乘이니라(宗鏡錄 一 標宗章)
楞伽經 偈頌에 이렇게 말했다. 諸天 및 梵衆乘과 聲聞 緣覺과 諸佛如來乘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諸乘들은 有心中의 轉變이므로 諸乘은 究竟無心이 아니라고 말한다.
만약에 그 各種의 有心이 滅盡하면 諸乘과 그 乘을 依止할 乘 者도 없어 乘이라 하는 名稱조차 建立할 수 없는 大無心地이다.
이는 諸乘을 초월한 最上唯一乘이나 衆生을 引導하기 위하여 方便으로 分別하여 諸乘을 說 한다.
* 諸天梵衆과 聲聞緣覺의 諸乘은 말할 것도 없고 諸佛如來乘도 有心轉이어서 究竟이 아니니,
諸佛如來乘까지 滅盡한 無餘涅槃인 究竟無心이 즉 見性이다.
이것은 方便으로 一乘이라 呼稱하나 이 一乘은 三乘相對의 一乘이 아니요
諸佛如來乘까지 초월하여 無乘及乘者인 最上乘을 표현한 假名이니 이는 最終究竟의 深深玄境인 大無心地를 말한 것이다.
故로 先德이 云하되 一예在眼하니 千華亂墜하고 一妄이 在心에 恒沙生滅이라 예除華盡하고 妄滅證眞하니 病差藥除하고
氷融水在로다 神丹이 九轉하니 點鐵成金이요 至理一言은 轉凡成聖이라 狂心이 不歇타가 歇卽菩提요 鏡淨心明 하니
本來是佛이니라(宗鏡錄 一 標宗章)
그러므로 先德이 말했다. 一點障예가 眼膜을 덮으니 千種幻華가 擾亂하게 墜 落하고, 一陣妄念이 心中에 일어나니
恒河沙數의 生滅이 發動한다. 眼예를 除去하니 幻華가 消盡하고, 妄念이 永滅하여 眞性을 證得하니
千病이 快差하여 藥을 除却하고, 妄念의 氷塊가 消融하여 眞性의 湛水가 流通한다.
神靈한 丹藥을 九番轉단하니 生鐵을 點下하여 眞金으로 變成하고, 至極한 妙理는 一 言片句로 凡夫를 轉換하여 聖者로 成就한다.
狂奔하는 妄心을 休歇치 못하다
가 休歇하니 즉 無上菩提요, 玄鏡이 淸淨하여 本心이 明徹하니 本來로 大覺世 尊이니라(以上 三段의 原文은 계속된 것임).
* 三細六楸의 一切妄念이 頓然 消滅되고 常住不變하는 眞如本性을 豁然證得 하니, 이것이 곧 妄滅證眞한 究竟無心인 見性이다. 病差藥除하여 無事無爲 한 大解脫人으로서 氷消水淨한 眞性의 大海에서 游泳自在하니, 天上人間에 獨尊無比한 大覺如來며 西天此土에 燈燈相續한 正眼宗師이다.
이로써 見性은 妄滅證眞하니 藥病이 俱消하고 敎觀을 咸息하여 諸佛如來
乘까지 滅盡한 無餘涅槃인 究竟大無心地임이 了然明白하다.
宗鏡錄의 著者 永明은 佛祖正傳인 大法眼의 三世嫡孫이다. 臨濟正脈인 中
峯이 [古今을 通한 天下의 師表는 永明을 두고 누구겠는가(古今天下之師는
捨永明하고 其誰歟아--中峯 山房夜話 上)]라고 讚歎하였다.
宗鏡錄 百卷은 宗門의 指針으로 龍樹 이래의 最大著述로서 讚仰된다.
晦堂은 역시 臨濟正傳인 黃龍派의 開祖 南禪師의 上首弟子로서 佛祖의 正脈으로 天下가 推仰한 바이다.
항상 宗鏡錄을 愛重하여, 寶覺(晦堂)禪師가 年臘이 많으나 오히려 宗鏡錄을 手中에서 놓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이 冊을 늦게 봄을 恨한다]라 하고 其中에 要處를 撮約하여 三卷을 만들어 冥樞會要라고 이름하니
世上에서 盛히 流傳하다 (寶覺禪師가 年臘이 雖高나 手不釋卷曰吾恨見此書晩矣로다 其中에
因撮其要處하야 爲三卷하고 謂之冥樞會要라 하니 世盛傳焉하니라--人天寶鑑 下).
이렇게 宗鏡錄中의 所論은 古今을 통하여 그 누구도 異議할 수 없는 宗門의 定論으로 되어 있다.
如菩薩地盡하면 滿足方便하야 一念相應하야 覺心初起하야 念無初相이라 以遠
離微細 念故로 得見心性하야 心卽常住일새 名究竟覺이니라(起信論)
菩薩의 終點인 十地가 了盡하면 修道의 方便이 圓滿具足하여 無間道인 一念
에 相應한다. 妄心의 初起生相을 覺知하여 心地에 初相이 全無한지라 初起生
相의 極微細妄念을 遠離하므로 自心의 本性을 徹見하여 心性이 湛然常住할새
究竟覺이라 부른다.
* 等覺의 金剛喩定에서 根本無明인 極微細妄念을 斷盡하면 豁然大悟하여 眞
如本性을 洞見하나니 이것이 究竟覺인 成佛이다. 이는 大乘佛敎의 總論인
起信에서 見性 즉 究竟覺이며 成佛임을 明證한 것이다.
業相動念이 念中에 最細일새 名微細念이니라 此相이 都盡하야 永無所餘故로
言永離니 永離之時에 正在佛地니라 前來三位는 未至心源일새 生相이 未盡하야
心猶無常이라가 今至此位하야는 無明이 永盡하야 歸一心源하야 更無起動故로
言得見心性이니 心卽常住하야 更無所進일새 名究竟覺이니라(元曉 起信論疏)
無明業相이 動念하는 것이 妄念中에서 가장 微微하므로 微細妄念이라 呼稱
한다. 이 微細妄念이 전부 滅盡하여 영원히 그 餘跡이 없으므로 영원히 離脫
한다고 한다. 이 微細妄念을 永永 離脫한 때에는 正確히 佛地에 머물게 된다.
前來의 三位는 心源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生相이 滅盡하지 않아서 心中이
아직 生滅無常하다가, 此位에 이르러서는 永永 滅盡하여 一心의 本源에 歸還
하여 다시는 起滅動搖함이 全無하므로 見性이라 稱言한다. 見性을 하면 眞心
이 廓然常住하여 다시는 前進할 곳이 없으므로 최후인 究竟覺이라 呼名한다.
業識動念이 念中에 最細일새 名微細念이니 謂生相也라 此相이 都盡하야 永無
所餘故로 言遠離요 遠離虛相故로 眞性이 顯現하나니 故로 云 見心性也라 前三
位中에는 相不盡故로 不見性也라(賢首義記 卷中末)
業識이 動念하는 것이 가장 微細하므로 微細妄念이라 呼名하나니 生相을 말
함이다. 이 最初生相이 전부 滅盡하여 永永 그 殘餘가 없는 故로 遠離라 하
며, 虛妄幻相을 遠離한 故로 眞如自性이 곧 顯現하나니 故로 見性이라고 한
다. 前三位中에는 最初生相이 滅盡하지 않았으므로 見性이라 하지 않는다.
佛地는 無念이니라(元曉疏 賢首義記)
佛地는 微細念까지 永盡한 無念이다.
* 元曉와 賢首는 敎宗의 權威이다. 微細無明인 第八阿賴耶識이 滅盡하면 無
餘涅槃인 佛地 즉 究竟覺이어서 이것이 無念 즉 無心이며 見性임은 佛敎의
根本原理이므로, 元曉 賢首도 異議가 있을 수 없으며 宗鏡의 所論과 완전
一致함은 당연한 歸結이다.
그리고 前三位라 함은 不覺의 十信, 相似覺의 三賢, 隨分覺의 十地를 말
함이니, 三賢 十地가 전부 無明業識의 幻夢中에 있으므로 見性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起信論中의 證發心도 無分別智를 얻어서 眞如라고 假
名하나 業識心이 微細起滅하여 無明이 未盡하였으므로 見性이 아니다.
十地諸賢(聖人)이 說法은 如雲如雨하여도 見性은 如隔羅곡이니라(汾州--傳燈
錄二十八 雲門--傳燈錄十九)
十地의 諸賢(聖人)들이 說法하기는 如雲如雨하여도 見性은 羅곡을 障隔함과
같느니라.
* 汾州와 雲門은 三學에 該通한 絶世의 正眼이다.
汾州 雲門뿐 아니라 十地未見性은 宗門正傳의 通則이니 究竟覺 즉 如來地
만이 見性인 緣故이며, 宗門에서 말하는 十地는 權敎十地가 아니요 一乘十
地이다. 十地 以後에 賴耶의 微細를 永斷하여야 見性이라 하니 일반적으로
는 不可能한 것 같으나, 夢中一如가 되면 華嚴七地요 熟眠一如가 되면 賴耶
微細의 自在菩薩位이다. 禪門 正眼宗師 中에 熟眠一如位를 透過하지 않고
見性이라 呼稱한 者는 없다. 이는 究竟覺을 成就한 所以이니 寤寐一如編에
서 詳述한다.
如明眼人이 隔於輕곡하고 覩衆色像하야 究竟地菩薩도 於一切境에 亦爾하며 如
明眼人이 無所障隔하고 覩衆色像하야 如來도 於一切境에 亦爾니라 如明眼人이
於微闇中에 覩見衆色하야 究竟地菩薩도 亦爾하며 如明眼人이 離一切闇하고 覩
見衆色하야 如來도 亦爾니라(瑜伽論 五十)
明眼人이 輕곡을 障隔하고 모든 色像을 보는 것과 같아서 究竟地菩薩도 一
切境界에 이와 같으며 明眼人이 障隔이 없이 모든 色像을 보는 것과 같아서
如來도 一切境界에 이와 같느니라. 明眼人이 微闇中에서 衆色을 보는 것과 같
아서 究竟地菩薩도 이와 같으며 明眼人이 一切昏闇을 떠나서 衆色을 보는 것
과 같아서 如來도 이와 같느니라.
* 究竟地菩薩인 等覺은 阿賴耶의 微細妄念이 殘餘하여 이것이 自性을 障蔽
하여 一切境界에 了然明白하지 못하여 如隔輕곡하며 如闇中覩色이라 하였으
며, 따라서 佛性境界도 이와 같이 明了하지 못하므로 佛祖는 十地菩薩도 見
性은 如隔羅곡 如闇中見色이라고 呵責하였다. 이 微細妄念이 滅盡하여 心眼
이 洞開하면 輕곡과 微闇을 永離한 一乘佛果를 成就하여 一切境界에 了然明
白하므로 涅槃經에서 如來見性은 如晝見色이라고 하였다. 이는 菩薩地盡하
여 永離微細하면 得見心性이니 名究竟覺이라고한 起信所論과 同一內容이다.
如隔輕곡 如闇見色은 正見이 아니므로 佛祖正傳은 見性을 不許하였을 뿐 아니
라 第八魔界라 하여 極力排擊한 것이다. 이와 같이 究竟地菩薩도 見性이 아니
니 其餘는 擧論할 필요도 없으므로 佛敎 萬代의 標準인 起信과 瑜伽의 究竟地
菩薩未見性의 原則下에 一乘佛果 以外의 見性說은 斷然코 容認할 수 없다.
以不生煩惱故로 則見佛性이요 以見佛性故로 則得安住大涅槃이니 是名不生이니
라(大涅槃經 十八)
煩惱가 不生하는 故로 곧 佛性을 正見하며 佛性을 正見한 故로 大涅槃에 安
住하나니, 이를 不生이라 하느니라.
* 不生은 즉 無生이니 微細의 煩惱妄想까지 滅盡한 大無心地요, 大涅槃은
無心地인 無餘涅槃이니 즉 究竟覺이다. 그리하여 見性은 즉 無心이요 究竟
覺이며 大涅槃인 것이다.
第一義建立者는 謂無餘依涅槃界中이 是無心位니 何以故오 於此界中에 阿賴耶
識이 亦永滅故니라 所餘諸位는 轉識이 滅故로 名無心地나 阿賴耶識이 未滅盡
故로 於第一義에는 非無心地니라(瑜伽論 十三)
第一義에서 建立한 正義는 無餘依涅槃界中이 眞正한 無心位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이 境界中에는 阿賴耶識이 또한 영원히 消滅한 緣故이다. 이 無餘依涅槃
以外의 諸位는 轉識이 消滅한 故로 無心地라고 假名하나 阿賴耶識이 永滅치
못한 故로 第一義에서는 無心地가 아니다.
* 眞無心은 微細無明인 第八阿賴耶識이 永滅한 無餘涅槃 즉 佛地만이다.
六七轉識이 滅한 第八阿賴耶의 無記를 無心이라 假稱하는 수도 있으나, 第
八識의 無記에는 六七轉識의 楸中妄念은 止息되었으나 第八의 微細動念이
殘餘하여 있으므로 眞正한 無心이 아니다. 往往에 賴耶無記를 無心으로 錯
認하는 例가 있으나, 見性은 究竟覺 즉 佛地이므로 無餘涅槃의 眞如無心이
다.
唯無餘依涅槃界中에 諸心이 皆滅하니 名無心地요 餘位는 由無轉識故로 假名無
心이나 由第八識이 未滅盡故로 名有心地니라(瑜伽釋)
오직 無餘依涅槃界 中에서만 모든 妄心이 다 消滅하니 無心地라 부른다. 餘
他의 諸位는 모든 轉識이 斷無한 故로 無心이라 假名하나 第八阿賴耶識이 아
직 滅盡치 못하였으므로 有心地라고 이름한다.
* 六七轉識 즉 六楸가 永滅한 滅盡定도 無心이 아니요 有心이며 十地 等覺
도 有心이다. 得見性하면 當下에 無心이라고 한 無心은 諸佛如來乘도 滅
盡한 無餘涅槃의 佛地無心이니 究竟覺이 見性인 緣故이다.
이에 佛敎 萬世의 標準인 宗鏡 起信 涅槃 瑜伽等의 正論으로써, 見性은
妄滅證眞한 無心, 遠離微細한 究竟覺, 不生煩惱한 大涅槃이니 이로써 見性
이 如來地 즉 成佛임이 確然明白하다.
五祖謂六祖曰 若識自心하고 見自本性하면 卽名天人師佛이니라(壇經--中國版
日本版)
五祖가 六祖에게 말하였다. 만약 自心을 洞識하고 自性을 明見하면 곧 天人師
佛이라 이름하느니라.
* 이는 五祖가 六祖를 印可付法할 때의 말이니, 究竟佛果를 成就하지 않으
면 見性이 아님은 宗門의 鐵則이다.
見性하면 卽成如來니라(宗鏡錄 四十四)
見佛性故로 卽住大涅槃이니라(宗鏡錄 三十六)
若頓見佛性하면 一念에 成佛하느니라(宗鏡錄 十七)
見性하면 卽是에 如來가 되느니라.
佛性을 明見한 故로 卽刻에 大涅槃에 現住하느니라.
萬若에 佛性을 頓見하면 一念에 成佛하느니라.
* 見性이 卽是 如來며 大涅槃이며 成佛이니, 이는 見性이 佛敎의 最後極果
임을 證言한 것이다.
若能諦觀心性하면 卽是見佛性이며 住大涅槃이니 卽同如來니라(宗鏡錄 十一)
만약에 心性을 諦觀하면, 卽是 佛性을 徹見한 것이며 大涅槃에 現住한 것이
니 如來와 同一하니라.
* 心性을 諦觀함은 見性과 同一한 內容이다.
見佛性하야 住大涅槃하면 卽是住不思議解脫也니라(宗鏡錄 二十四)
佛性을 明見하여 大涅槃에 現住하면 卽是 不思議解脫에 常住하느니라.
* 見性을 하면 一切의 業結을 超脫하므로 不思議解脫이 아닐 수 없다.
但見法性하면 住大涅槃이니라(宗鏡錄 八十四)
於一切法에 見心自性하면 卽是如實究竟之覺이니 卽是頓成佛義니라(宗鏡錄 三
十六)
다만 法性을 明見하면 大涅槃에 住하느니라.
一切萬法에 眞心의 自性을 明見하면 卽時 如實한 究竟覺이며 卽是 頓然히
成佛함이니라.
*佛性은 萬法의 自性이므로 또한 法性이라 하나니 見法性은 즉 見佛性이다.
諸佛境界는 廣大無邊하야 非情識知요 唯見性하야사 能了니라(宗鏡錄 十八)
諸佛의 境界는 廣大無邊하여 三細六楸의 情識으로서는 不知하고, 오직 見性
하여야만 能히 了達하느니라.
* 廣大無邊한 諸佛의 境界는 十地 等覺도 茫然不知요 廓徹大悟하여 洞見本
性하여야 도달하나니 成佛은 오직 見性에만 있다.
親到諸法無疑之處는 悟心方知요 頓照萬境無相之門은 見性方了니 斯乃如來行處
요 大覺所知니라(宗鏡錄 九十六)
諸法에 疑惑이 없는 深玄處에 親히 到達함은 自心을 徹悟하여야 바야흐로
明知요, 萬境에 形相이 없는 絶妙門을 頓然 鑑照함은 本性을 洞見하여야 바야
흐로 了達하나니 이는 如來의 行處요 大覺의 所知니라.
* 悟心은 즉 見性이니 이는 大覺如來의 行履이며 證知이다.
上述한 宗鏡의 所論은 見性이 즉 究竟이니 즉 成佛이며 즉 大涅槃이며 不
思議解脫임을 加一層 立證하였다.
二十八祖內에는 無一祖도 不見性成祖니라(宗鏡錄 十九)
西天의 二十八代 祖師 中에는 一人도 見性하지 않고 祖師됨이 없느니라.
* 如來의 涅槃妙心과 正法眼藏을 傳持하여야 祖師라 하나니 어찌 見性을 하
지 않고 祖師가 되리오. 二十八祖뿐만 아니라 達磨直下의 正傳宗師들도 全
部 見性達道人이니, 見性하지 않으면 達磨正傳의 本分兒孫이 아니다.
得旨하면 卽入祖位라 誰論頓漸之門이며 見性하면 現證圓通이라 豈標前後之位
리오(宗鏡錄 一 標宗章)
究竟玄旨를 悟得하면 卽是에 祖師의 寶位에 登入하는지라 그 누가 頓과 漸의
路門을 論議하며, 眞如本性을 正見하면 現前에 大覺圓通을 徹證하는지라 어찌
前과 後의 地位를 標的하리오.
* 得旨는 見性과 同一內容이다.
現證圓通은 永明이 明言한 바 種種性相의 本義는 大覺에 있어서 圓通한다
(種種性相之義는 在大覺而圓通이라--宗鏡錄序)고 한 圓通이니 大覺世尊이
現證한 바이다.
見性하면 大覺圓通을 現證하여 藥病이 俱消하고 敎觀을 咸息하였으므로
頓漸等의 各門과 賢聖等의 位階는 全然 필요없다. 만약 修行에 位階와 頓漸
이 필요하다면 이는 有病要藥으로 妄滅證眞하여 病差藥除한 究竟無心이 아
니니 절대로 見性이라 할 수 없다.
若直下에 無心하면 量出虛空之外어니 又何用更歷階梯리오(宗鏡錄 二十三)
만약 直下에 無心하면 허공 밖에 超出하거니 또한 어찌 階梯를 修歷하리오.
* 見性하면 當下에 無心하므로 一切의 地位 漸次를 超脫한다.
諸聖은 分證이요 諸佛은 圓證이니라(宗鏡錄 一)
無明을 若除하면 一時에 頓證이니라(宗鏡錄 二十五)
祖佛은 圓證法界니라(宗鏡錄 七十八)
利根上智는 須圓證이니 十聖三賢을 一念起로다(圓悟錄 十)
諸聖은 分分證得이요 諸佛은 圓滿徹證이니라.
根本無明을 만약 斷除하면 一時에 頓證하느니라.
祖師와 佛陀는 眞如法界를 圓證하니라.
利根과 上智는 모름지기 圓證할지니, 十聖과 三賢을 一念에 超越하느니라.
* 見性은 無明이 永盡한 究竟佛地이므로 圓證이며 頓證이요 分證이 아니다.
그러므로 宗門의 證悟見性은 반드시 諸聖의 分證이 아닌 佛地의 圓證을 내
용으로 한다.
若明悟相하면 不出二種이니 一者는 解悟니 謂明了性相이요 二者는 證悟니 謂
心造玄極이니라 若言頓悟漸修하면 此約解悟니 謂豁了心性하고 後漸修學하야
令其契合이니라(行願淸凉疏 二辨修證淺深)
豁然了知하니 卽爲始悟요 修行契證이 目爲終入이니라(淸凉疏 二十)
悟有解悟證悟하니 謂初因解悟하야 依悟修行하야 行圓功滿하면 卽得證悟니라
(圭峯圓覺疏 三下)
만약에 悟相을 설명하면 二種을 不出한다. 一은 解悟니 性理와 法相을 明白
히 了知함이요 二는 證悟니 悟心深玄하여 窮極에 到達함을 말함이다. 만약 頓
悟漸修를 말하면 이는 解悟이니 心性을 豁然了知하고 後에 漸漸修學하여 契合
하게 함이다.
豁然히 性相을 了知하니 곧 解悟인 始悟가 되고, 修行하여서 玄極에 契合實
證함은 證悟인 終入이다.
悟門에 解悟와 證悟가 있다. 始初에 解悟를 얻어 그 解悟를 依持修行하여
修行이 圓成되고 功果가 滿了하면 卽時에 證悟를 얻는다.
* 徹見心性하여 當下에 無心하면 涅槃心과 如來心도 求覓할 수 없거니 어찌
解悟와 證悟를 論하리오마는, 衆生의 根性이 各異하여 往往히 邪路에 誤入
하여 認賊爲子하는 實例가 數多하므로 方便上 解悟와 證悟를 假借하여 悟證
의 深淺 邪正을 試論코자 한다.
大抵 解와 證은 相反된 立場에 있으니 解는 始初요 證은 終極이다. 思量
分別의 妄識中에서 性相을 明白히 了解하는 佛法知見을 解悟라 하고, 妄識
이 永滅하여 知見이 蕩盡되어 究竟의 玄極處에 도달함을 證悟라 한다. 이證
悟를 敎家에서는 各種으로 分類하나 禪門의 證悟는 圓證뿐이다.
敎家에서는 信·解·修·證의 原則下에 解悟에서 始發하여 三賢 十聖의
諸位를 經歷修行하여 終極인 證悟 즉 妙覺에 漸入한다. 그러나 禪門의 悟인
見性은 現證圓通한 究竟覺이므로, 分證과 解悟를 부정하고 三賢 十聖을 초
월하여 無餘涅槃의 無心地인 證悟에 直入함을 鐵則으로 하니 이것이 禪門에
서 高唱하는 一超直入如來地이다.
따라서 諸聖의 分證도 微細知解에 屬하여 見性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秋毫의 知解가 殘留하여도 證悟치 못하고 一切의 知見解會가 徹底 蕩盡되어
야 見性케 되므로 分證과 解悟를 修道上의 一大障碍 즉 解碍라 하여 절대
排除하는 바이다. 이것이 禪敎의 相反된 입장이며 禪門의 특징인 동시에 命
脈이니, 玉石을 혼동하여 後學을 疑惑케 하면 佛祖의 慧命을 斷絶하는 重大
過誤를 범하게 된다. 佛祖正傳의 見性은, 遠離微細하여 永斷無明한 眞如無
心 無餘涅槃과 究竟覺 如來地를 내용으로 하는 圓證頓證의 證悟임은 上述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正傳의 大宗匠들은 妙覺後果인 圓證이 아니면 見性과
悟心을 허락하지 않고 分證과 解悟는 邪知惡解 妄識情見으로 極力痛斥하는
바이다. 그러나 禪門의 害毒이며 病弊인 分證과 解悟를 見性이라고 주장하
는 類屬이 往往히 있으니 如斯한 異說에 眩惑되지 말고 現證圓通하여 廓然
見性하여 究竟無心地에서 佛祖의 正傳을 闡揚하여 群迷를 開導하여야 할 것
이니 이것이 圓證見性의 正眼宗師이다.
二. 衆生佛性
一切衆生이 悉有佛性하야 佛法僧에 無有差別이니라(大涅槃經 二十一)
一切 衆生이 眞如本性인 佛性을 다 가지고 있어서, 佛이나 法이나 僧이나
평등하여 추호도 增減差別이 없느니라.
* 一切衆生이 具有한 眞如本性은 諸佛의 果德을 圓滿具備하였으므로, 이를
佛性 法性 또는 佛心 佛智等으로 부른다.
이 佛性은 절대로 平等하여 無上極果를 성취하여 廣大無邊한 智德을 完具
한 諸佛如來나 極惡重罪인 五逆十惡 乃至 一闡提의 衆生까지도 圓滿具有하
므로 如來와 衆生의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善根이 絶滅한 一闡提도 佛性만
正見하면 전부 成佛하나니, 이것이 佛敎의 생명이며 모든 宗敎가 追隨할 수
없는 가장 卓出한 특색이다.
一切衆生이 悉有佛性이언마는 常爲無量煩惱所覆故로 不能得見이니라(大涅槃經
十八)
一切 衆生이 그 누구를 막론하고 平等하게 佛性을 具有하고 있건마는, 항상
限量이 없는 煩惱妄想이 盖覆한 故로 能히 그 佛性을 볼 수 없느니라.
* 衆生이 煩惱妄想에 障蔽되어 自己本有의 佛性을 보지 못하나 佛性은 항상
無限한 大光明을 發하여 十方法界를 비추고 있으니, 이는 太陽이 中天에 높
이 떠서 宇宙를 비추고 있지마는 黑雲이 掩蔽하면 衆人이 보지 못함과 같
다.
四無碍智가 卽是佛性이니 佛性者는 卽是如來니라(大涅槃經 三十)
四無碍智가 곧 佛性이니 佛性은 곧 如來니라.
* 諸佛의 果智인 四無碍智가 佛性이니 佛性이 즉 如來이다.
佛性者는 不可思議니 乃是諸佛境界니라(大涅槃經 三十五)
佛性은 不可思議한 것이니 이는 諸佛의 境界니라.
* 無量無邊한 衆妙를 具備한 不可思議한 이 佛性은 無上正覺을 성취한 諸佛
如來의 深深玄玄한 境界이다. 이 不可思議한 神妙靈性이 煩惱妄想에 掩蔽되
어 衆生이 보지 못함은 實로 慨歎할 일이다.
見十二因緣者는 卽是見法이요 見法者는 卽是見佛이라 佛者는 卽是佛性이니 何
以故오 一切諸佛이 以此爲性이니라(大涅槃經 二十五)
十二因緣을 了見한 者는 卽是 萬法을 正見한 者요 萬法을 正見한 者는 卽是
佛陀를 徹見한 것이라, 佛陀라는 것은 卽是 佛性이니 무슨 緣故인고 하면 一
切諸佛이 이것으로써 自性을 삼기 때문이니라.
* 見法이 즉 見佛이며 佛은 즉 佛性이니 法性과 佛性은 同體異名이어서 이
를 眞如 如來藏 法界 正遍知 心地等의 千名萬號로 부른다.
佛性者는 十力 四無所畏 大悲 四念處니라(大涅槃經 二十五)
佛性은 諸佛의 極果인 十力과 四無所畏와 大悲와 四念處니라.
中道者名爲佛性이니 以是義故로 佛性은 常恒하야 無有變易이니라(大涅槃經 二
十五)
中道를 佛性이라 부르나니 그러므로 佛性은 常住恒一하여 變動과 遷易이 없
느니라.
* 釋尊이 菩提樹下에서 無上正覺을 성취한 후에 鹿野苑으로 五比丘를 尋訪
하여 開口第一聲으로 [我는 中道를 正等覺하였다]고 宣說하였다. 이것이 釋
尊의 大覺 내용을 開陳한 中道大宣言이어서, 中道는 佛性이므로 中道를 正
覺하였다 함은 佛性의 正見 즉 見性하였다 함이다.
中道之法을 名爲佛性이니 是故로 佛性은 常樂我淨이니라(大涅槃經 二十五)
中道의 大法을 佛性이라 呼稱하나니 그러므로 佛性은 常樂我淨이니라.
* 常樂我淨은 大涅槃의 四德이니 佛性은 卽 如來의 大涅槃境界를 말함이다.
佛性者는 名爲第一義空이요 第一義空은 名爲智慧니라(大涅槃經 二十五)
佛性은 第一義空이라 이름하며 第一義空은 智慧라 이름하느니라.
* 佛性은 第一義空 卽 如來의 無上正遍知이다.
十二因緣은 名爲佛性이니 佛性者는 卽第一義空이요 第一義空은 名爲中道며 中
道者는 卽名爲佛이요 佛者는 名爲涅槃이니라(大涅槃經 二十五)
十二因緣을 佛性이라 부르나니 佛性은 卽是 第一義空이요 第一義空은 中道
라 하며 中道는 佛陀니 佛陀는 涅槃이라 하느니라.
* 第一義空과 中道와 佛陀와 涅槃은 전부 佛性을 말함이니, 그러므로 十方
三世의 一切如來가 佛性을 徹見하여 得道 成佛한 것이다.
自性이 滿足一切功德하느니라(起信論)
自性이 具三身하야 發明成四智하나니 不離見聞緣하고 超然登佛地니라(壇經)
自性이 無量無邊한 一切의 功德을 圓滿具備하였느니라.
自性이 法 報 化의 三身을 具備하여서 發明하여 四智가 되나니, 見聞의 攀
緣을 離去하지 않고 超然히 佛地에 登入하느니라.
* 自性 즉 佛性이 佛敎의 極果인 三身四智를 具備하여, 一切의 功行과 德用
을 圓滿俱有하여 一毫의 부족도 없으니 참으로 不思議中 不思議이다. 그러
니 이 自性을 徹見하면 一超直入如來地함은 당연 이상의 당연이다.
釋尊이 衆生에게 寄與한 最大功獻은 佛性의 발견이다. 만약에 佛性의 存
在와 그 開發의 방법을 宣示하지 아니하였으면, 衆生은 永作衆生으로 苦海
를 度脫하는 解脫의 길은 영원히 閉塞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一切衆生 皆有
佛性의 大原理에 의하여 努力修行하여 法海에 自在無碍하는 大解脫道를 성
취하여야 할 것이다.
三. 煩惱妄想
以根本無明이 動彼眞如하야 成於三細를 名爲梨耶요 又以境界緣故로 動彼心海
하야 起於六楸를 名爲意識이니라(賢首 起信論別記)
根本無明이 眞如本性을 鼓動하여 三種의 微細한 妄想을 結成하니 阿賴耶라
한다. 그리고 各種의 境界攀緣으로 妄心業海를 起動하여 六箇의 楸重煩惱를
添起하니 이를 意識이라 한다.
* 煩惱妄想에 無分別인 三種微細와 有分別인 六種楸重이 있어 八萬四千의
無量煩惱를 派生한다. 三細는 根本無明으로 阿梨耶 阿陀那 및 第八識等으로
부르고 六楸는 意識 혹은 第六識이라 한다. 그리고 第七末那는 計內爲我하
야 屬前三細하고 計外爲我所하야 屬後六楸일새 略不論(賢首 起信論義記)이
라 하였다.
諸師의 論疏에 三細를 阿賴耶라 함은 一致하나, 六楸에 대하여서는 六識 혹
은 六七識이라 하여 論說이 한결같지 않다. 그러나 감山德淸도, 其七은 乃虛
假니 故로 楞伽에 云 七識은 不流轉하나니 非生死因(百法論議)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第七末那를 別論하지 않아도 修道上에 關係 없으므로 賢首說을 取하
였다.
三細六楸가 總攝一切染法하나니 皆不了眞如而起니라 故로 云當知하라 無明이
能生一切染法也라하니라(賢首 起信論義記)
三細와 六楸가 一切의 生滅하는 染法을 總攝하나니 이는 다 眞如本性을 背
馳한 因由로 生起한다. 그러므로 當然히 알지어다. 三細六楸의 根本인 無明이
能히 一切의 生滅法을 派生한다고 하였느니라.
* 三細는 根本無明이요 六楸는 枝末無明이니, 七地以下의 一切衆生은 六楸
中에 있고 八地以後의 自在菩薩은 三細中에 있다. 이 本末의 兩種無明 즉
煩惱妄想이 眞如佛性을 掩蔽하고 있으니, 本性을 徹見하려면 이 兩種을 除
去하여야 한다. 만약에 六楸만 除去하고 三細가 殘餘하면 이는 自在菩薩의
境界이니, 宗門에서 第八魔界라 하여 究竟覺인 見性이 아니다.
見性은 第八阿梨耶識인 三細를 永斷한 無餘涅槃이라야 하나니 無餘涅槃은
즉 無心이다. 그리하여 自在 이상의 大菩薩들도 微細無明을 未脫하고 第八
阿梨耶에 住在하므로 見性이 못되나니, 第八의 極微細妄想까지 斷盡하여야
만 如來의 正法眼藏을 傳持한다.
만약에 客塵煩惱가 如前無殊하여 六楸도 未除한 解悟를 見性이라고 한다
면 이는 正法을 破滅하는 용서할 수 없는 大過誤이며 佛祖의 反逆이다.
於六趣生死에 彼彼有情이 墮彼有情中이라 於中最初에 一切種子心識이 展轉和
合하야 增長廣大하나니 此識을 亦名阿陀那하며 亦名阿賴耶하며 亦名爲心이니
라 阿陀那가 爲依持하야 建立
故로 六轉識身이 轉하나니 謂眼耳鼻舌身意니라(解深密經 一)
六途에서 生死輪廻할 때에 彼等의 有情衆生들이 生滅하는 有情들 中에 墮落
하여 있다. 그 中 最初에 一切의 生滅하는 種子인 心識이 展轉하며 和合하여
增長하고 廣大하나니, 이 根本識을 혹은 阿陀那 혹은 阿賴耶 혹은 心이라 名
稱한다. 이 阿陀那識이 依持가 되어서 建立하는 故로 六轉識身이 轉動하나니
이는 眼耳鼻舌身意이다.
* 解深密經은 唯識法相의 根本所依이다. 最初의 種子識 卽 阿陀那는 三細를
말한 것이요 六轉識身은 卽六楸이니 解深密에서는 第七識을 說하지 않았다.
諸識이 有二種生하니 謂流注生及相生이니라(楞伽經會譯 上之上)
煩惱妄想인 諸種識心에 二種의 生이 있으니 流注生과 相生이다.
* 流注生은 第八阿賴耶의 三細요 相生은 六楸이다.
阿陀那識이 甚深細하야 一切種子如瀑流로다 我於凡愚에 不開演은 恐彼分別執
爲我니라(解深密經)
阿陀那識이 極甚히 深細하여 一切生滅의 種子가 瀑布같이 流動한다. 내가
愚昧한 凡夫에게 이 阿陀那識을 開演하여 설명하지 않는 것은, 彼等이 分別하
여 眞我라고 誤執할까 두려워하는 까닭이다.
* 無功用行과 無分別智의 自在菩薩이 究竟을 성취 못하는 것은 阿陀那에 住
著하는 緣故이니 항상 佛陀의 呵責을 면하지 못한다.
六추中智相은 於七地에 盡此惑也요 三細中業相은 十地終心金剛喩定에서 都盡
하느니라(賢首 起信義記 下本)
六추의 終末인 智相은 七地에서 이 迷惑이 盡滅하고, 三細의 최후인 業相은
十地終心인 金剛喩定에서 永盡한다.
* 夢中一如의 華嚴七地位는 아직 六추의 領域이요 熟眠一如인 自在位에서
비로소 第八梨耶인 三細이니, 八地에는 六추가 없고 佛地에는 三細가 없다.
禪門에서는 藏識을 第八魔界라 하여 極力 排斥함은 微細藏識을 打破하지 않
으면 見性할 수 없으므로 오직 正法을 위한 老婆心의 發露이다.
自性을 掩蔽하고 있는 煩惱妄想에 微細와 楸重의 兩種이 있음을 알았다.
추重은 有分別이므로 容易히 覺知되지마는 微細는 無分別이어서 참으로 甚
深難解하여 修道上의 一大隘路가 된다.
動靜一如와 夢中一如가 되어도 熟眠一如가 되지 않으면 이는 六楸의 領域
이요, 熟眠一如가 되어야 비로소 假無心인 三細이다. 이 微細를 斷盡하지
않으면 見性이 아니어서 正眼宗師가 될 수 없으니, 이것을 極力 究明하여
期必코 離脫하여야 佛祖의 慧命을 계승할 수 있다.
추重을 永離한 賴耶無心도 見性이 아니어늘, 추重의 客塵煩惱 속에서 見
性이라 自處하게 되면 自誤誤人의 大悲劇이 演出되나니 千萬 覺醒하여야 한
다.
四. 無上正覺
卽見佛性하야 得阿 多羅三 三菩提니라(大涅槃經 二)
必得阿 多羅三 三菩提하야 得見佛性이니라(大涅槃經 二十)
곧 佛性을 正見하여 阿 多羅三 三菩提를 證得하느니라.
반드시 阿 多羅三 三菩提를 證得하여서 佛性을 正見함을 얻느니라.
* 阿뇩多羅三먁三菩提는 無上正覺 또는 無上正遍知等으로 번역되나니, 正覺
의 내용이 正遍知에 있으므로 同一한 意味이다. 이 無上正覺인 正遍知는 佛
敎의 最後 究竟目標이다.
見性을 하면 正覺을 얻고 正覺을 얻으면 見性을 한다 함은, 見性 즉 正覺
이요 正覺 즉 見性임을 宣說한 것이다. 그러므로 見性이 즉 無上正覺이며
成佛이다.
我性者는 如來秘密之藏이니 若得成就阿 多羅三 三菩提하면 爾乃證知하느니
라(大涅槃經 八)
我性 즉 佛性은 三世如來의 窮極秘密의 寶藏이니 만약에 無上正覺을 성취하
면 我性을 圓證明知하느니라.
* 正覺의 成就 즉 成佛하지 않고서는 本性을 正見할 수 없으니 成佛이 즉
見性이다. 見性이 즉 成佛이며 成佛이 즉 見性임은 金口所宣이며 靈山正傳
이다. 이는 見性이 圓證頓證의 證悟 즉 究竟覺임을 明示함이니 分證과 解悟
로써 見性이라고 主張하는 異端邪說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是諸衆生이 爲無量煩惱之所覆蔽하야 不識佛性하나니 若盡煩惱時엔 乃得知明了
하야 如彼力士가 於明鏡中에 見其寶珠니라(大涅槃經 八)
이 모든 衆生들이 無量한 煩惱妄想의 覆蔽한 바 되어 自己心中의 佛性을 알
지 못한다. 만약에 煩惱가 滅盡한 때에는 佛性을 證得하여 分明了知하되, 저
力士가 明鏡中에서 額上의 無價寶珠를 明見함과 같느니라.
* 三細의 極微妄想까지 滅盡無餘하면 자연히 究竟無心에 도달하나니, 이것
이 見性이며 成佛이다.
如來는 於諸衆生에 猶如良醫하야 知諸煩惱體相差別而爲斷除하야 開示如來秘密
之藏의 淸淨佛性이 常住不變하느니라(大涅槃經 八)
諸佛如來는 一切衆生에게 良醫와 같아서 모든 煩惱의 體相差別을 悉知하여
이 煩惱를 斷滅除去하여, 如來의 비밀한 寶藏中에 있는 淸淨無垢한 佛性이 永
劫토록 常住하여 절대로 不變함을 開示하느니라.
* 如來의 神方法藥이 아니면 衆生들이 어찌 無價眞寶인 自己心佛 즉 佛性을
볼 수 있으리오. 그 大悲鴻恩은 粉骨碎身하여도 未足酬이다.
佛性은 非是作法이요 但爲煩惱客塵의 所覆이니 若能斷除하면 卽見佛性하야 成
無上道하느니라(大涅槃經 八)
佛性은 衆生이 本有한 것이요 造作한 法이 아니다. 다만 煩惱인 客塵에 覆
蔽되어 있을 뿐이니, 만약에 그 煩惱를 斷除하면 즉시에 佛性을 明見하여 無
上大道를 성취하느니라.
* 無上正覺은 衆生의 無量煩惱妄想을 斷除하고 本有의 淸淨自性을 徹見함에
있으니 이는 佛敎 萬世不變의 大原則이다.
無一衆生而不具如來智慧언마는 但爲妄想顚倒執著而不證得하나니 若離妄想하면
一切自然智와 無碍智가 則得現前하느니라(八十華嚴經 五十一)
一人의 衆生도 如來의 智慧인 佛性을 具有하지 않은 者 없지마는, 妄想으로
생긴 顚倒에 집착하여 이것을 證得하지 못한다. 만약에 妄想을 離脫하면, 自
性에 具有되어 있는 一切의 自然智와 無碍智가 卽時에 現前하느니라.
* 衆生이 本具한 如來智慧는 곧 眞如佛性이니, 一切妄念이 頓盡하면 이것이
見性이며 無上正覺이다.
如來言하사되 奇哉奇哉라 此諸衆生이 云有如來智慧어늘 愚痴迷惑하야 不知不
見고 我當敎以聖道하야 令其永離妄想執著하야 自於身中에 得見廣大智見하야
與佛無殊케하리라(八十華嚴)
如來가 言明하였다. 神奇하고도 神奇하다. 一切衆生이 모두 一切智者인 如
來의 智慧를 具備하고 있거늘 愚痴하고 迷惑하여 不知하며 不見하는도다. 내
가 당연히 聖道로써 敎導하여 그 障蔽物인 妄想執著을 영원히 離脫케 하여 衆
生의 自身中에서 廣大無邊한 智見을 體得하여 獨尊無比한 佛陀와 차이가 없게
하리라.
* 涅槃과 華嚴의 兩大經에서 一切衆生의 本具佛性을 言明한 것은 人間 本有
의 眞價 즉 絶對性을 발표한 有史以來의 一大宣言이다. 이로써 人間은 本有
의 絶對性을 開發하여 無上道를 성취하는 영원한 活路를 얻었다.
만약에 佛陀가 無碍大智로써 衆生이 佛性을 具備하였음을 洞見하여 이를
敎示하지 않았으면, 衆生은 永永 衆生의 領域을 離脫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
이다. 그러므로 八萬寶藏의 金口聖言은 그 목적이 佛性開發에 있으니, 言語
文字의 習得으로써 佛敎를 삼는다면 이는 佛敎의 逆行이다.
諸阿羅漢은 不見佛性이니 以不見故로 不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니라(大涅槃經
二十七)
모든 阿羅漢은 佛性을 不見하였으니, 佛性을 不見한 故로 無上正覺 즉 阿뇩
菩提를 얻지 못하느니라.
* 小乘極果인 無學地의 阿羅漢은, 有餘涅槃이어서 見性이 아니므로 正覺을
성취하지 못하였다. 阿羅漢뿐 아니라 凡聖을 막론하고 見性을 못하면 正覺
즉 成佛이 아니다.
菩薩이 位階十地하여도 尙不明了知見佛性이니 何況聲聞緣覺之人이 能見耶아
(大涅槃經 八)
地位가 최후인 第十地에 도달한 大菩薩도 오히려 佛性을 明了히 知見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聲聞緣覺들이 能히 正見하리오.
* [十地大聖이 說法을 如雲如雨하여도 見性은 羅곡을 障隔함과 같다]고 하
여, 宗門正眼들은 十地大聖도 見性하지 못하였음을 指摘 呵責하였다. 또한
[三賢이 오히려 禪門宗旨를 明了치 못하는지라 十聖이 어찌 祖師禪宗에 到
達하리오(三賢이 尙未明斯旨라 十聖이 豈能達此宗이리오--十玄詩)]라 하였
으니, 見性을 根本으로 하는 禪宗의 深玄한 宗旨는 三賢은 말할 것도 없거
니와 十地大聖도 門外漢임을 喝破하였으니, 十地大聖이 見性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諸佛如來와 十住菩薩은 眼見佛性이요 乃至 九地는 聞見佛性이니라(大涅槃經
二十五)
九地以還은 聞見佛性이요 十地는 眼見이나 未了了하고 如來佛眼이라사 窮盡하
니라(淸凉 華嚴苕 八十一)
諸佛如來와 十住菩薩은 兩眼으로 佛性을 보고, 九地에 이르기까지는 傳聞
으로 佛性을 보느니라.
九地 以下는 耳聞으로 佛性을 보고 十地는 兩眼으로 보나 明了하지 못하고,
如來의 佛眼이라사 了了明明히 窮盡하느니라.
* 十住는 三賢의 初階요 九地는 十聖의 後班이다. 그런데 十住는 眼見이요
九地는 聞見이라 하니, 先後가 錯倒된 것 같으나 여기의 十住는 三賢의 十
住가 아니요 十地의 異稱이다. 數種經論에서 十地를 十住로 표현하였으니
本文의 十住는 十地를 말함이다. 그러므로 天台二祖인 灌頂도 住地不異 즉
十住와 十地가 다르지 않다(今文에 云住라 하고 又復云地라 하니 故知此中
의 住와 地가 不異하니라--大涅槃經疏 二十四)고 하였다.
十地菩薩이 雖見佛性이나 而不明了니라(大涅槃經 二十五)
十住菩薩이 知有佛性이나 猶如闇夜하야 所見이 不了하고 諸佛如來는 亦見亦知
니라(大涅槃經 十五)
十住菩薩의 所見佛性은 如夜見色이요 如來所見은 如晝見色이니라(大涅槃經 二
十五)
十住菩薩은 智慧力이 多하고 三昧力이 少故로 不得明見佛性이니라(大涅槃經
二十八)
十住菩薩은 不見佛性일새 名爲涅槃이요 非大涅槃이니라((大涅槃經 二十一)
十地菩薩이 비록 佛性을 보나 明了치 못하느니라.
十住菩薩은 佛性이 있음을 아나 暗夜의 所見과 같고, 諸佛如來는 또한 보며
또한 아느니라.
十住菩薩의 所見한 佛性은 黑夜에 色彩를 봄과 같고, 如來의 所見은 白晝에
色像을 봄과 같느니라.
十住菩薩은 智慧力이 많고 三昧力이 적으므로 佛性을 明見치 못하느니라.
十住菩薩은 佛性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涅槃이라 이름하고 大涅槃이 아니니
라.
* 此段의 十住도 十地를 말함이다.
十地見性은 如夜見色이니 黑夜中의 見色은 正見이 아니요 如來와 같이 白
晝見色이라야 正見이므로, 十地도 見性을 허락하지 않고 如來佛地에서 비로
소 見性이라 하는 것이다. 上文에서 말한 涅槃은 有餘涅槃이요 大涅槃은 無
餘涅槃이다.
諸善男子의 所有佛性은 如是甚深하야 難得知見이니 唯佛能知니라(大涅槃經
八)
如是佛性은 唯佛能知니라(大涅槃經 八)
모든 善男子들의 所有한 佛性은 이렇게 지극히 深玄하여 正知明見하기 심히
어려우니, 오직 正覺한 佛陀만이 이를 能히 알 수 있느니라.
이렇게 佛性은 오직 佛陀만이 能히 아느니라.
* 佛性은 즉 如來여서 諸佛境界이니, 佛 以外는 모두 正知正見하지 못함은
당연한 歸結이다.
諸佛이 了了得見佛性이니라(大涅槃經 二十五)
佛眼見故로 得明了니라(大涅槃經 二十六)
明見佛性故로 名明行足이니라(大涅槃經 十六)
諸佛如來만이 分明了了히 佛性을 볼 수 있느니라.
佛眼으로 보므로 明明了了하니라.
佛性을 分明히 보므로 明行足이라 하느니라.
* 無明의 暗窟을 打破하고, 長夜의 迷夢을 覺惺하여 靑天白日下에 廓然廣照
하여야 眞性을 正見한다. 十地大聖은 微細無明이 正眼을 障蔽하여 闇夜見色
의 夢中迷妄이므로, 正覺이 아니며 見性이 못된다.
그리하여 阿 菩提 즉 無上正覺을 성취하여 佛性을 正見하는 佛祖正傳의
鐵則下에, 究竟無心인 佛地 以外는 斷然코 見性을 不許한다. 見性이 이렇게
極難하니 有佛以來로 見性得道가 얼마나 될는지 疑心할 수도 있다. 그러나
究竟覺인 見性은 衆生의 根本無明 즉 第八阿賴耶의 微細妄想을 斷盡하는 데
있다.
衆生의 佛性은 不可思議하여서 佛祖의 聖訓에 따라 如實히 修行하면, 五
逆十惡의 極重罪人도 當世에 見性할 수 있음을 佛祖가 同說한 바이니, 不爲
也언정 非不能也라 함은 이를 말함이다. 이는 오직 當者의 努力 如何에 있
을 뿐이다.
그러므로 自古로 禪門의 正眼宗師中에, 賴耶의 微細妄想을 斷盡하여 究竟
無心地에 도달하지 않은 者는 없다. 그리하여 微細妄想을 宗門에서 第八魔
界라 呼稱하여 修道上 極力排遣하여, 第八魔界인 根本無明을 打破하여야만
正眼으로 認許하는 것이니, 佛祖의 慧命이 여기에 달려 있다.
諸佛世尊은 眼見佛性하되 如掌中에 觀阿摩勒하니라(大涅槃經 二十六)
諸佛世尊은 見於佛性을 如觀掌中의 阿摩勒果하니라(大涅槃經 二十五)
諸佛世尊은 定慧等故로 明見佛性하야 了了無碍하야 如觀掌中의 菴摩勒果하니
라(大涅槃經 二十八)
諸佛世尊은 雙眼으로 佛性을 洞見하되 掌中에 阿摩勒果를 보는 것과 같느니
라.
諸佛世尊은 佛性을 了見하되 掌中의 阿摩勒果를 봄과 같느니라.
諸佛世尊은 定과 慧를 等持하므로 佛性을 明見하여 了了히 障碍가 없어서
菴摩勒果를 봄과 같느니라.
* 定慧가 均等한 大寂光三昧中의 如來位가 아니면, 佛性을 明見치 못하나니
見性이 즉 成佛인 無上正覺이다.
如來가 入大涅槃이니라(大涅槃經 十三)
是大涅槃은 卽是諸佛의 甚深禪定이니라(大涅槃經 十一)
若見佛性하면 能斷煩惱하나니 是則名爲大涅槃이니라(大涅槃經 二十三)
若了了見於佛性하면 得名爲大涅槃이라 是大涅槃은 唯大象王이 能盡其底니
大象王者는 謂諸佛也니라(大涅槃經 二十一)
衆生佛性은 諸佛境界니 以見佛性故로 解脫生死하야 得大涅槃이니라(大涅槃經
二十六)
大覺如來가 大涅槃에 들어가느니라.
이 大涅槃은 곧 諸佛世尊의 甚深한 禪定이니라.
만약에 佛性을 正見하면 능히 煩惱를 斷盡하나니 이를 大涅槃이라 하느니라.
만약에 了了히 佛性을 正見하면 大涅槃이라 하는지라, 이 大涅槃은 오직 大
象王이 능히 그 深底를 窮盡하나니 大象王은 諸佛을 말함이니라.
衆生의 佛性은 諸佛의 境界니, 佛性을 正見한 故로 生死를 解脫하여 大涅槃
을 얻느니라.
* 諸佛의 甚深禪定인 大涅槃 즉 無餘涅槃은 오직 佛性을 正見하여야 성취하
나니 이는 見性이 즉 如來며 大涅槃인 까닭이다.
涅槃經에 云호대 金剛寶藏이 無所減缺이라하니 故名圓敎也니라(智者 四敎儀
一)
涅槃經에서 말하기를 金剛不壞의 無盡寶藏이 增減과 欠缺이 없다고 하였으
니 그러므로 圓敎라 하느니라.
* 智者는 華嚴 法華 涅槃等經을 圓敎라고 判定하였다. 涅槃經은 如來 最後
의 窮極說法이므로 圓敎라 한 것이며 所證佛果는 圓敎極果요 無餘涅槃이다.
復願諸衆生이 永破諸煩惱하야 了了見佛性하되 猶如文殊等케하여지이다(大涅槃
經 十八)
文殊師利와 諸菩薩等이 已無量世에 修聖道하야 了知佛性이니라(大涅槃經 三
十)
다시 願하노니 모든 衆生들이 一切煩惱를 영원히 破滅하여 了了히 佛性을
正見하되 文殊菩薩等과 같게 하여지이다.
文殊師利와 모든 菩薩들이 이미 無量世에 聖道를 修習하여 佛性을 了了明知
하느니라.
* 無上正覺을 成就한 如來位 즉 佛地만이 了了見性임은 佛陀의 慧命이니 文
殊菩薩을 了了見佛性이라 함은 文殊는 已成佛의 權現菩薩인 所以이다. 즉
文殊는 永破諸煩惱하여 已成正覺하여, 과거에 龍種上如來(首楞嚴三昧經下)
로, 大身如來(菩薩瓔珞經四)로, 寶相如來(寂調音所問經)로, 歡喜藏摩尼寶積如
來(央굴摩四維經四) 等으로 出現한 大力菩薩이니 了了見佛性인 것이다. 文殊
以外의 諸菩薩이라 함도 文殊와 같은 大力菩薩을 指稱함이다.
云何了了見고 如人이 自觀掌中의 阿摩勒果하야 道와 菩提와 涅槃을 唯有如來
가 悉知見覺하나니 及諸菩薩도 亦復如是니라(大涅槃經 十五)
어떤 것이 了了見인고. 사람이 스스로 掌中의 阿摩勒果를 보는 것과 같아
서, 無上道와 菩提와 涅槃은 오직 如來만이 완전히 了知明見正覺하나니 모든
菩薩들도 또한 이와 같느니라.
* 掌中의 勒果를 明觀함과 같이, 佛性을 了見함은 오직 佛陀뿐이라 함은 世
尊이 累累히 宣說한 바이다. 그러니 及諸菩薩이라 함은 猶如文殊等과 같은
大力菩薩이다.
阿뇩多羅三먁三菩提와 大般涅槃을 若知見覺하면 當名菩薩이니라(大涅槃經 十
六)
阿뇩菩提와 大般涅槃을 만약에 了知明見正覺하면, 마땅히 菩薩이라 이름하느
니라.
* 無上正覺인 阿 菩提와 諸佛深定인 大涅槃을 知見하면 佛地如來이니, 菩
薩이라 名稱함은 大力權現의 果後菩薩임은 의심할 수 없다.
若有見知覺佛性하면 名爲菩薩이니라(大涅槃經 十六)
明見佛性하면 是名菩薩이니라(大涅槃經 十六)
得解脫故로 得見佛性이요 見佛性하면 得大涅槃이니 是菩薩의 淸淨持戒니라(大
涅槃經 十六)
만약에 佛性을 知見覺한 者라면 菩薩이라 이름하느니라.
佛性을 明見하면 이를 菩薩이라 이름하느니라.
解脫을 얻은 故로 佛性을 보며 佛性을 봄으로 大涅槃을 얻나니, 이는 菩薩
의 淸淨持戒니라.
* 여기서 말한 菩薩도 明見佛性한 大涅槃의 菩薩이니 大力菩薩이다.
大般涅槃은 唯佛菩薩之所見이니 故로 名大涅槃이니라(大涅槃經 二十)
大般涅槃은 오직 佛과 菩薩의 所見이니, 그러므로 大涅槃이라 하느니라.
* 果後如來만이 大涅槃이니, 이 佛菩薩의 菩薩도 地上菩薩이 아니요 果後大
力菩薩임은 不要再論이다.
佛世尊을 名爲大沙門이며 大婆羅門이니라(大涅槃經 十六)
大身衆生者는 諸佛菩薩이니 大智慧故로 名大衆生이니라(大涅槃經 三十)
佛世尊을 大沙門이라 大婆羅門이라 하느니라.
大身衆生이라 함은 佛陀와 大力菩薩이니, 無上大智慧인 故로 大衆生이라 하
느니라.
*果後如來인 正覺世尊과 大力菩薩을 大婆羅門 大衆生이라 呼稱하여도 이는
正覺을 내용으로 하여 實地의 婆羅門과 衆生이 아니니, 如何히 呼稱하여도
正覺인 내용에는 변동이 없다. 이와 같이 明見佛性한 如來世尊을 方便上 菩
薩로 표현하여도, 明見佛性인 如來世尊임에는 秋毫의 상관도 없다.
眞解脫者는 卽是如來요 如來者는 卽是涅槃이요 涅槃者는 卽是無盡이요 無盡者
는 卽是佛性이요 佛性者는 卽是決定이요 決定者는 卽是阿 多羅三 三菩提니
라(大涅槃經 五)
眞解脫은 곧 如來요 如來는 곧 涅槃이요 涅槃은 곧 無盡이요 無盡은 곧 佛
性이요 佛性은 곧 決定이요 決定은 곧 阿 多羅三 三菩提니라.
* 解脫·如來·涅槃·佛性과 阿 菩提는 同體異名이다. 그리하여 解脫과 涅
槃을 證得하든지 佛性을 明見하면 無上正覺인 如來이다.
佛言하사되 善男子야 無因緣故로 故名爲無生이요 以無爲故로 故名無出이요 無
造業故로 故名無作이요 壞結賊故로 故名安穩이요 諸結火滅故로 名滅度요 離覺
觀故로 名涅槃이요 遠
궤뇨故로 名爲寂靜이요 永斷生死故로 名無病이요 一切無故로 名無所有니 善
男子야 菩薩이 作是觀時에 卽得明了於佛性이니라(大涅槃經 二十八)
佛陀가 말씀하셨다. 善男子들아, 因緣이 없으므로 無生이라 名稱하며, 無爲
인 故로 無出이라 하고 造業이 없으므로 無作이라 이름한다. 妄結과 業賊을
破壞하였으므로 安穩이라 하고, 모든 妄結의 業火가 永滅한 故로 滅度라 하
며, 覺觀을 捨離하였으므로 涅槃이라 呼稱한다. 궤뇨함을 遠離하였으므로 寂
靜이라 하며, 生死를 永斷하였으므로 無病이라 하고, 一切가 空無하므로 無所
有라 하나니, 菩薩이 이 深觀을 作得하였을 때 卽是에 佛性을 明了히 正見하
느니라.
* 無生 無爲와 涅槃 無病等 呼稱은 各異하나 如來가 現證한 同一 내용이니,
第八阿賴耶의 微細妄想을 永斷하고 究竟大無心地에 도달한 深深玄境을 표현
한 名稱이다.
그리하여 寂照雙融하며 定慧等持한 이 究竟三昧에서만이 見性이며 成佛이
니, 諸佛如來와 正眼宗師들이 無生 無爲等을 徹證하지 않고 見性하며 成道
하지 않았다.
大涅槃經에서 不生煩惱 斷盡煩惱 斷除煩惱 永破煩惱를 見性이라 하였는
바 이煩惱는 추重과 微細를 總括한 것이니, 起信論에서 永離微細를 得見心
性이라 함과 同一하다. 十地菩薩도 煩惱를 斷盡하지 못하였으므로 見性이
아니라 하였으며, 佛地에서만 永破煩惱하였으므로 諸佛如來만이 見性이라
한 것이다. 이 遠離微細 不生煩惱한 佛地의 見性을 無心 無念 無生 大涅槃
究竟覺 如來地라 하였다.
이렇게 前佛後祖가 異口同聲으로 見性 즉 究竟覺인 無上正覺이며 無餘涅
槃인 大涅槃이며 佛陀如來임을 苦口정녕으로 宣說하셨으니, 이로써 見性이
圓證頓證의 證悟 즉 究竟覺의 大無心地임을 立證하고도 남는다.
그러니 修道高士는 佛祖의 遺法만 따를 뿐이요 餘外의 異端邪說은 正法의
旗幟 아래에서 斷然 排除하여야 한다.
五. 無生法忍
聲聞은 不知聖心이니 住於空定이요 諸菩薩은 沈空滯寂하야 不見佛性이라 若是
上根衆生이면 忽遇善知識指示하야 言下에 領會하야 更不歷階級地位하고 頓悟
本性이니라(馬祖語錄)
聲聞은 佛陀의 聖心을 모르니 空定(人空)에 住著하여 있고, 모든 菩薩들은
空(人空)에 沈潛하고 寂(法空)에 滯留하여 佛性을 보지 못한다. 만약에 上根
衆生이면 忽然히 善知識의 指示를 받아서 言下에 了然히 領會하여 本性을 頓
悟하느니라.
* 十地의 大菩薩도 見性을 못하였으니 二乘은 擧論할 필요도 없다. 上根大
智는 地位와 階級을 초월하고 刹那에 究竟無心地에 頓入하여 正覺을 成就하
나니, 이것이 他宗들이 追隨할 수 없는 禪門의 특색이다. 頓悟本性은 頓見
本性과 같은 내용이니 究竟覺인 證悟이다.
悟則悟自家本性이니 一悟하면 永悟하야 不復更迷니라
如日出時에 不合於冥하야 智慧日出하면 不與煩惱暗으로 俱하고 了心及境하야
妄想이 不生하느니라 妄想이 旣不生하니 卽是無生法忍이라 本有今有라 不假修
道坐禪이니 不修不生이 卽是如來淸淨禪이니라(馬祖語錄 傳燈錄 二十八)
未審師所說法은 如何오 師曰 無生無滅이 是如來淸淨禪이니라(壇經·傳燈錄
五)
悟라 함은 自家의 本性을 徹悟함이니 한번 悟達하면 영원히 了悟하여 다시
는 迷惑하지 않는다.
白日이 出現한 때에 冥暗과 相合하지 않음과 같아서, 智慧의 日光이 出現하
면 煩惱의 暗雲이 消滅되고 內心과 外境을 了亡하여 妄想이 生起하지 않으니,
이것이 곧 無生法忍이라, 本來부터 있는 것을 지금 갖는 것이다. 修道와 坐禪
을 假借할 것 없이 修治하지도 않고 生起하지도 않으니 卽是 如來의 淸淨禪
이다.
아지못케라, 스님의 說法하신 바는 어떠합니까. 六祖 말씀하되, 生도 없고 滅
도 없음이 如來의 淸淨禪이니라.
* 妄想이 滅盡하고 無生을 徹證하여 不復更迷하는 如來淸淨禪을 내용으로
하는 馬祖의 頓悟는, 頓超十地한 究竟無心인 證悟가 분명하다. 馬祖뿐만 아
니라 達磨直傳의 正眼宗師들은 모두 無生法忍을 圓證한 果後大聖들이니, 禪
門正傳의 頓悟와 見性은 分證과 解悟가 絶對로 아니요 圓證인 證悟임이 確
然하다.
入佛地位하야 自證聖智를 名如來禪이니라(楞伽會譯 上之上)
佛陀의 地位에 頓入하여 如來의 聖智를 自證함을 如來淸淨禪이라 한다.
* 馬祖가 말한 如來禪은 楞伽經의 究竟佛地를 表現한 것이다.
問하되 如今說此土에 有禪이라하니 如何오 師云 不動不禪이 是如來禪이니 離
生禪想이니라(百丈--古尊宿語錄 一)
夫學道者는 先須倂却雜學諸緣하고 決定不求하며 決定不著하야 聞甚深法하되
恰似 淸風이 屆耳하야 瞥然而過하고 更不追尋이니 是爲甚深入如來禪하야 離生
禪想이니라
從上諸祖師는 唯傳一心하고 更無二法하야 指心是佛하나니 頓超等妙二覺之表하
야 決定不流至第二念이니라(黃檗--古尊宿語錄 三)
問迦葉이 受佛心印하니 得爲傳語人否아 師云是니라 云若是傳語人이면 應不離
得羊角이로다 師云迦葉은 領得本心일새 所以不是羊角이니 若以領得如來心하야
見如來意하며 見如來色相者는 卽屬如來使하야 爲傳語人하느니라(黃檗--古尊宿
語錄 三)
問六祖는 不會經書어늘 何得傳衣爲祖오 師云 六祖는 當時에 只是默契하야 得
如來甚深意니 所以付法與他니라(黃檗--古尊宿語錄 二)
問只今此土에 禪이 있다 하니 如何오. 師云 不動하며 不禪함이 卽是 如來禪
이니 禪想이 生起함을 離脫하니라.
大抵 學道하는 者는 尤先에 반드시 雜學과 諸緣을 倂却하고 決定코 一切不
求하며 一切不著하여, 甚深妙法을 聽聞하되 淸風이 屆耳함과 恰似하야 瞥然히
지나치고 다시는 追尋하지 않나니, 이것이 甚深히 如來禪에 得入함이 되어서
禪想이 生起함을 離脫함이니라.
從上의 諸祖師는 오직 一心法만 傳하고 다시 二法이 없어서 卽心이 是佛임
을 直指하나니, 等妙二覺의 表를 頓超하여 決定코 第二念에 流落하지 않느니
라.
問 迦葉이 佛陀의 心印을 傳受하였으니 傳語人이 되는가. 師云 如是니라.
云 만약 傳語人이면 應當히 求覓者인 羊角을 離得하지 못하도다. 師云 迦葉은
스스로 本心을 領得하였기 때문에 羊角이 아니니, 만약에 如來心을 領得하여
如來意를 明見하고 如來色相을 正見한 者는 如來使에 屬하여 傳語人이 되느니
라.
問 六祖는 經書를 모르거늘, 어찌 法衣를 傳受하여 祖師가 되었는고. 師云
當時에 六祖는 다못 默默히 契合하여 如來의 甚深한 密意를 證得하였으니 所
以로 大法을 그에게 付與하니라.
* 如來心 如來意를 洞見하여 如來禪을 傳受함이 等妙二覺을 초월한 삽三祖
師임을 宣說한 超群의 大祖師인 馬祖 百丈 黃檗 三代의 法門은 實로 宗門
萬古의 標準이다.
如來禪祖師禪이 豈有兩種이리오 未免암含하야 各分 白하야 特地乖張이로다
(圓悟錄十五 圓悟心要上 示泉上人)
達磨遠繼西天二十七祖하야 以如來圓極心宗之謂禪也라(中峯廣錄 十一之上 山房
夜話)
如來禪與祖師禪이여 一手猶分掌與拳이로다 旣得髓時에 忘直指하고 已拈花處에
喪單傳이라 烏焉成馬는 今皆是요 黃葉爲金도 古亦然이니 未具照空生死眼이면
爭敎仰不愧龍天이리오(中峯廣錄 二十九 偈頌)
如來禪과 祖師禪이 어찌 兩種이 있으리오. 암含不決하여 各各 白을 妄分하
여 특히 宗旨에 乖背함을 未免하는도다.
達磨가 멀리 西天二十七代의 祖師들을 繼承하여 如來의 圓極한 心宗으로써
禪을 삼았느니라.
如來禪과 祖師禪이여, 一手를 掌과 拳으로 兩分함과 같도다. 骨髓를 得하였
을 때 이미 直指를 忘失하였고, 蓮華를 拈한 곳에 벌써 單傳을 喪却하였는지
라, 烏焉을 馬字로 誤寫함은 지금도 다 이렇고 黃葉을 眞金으로 錯認함은 옛
도 또한 그러하니, 照破하여 生死가 皆空한 明眼을 具備하지 못하면, 어찌 仰
望하여 龍天이 부끄럽지 않으리오.
* 如來心 如來意를 내용으로 한 如來禪을 繼承함이 삽三祖師임은 正眼宗師
들의 定論이니 祖師禪 즉 如來禪임은 당연한 歸結이다.
間或 佛祖의 本意를 알지 못하고 如來禪 祖師禪을 兩分하여 그 優劣과 深淺
을 妄論하는 할眼衲僧이 往往 있으므로, 圓悟는 未免암含하여 特地乖張이라
呵責하였고, 中峯은 烏焉成馬 黃葉爲金이라고 痛歎하였다. 或者는 仰山과
香嚴의 問答을 引證하나 이는 法門擧揚이니, 禪家의 回互時節임을 明眼
宗師들이 摘破한 바이다.
특히 韓國에서는 自古로 眞歸祖師說을 高唱하여 異說이 紛紛하나, 佛傳硏
究가 극도로 발달된 지금까지 東西古今을 통하여 韓國 以外에는 眞歸祖師說
이 全然 없다. 이는 韓國의 訛傳이 分明하니 一顧의 가치도 없을 뿐만 아니
라 外國學者들의 嘲笑를 면치 못하는 바이니, 誤錯된 思想은 단연코 이를
是正하여야 한다.
如來禪이여 烈焰光中에 綻白蓮이요 祖師意여 海底紅塵이 成陣起로다(應菴錄
四)
祖師禪과 如來禪이여 折角泥牛連夜吼로다(中峯廣錄 十四)
僧問하되 仰山이 謂如來禪은 許師兄會어니와 祖師禪은 未夢見在라하니 此意如
何오 師云 蛇入竹筒이니라 僧云 仰山이 平白受屈이로다 師云 和爾脫不得이니
라(虛堂錄 二)
聞擊竹而悟道하되 灼然不會祖師禪이라하고 見桃花而不疑어늘 敢保老兄猶未徹
이라하니 仰山 玄沙는 不曾夢見香嚴靈雲의 汗臭氣在로다(痴絶錄 七)
如來禪이여, 猛烈한 火焰光中에 白蓮이 綻開하고, 祖師意여 大海深底에 紅
塵이 成陣하여 飛起하는도다.
祖師禪과 如來禪이여, 折角한 泥牛가 連夜하여 哮吼하는도다.
僧이 問하되 仰山이 云謂하기를, 如來禪은 師兄이 領會함을 許諾하나 祖師
禪은 夢寐에도 未見하였다 하니 此意旨가 如何오. 師云 蛇가 竹筒에 入하니
라. 僧云 仰山이 명백히 屈辱을 받는도다. 師云 그대도 같이 脫出치 못하니
라.
擊竹을 聞하고 悟道하였으되 灼然히 祖師禪을 알지 못한다 하고, 桃花를 보
고 의심하지 않거늘 老兄이 오히려 未徹이라 하니, 仰山과 玄沙는 香嚴과 靈
雲의 汗臭氣도 夢見하지 못하였도다.
* 應菴·中峯·虛堂은 臨濟正傳의 明眼이요, 痴絶은 密菴의 直孫으로서 三
大名刹인 天童·靈隱·徑山에 勅住한 巨匠이다. 正傳巨匠들은 如出一口로
如來禪 즉 祖師禪임을 明示하였으니, 仰山 玄沙의 神機密用은 오직 正眼만
이 窺破한다.
仰山 玄沙의 用處는 衲僧의 回互時節이니, 僧問 天童覺하되 玄沙가 爲什瑪
하야 却道諦當甚諦當이나 敢保老兄未徹在닛고. 覺이 云 箇是衲僧回互底時節이
니라(拈頌 十五)하니 天童覺은 實로 超群正眼이다.
佛은 無生을 爲生하고 無住로 爲住하나니라(攝論 十)
悟無生하면 名爲妙覺이라 一念頓超어니 豈在煩論이리오(南陽慧忠 般若心經序)
佛陀는 無生을 生으로 하고 無住로 住를 한다.
無生을 悟達하면 佛地인 妙覺인지라, 一念의 사이에 頓然히 초월하거니 어
찌 煩論할 바 있으리오.
* 無生이 究竟覺임은 不問可知이니, 妄想의 滅盡을 根本으로 한 馬祖의 無
生도 亦然하다. 敎典에서는 數種의 無生法忍을 說하였으나 妙覺만이 眞無生
이다.
了然守心하야 則妄念이 不起하면 則是無生이니라
守本眞心하야 妄念이 不生하야 我 我所心이 滅하면 自然히 與佛로 平等하니라
妄想이 斷故로 則具正念이요 具正念故로 寂照智生이요 寂照智生故로 窮達法源
이요 窮達法源故로 則得涅槃이니라
衆生의 佛性은 本來淸淨하야 如雲底日하니 但了然守本眞心하야 妄念雲이 盡하
면 慧日이 卽現하느니라(最上乘論)
了然히 眞心을 守護하여 妄念이 일어나지 않으면 則是無生이니라.
本有의 眞心을 守護하여 妄念이 일어나지 않고 我와 我所心이 滅하면 자연
히 佛陀와 平等하여 同一하니라.
妄念이 斷絶된 故로 正念이 圓具하고, 正念이 圓具한 故로 寂照의 眞智가
생기고 寂照의 眞智가 생기므로 萬法의 根源을 窮達하고, 萬法의 根源을 窮達
한 故로 無餘의 涅槃을 證得한다.
衆生의 佛性은 본래 淸淨하여 黑雲 속의 白日과 같아서, 本有의 眞心을 守
護하여 妄念의 黑雲이 散盡하면 自性의 慧日이 즉시 출현한다.
* 妄念이 滅盡하면 이것이 無生이다. 無生은 즉 成佛이며 正念이며 寂照智
이며 無餘涅槃이니, 즉 究竟無心이며 馬祖의 頓悟이다. 五祖의 敎示는 馬師
의 法語와 如合符節하니 前佛後祖에 어찌 異說이 있으리오.
自從頓悟了無生으론 於諸榮辱에 何憂喜리오
損法財滅功德은 莫不由斯心意識이니 所以로 禪門은 了却心하고 頓入無生知見
力이니라(證道歌)
頓悟하여 無生을 了達하고 나면 모든 榮華나 困辱에 어찌 憂慮하며 喜樂하
리오.
法財를 毁損하고 功德을 破滅하는 것은 이 心과 意와 識이니, 그러므로 禪
門에서는 妄心을 了却하고 無生인 知見力에 頓入하느니라.
* 心은 第八識이요 意는 第七識이요 識은 第六識을 말한다. 第八의 微細妄
想과 第六七의 추重妄想을 滅盡한 것이 無生이다. 第八의 微細까지 滅盡한
無生은 즉 見性이며 正覺이니, 이것이 圓證頓證의 頓悟이다.
若識心이 寂滅하여 無一動念處하면 是名正覺이니라(四行論)
만약에 識心이 寂滅하여 一毫의 妄念도 動搖함이 없으면, 이것을 無上正覺
이라고 이름한다.
* 識心은 妄想을 總稱한 것이다. 衆生의 識心이 全滅하면 正覺이 아닐 수
없으니, 이것을 無生이라 無心이라 한다.
禪門正傳의 頓悟는 妄想이 滅盡한 究竟無生을 內容으로 한 圓證의 頓悟이
다. 禪門의 悟는 證으로 生命삼아, 解는 妄想情解 邪知惡見으로서 근본적으
로 否認하며 絶對 排斥한다. 理由인즉 妄想情解로는 心性을 正悟하며 正見
할 수 없기 때문이다.
六. 無念正宗
悟此法者는 卽是無念이니 無憶無著하야 不起 妄하고 用自眞如性하야 以智慧
觀照하야 於一切法에 不取不捨하나니 卽見性成佛道니라(壇經)
이 法을 了悟한 者는 卽是 無念이니 憶念과 執著이 없어서 妄이 일어나지
않고, 自己의 眞如本性을 사용하여 智慧로써 觀照하여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
나니, 이것이 見性이며 佛道를 성취함이니라.
* 妄滅證眞한 究竟無心을 또한 無念이라 한다. 이 無念이 즉 無生이니 卽
頓悟이며 見性이며 成佛이다.
悟無念法者는 萬法에 盡通하며 悟無念法者는 見諸佛境界하며 悟無念法者는 至
佛地位니라
(壇經)
無念法을 徹悟한 者는 萬法에 전부 通達하며 諸佛의 甚深한 境界를 洞見하
며 佛陀의 地位에 이른다.
* 頓悟인 無念은 見性이며 諸佛境界며 究竟佛地이다.
故로 云 悟無念法者는 萬法에 盡通하며 悟無念法者는 見諸佛境界라하니 是知
若入無念法門하면 成佛이 不出刹那之際니라(宗鏡錄 十五)
金剛已還의 一切衆生은 皆是有念일새 名爲衆生이요 一切諸佛은 皆得無念故로
名爲佛이니라(宗鏡錄 十四)
그러므로 無念法을 了悟한 者는 萬法에 다 통달하며 諸佛의 境界를 본다 하
였으니, 만약에 無念法門에 正入하면 成佛이 刹那頃에 있음을 알겠다.
金剛 즉 等覺 以下로부터의 一切衆生은 皆悉 有念이므로 衆生이라 하고, 一
切諸佛은 전부 無念을 證得하였으므로 佛陀라 呼名한다.
* 剛喩定이며 金剛無間道인 等覺도 아직 極微細妄念을 未斷한 故로 衆生이
라 하며, 等覺이 金剛心으로써 最微細念인 第八賴耶를 斷盡하고 妙覺에 頓
入함을 見性 또는 成佛이라 하나니 이것이 頓悟이다. 그러므로 衆生과 諸佛
의 차이는 有念과 無念에 있다. 六祖가 宣說한 無念正悟는 究竟佛地이니,
즉 圓證頓證의 證悟이며 見性의 標本이다.
我於忍和尙處에 一聞하고 言下에 便悟하야 頓見眞如本性하니라 是以로 將此敎
法하야 流行하야 令學道者로 頓悟菩提하야 自見本性케하느니라(壇經)
내가 五祖 弘忍和尙의 處所에서 한번 듣고 문득 大悟하여 眞如本性을 頓見
하니라. 그러므로 이 頓悟見性法으로써 世上에 流行하여, 學道하는 者로 하여
금 菩提를 頓悟하여 本性을 自見케 하느니라.
* 이 頓悟와 見性은 無念을 내용으로 하는 究竟 佛地이다.
唯傳見性法하야 出世破邪宗하노라(壇經)
오직 見性하는 法만을 傳하여, 世上에 出現하여 邪宗을 破碎하노라.
* 佛祖의 正法은 見性에 있으며 見性은 佛地인 證悟이다. 그리하여 佛祖의
慧命을 계승한 正眼宗師는 頓悟 즉 見性法을 正傳하고 其外는 전부 邪宗으
로서 破碎한다. 이는 人我로써 他宗을 誹謗排斥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正
法을 守護하기 위한 慈悲의 發現이다.
前佛後祖가 心心相傳한 頓悟見性法은 佛祖의 命脈이요 正法의 骨髓이다.
其他 各宗은 隨宜方便의 一時權說에 不過하므로, 正法의 根本立場에서 論할
때에는 邪宗이라 點破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에 方便假說을 實法으로 誤執
不捨하면, 衆生들이 此方便假說에 繫縛되어 正法에는 永永 歸復하지 못한
다. 그러므로 이를 痛烈히 破碎排擊하고 根本正法을 宣揚하는 것이다.
若起眞正般若觀照하면 一刹那間에 妄念이 俱滅이요 若識自性하면 一悟에 卽至
佛地니라(壇經)
만약에 自性의 眞正한 般若인 觀照가 現前發起하면, 一刹那間에 妄念이 俱
滅한다. 그리하여 自性을 識得하면 一悟해서 卽是에 佛地에 到達한다.
* 妄念이 俱滅하면 自性을 明見하고 自性을 明見하면 이것이 正悟이며 無念
이니, 地位와 階級을 經歷하지 않고 究竟覺인 佛地에 頓入한다. 이것이 一
超直入如來地의 妙訣이어서, 他宗들의 追隨를 不許하는 禪門의 특징이다.
我此法門은 無念으로 爲宗하며 無相으로 爲體하고 無住로 爲本이니라(壇經)
나의 이 法門은 無念으로 宗趣를 삼아서, 無相으로 體를 삼고 無住로 根本
을 삼는다.
* 見性法門인 無念正宗은 前佛後祖가 燈燈相續하는 無上의 慧命이다.
無者는 無何事며 念者는 念何物고 無者는 無二相이며 無塵勞之心이요 念者는
念眞如本性
이니 眞如는 卽是無念之體요 念은 卽是眞如之用이니라(壇經)
無라 함은 何事가 없음이며, 念이라 함은 何物을 念하는고. 無라 함은 相對
의 二相이 없으며 塵勞의 妄心이 없는 것이요, 念이라 함은 眞如의 本性을 念
함이니, 眞如는 卽是 念의 本體요 念은 卽是 眞如의 大用이니라.
* 妄心이 滅盡하면 眞如本性이 現前하나니 眞如正念이 無念이다.
若識本心하면 卽本解脫이요 若得解脫하면 卽是般若三昧며 卽是無念이니라(壇
經)
만약에 眞如本心 즉 自性을 識得하면 卽是 根本解脫이요, 解脫을 體得하면
卽是 般若三昧며 無念이니라.
* 自在解脫과 般若三昧와 無生無念과 識心見性과 頓悟圓證과 成佛作祖는 同
一한 내용이니 究竟無心의 別稱이다.
云何爲頓悟오 答하되 頓者는 頓除妄念이요 悟者는 悟無所得이니라(頓悟要門)
어떤 것을 頓悟라 하는고. 對答하되 頓이라 함은 一切妄念을 斷除함이요,
悟라 함은 悟에 所得이 없음이니라.
* 頓除妄念하고 悟無所得의 頓悟는, 妄滅證眞한 究竟無心이니 佛地無念의
見性이다.
此頓悟門은 以何爲宗하고 以何爲旨하며 以何爲體하고 以何爲用고 答하되 無念
으로 爲宗하고 妄念不起로 爲旨하며 以淸淨으로 爲體하고 以智爲用이니라(頓
悟要門)
이 頓悟門은 무엇으로 宗을 삼고 무엇으로 旨를 삼으며 무엇으로 體를 삼고
무엇으로 用을 삼는고. 對答하되 無念으로 宗을 삼고 妄念이 일어나지 않음으
로 旨를 삼으며, 淸淨으로 體를 삼고, 智慧로 用을 삼는다.
* 妄念을 頓除하여 無念을 證得하면, 淸淨無垢한 般若大智가 朗然獨照하나
니, 이것이 禪門正傳의 根本宗趣다.
無念者는 一切處에 無心이 是니 無一切境界하며 無餘思求가 是니라 對諸境色
하야도 永無起動이 是無念이니 無念者는 是眞念也니라 若離一切處無心하고 得
菩提解脫과 得涅槃寂滅과 禪定見性은 非也니라(頓悟要門)
無念이라 함은 一切處에 無心함이니, 一切 境界가 없으며 思慮 希求가 없
다.
모든 境界와 色相을 對하여도 영원히 起滅과 動搖가 없는 것이 無念이니,
無念은 즉 眞如正念이다. 만약에 無念인 一切處無心을 떠나서, 菩提解脫과 涅
槃寂滅과 禪定見性을 體得하려면 될 수 없다.
* 無心인 無念은 究竟佛地이니 이것이 卽 解脫涅槃이며 頓悟見性이다.
頓悟者는 爲頓除妄念하고 永絶人我하야 畢竟空寂하야 卽與佛로 齊等하야 無有
異니라(頓悟要門)
頓悟한 者는 妄念을 頓除하고 人我를 永絶하여 畢竟에 空寂하므로, 즉시에
佛陀와 齊等하여 秋毫의 차이도 없다.
* 一切妄念이 永斷된 大空寂三昧를 頓悟라 하나니 이는 究竟佛地이다.
妄念不生이 爲禪이요 坐見本性이 爲定이니 本性者는 是汝無生心이요 定者는
對境無心하여 八風이 不能動이니 若得如是定者는 雖是凡夫나 卽入佛位니라(頓
悟要門)
妄念이 생기지 않음이 禪이요 正坐하여 本性을 明見함이 定이니, 本性은 汝
等의 無生心이요, 定이라 함은 外境을 對하여도 無心하여 八風이 能히 搖動하
지 못하나니, 이러한 定을 體得하면 비록 凡夫이지마는 卽時에 佛位에 頓入하
느니라.
* 妄念이 滅盡하여 無生의 本性을 了見하여 無心을 體得하였으니 成佛이 아
닐 수 없다.
但能無心하면 便是究竟이니라(傳心法要)
다만 能히 無心하면 문득 이것이 究竟인 成佛이니라.
* 頓悟와 見性의 內容인 無心無念이 究竟覺이라 함은 前佛後祖가 如出一口
이다.
若了了知心이 不住一切處하면 卽了了見本心也요 亦名了了見本性也라 只箇不住
一切處心者는 卽是佛心이며 亦解脫心이요 亦名菩提心이며 亦名無生心이니 經
에 云하되 證無生法忍이 是也니라(頓悟要門)
만약에 마음이 一切處에 住著하지 않음을 明明了了하게 알면, 곧 本心을 了
了하게 본 것이며 또한 本性을 了了하게 본 것이라고 이름한다. 이 一切處에
住著하지 않는 心은 卽是 佛心이며 또한 解脫心이요 菩提心 無生心이라고 하
나니, 經에 말씀하시기를 無生法忍을 證得하였다 함이니라.
* 識心見性하여 마음이 一切處에 住著하지 않으면 즉 無生無念을 體得한 것
이니, 丈夫能事畢이라 自在無碍한 大解脫門의 無心道人이 아닐 수 없다.
靈山正脈이며 曹溪直傳인 見性은, 그 내용이 根本無明인 第八梨耶의 微細妄
想이 永滅한 無心 無生 無念等의 究竟佛地에 있음이 명확하다. 이는 妄滅證
眞하여 病差藥除하고 敎觀을 咸息하여 現證圓通한 圓證頓證의 證悟이니, 이
것이 佛祖正傳의 見性이며 頓悟이다.
만약에 第八梨耶의 微細妄想은 고사하고 六七識의 楸重生滅妄想도 未脫한
解悟로써 見性이라 云謂한다면 이는 佛祖의 慧命을 단절하고 衆生의 正路를
파괴하는 正法의 大逆이니, 이러한 異端邪見에 誤落되지 않도록 努力하여야
한다.
七. 保任無心
內外虛寂하고 湛然凝照하야 到一念不生處하야 透徹淵源하야 유然自得하면 體
若虛空하야 莫窮邊量이라 亘古亘今하야 萬像이 羅籠不住하며 凡聖이 拘碍不得
하야 淨裸裸赤 하나니 謂之本來面目이며 本地風光이니라 一得永得하야 盡
未來際하나니 更有甚生死하야 可爲滯碍리오 此箇無心境界와 無念眞宗은 要猛
利人이라사 方能著實이니라(圓悟心要)
內外가 虛寂하고 湛然히 凝照하야 一念도 不生하는 深處에 도달하여서 淵源
을 철저히 透得하여 유然히 自得하면, 그 當體가 虛空과 같아서 邊量을 窮盡
하지 못한다. 上古와 現今에 뻗쳐서 萬像이 羅籠하지 못하며 凡聖이 拘碍하지
못하여 淨裸裸赤 하나니, 이를 本來面目이라 本地風光이라 한다. 一得하면
영원히 證得하여 未來際가 다 하여도 亡失하지 않나니, 무슨 生死가 있어서
가히 滯碍하리오. 이 無心境界와 無念眞宗은 猛利한 사람이라야 能히 實證
한다.
* 無心無念의 本來面目을 徹證하여야 비로소 悟達이라 하나니 未來劫이 窮
盡토록 自在無碍한 이 大休歇地가 正眼宗師의 安身立命處이다.
直透本來妙心하면 亘古亘今하고 湛然不動하야 萬年一念이요 一念萬年이라
永無渗漏하야 一得永得하야 無有變易하나니 乃謂之直指人心見性成佛이니라
(圓悟心要)
本來의 眞如妙心을 直透徹證하면, 古今에 長亘하고 湛然히 不動하여 萬年이
一念이요 一念이 萬年이다. 心地에 永永히 一毫의 渗漏도 없어서 一得하니
永得하여 如如不動하는 妙心은, 變異가 절대로 없나니 이것을 人心을 直指하
여 見性 成佛한다고 하느니라.
* 眞妄의 渗漏가 永絶하여 湛然히 不動하는 涅槃妙心은 千萬年이 다 하여도
變異가 없나니, 이 無心無念地가 참으로 見性이며 成佛이다.
與無心으로 相應하면 乃是究竟落著之地니 岩頭道하되 只守閑閑地라하며 雲居
道하되 千人萬人中에 如無一人相似라하며 曹山이 道하되 如經蠱毒之鄕하야 水
也不得沾他一滴이라하니 謂之長養聖胎며 謂之汚染不得이니라(圓悟心要)
長養聖胎一句는 作瑪生道오 不起纖毫修學心하고 無相光中常自在로다(圓悟 錄
二)
眞無心으로 相應하면 이는 究竟의 落著地이다. 岩頭는 다만 無爲無事한 閑
閑地만 守護한다 하였고, 雲居는 말하기를 千人萬人中의 紛雜한 곳에 있어도
一人도 없는 것과 같이 無心하다고 하였다. 曹山은 또한 蠱毒의 死鄕을 經過
하는 것과 같아서 한방울의 물도 젖지 않는다 하였다. 이것을 聖胎를 長養하
는 것이 라 하며 汚染할 수 없는 無心의 眞境이라 했다.
長養聖胎의 一句는 어떻게 말하는고? 纖毫의 修學心도 일으키지 않고 無相
光中에 恒常 自在하도다.
* 一切萬念이 俱滅한 無心地를 體得하면, 無爲無事하며 閑閑寂寂할 뿐이다.
이 大休歇處에 安身한 達道者는, 千萬群衆의 紛擾한 속에 있어도 人影이 永
絶한 深山窮谷에 있는 것과 같이 身心이 安閑하다. 一滴의 毒水로 生命을
卽奪함과 같이, 極微一念이라도 起動하면 自性을 昧却하나, 一得永得하여
如如不變하므로 微念도 起動치 않나니, 이렇게 大寂滅場中에서 遊戱自在하
는 것이 正眼宗師들의 悟後行履이다.
心冥境寂然後에 有所證入하나니 及至證入하야는 證亦非證이요 入亦非入이라
유然通透하야 如桶底脫하야사 始契無生無爲한 閑閑妙道正體니라(圓悟心要)
內心이 玄冥하고 外境이 空寂한 然後에 大道에 證入한 바 있나니, 證入하
고 나서는 證도 또한 證이 아니요, 入도 또한 入이 아닌지라, 유然히 深通
徹透하여 桶底가 陷脫한 것과 같아야 비로소 無生無爲인 閑閑한 妙道의 正
體에 契合하느니라.
* 豁然히 徹證하여 證跡도 不得하여야 究竟大休歇地인 無生無爲하여 閑閑無
事한 道體에 契合한다. 岩頭의 只守閑閑地는 無生無爲인 究竟無心의 閑閑地
를 말함이니, 이로써 長養聖胎와 保任履踐의 眞意를 正解할 것이다.
得道之士는 徹證無心이라 雖萬機頓赴나 豈撓其神하며 干其慮哉아 只守閑閑
地하야 如痴似兀하나 及至臨事하야는 風旋電轉하야 靡不當機니라(圓悟心要)
大道를 體得한 高士는 無心을 철저히 深證한지라, 비록 萬般群機가 一時에
來赴하여도 어찌 그 精神을 撓動하며 그 深慮를 干犯하리오. 다만 閑閑한 心
地만 守護하여 愚痴함과 같으며 鈍兀함과 같으나, 百事에 應臨하여서는 急風
과 같이 旋回하며 飛電과 같이 活轉하여 的機에 正當치 않음이 없느니라.
* 閑閑地는 徹證無心한 大休歇處의 表現이다.
到極深處하야는 無深하며 極妙處하야는 無妙하야 大休歇 大安穩하야 不動纖
塵하고 只守閑閑地하야 凡聖이 莫能測하며 萬德이 不將來然後에 可以分付鉢袋
子也니라(圓悟心要)
極深處에 도달하여서는 深이 없으며, 極妙處에서는 妙가 없어서, 大休歇하
며 大安穩하며 纖塵도 不動하고 다만 閑閑地만 守護하며, 凡聖이 능히 測量
치 못하며 萬德이 將來하지 못한 연후에 傳法의 鉢袋子를 分付하느니라.
* 極深極妙의 大安穩 大休歇處인 無心無念의 閑閑地를 圓證하여야만 佛祖正
傳을 계승한다. 만약 有心有念의 紛紛地인 解悟에서 得道를 詐稱하며 傳法
을 恣行한다면, 이는 未得謂得 未證謂證하는 滅佛種族이다.
到無心地하면 一切妄念情習이 俱盡하고 知見解碍가 都消하나니 更有甚事리
오 故로 南泉이 云 平常心이 是道라하니라(圓悟心要)
無心地에 到達하면 一切의 妄念과 情習이 俱盡하고 知見과 解碍가 都消하나
니, 다시 무슨 일이 있으리오. 그러므로 南泉이 말하기를 平常心이 道라 하니
라.
*여기서 平常心이라 함은 妄念情習과 知見解碍가 蕩盡한 大無心處이다. 迷
惑한 盲者는, 煩惱妄想等 衆生 本然의 生滅心으로 錯覺하나니 참으로 將南
作北의 狂見이다.
致至實平常大安穩處하면 了無纖芥可得하고 只恁瑪隨處轉安하나니 眞無心道
人也라 保任此無心하야 究竟에 佛亦不存이어니 喚甚瑪作衆生이며 菩提도 亦不
立이어늘 喚甚瑪作煩惱리오 유然永脫하야 應時納祐하야 遇飯喫飯하며 遇茶喫
茶니라 縱處하야도 如山林하야 初無二見하야 假使致之蓮華臺上하야도 亦不生
이요 抑之九泉之下하여도 亦不起厭이니라(圓悟心要)
至實한 平常의 大安穩處에 到達하면 了然히 纖芥도 可히 所得한 것이 없고,
다만 이같이 處所를 따라서 自由로히 安穩하나니 眞實로 無心道人이다. 이
無心을 保任하여 究竟에 佛도 또한 存在하지 않는데 무엇을 불러 衆生이라 하
며, 菩提도 또한 成立되지 않거늘 무엇을 불러 煩惱라 하리오. 유然히 永脫하
며 때에 順應하여 自在하니 밥을 만나면 밥을 먹고 茶를 만나면 茶를 마신다.
설사 奔雜한 市井에 處하여도 寂靜한 山林과 같아서 當初에 二種의 見解가 없
다. 설사 蓮華臺上에 모셔도 悅하지 않으며 九泉之下에 抑閉하여도 嫌厭하
지 않 는다.
* 無心道人의 無碍自在한 大寂三昧가 保任이며 長養이니, 이는 妄滅證眞하
여 究竟覺을 성취한 후의 生活이다.
脚踏實地하야 到安穩處時엔 中無虛假底工夫하야 綿綿不漏絲毫하고 湛寂凝然
하야 佛祖莫知요 魔外無提라 是自住無所住大解脫이니 雖歷窮劫하야도 亦只如
如地어니 況復諸緣耶아(圓悟心要)
自性의 實地를 踏著하여 無事安穩한 곳에 도달한 때에는 心中에 虛假한 工
夫가 없다. 綿綿不絶하여 絲毫도 渗漏하지 않고, 凝然히 湛寂하여 佛祖도 知
得할 수 없으며 魔外도 提携하지 못한다. 이것은 無所住의 大解脫에 自住함이
니, 비록 窮劫을 經歷하여도 또한 如如不變하거늘 하물며 塵緣이 다시 있으
랴.
* 億千萬劫토록 如如不變한 大解脫境界가 無心安樂人의 日常行履이다.
心中에 不留一物하면 直下에 似箇無心底人하야 如痴似兀하야 不生勝解라 養
來養去하야 觀
生死하되 甚譬如閑하야 便與趙州南泉과 德山臨濟로 同一見也 니 切自保任하야
端居此無生無爲大安樂之地니라(圓悟心要)
心中에 一物도 殘留하지 않으면 直下에 木石과 같은 無心人이 되어서, 愚痴
鈍兀함과 같아 勝解를 내지 않는다. 養來하고 養去하여, 生死를 觀하되 甚히
無事閑暇로움과 같아 문득 趙州 南泉과 德山 臨濟와 더불어 同一한 見地에 서
게 되니, 懇切히 스스로 保任하여 이 無生無爲의 大安樂한 境地에 端居하느니
라.
*無生無爲인 大安樂의 解脫境界에서 優遊自在하는 것이 保任이다.
到一念不生하고 前後際斷處하야 驀然透徹하야 如桶底脫하야 有歡喜處하면
極奧極深하야 踏著本地風光하며 明見本來面目하야 不疑天下老和尙의 舌頭니라
坐得斷把得住하야 以無心無事로 養之라 二六時中에 無虛過底工夫하야 心心不
觸物하며 步步無處所하나니 便是箇了事衲僧也니라(圓悟心要)
一念도 不生하고 前後際가 斷絶한 深處에 도달하여 驀然히 透徹하여 桶底가
脫落함과 같아서, 歡喜한 處所가 있으면 極奧하고 極深하여 本地의 風光을
踏著하고 本來의 面目을 明見하여 天下老和尙의 舌頭를 疑心하지 않는다. 一
切를 坐斷하며 把住하여 無心과 無事로 長養한다. 二六時中에 虛過하는 工夫
가 없어서 心心에 觸物하지 않고 步步에 處所가 없나니, 이것이 참으로 萬事
를 了畢한 出塵한 衲僧이다.
* 一念不生하는 深奧한 境界에서 豁然大悟하여 本來面目 즉 自性을 徹見하
고 無心과 無事로 長養聖胎하는 것이 佛祖도 窺知할 수 없는 正眼衲僧의 不
可思議 한 悟後의 保任이다.
直似大死底人하야 絶氣息然後에 甦醒하면 始知廓同太虛하야 方到脚踏實地니
라 深證此事하야 等閑蕩蕩地하야 百不知百不會하나니 至築著하면 便轉록록
이라 更無物制하며 亦無方所하야 要用便用하며 要行便行하나니 更有甚得失이
리오 通上徹下하야 一時收攝하나니 此無心境界는 豈容易履踐湊泊이리오 要須
是箇人 始得다(圓悟心要)
곧 大死한 사람과 같아서 氣息이 斷絶된 然後에 甦醒하면, 비로소 廓然 히
太虛와 同一함을 알아야 바야흐로 實地를 踏著하는 데 到達한다. 此事를 深
深徹證하여 等閑에 蕩蕩無碍하여 百不知하고 百不會하나니, 반드시 築著하게
되면 문득 록록히 活轉한다. 다시는 物制도 없고 또한 方所도 없어서 要用하
면 便用하고 要行하면 便行하는데, 다시 무슨 是非得失이 있으리오. 上으로
通透하고下로 徹底하여 一時에 收攝하나니, 深玄한 이 無心境界를 어찌 容易
히 履踐하며 湊泊하리오. 이것은 모름지기 過量大人이라야 한다.
* 悟後履踐은 深證此事하야 任運自在한 大無心境界에 있으니, 大死大活한
絶學無爲閑道人이라야 한다.
直截根源하야 更無依倚하고 脫却知見解碍하며 不拘淨染二邊하야 超證無上眞
宗하야 履踐無爲無作이니라(圓悟心要)
心性의 根源을 直截하여 다시는 依倚가 없고, 知見과 解碍를 脫却하여 淨穢
二邊에 拘碍되지 않아서 無上의 眞宗을 超證하여 無爲無作을 履踐한다.
* 無心無念의 無上眞宗을 超證하여 無爲無作을 履踐하는 것이 佛祖正傳의
悟後保任이다.
若一念圓證하야 念念修行하면 以無修而修하며 無作而作이라 於一切境에 不
執不著하야 不被善惡業緣縛하야 得大解脫하나니 到百年後에는 유然獨脫하야
前程이 明朗하야 劫劫生生에 不迷自己니라(圓悟心要)
만약 一念에 自性을 圓證하여 念念이 修行하면 修함이 없이 修하며 作함이
없이 作하는지라, 一切의 境界에 執念치 않으며 愛著치 않아 善惡의 業緣에
繫縛되지 않아서 大解脫을 얻는다. 死後에 이르러서는 유然히 獨脫하여 前程
이 明朗하여 劫劫生生에 自己를 迷昧하지 않느니라.
* 悟後의 修行은 自性을 圓證하여 究竟無心을 성취한 후에 시작되나니 이는
自在解脫이며 自在三昧이다.
南岳이 云 修證卽不無나 汚染卽不得이라하니 卽此不汚染之修는 可謂圓 修니
還著得箇修字瑪아 卽此不汚染之證이 可謂圓證이니 還著得箇證字瑪아 如此 則
終日修而無修하야 掃地焚香이 皆悉無量之佛事어늘 又安可廢리오 但不著修證이
니라 九地도 尙無功用이어늘 況十地乎아 乃至 等覺이 說法을 如雲如雨하야도
猶被南泉呵斥하야 與道全乖어늘 況十地觀照가 與宗門而較其優劣이 可乎아(博
山警語)
南岳이 [修證은 없지 않으나 汚染은 卽 얻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 不汚
染의 修는 可謂圓修니 修字가 붙을 수 있는가. 이 不汚染의 證이 可謂 圓證이
니 證字가 붙을 수 있는가. 이러한즉 종일토록 修하여도 修함이 없어서 掃地
焚香이 전부 無量한 佛事이어늘, 이를 또한 어찌 廢하리오. 다만 修證에 著하
지않을 뿐이다. 九地도 오히려 無功用이어늘 하물며 十地리오. 설사 等覺이
說法하기를 如雲如雨하여도 오히려 南泉의 呵斥을 當하여 大道에 全然 背乖되
었거늘, 하물며 十地菩薩의 觀照로써 禪門의 優劣을 論할 수 있으리오.
* 六祖가 말하였다. 다만 自心에 항상 正見이 일어나서 煩惱와 塵勞가 능히
汚染하지 못하는 것이 곧 見性이다(但於自心에 常起正見하야 煩惱塵勞가
常不能染이 卽是見性이니라--壇經).
이와 같이 不汚染은 徹證後의 究竟無心이라야 可能하며 十地等覺도 追隨하
지 못한다. 그러므로 圓悟도 究竟無心의 閑閑地를 汚染不得이라 하였다(前
文參照).
그리하여 南岳의 不汚染修證은 十地等覺을 超越한 究竟地인 無爲無作의 履
踐이다. 이 不汚染의 圓證處는 唯佛與佛이 乃能窮盡하나니, 如來의 正眼을
完具한 宗門正傳의 命脈이다.
於一念不生處에 明悟此心이니라 虛而靈寂而照하야 內外洞然하야 唯一眞實이
니라 便能隨所作爲가 皆是透頂透底하야 大解脫金剛正體也니 要須了悟此心然後
에 修一切善이니라 平持此心하야 無我人無愛憎하며 無取捨無得失하야 漸漸長
養하나니 所謂理須頓悟요 事要漸修니라 離諸妄緣하야 유然澄淨然後에 奉行一
切善하야 饒益有情이니라(圓悟心要 答胡尙書悟性勸善文)
一念도 不生하는 곳에서 此心을 明了히 悟徹하느니라. 空虛하여 靈靈하 고
寂寂하여 照耀하며 內外가 넓게 밝아서 唯一한 眞實뿐이니라. 문득 능히 作
爲하는 바를 따라서 다 透頂透底하여 大解脫인 金剛正體이니 尤先 此心을 了
了히 明悟한 然後에 一切諸善을 修行할지니라. 此心을 平持하여 我人이 없으
며 愛憎이 없고 取捨가 없으며 得失이 없어서 漸漸히 長養하나니 所謂 理는
모름지기 頓悟할 것이요 事는 漸修함을 要하느니라. 모든 妄緣을 絶離하고 유
然히 澄淨 한 然後에 一切諸善을 奉行하여 有情을 饒益할지니라.
* 이는 一念不生處에서 廓徹明悟하여 虛靈寂照한 大解脫을 成就한 後에 一
切諸善을 修行하여 有情을 饒益하는 圓證圓修이다. 이 法語中의 理須頓悟요
事要漸修라 하는 句節로써 圭峯의 頓悟漸修와 混同하는 바가 往往 있다. 그
러나 圭峯의 頓悟는 心中有妄이므로 그 漸修는 心中除妄이요 圓悟의 頓悟는
心中無妄이므로 그 漸修는 事上修善이어서 圭峯의 漸修는 除業이요 圓悟의
漸修는 積善이니 頓悟漸修의 名稱은 同一하나 그 內容은 南北相反이다. 그
리고 修善을 漸 修라 함은 諸善을 一時에 盡行하지 못함이니 圓悟의 悟後
修行은 언제나 大解脫 圓證 以後의 不汚染의 修인 故로 其實은 圓修이다.
圭峯이 都序에서 頓悟頓修는 一念不生前後際斷이라고 規定하였으나, 一念不
生處에 住著하면 正悟가 아니며 眞無心이 아니다.
그러므로 禪門正傳의 悟後保任은 반드시 一念不生處에서 徹證無心함을 前
提로 하였으니, 이는 頓修圓證後로부터 始發된다. 그리하여 保任長養은 妄
滅證眞 하여 病差藥除한 無念無生의 大休歇 大解脫인 究竟地를 말함이다.
그러니 參學高人은 오직 佛祖의 正傳을 標準하고 餘外의 異說은 追從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煩惱習은 名煩惱殘氣니라 譬如久鎖脚人이 卒得解脫하야 行時에 雖無有鎖나
猶有習在요 如乳母衣가 久故垢著일새 雖以淳灰로 淨洗하야 雖無有垢나 垢氣猶
在니라(大智度論 二十七)
煩惱의 習이라 함은 煩惱의 殘氣를 말함이니라. 비유하건대, 長久히 兩脚을
拘鎖한 人間이 卒地에 解脫함을 얻어서 行步할 때에 비록 拘鎖가 없으나 오히
려 習慣이 殘在하고, 乳母의 衣服이 日久한 故로 垢穢가 付著하였을새 비록
淳灰로써 淸淨히 洗浣하여 垢穢가 完全히 없으나 垢穢의 氣分이 殘在함과 같
느니라.
* 煩惱가 滅盡하여도 그 餘習과 殘氣를 習氣라 하며, 이 習氣消磨를 悟後保
任이라고 云謂하는 바 있다. 그러나 前述함과 같이 悟後保任은 圓證 以後의
無位無事하며 無心無念한 常寂常照의 大解脫深境이므로 絶學無爲閑道人의
任運自在한 이 無心大定에는 習氣는 紅爐點雪이다. 그러므로 오직 自性을
圓證하여 保任無心할 뿐 習氣는 문제삼을 필요가 없다. 馬祖는 著衣喫飯하
여 長養聖胎하여 任運過時하니 更有何事오 하였으며, 誌公도 不起纖毫修學
心하고 無相光中에 常自在라고 하였다.
法達이 言下에 大悟하야 自言호대 已後로는 念念修行佛行하리이다 大師言호되
卽佛行이 是佛이니라
(敦煌本壇經)
法達이 言下에 大悟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已後로는 생각생각 佛行을 修行하
겠읍니다 하니, 大師 말씀하기를 佛行이 곧 佛이니라.
* 壇經의 大乘寺本에는 願修佛行, 興聖寺本에는 方修佛行이라 하였으나 뜻
은 同一하다. 이는 頓悟見性하면 佛地이므로 悟後漸修는 必要없고 佛行을
修行한다 함이니, 이것이 無心을 圓證 後의 無事行이다.]
八. 寤寐一如
有一般昭昭靈靈한 靈臺智性하야 能見能聞하야 向五蘊身田裏하야 作主宰하나
니 恁瑪爲善知識하면 大잠人이니라 我今問汝하노니 若認昭昭靈靈하야 爲汝眞
實이면 爲甚瑪하야 개睡時엔 又不成昭昭靈靈고 若개睡時에 不是면 這箇는 認
賊爲子니 是生死根本이며 妄想緣起니라(玄沙備 傳燈錄 十八)
一般으로 昭昭靈靈한 靈臺의 智性이 있어서, 능히 보며 능히 듣고 五蘊의
身田 속에서 主宰를 짓나니 이렇게 하여 善知識이라 한다면 크게 사람을 속임
이다. 만약에 昭昭靈靈을 認得하여 너의 眞實을 삼는다면, 개睡할 時에는 어
째서 昭昭靈靈이 없어지는가. 萬若 개睡할 때에 없으면 이것은 盜賊을 誤認하
여 子息으로 삼는 것과 같으니, 이는 生死의 근본이며 妄想의 緣起이다.
* 如何히 大悟하고 知見이 高明한 것 같아도, 實地境界에 있어서 熟眠時에
如前히 暗黑하면 이는 妄識의 變動이요 實悟는 아니다. 그러니 修道者는
반드시 寤寐一如의 實境을 透過하여야 正悟케 된다.
湛堂準이 謂大慧고曰 고上座야 我這裏禪을 爾一時理會得하야 敎爾說也說得
하며 敎爾拈古頌古와 小參普說도 爾也做得하나 祗是有一件事未在라 爾惺惺思
量時엔 便有禪하되 睡著時엔 便無了하니 若如此하면 如何敵生死리오 고曰
正是某의 疑處니이다(大慧 宗門武庫)
湛堂準이 大慧에게 말하였다. 고上座여, 나의 禪法을 그대가 一時에 理解하
여 說法을 하라면 說法을 잘 하고 拈古 頌古나 小參普說할 것 없이 잘한다.
그러나 一件 事實이 있어서 實悟가 아니다. 그대가 惺惺히 思量할 때에는 문
득 禪이 있으나 겨우 잠 들었을 때에는 문득 없어진다. 만약에 이러할진대 어
찌 生死를 當敵하리오. 고가 대답하되, 참으로 이것이 저의 疑心하는 바입니
다라고 하였다.
* 說法 其他에 아무리 能한 것 같아도 睡眠時에 캄캄하면 이는 전혀 第 六
意識中의 思量分別인 知解邪見이요 實悟가 아니니, 修道人은 양심에 비추어
猛然히 반성하여야 한다.
寤寐一如의 境地에도 도달하지 못하고서 頓悟見性이라고 自負한다면 이는
自誤誤人의 大罪過이며 修道過程에 있어서 可恐할 病痛이요 障碍이다.
大慧問圓悟하되 自念하니 此身이 尙在하야도 只是睡著하면 已作主宰不得이
어니 況地水火風이 分散하야 衆苦가 熾然하면 如何不被回換이릿고 悟가 但以
手로 指曰 住住어다 休妄想休妄想하라 又曰待汝說底許多妄想이 絶時에 汝自到
寤寐恒一處也리라 初聞코 亦未之信하야 每日我自顧하되 寤與寐가 分明作兩段
이어늘 如何敢大開口하야 說禪고 佛說寤寐恒一이 是妄語則我此病을 不須除어
니와 佛語果不欺人이면 乃是自我未了로다 後聞熏風이 自南來하야 忽然去却碍
膺之物하고 方知夢時便是寤時底요 寤時便是夢時底니 佛言寤寐恒一을 方始自知
라 這般道理는 拈出人不得하며 呈似人不得하되 如夢中境界하여 取不得捨不得
이니라
(大慧 廣錄 二十九)
大慧가 圓悟에게 물었다. 제가 생각하니 此身이 아직 存在하여도 다못 睡眠
할 때에는 캄캄하여 主宰가 되지 않읍니다. 그러하니 地水火風이 分散하는 死
境에서 衆苦가 熾然히 일어날 때에는 어찌 回換顚倒되지 않겠읍니까. 圓悟는
다만 手指로 가리키며, 그만하고 그만하라 그리고 妄想을 쉬어라 妄想을 쉬어
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대가 只今 說法하는 許多한 妄想이 斷絶
될 때에 그대 스스로 寤寐恒一處에 도달하리라고 하였다. 初聞하고는 또한 信
從하지 않아서 每樣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回顧하여 보건대, 寤와 寐가 分明
히 兩段이어늘 어찌 감히 크게 開口하여 禪을 說하리오. 다못 寤寐恒一이라한
佛語가 妄語라면 나의 此病을 除去할 것 없지마는, 佛語가 과연 衆生을 欺瞞
하지 않으면 이는 내가 아직 未達한 것이다. 後日에 熏風이 南으로부터 吹來
한다는 說法을 듣고, 忽然히 心中에 碍膺된 物件을 去却하고서 바야흐로 夢時
가 곧 寤時와 같고 寤時가 곧 夢時와 같음을 알게 되니, 寤寐恒一이라 한 佛
言을 알았다.
이 道理는 他人에게 拈出할 수도 없고 呈似할 수도 없어서, 夢中境界
와 같이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 寤寐恒一은 睡夢中과 熟眠時의 兩種이 있는데, 夢中位는 第六意識의 領域
이니 敎家의 七地에 該當하고, 熟眠位는 第八梨耶의 微細에 住著한 八地 以
上의 自在菩薩들과 梨耶微細를 永離한 佛地의 眞如恒一이니, 지금 大慧가
말한 바는 夢中一如이다.
대개 寤寐一如를 不信하는 것은 大慧만의 病痛이 아니요 修道人의 古今通
病이다. 一知半解의 邪見으로써 寤寐一如의 實境을 부정하고 감히 大開口說
禪하니 참으로 痛歎할 바이다. 大慧가 만일에 湛堂·圓悟 같은 明眼宗師를
만나서 回心하지 않았다면, 後日의 大成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大慧가
寤寐一如를 實 地로 體得하고는 佛言寤寐恒一이 是眞語며 不妄語라고 讚歎
하며 그 恩惠는 粉骨 碎身未足酬라고 感激하였다.
修道人은 各自의 私見을 고집하지 말고, 古佛古祖의 言敎를 표준삼아 究
竟無心地를 實證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自己의 生死大事도 해결하지
못하며 佛祖의 慧命은 영원히 斷絶될 것이다.
妙喜는 一生을 不自肯하고 晩登川勤之室하야 直階華嚴七地하니라(大明高僧
傳 六)
妙喜(大慧)는 일생동안 自肯하지 않고, 晩年에 川勤(圓悟)의 祖室에 入參하
여 곧 華嚴七地에 昇進하였다.
* 華嚴七地菩薩의 聖位가 高遠難到한 것 같지마는, 누구든지 夢中에 一如하
면 七地位이다. 그러나 熟眠一如인 滅盡定의 自在位는 아니어서 여기에 아
직 一 大重關이 있으니 노력하여 期必코 透過하여야 한다.
想陰이 盡者는 是人이 平常에 夢想이 消滅하야 寤寐恒一하야 覺明이 虛靜
하야 猶如虛空하야 無復楸重前塵影事니라(楞嚴經 十)
想陰이 滅盡한 者는 是人이 平常時에 夢想이 消滅하여 寤寐에 恒一하여, 覺
明이 空虛하고 寂靜하여 虛空과 같아서 다시는 추重한 前塵妄想의 影事는
없다.
* 第六意識의 楸重妄想은 消滅하여도 第八의 微細妄想이 尙存하니 寤寐恒一
은 夢中과 熟眠에 다 통한다. 그리하여 夢中一如는 七地, 熟眠一如는 八地
以上에 해당한다.
菩薩이 住此第七地하야 修習方便慧와 殊勝道하야 安住不動하야 無有一念도
休息廢捨하나니 行住坐臥와 乃至睡夢中에도 未曾與盖障으로 相應하느니라(華
嚴經 十地品)
菩薩이 此第七地에 住하면 方便慧와 殊勝道를 修習하여 安住不動하여 一念
도 休息하여 廢捨하지 않나니, 行住坐臥와 乃至 睡夢中에서도 暫時라도 盖障
과 相應하지 않느니라.
* 第七地의 無相定에서는 楸重妄想이 習伏되어, 夢中에서도 如如하여 어떤
障碍도 받지 않는다.
菩薩이 第七地에 行住坐臥와 乃至睡夢에도 遠離障盖니라(十地經)
菩薩이 第七地에서는, 行住坐臥와 乃至睡夢中에서도 모든 障盖를 遠離한다.
* 障盖는 煩惱妄想으로 發生하는 修道上의 障碍이다. 菩薩이 第七地에서 비
로소 夢中에 一如하니 修道人이 夢中一如만 되면 第七地와 同等하다.
無想天과 無想定과 滅盡定과 睡眠과 悶絶의 此五位中에 異生은 有四하니 除
在滅定이요 聖唯後三이라 於中에 如來及自在菩薩은 唯得一이니 無睡悶故니라
(成唯識論 七)
無想天과 無想定과 滅盡定과 睡眠과 悶絶의 此五位中에, 異生인 凡夫는 四
位를 다 俱有하니 滅盡定을 除外함이요, 聖位에서는 後의 三位만 있다. 그 中
에 如來와 自在菩薩들은 오직 滅盡定 一位만 있으니 睡眠과 悶絶이 없는 緣故
이다.
無心五位中에 異生이 有四者는 除滅定이요 聖唯後三이며 佛及八地已去菩薩
은 唯得一滅
定하야 無睡眠悶絶이니 二以惡法故로 現似有睡나 實無有故요 卽 二乘無學도
亦有悶絶也니라(宗鏡錄 五十五)
無心의 五位中에 異生에 四位가 있다 함은 滅盡定을 除外한 것이요 聖衆은
오직 後의 三位뿐이며, 佛과 八地已後의 自在菩薩은 唯獨 滅盡定만 있어서 睡
眠과 悶絶이 없나니, 이 二種은 惡法이므로 現狀으로는 睡眠하는 것 같아도
實質로는 없는 緣故요, 즉 二乘의 無學들도 또한 悶絶이 있느니라.
* 여기에서 無心이라 함은 如來를 除外하고는 전부 假無心을 말한 것이다.
自在菩薩과 如來를 滅盡定이라 하였는데, 自在菩薩의 滅定은 第六意識 즉
六추만 消滅된 假無心이요 如來의 滅定은 第八識 즉 三細까지 消滅한 眞無
心이다.
睡眠과 悶絶이 없음은 寤寐가 一如함을 말함이니, 自在菩薩은 第八의 無
記無心에서 一如하고, 如來는 眞如의 究竟無心에서 一如한 바 眞正한 一如
는 佛地의 究竟無心뿐이다.
漸到寤寐一如時에 只要話頭心不離라 疑到情忘心絶處하면 金烏夜半에 徹天飛리
니 於時에 莫生悲喜心하고 須參本色永決疑어다(太古集)
漸漸하여 工夫가 寤寐가 一如한 時에 到達하거든, 다못 心中에 話頭를 離却
忘失하여서는 안된다. 參究하여 情忘하고 心絶한 深處에 도달하면, 金烏가 夜
半에 徹天하여 高飛하리니, 그 때에 悲喜心을 내지 말고 모름지기 本色正眼을
往參하여 永永히 의심을 결단하라.
* 이 寤寐一如는 如來의 眞如一如를 除外한 것이다. 寤寐가 一如한 後에 了
徹하여 無餘하면 自性을 洞見하는 것이다. 그러나 根器에 따라서 或 未徹함
이 있을 수 있으니, 正眼宗師를 期必코 往參하여 印證을 받아야 참으로 의
심을 놓는 것이다.
太古和尙은 二十年間을 刻苦參究하여 三十七歲에 寤寐一如가 되고 三十八歲
에 大悟하여, 中國의 石屋禪師를 參謁하여 印可를 받고 臨濟正脈을 繼承하
였다.
工夫가 旣到動靜無間하며 寤寐恒一하야 觸不散蕩不失하야 如狗子見熱油相似하
야 要지又지不得하며 要捨又捨不得時에 作瑪生合殺오(懶翁集)
工夫가 이미 動靜에 間斷 없으며 寤寐에 항상 一如함에 이르러 抵觸하여도
散去하지 않고 蕩蕩히 亡失되지도 않는다. 狗子가 極熱한 油당을 봄과 같아서
핥을래야 핥을 수도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合當한
고.
* 懶翁이 工夫十節目을 作成하여 修道의 指針이 되게 하였는데 이는 그 第
六節目이다. 그리하여 參禪悟道에는 寤寐一如의 通過를 必須條件으로 삼는
다. 만일에 이것을 통과하지 못하면 見性이 아니며 悟道가 아니다.
十地等覺을 超過한 究竟覺인 無心을 徹證하여 眞正한 寤寐一如에서 永劫
不昧하여야 見性이며, 이 大無心地를 保任하는 것이 悟後履踐임은 佛祖正傳
의 鐵則이다. 그러면 究竟無心을 實證한 宗師가 그 얼마나 될는지 의심할지
도 모른다. 그러나 夢中一如가 되면 벌써 華嚴七地며 熟眠一如가 되면 八地
以上이다. 禪門의 正眼宗師치고 이 寤寐一如의 玄關을 透過하지 않고 見性
이라고 한 바는 없으며, 八地 以上인 熟眠一如 以後에서 開悟하였으니 究竟
覺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客塵煩惱가 如前無殊하여 楸重妄識도 未脫한 解
悟는 見性이 아니 며 頓悟가 아니므로 이를 절대로 容認하지 않는 것이다.
九. 死中得活
如今人은 多是得箇身心이 寂滅하고 前後際斷하야 休去歇去하야 一念萬年去
로 便爲究竟이나 殊不知却被此勝妙境界가 障蔽自己하야 自己正知見이 不能現
前하며 神通光明이 不能發露니라(眞淨文 古尊宿語錄 四十四)
如今의 修道人은 多數가 心身이 寂滅하고 前後際가 斷絶함을 體得하여 休去
하고 歇去하여 一念이 萬年去로 문득 究竟을 삼는다. 그러나 도리어 이 勝妙
한 境界가 自心을 障蔽함을 입어서 自己의 正知見이 現前하지 못하며 神通光
明이 發露하지 못한다.
* 心身이 寂滅하여 一念不生하고 前後際斷한 勝妙境界도 正悟가 아니어늘,
念起念滅하여 一念不生도 못된 者는 말할 것도 없다.
休去歇去하여 一念萬年이며 前後際斷하니 諸方에 有幾箇가 到這般田地오 他却
喚作勝妙境界하니 舊時에 寶峯廣道者가 便是這般人이라 一箇渾身을 都不理解
하며 不見有世間事하고 世間塵勞가 昧他不得이라 雖然恁瑪나 却被勝妙境界
하야 障却道眼하니 須知一念不生前後際斷處하야 正要見尊宿이니라(五祖演--大
慧錄 十七)
休去歇去하며 一念이 萬年이며 前後際斷하니, 諸方에 幾箇나 이 深深한 田
地에 到達하였는가. 眞淨이 이를 도리어 勝妙境界라고 부르니, 舊時에 寶峯의
廣道者가 참으로 이러한 사람이다. 自己의 渾身을 全然 忘却하며 世間事가 있
음을 보지 못하고 따라서 世間의 塵勞가 그를 昧却하지 못한다. 비록 그러하
나 도리어 이 勝妙境界에 떨어져서 道眼을 障却하니, 참으로 一念不生하고 前
後際斷 한 勝妙境界에 到達하여서 正히 大尊宿을 參見하여야 함을 알아라.
* 一念不生 前後際斷을 圭峯은 頓悟頓修라 하여 讚歎不已하였다. 그러나 正
傳의 尊宿들은 이를 勝妙境界라 하여 排除하였으니 그 深淺과 優劣을 可히
알수 있다. 實際에 있어서는 難得의 勝妙境界도 正眼을 障蔽하는 大病이니
正眼知識을 參見하여 廓然徹悟하여 心身이 寂滅한 이 死地에서 大活하지 않
으면 正悟가 아니다.
達磨云하되 外息諸緣하고 內心無喘하야 心如墻壁하야사 可以人道니라.
一念不生하고 前後際斷하야 塵勞頓息하고 昏散을 剿除하야 終日애준준地하
야 恰似箇泥塑木彫底하나니 故로 謂墻壁으로 無殊라하니라 到這境界現前하면
卽到家消息이 決定去地不遠이니라(高峯妙)
達磨가 말했다. 外境의 諸緣을 頓息하고, 內心이 寂然無喘하여 心境이 墻壁
과 같아야만 可히 大道에 正入하느니라.
一念도 不生하고 前後際가 忽斷하여 塵勞가 頓然히 息滅하고 昏沈과 散亂을
斷除하여 종일토록 전혀 分別이 없어서 泥塑木彫와 恰似하니, 그러므로 墻壁
과 다름이 없다 하였다. 이 境界가 現前하면 正悟의 到家消息이 결정코 不遠
하다.
* 外境과 內心을 寂然息滅하여, 墻壁이나 木石과 같은 無心境界가 되어야만
大道에 悟入한다.
若一念不生하면 則前後際斷하야 照體獨立하야 物我一如하야 直造心源하야
無知無得하고 不取不捨하며 無對無修니라(澄觀心要 傳燈錄 三十)
만약에 一念不生하면 前後際斷하여 照體가 獨立하며 物我가 一如하여 곧 心
源에 도달하여 無知無得하고 不取不捨하며 無對無修니라.
* 萬念이 俱寂하면 眞如自性을 徹證케 되나니, 卽 見性이며 頓悟며 成佛이
다.
老漢이 見圓悟老師의 擧熏風이 自南來하고 忽然前後際斷하니 如一려亂絲를
將刀一截截斷相似하야 雖然動相이 不生이나 却坐在淨裸裸處라 老師云 可惜다
死了不能活이로다 不疑言句是爲大病이니 絶後更甦하야사 欺君不得이니라 每入
室에 只擧有句無句如藤倚樹하고 開口하면 便道不是라하다 我說箇譬喩曰這箇
道理는 恰似狗看熱油 相似하야 要지又지不得하며
要捨又捨不得이니다 一日에 老師가 擧樹倒藤枯相隨來也어늘 老漢이 便理會得
하고 乃曰某會也니다 老師曰 지恐니透公案不得이라하고 連擧一絡索효訛公案
하니 被我三轉兩轉截斷하되 如箇太平無事에 得路便行하야 更無滯碍하야 方
知道我不니하니라(大慧錄 十七)
老漢이 圓悟老師의 熏風自南來를 擧揚함을 보고 忽然히 前後際가 斷絶하니
一려의 亂絲를 利刀로써 一截하여 斷截함과 같아서 비록 動相이 不生하나 도
리어 淨裸裸處에 坐在하니라. 老師가 말하되 [可惜하다 死了하고 更活치 못하
는도다. 言句를 疑心하지 않는 것이 大病이니 死絶後에 更甦하여야 君을 欺瞞
치 못한다]고 하였다. 每日 入室함에 다만 有句無句는 藤넝쿨이 樹木을 倚止
함과 같다 함을 擧揚하고서, 내가 대답하려고 開口만 하면 문득 不是라 하였
다. 내가 譬喩를 說하되 這箇의 道理는 恰似히 狗子가 熱油당을 봄과 같아서
핥으려고 하나 핥을 수 없고, 버리려고 하나 버릴 수도 없읍니다고 하였다.
一日에 老師가 樹倒藤枯한 때에 相隨來也라고 擧揚하니 老漢이 문득 廓徹
하여 理會하였다. 그리하여 저가 理會하였다고 하니, 老師가 말하기를 [다만
네가公案을 透
過못할까 두려워한다]고 하며, 드디어 一絡索의 難解한 효訛公案을 連擧하였
다. 내가 三轉兩轉하여 截斷하되 太平無事時에 大路를 얻어 문득 行進함과 같
아서 다시 滯碍함이 없으니, 바야흐로 내가 그대를 欺瞞 못한다 함을 알았다.
* 寤寐一如에 夢中과 熟眠의 深淺이 있음과 같이, 勝妙境界인 一念不生 前
後際斷도 七地無想定과 八地滅盡定의 차별이 있다.
大慧는 夢中一如 즉 七地의 死境에서 究竟地까지 透過하니 과연 利根이
다. 이는 滅盡定의 大死는 아니지마는, 여기에서도 深悟하면 正覺을 성취한
다.
이와 같이 前後際斷의 勝妙境界를 禪門에서는 死了不活이라 하여 極力排
除하는 것이니, 여기에서 徹悟하여 豁然大活하여야만 正眼으로 印許하는 것
이다. 오직 生命線은 不疑言句是爲大病이어서, 大死後 大活하기 前에는 佛
祖公案의 深玄한 妙旨를 領會할 수 없다. 그러므로 七地大菩薩地位의 大慧
에게도 言句를 極力 參究시켰으며, 相隨來也에서 廓徹하였어도 恐爾透公
案不得이라 하였으니, 其外는 更論할 필요도 없다. 설사 八地 以上에서도
공案의 落處는 茫然不知하여 究竟正覺을 成就하여야 了知하는 것이니, 역시
불의언句하면 是爲大病이니, 參學高士는 萬世의 龜鑑으로 삼아야 한다.
半月餘에 動相이 不生하나 不合向這裏하야 坐住니 謂之見地不脫이니 碍正知
니라 每於睡著하야 無夢想見聞地엔 打作兩궐하야 經敎語錄에 無可解此病이
在胸中者十年이러니 一日에 見枯栢하고 觸目省發하야 向來所得境界가 撲然
하고 如闇室中에 出在白日하야 始得徑山老人의 立地處하니 好與三十棒이로
다 (雪岩錄)
半月餘에 動相이 不生하나 這裏에 坐住하면 合當치 못하니, 見地不脫이라
云謂하여 正知見을 障碍한다. 每樣에 熟眠하여 夢想과 見聞이 없을 때에는 截
斷되어 兩궐을 打作하여 經敎와 語錄에서 此病을 解消할 수 없었다. 胸中에
滯碍하여 있은지 十年이러니, 一日에는 枯栢을 보고 觸目하여 大省發悟하여
向前의 所得한 境界가 撲然히 散滅하였다. 그때 闇室에서 百日下에 나와 있음
과 같아서, 비로소 徑山老人(無準)의 立地處를 得見하니 三十棒을 打與함이
大好 하다.
* 熟眠時에는 茫然하여 一如치 못하니 이는 전체가 病이다. 이 大病을 正悟
로 錯認하면, 靑天白日下의 廓徹大悟는 未來劫이 다하여도 있을 수 없다.
雪岩이 問曰 日間浩浩時에 作得主瑪아 答하되 作得이니다 睡夢中에도 作
得主瑪아 作主니다 又問하되 正睡着하면 主在何處오 於此엔 無言可對며 無
理可伸이라 後五年에 驀然打破疑團하니 自此로 安邦定國하야 一念無爲하야
天下太平하니라(高峯語錄)
雪岩이 묻기를 日間 浩浩히 奔走할 때에 一如하느냐. 답하되 一如합니다.
夢中에도 一如하느냐. 一如합니다. 또 묻되 正히 熟眠할 때에는 主人公이 何
處에 있느냐. 여기에서는 言語로써도 可히 對答할 수 없으며, 이치로도 可히
伸說 할 수 없었다. 五年 後에 疑團을 打破하고 大悟하니, 自此로 安邦定國하
여서 一念無爲하여 天下가 太平하다.
* 雪岩父子도 夢中一如의 假死에서 究竟地에 頓入 大活하여 臨濟 正印을 授
受하였으니, 實로 千古의 榜樣이다.
大死底人은 都無佛法道理하니 玄妙得失과 是非長短을 到這裏하야는 只恁瑪
休去니라 古人이 謂之平地上死人이니 須是透過那邊하야사 始得이요 或有依倚
解會하면 沒交涉이니라 喆和尙이 云見不淨潔이라하며 五祖先師謂之命根不斷이
니 須是大死一番하야 却活하야사 始得다(碧岩錄 五)
大死한 사람은 佛法道理가 전연 없어서, 玄妙得失과 是非長短을 這裏에서는
다만 이렇게 休歇한다. 古人은 이를 平地上의 死人이라 하니 반드시 那邊에
透過하여야 되며, 만약에 依倚와 解會가 있으면 絶對로 不可하다. 喆和尙은
見地가 淨潔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五祖先師는 命根이 斷絶되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오직 大死一番하여서 다시 大活하여야 한다.
* 추重妄想인 第六意識이 滅盡한 第八梨耶의 無記가 大死이니, 이는 熟眠에
서도 一如한 自在 以上의 大菩薩位이다. 微細妄想인 第八梨耶를 離脫하지
못하면 이는 命根不斷이다. 그리고 十地等覺의 大死深坑에서 豁然大活하여야
梨耶의 無記까지 永滅한 眞大死이니, 常死常活하고 常寂常照하여 바야흐로
禪門의 本分種草가 된다.
這般의 生鐵로 鑄就漢은 或遇奇特境界커나 或遇惡境界커나 到此面前하야는
悉皆如夢相似하야 不知有六根하며 不知有旦暮하니라 直饒到這般田地하야도 切
忌守寒灰死灰하야 打入黑漫漫地去요 須有轉身一路하야사 始得다(碧岩錄 三)
이러한 生鐵로 鑄就한 者는 或 奇特한 境界를 만나거나 或은 惡境界를 만나
도 그의 面前에 있어서는 전연 夢中과 相似하다. 自己 六根이 있는 것도 모르
며 旦暮가 있는 것도 모른다. 비록 이러한 境界에 到達하였어도, 寒灰와 死灰
를 固守하여 暗黑한 곳으로 들어가서는 못쓰며 오직 轉身하는 大活路가 있어
야 한다.
* 假無心의 寒灰와 死灰를 執着하여 轉身하는 活路를 못얻으면 永永히 死地
에 埋沒되고 만다.
投子因趙州問하되 大死底人이 却活時에 如何오 子云 不許夜行이요 投明須到니
라 宏智가 小參에 擧此話云 若介時를 識得去하면 便知道하되 當明中에 有暗하
니 勿以暗相遇하고 當暗中에 有明하니 勿以明相覩하라 一切法盡處에 介時에
了了常在하고 一切法生時에 介時에 空空常寂하야 便知道死中活活中死로다(宏
智錄 五)
趙州가 投子에게 물었다. 大死한 사람이 却活한 때에는 어떠한고. 投子가
대답하였다. 夜行을 不許하고, 天明에 반드시 도달할지니라.
宏智가 小參에 이 法門을 擧揚하고 말하였다. 만약 이 時節을 識得하면 문
득 말하기를, 明中에 暗이 있으니 暗으로 서로 만나지 말고 暗中에 明이 있으
니 明으로 서로 만나지 말라 함을 알지니라. 一切 萬法이 滅盡한 이때에 了了
明明하여 항상 있고, 一切 萬法이 生起한 그때에 空空豁豁하여 恒常 寂寂하니
참으로 死中活이요 活中死라 함을 알 것이다.
* 大死하여 大活하면 梨耶無記까지 滅盡한 眞大死境이 現前하여, 常死常活
하고 常活常死하여 明暗이 雙寂하고 明暗이 雙照하니 佛祖의 正眼이다.
絶氣息時와 斷 跡處에 須具眼하야사 始得다 那時에 歷歷不沈하고 靈靈 絶對
하야 便能豁步大方하야 周旋普應하리라(宏智錄 五)
氣息이 永絶한 때와 跡이 斷滅한 곳에 참으로 正眼을 具備하여야 한다.
그때에는 歷歷하여 沈寂하지 않고 靈靈하여 相對가 끊어져서 문득 能히 大方
에 豁步하며 周旋普應할 것이다.
* 絶後更甦하면 玄機大用이 現前하여 殺活自在하고 縱橫無碍한 것이다.
田地穩密密處와 活計冷湫湫時에 便見劫空하야 無毫髮許도 作緣累하고 無
絲초許도 作障예하야 虛極而光하고 淨圓而耀하야 有亘萬古不昏昧底一段事
니라(宏智錄 六)
田地가 安穩하여 密密한 곳과 活計가 冷淡하여 湫湫한 때에 문득 劫이 空함
을 보아서 毫髮만큼도 緣累됨이 없고 絲초만큼도 障예됨이 없다. 空虛함이 至
極하여 光明이 있고 淸淨함이 圓融하여 照耀하니, 萬古에 뻗쳐 昏昧하지 않은
一段의 事實이 있다.
* 亘萬古不昏昧하여 未來劫이 다 하도록 如如不變하는 大寂光은 오직 大
死却活에서 오나니, 梨耶無記까지 永滅한 眞大死境의 大空寂中에서 發하는
大光明은 歷千劫而不古하고 亘萬世而長今이다. 楸重妄想이 滅盡하여 一念不
生하고 前後際斷한 大死深處도 第八魔境이어서 悟道가 아니며 見性이 아니
다. 滅盡의 死地에서 忽然 大活하여 常死常活하고 常寂常照하여, 寂照同時
며 寂照不立한 明 暗雙雙의 究竟無心을 徹證하여야 비로소 罷參碧眼이다.
只這大死却活處는 古佛도 亦不曾到며 天下老和尙도 亦不曾到니 任是釋迦老
子와 碧眼胡僧도 也須再參하야사 始得다 所以道하되 只許老胡知요 不許老胡會
라 하니라(圓悟 碧岩錄 四十一則)
諸人은 要會末後句瑪아 只許老胡知요 不許老胡會니라(雪竇 碧岩錄 五十一
則)
末後句를 爲君說하노니 明暗雙雙底時節이로다(雪竇 碧岩錄 五十一則)
招慶이 問羅山云 岩頭道하되 恁瑪恁瑪不恁瑪不恁瑪라하니 意旨가 如何오 山
云 雙明亦雙暗이니라 慶云 如何是雙明亦雙暗고 山云 同生亦同死니라(雪竇 碧
岩錄 五十一則)
雙照雙遮하며 同生同死하고 全明全暗하며 全殺全活이로다(圓悟錄 七)
이 大死却活한 深處는 古佛도 도달치 못하였으며 天下老和尙도 또한 도달치
못하였으니, 설사 釋迦와 達磨라도 반드시 再參하여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但只 老胡가 了知함을 許諾하고 老胡가 領會함은 不許한다고 하였다.
諸人은 末後句를 알고자 하는가. 只許老胡知요 不許老胡會니라.
末後句를 그대를 위하여 說하노니 明暗이 雙雙한 時節이니라.
招慶이 羅山에 問하되 岩頭가 말하기를 恁瑪恁瑪 不恁瑪不恁瑪라 하니 그
意旨가 如何오. 山云 雙明하며 또한 雙暗하니라. 慶云 如何是 雙明亦雙暗고.
山 云 同生하며 亦同死니라.
雙照雙遮하며 同生同死하고 全明全暗하며 全殺全活이로다.
* 大死大活하여 常寂常照하는 明暗雙雙의 末後句는 雙遮雙照 同生同死 全明
全暗 全殺全活等으로 表現하나, 이는 古佛도 未曾到인 最後 極深深處이니
오직 實參實悟에 있을 뿐이다.
一0, 大圓鏡智
위山이 謂仰山曰 吾以鏡智로 爲宗要하야 出三種生이니 所謂 想生 相生 流注生
이니라 想生은 能思之心이 雜亂이요 相生은 所思之境이 歷然이요 微細流注는
具爲塵埃니라(人天眼目)
위山이 仰山에게 말했다. 나는 大圓鏡智로 宗要를 삼아서 三種의 生을 出離
하여야 하니, 所謂 想生과 相生과 流注生이다. 想生은 能思하는 妄想이 雜亂
함이요, 相生은 所思의 塵境이 歷然함이요, 微細流注는 함께 塵埃가 되느니
라.
* 第八阿賴耶識인 微細流注를 滅盡하고 眞如自性을 洞見하면, 곧 究竟無心
인 大圓鏡智가 現前하나니 이것이 大死却活의 本來面目이다. 이 鏡智는 如
來의 果智로서 禪敎를 通하여 究竟處이다. 이 鏡智를 성취하여야 見性이니
위山뿐만 아니라 佛祖正傳은 전부 鏡智로써 宗要를 삼아서, 만약에 第八의
微細流注를 出離하지 않으면 現證圓通한 正眼은 못된다. 이것으로서도 見性
이 果上佛地임이 一層 明確하다.
未達其源하면 落在第八魔界니라(洞山初)
그 眞心의 本源에 到達하지 못하면, 第八微細인 魔界에 墮落한다.
* 假無心인 第八阿賴耶의 微細流注도 魔界이니, 第六意識의 楸重妄想은 더
말할 것도 없다.
湛然空寂하야 圓明不動이 卽 大圓鏡智니라(頓悟要門)
湛然히 空空寂寂하여 圓明不動함이 大圓鏡智니라.
* 微細流注를 超出하여 究竟無心을 證得하면, 六祖의 말씀과 같이 圓明常寂
照한 無上大涅槃이 즉 鏡智이다.
如初生孩子가 雖具六識하야 眼能見하며 耳能聞하나 未曾分別六塵하야 好惡長
短과 是非得失을 總不知라 學道之人도 要復如 孩하야 榮辱功名과 逆情順境이
動他不得하야 眼見色하되 如盲等하며 耳聞聲하되 如聾等하야 如癡似兀하야 其
心不動이 如須彌山이니라 無造作緣慮하야 如天普蓋하며 似地普擎하나니 爲其
無心故로 所以長養萬物하야 如是無功用中에 施功하나니라 雖然恁瑪나 又更須
跳出 窟하야사 始得다 豈不見가 敎中에 道하되 第八不動地菩薩이 以無功用智
로 任運流入薩婆若海라하나니 衲僧家는 到這裏하야 亦不可執着이니라 楞伽經
에 云 相生은 執碍요 想生은 妄想이요 流注生則逐妄流轉이라하니 若到無功用
地하야도 猶在流注生中이니 須是出得第三流注生相하야사 方始快活自在니라 經
에 云 如急流望爲恬靜이라하니 孩子六識이 雖然無功用이나 爭奈念念不停流가
如急流水오(碧岩錄 八)
갓난아기가 비록 六識을 두루 갖추고 있어 눈으로 능히 보고 귀로 능히 듣
지만 일찍 六塵을 分別하지 못하여 好惡長短과 是非得失을 總不知함과 같다.
學道하는 人士도 이 孩와 같아서 榮辱功名과 逆情順境이 그를 動搖하지 못
하며, 눈으로 色을 보되 盲人과 같고 귀로 소리를 듣되 聾者와 같아서, 如癡
하며 似兀하여 그 心中이 動搖하지 않아 須彌山과 같다. 造作과 緣慮가 없어
서 蒼天이 넓게 덮음과 같으며, 厚地가 넓게 받치는 것과 같나니 無心인 所以
로 萬物을 長養하여 如是히 無功用中에서 施功한다. 비록 이러하나 그 窟을
跳出하여야 한다. 어찌 敎中에서 말함을 보지 못하였는가. 第八不動地菩薩이
無功用智로써 任運하여 薩婆若海에 流入한다 하였으나, 衲僧은 여기에 도달하
였어도 집착하여서는 不可하다. 楞伽經에 相生은 執碍요 想生은 妄想이요 流
注生인즉 妄緣을 追逐하여 流轉한다 하였으니, 만약 無功用地에 到達하였어도
오히려 流注生中에 있으니 第三流注生相을 出離하여야 비로소 快活自在하다.
經에 말하기를 急流水를 바라보아도 恬靜함과 같다 하였으니, 孩子의 六識
이 비록 無功用이나 念念이 流去함이 急流水와 같으니 어찌 하리오.
* 第八不動地菩薩이 無功用의 無心地에 있으나 이는 아직 賴耶인 微細流注
의 假無心이니, 微細를 永斷하고 鏡智를 實證하여야 見性의 眞無心이며 大
活의 正眼이다.
異熟이 若空則超因果하야 方才轉成大圓鏡智니 言無垢가 同時發者는 以佛果位
中을 名無垢니 乃淸淨眞如니라 謂鏡智로 相應하면 法身이 顯現하야 圓明普照
十方塵刹하야 以理智가 一如하야 方證究竟一心之體니 此唯識之極則이며 乃如
來之極果也라 諦觀하니 此識이 深潛難破하니 此識을 絲毫未透하면 終在生死岸
頭事니라 古德諸祖가 未有不破此識而有超佛越祖之談이어늘 今人은 生滅도 未
忘하야 心地에 雜染種子도 未淨纖毫하고 便稱悟道하니 豈非未得을 謂得하며
未證을 謂證이리오 可不懼哉아( 山 八識規矩通說)
第八인 異熟識이 만약에 空滅하면, 곧 因果를 超越하여 바야흐로 大圓鏡智
를 轉成한다. 無垢가 同時에 發現한다 함은 佛果位中에서는 鏡智를 無垢라 하
니 이것은 淸淨眞如인 까닭이다. 鏡智로 相應하면 法身이 顯現하여서 十方塵
刹을 普照하여 理와 智가 一如하므로, 바야흐로 究竟인 一心의 本體를 證得하
는 것이니 이는 唯識의 極則이며 如來의 極果이다. 밝게 觀察하니 이 第八識
이 深潛하여 難破하니, 此識을 絲毫라도 透過하지 못하면 끝까지 生死岸頭에
滯在한다. 古德과 諸祖가 此第八識을 打破하지 않고서는 超佛越祖의 玄談을
하지 않았거늘, 今人들은 生滅心도 未忘하여 心地에 雜染의 煩惱種子를 纖毫
도 淨潔케 하지 못하고서 문득 悟道라고 詐稱하니 어찌 未得을 得이라 하고
未證을 證이라 함이 아니리오. 참으로 두렵지 않은가.
* 감山은 禪敎에 該通한 明末의 巨匠이다. 第八微細流注를 永離하여 如來의
極果인 大圓鏡智를 證得하여야 悟道며 見性임을 分明히 宣說함은 참으로 曹
溪直傳을 相承한 稀有의 知識이다. 그리고 生滅妄心도 未斷하고 悟道라 詐
稱함을 痛歎함은 古今 修道人의 通病을 摘破한 快論이다. 그러니 楸重과 微
細의 一切 煩惱妄想을 蕩盡하여 究竟無心인 鏡智를 實證하여 大休歇의 古人
田地에 到達하여야 한다. 第八微細를 斷盡한 鏡智는, 大死却活한 無心 無念
無生 無住이며, 따라서 頓證圓證한 究竟正覺인 頓悟와 見性이다.
一一, 內外明徹
智慧로 觀照하야 內外明徹하야 識自本心하면 卽本解脫이니 卽是無念이니라
智如日이요 慧如月하야 智慧常明이어늘 於外에 著境하야 被妄想浮雲이 盖覆하
야 自性이 不得明朗이라 若聞眞法하고 自除迷妄하면 內外明徹하야 於自性中에
萬法이 皆現하나니 見性之人도 亦復如是니라(壇經)
智慧로써 觀照하여 內外가 明徹하여 自己의 本心을 識得하면, 卽本解脫이니
卽是 無念이니라.
智는 白日과 같고 慧는 朗月과 같아서 智慧는 항상 明朗하지마는 外部로 塵境
에 住著하여 妄想의 浮雲이 盖覆함이 되어서 明朗하지 못한다. 만약에 眞法을
得聞하고 迷妄의 暗雲을 스스로 除去하면 內外가 明徹하여 眞如自性中에 萬法
이 皆現하나니 見性한 사람도 이와 같다.
* 鏡智로 觀照하여 內外가 明徹하면 이것이 識心이며 解脫이며 無念이며 見
性이니 이는 根本無明의 暗雲이 消散한 證左이다.
水精瓔珞은 內外明徹하야 妙覺에 常住하야 湛然明淨이라 名一切智地니 常處中
道니라
唯佛이 居中道第一法性之土니라(瓔珞經 上)
水精의 瓔珞은 內外가 圓明通徹하여 究竟地인 妙覺에 常住하여 湛然히 玄明
淸淨한지라 一切智地라고 하나니 항상 中道에 安處하느니라.
오직 佛陀만이 中道第一義諦인 法性心土에 住居하느니라.
* 水精瓔珞과 같이 內外明徹하여 一切의 妄塵을 蕩盡하면 究竟妙覺인 佛地
이며 見性이다.
十方世界와 及與身心이 如吠瑠璃하야 內外明徹을 名識陰盡이니라 若識陰이 盡
則圓明淨心이 於中에 發化하야 如淨瑠璃內含寶月하나니 如是乃超菩薩所行의
金剛十地하야 等覺圓明
하야 入於如來妙莊嚴海하야 圓滿菩提하야 歸無所得이니라(楞嚴經 十)
十方의 世界와 및 身心이 吠瑠璃와 같아서 內外가 明徹함을 識陰이 盡하였
다 한다. 만약에 識陰이 滅盡하면, 圓明한 淸淨妙心이 그 中에 發化하여 淸淨
한 瑠璃內의 寶月과 같다. 그리하여 菩薩의 所行인 金剛과 十地를 초월하여
正覺과 同等하게 圓明하여 如來의 妙莊嚴海에 頓入하여 菩提를 圓滿成就하여
無所得에 歸還한다.
* 第八梨耶인 識陰이 滅盡하면 內外가 明徹하여 一超直入如來地한다. 大乘
五蘊論과 其他에 識陰은 謂阿賴耶니 亦名 阿陀那라고 分明히 하였다.
識陰이 盡者는 圓明淨心이 於中에 發化하나니 卽上同諸佛慈力하고 下含衆生悲
仰하야 普同示現하야 利益衆生일새 故로 云 發化니라 身心世界와 諸佛衆生이
圓融交徹故로 如淨瑠璃內含寶月이라 便能超越地位하야 入於果海하야 歸無所
得하나니 如此하야사 方名究竟極則也니라(감山 楞嚴經通議 十)
此示陰盡圓證功用也니라(通議 十 P165下17)
識陰이 盡한 者는 圓明淨心이 於中에 發化한다. 此는 卽 上으로는 諸佛의
慈力과 同一하고, 下로는 衆生의 悲仰을 含容하여 普편同等하게 示現하여 衆
生을 利益하므로 發化라 한다. 身心世界와 諸佛衆生이 圓融交徹하는 故로 淨
瑠璃內에 寶月을 含有함과 같다. 문득 能히 地位를 초월하여 大覺果海에 頓入
하여 無所得에 回歸하나니, 이와 같아야 비로소 究竟極則이라 이름한다.
이는 五陰이 다하고 圓證한 功用을 보임이니라.
* 內外明徹한 見性은 卽 識陰이 永斷한 大覺極果이다. 華嚴에서 十地菩薩이
方便神通內外明徹(八十華嚴 第三十卷)이라 하였는 바, 十地菩薩은 微細無明
을 未斷하였으므로 이 內外明徹은 第八賴耶의 通明影像이요, 眞正한 內外明
徹이 아니다.
圓明淨心이 於中에 發化하면 三類分身하야 息苦輪하나니 唯如如理와 如如智가
內外明徹하야
譬如瑠璃內含寶月하야 圓超信住向地等하야 而成無上道也니라(智旭 楞嚴經文句
十)
圓明한 淨心이 그 中에 發化하면, 三類로 分身하여서 衆生의 苦輪을 쉬게 한
다. 오직 如如理와 如如智가 內外에 明徹하나니, 비유하건대 瑠璃속에 寶月을
含有함과 같아서, 十信 十住와 十廻向 十地等을 圓滿히 초월하여 無上佛道를
성취한다.
* 內外明徹한 功果가 이렇게 玄妙하다.
塵境이 旣空卽身心內外가 一時淸淨하야 而十方이 皎然하야 如吠瑠璃內含寶月
하나니 豈不快哉아 斯乃頓破根本無明하야 使八識種子로 병裂이니라(감山 通議
八)
塵境이 이미 空寂한즉 身心內外가 一時에 淸淨하여 十方이 皎然하여 吠瑠璃
內에 寶月을 含有함과 같으니, 어찌 통쾌하지 않으리오. 이는 根本無明을 頓
破하여 八識種子로 하여금 병裂滅盡케 한 것이다.
* 八識種子인 微細妄想을 裂破하여 內外明徹한 無生玄路에 優遊自在하니 이
는 오직 實參實悟에 있다.
若得識陰이 盡하면 方超地位하야 了無所得하고 究竟圓成하야 如淨瑠璃內含寶
月이니라(宗鏡錄 八十八)
만약에 識陰이 滅盡하면, 바야흐로 地位를 초월하여 了然히 所得이 없고 究
竟佛果를 圓滿成就하여 淨瑠璃內에 寶月을 含有함과 같다.
* 佛言과 祖言이 兩道가 없으니 이는 다 같이 正眼을 完具한 까닭이다.
覺卽了不施功이니 一切有爲法不同이라 住相布施는 生天福이나 猶如仰箭射虛空
이로다 勢力盡箭還墜하야 招得來生不如意라 爭似無爲實相門에 一超直入如來地
리오 但得本莫愁末하라 如淨瑠璃含寶月이니 旣能解此如意珠하니 自利利他終不
竭이로다(證道歌)
大覺하면 頓了하여 功用을 虛施할 것 없으니, 一切의 有爲法과는 不同하다.
名相에 住著한 布施는 天上에 往生하는 福은 되나, 箭矢로 허공을 향해 力射
함과 같다. 勢力이 다하면 箭矢는 도로 墜落하니, 來生의 不如意함을 초래할
뿐이다. 어찌 無爲인 實相門에서 한번 초월하여 如來地에 直入함과 같으리오.
根本만 悟得할 것이요 枝末은 걱정하지 말라. 淨潔한 瑠璃 속에 寶月을 含有
함과 같다. 벌써 如意珠를 解得하였으니, 自利와 利他가 끝내 竭盡하지 않는
도다.
* 一超直入如來地하여 內外明徹하면 正傳의 頓悟이며 見性이다.
추重이 滅盡한 自在位 以上만 되어도 寤寐一如의 實境이 現前하지마는, 微
細流注인 識陰까지 蕩盡無餘하여 如來地에 直入하지 않으면 內外明徹하여
如淨瑠璃含寶月한 究竟無念은 성취하지 못한다.
一二, 常寂常照
無上大涅槃이여 圓明常寂照로다(壇經)
無上한 大涅槃이여 圓融明徹하여 恒常寂照하는도다.
* 見性 즉 大涅槃임은 大涅槃經과 宗鏡錄等에서 詳說되어 있다.
廓徹大悟하여 頓見自性하면, 內外明徹하여 常寂常照하는 究竟無念의 大涅
槃을 圓成한다. 微細賴耶를 透脫하여 末後 牢關을 打破하면 究竟無心인 無
上涅槃이 現前하여, 大死大活하고 常寂常照하여 明暗이 雙雙이요 定慧가 等
等하니 즉 見性이며 成佛이다.
進破微細無明하고 入妙覺位하면 名大涅槃이니 居常寂光土하느니라(天台四敎儀
圓敎) 微細無明을 進破하고 妙覺位에 得入하면 大涅槃이라 이름하나니 常寂光土에
居住하느니라.
* 常寂光은 常寂照이다. 起信論에서 遠離微細하면 得見心性이니 名究竟覺이
라 하였으니, 見性 즉 究竟覺이 常寂照인 大涅槃이며 妙覺이다.
障無不寂하고 理無不照하야 寂照雙流하면 徹見心性이니라(淸凉苕 五十七)
障盖가 寂滅하지 않음이 없고 事理를 洞照하지 않음이 없어서 寂과 照가 雙
流하면 心性을 徹見하느니라.
* 常寂常照하여 寂照가 雙流하면 見性인 大涅槃이다.
禪非智면 無以窮其寂이요 智非禪이면 無以深其照니 故로 寂智雙流하면 方成佛
果니라 經에 云 佛自住大乘하나니 如其所得法은 定慧力으로 莊嚴하야 以此度
衆生이니라(大華嚴經略策 止觀雙運)
禪寂은 智照가 아니면 그 寂定을 窮極할 수 없으며, 智照는 禪寂이 아니면 그
慧照를 深達할 수 없으니, 禪寂과 智照가 雙流하면 佛果를 成就하느니라. 經
에 말하되 佛陀는 大乘에 自住하나니 그 所得한 大法은 定慧의 功力으로 莊嚴
하여 이로써 衆生을 濟度하느니라.
* 寂智는 寂照다. 寂照는 즉 定慧며 止觀이니, 寂照雙流하고 定慧均等하며
止觀이 雙運하면 悟心見性이며 究竟佛果이다.
生心卽妄이요 不生卽佛이라 生心者는 非生於餘心이요 縱生菩提涅槃과 觀心見
性하야도 亦曰生心이니 竝爲妄想이라 念想이 都寂하면 方曰不生하야 寂照現前
이어니 豈不名佛가 故로 達磨碑에 云 心有也하면 曠劫而滯凡夫요 心無也하면
刹那而登正覺이로다(淸凉苕 九)
生心하면 즉 妄이요 生心치 않으면 즉 佛인지라, 生心이라 함은 雜心만 나
는 것이 아니요 비록 菩提涅槃과 觀心見性의 妙心이 나도 또한 生心이니 전부
妄想이 되느니라. 雜念妄想이 永永 寂滅하여야 바야흐로 不生이라 이름하여
寂照가 現前하나니, 어찌 佛이라고 이름하지 않으리요. 그러므로 達磨碑에서
말하였다. 心念이 있으면 永劫토록 凡夫에 滯留하고 心念이 없으면 刹那에 正
覺을 성취하는도다.
* 有心은 衆生이요 無心은 佛이다. 無生無念의 大寂三昧에서 무한 慧光이
항상 發現하니 이것이 寂照즉 佛地이다.
雙照空有하며 不住內外하니 似谷答聲而絶慮하고 如鏡鑑像而無心하야 妙湛圓明
하야 寂而常照로다(宗鏡錄 六十五)
空과 有를 雙照하며 內와 外에 住留하지 않으니, 空谷이 聲音을 對答함과
같아서 心慮가 永絶하고 明鏡이 色像을 觀照하는 것과 같아서 妙湛하고 圓明
하여 寂寂하며 항상 照耀하는도다.
* 絶慮無心하여 圓明寂照하니 定慧等持이다.
寂照無二가 爲菩提相이니 猶如明鏡하야 無心이 爲體요 鑑照가 爲用하야 合爲
其相이라 亦卽禪宗의 卽體之用이 自知하며 卽用之體가 恒寂하야 智寂不二가
爲心相也니라(淸凉苕 八十)
寂과 照가 둘이 없음이 菩提의 實相이 되나니 明鏡과 같아서 無心이 體가
되며 鑑照가 用이 되어 합하여 그 實相이 되는지라, 또한 禪宗에서 體에 卽한
用이 自知하며 用에 卽한 體가 恒寂하여 智와 寂이 둘이 아님이 眞如의 實相
이 됨과 같느니라.
* 寂靜無心한 鏡體와 照耀無碍한 鏡光이 어찌 둘이리오. 鏡體가 즉 鏡光이
니 寂卽照며 照卽體라 眞如自性도 이러하다.
卽寂之照는 爲般若요 卽照之寂은 爲解脫이며 寂照之體는 爲法身이라 如一明淨
圓珠하야 明卽般若요 淨卽解脫이며 圓體法身이니 約用不同이나 體不相離故니
라 此三法이 不縱不橫하며 不竝不別하니 名秘密藏하야 爲大涅槃이니라(淸凉疏
五十)
寂에 卽한 照가 般若요 照에 卽한 寂이 解脫이며 寂照의 體가 法身인지라,
一箇의 明淨한 圓珠와 같아서 明은 즉 般若며 淨은 즉 解脫이요 圓體는 法身
이니 用은 不同하나 體는 相離하지 않느니라. 이 三法이 縱도 아니요 橫도 아
니며 竝도 아니요 別도 아니니 秘密藏이라 이름하여 大涅槃이 되느니라.
* 이 大涅槃의 三德은 自性中에 圓具하니 이를 實證하면 見性이며 成佛이
다.
一은 見性成佛이니 自開法身하면 稱性이 應現이요 次는 無得이니 自開般若하
면 佛法은 所覺이요 菩提는 能覺이라 能所相因故로 俱파得이니 無所得者는 則
得菩提며 後는 離妄成佛이니 自開解脫하면 不動無住하야 妄倒斯寂일새 明眞解
脫이니라(淸凉疏 二十五)
一은 見性하면 成佛이니 眞如法身을 自開하면 眞性이 現前하고, 次는 無得
하면 成佛이니 眞性般若를 自開하면 佛法은 所覺이며, 菩提는 能覺인지라 能
과 所가 相因한 故로 能所를 俱不得이다. 所得이 絶無한 者는 無上菩提를 則
得하며, 後는 離妄하면 成佛이니 本性解脫을 自開하면 如如不動하며 蕩蕩無住
하여 妄想顚倒가 斷寂하므로 진정한 解脫이라 이름하느니라.
* 法身과 般若와 解脫은 果上三德이니 同體異用이다.
見性하면 無得이요 離妄하면 見性이니, 三者가 표현은 各異하나 내용은 同
一하여 佛果를 성취한다. 그러므로 見性하면 成佛하여 如來의 三德이 圓滿
俱足하여 顚倒妄想을 永離하여 究竟無所得의 大覺海에 頓入한다. 그리하여
寂而常照하고 照而常寂하여 常寂常照하는 寂光淨土에 常住하나니 이것이 諸
佛의 無所住의 住處이다.
以奢摩他(止·定)故로 雖寂而常照하고 以毘婆舍那(觀·慧)故로 雖照而常寂이
요 以優畢叉(捨·平等)故로 非照而非寂이라 照而常寂故로 說俗而卽眞이요 寂
而常照故로 說眞而卽俗이요 非寂非照故로 杜口於毘耶니라(永嘉集)
奢摩他인 故로 비록 寂滅하나 항상 觀照하고, 毘婆舍那인 故로 비록 觀照하
나 항상 寂滅하며, 優畢叉인 故로 照도 아니요 寂도 아니니라. 照하되 항상
寂한 故로 俗을 說하나 곧 眞이요, 寂하되 항상 照하는 故로 眞을 說하나 곧
俗이며, 寂도 아니요 照도 아닌 故로 毘耶에서 杜口하였느니라.
* 寂照同時요 寂照不立하니 大圓鏡中의 無上涅槃이요, 常死常活하고 不死不
活하니 少林門下의 碧眼衲僧이다.
寂而常照하니 寤寐一致요 生死一如로다(勅修淸規 五 坐禪儀)
常寂하여 常照하니 寤寐가 一致하고 生死가 一如하도다.
* 大寂光中의 寤寐一如는 如來無心이다.
瓔珞에 云 等覺은 照寂이요 妙覺은 寂照라하니 今八地無生도 亦照寂이니라 故
로 若得寂照하면 卽同佛故니라(華嚴苕 六十九)
瓔珞經에서 말씀하되, 等覺菩薩은 照寂이요 妙覺世尊은 寂照라 하였다. 卽
今 八地의 無生도 또한 照寂이니, 그런 故로 만약에 寂照를 證得하면 佛陀와
동일한 緣故이니라.
* 八地는 假無生이니 賴耶의 微細識光이 未滅한 故로, 無分別智가 존속하여
寂照가 못된다. 賴耶識光이 소멸하고 無分別智를 頓忘하면, 眞無生인 大寂
光이 現前하여 常寂常照하니 이것이 妙覺인 見性이다.
그리고 照寂은 有心有碍하여 寂而常照 照而常寂하지 못하나 寂照는 無心無
碍하여 寂而常照 照而常寂 常寂常照 非寂非照하여 妙用自在하니, 이것이 等
覺照寂과 妙覺寂照의 差異이다.
在等覺位하야는 名照寂慧니 未離生滅動相故요 至妙覺位하야 名寂照慧니 已歸
第九識하야 究竟靜故니라 前等覺位는 猶有生滅하야 未盡心源故로 在八識이요
今到妙覺하면 永離生滅하야 窮歸本覺一心之源故로 入第九識中明淨이니라(元曉
金剛三昧經論 下)
等覺의 地位에 있어서는 照寂慧라 이름하나니 生滅動相을 離脫하지 못한 緣
故요, 妙覺의 佛地에 이르러서야 寂照慧라 이름하나니, 벌써 眞如인 第九識에
歸復하여 究竟으로 寂靜한 緣故이니라. 앞의 等覺位는 아직 生滅이 있어서 心
源을 窮盡하지 못하였으므로 第八阿賴耶識에 滯在하여 있고, 이제 妙覺에 도
달하면 生滅妄心을 영원히 離脫하여 窮極에 本覺인 一心의 根源에 歸復한 故
로 眞如인 第九識中의 圓明淸淨境에 頓入하느니라.
* 照寂은 八識生滅의 等覺이요, 寂照는 一心眞如의 妙覺이니 圓明常寂照하
는 無上大涅槃은 見性達道人의 實證處이다.
眞如本性은 諸佛과 衆生이 平等無異하다. 다만 衆生은 六·七識의 楸重煩惱
와 第八識의 微細妄想이 盖覆하여 本性을 不知不見할 뿐이다. 그러므로 根
本無明인 第八賴耶를 滅盡하지 않으면 本性이 顯現하지 않는다.
第八微細流注를 永斷하여 無心無念의 大圓鏡智가 發現하면, 이는 究竟妙覺
인 無餘涅槃이니 즉 見性이며 成佛이다. 설사 六·七識의 楸重妄想이 滅盡
하여 一念不生의 假無心인 熟眠一如한 自在位에 進入하였어도, 이는 勝妙境
界며 死了不活하여 宗門의 正眼이 아니다. 오직 前後際斷하여 淨裸裸한 第
八魔界에서 豁然大活하여 微細流注인 根本無明을 滅盡無餘하여 寤寐恒一
하고 內外明徹하며 無心無念하고 常寂常照하는 窮極深處인 大涅槃을 親證하
여야 靈山嫡傳이며 少林正印이다.
이 究竟無心의 大休歇 大安穩地에서 無爲無作하며 任運自在하는 大解脫境이
悟後의 保任이며 履踐이다. 그리하여 見性은 頓修圓證의 證悟임이 靑天白日
과 같이 昭昭然하다. 그러하니 參學高士는 이 佛祖正傳의 鐵則에 違背되는
如何한 異說도 斷然 排除하고, 正傳을 標榜하여 無上大道를 圓滿成就하여야
한다.
一三, 解悟漸修
頓悟漸修者는 頓悟(日出·孩生)와 漸修(霜消·孩長)이니 爲解悟니라(圭峯 圓
覺大疏 上之二)
先須頓悟하야 方可漸修者는 此約解悟니 故로 華嚴에 說하되 初發心時에 便成
正覺後에 三賢十聖을 因次第修證하느니라(都序)
頓悟漸修라 함은 頓悟(日出과 孩生)와 漸修(霜消와 孩長)이니 解悟니라.
우선 頓悟하여 바야흐로 漸修함은 이는 解悟이다. 그런 故로 華嚴에서 說하되
始初發心할 때에 문득 正覺을 성취한 연후에 三賢과 十聖을 次第로 修證한다
고 하였다.
* 敎家의 修行方法인 解悟漸修는 當下에 無心하여 頓證佛地하는 禪門宗旨와
正反하나니, 金沙를 不分하며 玉石을 混同하면 일대과오가 발생된다.
悟後에 初入十信位也니라(圭峯 師資承襲圖 節要)
初悟之人은 未能說法하며 答他問難을 皆悉不得이니라(都序 節要)
頓悟한 후에는 始初로 十信位에 得入한다.
처음 頓悟한 者는 說法을 못하며 他人의 問難에 대답도 전연 못한다.
* 見性은 現證圓通한 究竟覺이므로, 十信初位를 내용으로 하는 解悟인 頓悟
는 見性이 아니다. 自古로 禪門에서는 頓悟하였다 함은, 甚深極玄한 難問으
로써 시험하여 靑天白日과 같이 明明了了한 正答이 불능하면 打出되어 認可
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十信位는 正悟가 아니므로 說法과 問難이 불능한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리하여 圓證을 내용으로 하는 禪門의 頓悟 즉 見性
과 解悟인 敎家의 頓悟는 其實 天壤之判이 있다.
此頓悟漸修之義는 備於一藏大乘而起信圓覺華嚴이 是其宗也니라(承襲圖)
이 頓悟漸修의 意義는 一藏大乘에 구비하였는데, 起信論 圓覺經과 華嚴經이
그 宗이다.
* 不立文字하고 敎外別傳하여 直指人心 見性成佛하는 禪門頓宗의 圓證을 三
賢 十聖을 次第修證하는 敎家漸修의 解悟에 융합하려는 無理는 결국 그 사
람의 파멸을 자초한다.
先須信解心性이 本淨하고 煩惱가 本空하야 不妨依解薰修者也니라(定慧結社文)
우선 心性이 본래 淸淨하고 煩惱가 본시 空寂함을 深信了解하여서, 그 信解
를 依持하여 薰習修行함이 무방하니라.
* 이 信解는 解悟인 頓悟를 말함이니 이는 敎家의 頓悟漸修 思想이다.
忽被善知識의 指示入路하야 一念回光하야 見自本性하야 而此性地에 元無煩惱
하며 無漏智性이 本自具足하야 卽與諸佛로 分毫不殊일새 故로 云 頓悟也요 雖
悟本性이 與佛無殊나 無始習氣를 卒難頓除故로 依悟而修하야 漸薰功成하야 長
養成胎하야 久久成聖일새 故云 漸
修也니라(修心訣)
홀연히 善知識의 지시로 入路하여 一念에 回光하여 자기의 本性을 得見하여
이 性地에 원래로 煩惱가 없으며 無漏한 智性이 本然으로 具足하여 곧 諸佛
과 더불어 조금도 다르지 않는 故로 頓悟라 한다. 비록 本性이 諸佛과 다르지
아니함을 悟得하였으나, 無始의 習氣를 창졸히 제거하기 難하므로 悟를 依持
하여 修習한다. 점점 薰習하여 그 功이 성취되어 聖胎를 長養하여 久久에 成
聖할새 漸修라 하느니라.
* 前章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見性은 現證圓通하여 頓超十地한 究竟覺인
圓證을 말한다. 그런데 十信初인 解悟로써 見性이라 함은 佛祖의 言敎에 전
연 위배된 독창적 新說이다. 여하한 논설도 佛祖의 言敎에 배치되면, 불교
인으로서는 단연히 이를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
頓悟自性이 本來空寂하야 與佛無殊나 而此舊習을 卒難頓除故로 逢順逆境하면
瞋喜是非가
熾然起滅하며 客塵煩惱가 與前無殊하나니 若不以般若로 加工著力하면 焉能對
治無明하야 得大休歇之地리오 如云頓悟雖同佛이나 多生習氣深이라 風靜하야도
波尙湧이요 理現하야도 心猶侵이라하니 故로 悟後에 長須照察하야 妄念이 忽
起어든 都不隨之하고 損之又損하야 以至於無爲하야사 方始究竟이니 天下善知
識의 悟後牧牛行이 是也라(修心訣)
自性이 본래로 空寂하여 佛과 다르지 아니함을 頓悟하였으나, 이 舊習을 졸
연히 頓除하기 甚難하다. 그런 故로 逆境이나 順境에 봉착하면 瞋喜와 是非가
치연히 起滅하여 客塵인 煩惱妄想이 前日과 다름없다. 만약에 般若智慧로 가
공하여 著力하지 않으면, 어찌 無明을 對治하여 大休歇地를 얻으리오. 古人이
말하기를, 비록 佛陀와 동일함을 頓悟하였으나 다생의 習氣가 甚深하다. 風勢
는 정지하나 파도가 오히려 洶湧하고 性理는 現前하였어도 妄心이 오히려 侵
入한다. 그런 故로 悟後에 장구히 모름지기 反照審察하여서 妄念이 홀연히 生
起하거든 전연히 隨去하지 말고 損減하고 또 損減하여 寂然無爲함에 도달하여
야 비로소 究竟이니 천하 善知識의 悟後 牧牛行이 이것이다.
* 解悟는 楸重妄想을 벗어나지 못한 虛幻妄境이므로, 客塵煩惱가 前日과 같
이 치연히 起滅하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 煩惱妄想을 제거하는 것이
悟後의 漸修다. 禪門에서는 楸重妄想은 말할 것도 없고, 第八의 微細까지
永斷한 究竟無心의 大休歇處가 頓悟며 見性이므로 妄滅證眞한 이 無心 無念
無爲 無事의 金剛大定을 保任하는 것이 長養聖胎이다.
그러므로 證과 解의 상반된 내용을 見性이라고 혼동함은 일대 착오이다. 물
론 敎家에서는 客塵煩惱가 여전한 解悟를 頓悟라고 주장한 이상, 煩惱妄想
을 제거하여 大休歇地에 도달하여야 하므로 漸修門이 필요하다. 그러나 禪
門正傳에서는 이와 정반대로 妄滅證眞한 大休歇處가 頓悟며 見性이므로,
[得見性하면 當下無心하여 藥病이 俱消하고 敎觀을 咸息이라]고 단언한 것
이다. 따라서 解悟의 漸修는 필요없다. 그러니 내용이 상반된 禪門圓證의
頓悟와 敎家解悟의 頓悟를 혼동시켜 修道正路를 파괴함은 佛祖正傳의 大罪
過이다.
圭峯이 深明先悟後修之義曰識氷池而全水하야 借陽氣而銷鎔하고 悟凡夫而卽佛
하야 資法力而薰修라 氷消則水流潤하야 方呈漑滌之功하고 妄滅則心靈通하야
應現通光之用이니라(修心訣)
圭峯이 先悟後修하는 의의를 아주 자세히 설명하였다. 結氷된 池塘이 全體
로 流水임을 알아서 陽氣를 차용하여 銷融시키고, 凡夫衆生이 卽是佛陀임을
悟解하여 法力을 依資하여 薰修한다. 氷塊가 銷鎔되면 水流가 潤滑하여 바야
흐로 灌漑와 洗滌의 功果를 얻고, 妄念이 滅盡하면 心靈이 圓通하여 玄通한
神光의 大用이 應現한다.
* 견고한 結氷이 전부 銷鎔되어 活潑한 流水로 通用하고, 煩惱의 妄想이 廓
然消滅하여 無垢한 眞如를 證得한 것이 見性이며 圓證이므로 見性하면 妄滅
證眞하고 氷融水在라 確言하였다. 그러니 氷塊가 本來 流水임을 분명히 알
았으나 氷塊는 여전함과 같이 중생이 원래 佛陀임을 확실히 解悟하였으나
妄想이 起滅함을 頓悟며 見性이라 하여 氷塊를 銷鎔하듯이 망상을 제거하는
漸修를 禪門正傳이라고 극력 주장함은, 참으로 禪門正傳과 상반된 妄論臆說이
다.
譬如寒月에 結水爲氷이라가 乃至暖時에 釋氷爲水하나니 衆生이 迷時에 結性成
心이라가 衆生이 悟時에 釋心成性이니라(南陽慧忠 傳燈錄 二十八)
비유를 들면 혹한인 冬節에 流水가 凝結하여 堅氷이 되었다가, 따뜻한 시기
에 이르면 堅氷이 消釋되어 流水로 환원함과 같다. 衆生이 미혹할 때에는 本
性이 凝結하여 妄心이 되었으나, 중생이 正悟할 때에는 妄心이 消釋하여 本性
으로 환원한다.
* 妄心의 堅氷이 완전히 소멸하여 流通自在한 活水가 되어야 頓悟이며 見性
이니, 堅氷 그대로가 본시 流水이며 妄心 이대로 원래 眞性인 줄 안 것으로
써 頓悟며 見性이라 함과는 남북의 차가 있다.
一切惡業과 貪瞋痴인 無明煩惱와 種種塵勞等은 俱無自性이요 皆由迷自心故로
依妄而有니라 如水因寒하야 結而爲氷이니 此心을 旣悟則諸妄이 乘其所悟而消
하야 如氷이 因慧日所照하야 復化爲水어늘 今云氷復何處著고하면 此寔迷中迷
人이니라(中峯 山房夜話)
일체 惡業과 貪瞋痴인 無明煩惱와 각종의 塵勞 등은 다 自性이 없고, 眞如
本心을 미혹함으로 인하여 妄念에 依止하여 있다. 淨水가 寒氣로 인하여 凝結
하여 堅氷이 된 것과 같다. 이 眞如本心을 正悟하면 一切妄念이 그 正悟를 따
라서 소멸하니, 堅氷이 慧日의 照熱로 인하여 다시 淨水로 歸復함과 같다. 그
런데 지금 氷塊의 處理를 말하는 것은 진실로 미혹한 인간 중에 한층 더 미혹
한 인간이다.
* 이는 妄滅證眞하고 氷消水融한 宗門正眼들의 일관된 통설이다. 그리하여
妄盡氷消가 아니면 이는 迷夢이어서 悟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니, 迷中迷의
妄說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圭峯이 摠判先悟後修之義曰頓悟此性이 元無煩惱하며 無漏智性이 本自具足하야
與佛無殊하나니 依此而修者는 是名最上乘禪이며 亦名如來淸淨禪也라 若能念念
修習하면 自然漸得百千三昧하나니 達磨門下에 展轉相傳은 是此禪也라하니 頓
悟漸修之義는 如車二輪하야 厥一不可니라(修心訣)
圭峯이 先悟後修의 뜻을 摠判하여 말하였다. 此性이 원래로 煩惱가 없으며
無漏한 智性이 본연히 구족하여 佛陀와 더불어 차이가 없음을 頓悟하여 이를
依止하여 修習하는 사람은 이를 最上乘禪이라 하며 如來淸淨禪이라 名稱한다.
만약에 능히 念念에 修習하면 자연히 百千三昧를 점점 획득하나니, 達磨門下
에서 展轉하여 대대로 相傳하는 것이 곧 이 禪이라 하였다. 그런즉 頓悟와 漸
修의 二義는 乘車의 二輪과 같아서 한개도 없어서는 안된다.
* 達磨正傳의 禪門巨匠들은 如出一口로 無心無念인 究竟覺의 圓證으로써 頓
悟와 見性이라 하였으며, 十地等覺을 초월하여 微細妄念이 滅盡한 佛地의
無生法忍을 正悟라 如來淸淨禪이라 하였다. 客塵煩惱가 여전히 다름이 없는
解悟로써 達磨相傳의 禪宗이라 함은 禪宗을 모욕하는 일대 망언이다.
此頓漸兩門은 是千聖軌轍也니 從上諸聖이 莫不先悟後修하며 因修乃證이니라
(修心訣)
이 頓悟漸修의 兩門은 곧 千聖의 軌轍이니, 從上의 諸聖이 先悟하여 後修하
고 修習함을 인하여 證得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 이는 解悟를 근본으로 하는 敎家에는 金科玉條가 될 것이다. 그러나 解悟
를 부정하고 圓證에 直入하는 禪門에는 砒霜 毒이다. 만약 이것을 禪門이
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達磨正傳은 꿈속에서도 見聞치 못한 것이다.
頓悟漸修는 深諧敎理요 頓悟頓修는 正當宗鏡이니라
明鏡이 本來淨이라 何用拂塵埃리오하니 此是 六祖가 直顯本性하야 破其漸修니
라(宗鏡錄 三十六)
頓悟漸修는 敎理에 甚深히 諧當하고, 頓悟頓修는 宗鏡 즉 禪宗에 眞正 適當
하니라.
明鏡이 본래 청정한지라 어찌 塵埃를 拂拭할 필요가 있으리오 하였으니, 이
는 六祖가 本性을 直顯하여 그 漸修를 打破함이니라.
* 이는 金沙와 玉石을 善別하는 明眼의 正論이다. 解悟는 敎家의 修行漸路
요, 圓證은 禪門의 悟道捷徑이니 이를 혼동하면 자기도 그릇치고 남도 그르
치게 된다.
迷人은 漸契하고 悟人은 頓修하느니라
自性自悟하야 頓悟頓修하야 亦無漸次니라(壇經)
미혹한 인간은 점점 契合하고 悟達한 高人은 頓然히 修斷한다.
自性으로 自悟하여 頓悟하고 頓修하여 또한 地位漸次가 없느니라.
* 達磨直傳인 六祖의 正法은 唯頓無漸이다. 漸門은 迷界에서만 있을 뿐이요
悟境은 아니므로, 六祖는 오직 頓悟頓修의 圓證인 見性만을 宣說하였다. 그
러므로 頓悟頓修를 내용으로 하는 圓證만이 六祖正傳이니 頓修圓證이 아니
면 悟가 아니다.
頓悟頓修는 此說上上智니 根性樂欲이 俱勝하야 一聞千悟하야 得大摠持하야 一
念不生하야 前後際斷하느니라 斷障은 如斬一려絲하야 萬條를 頓斷하며 修德은
如染一려絲하야 萬條를 頓染也라 此人三業은 唯獨自明了하야 餘人所不見이니
且就事跡而言컨대 如牛頭融大師之類也니라(都序)
頓悟頓修라 함은 이는 上上智를 설함이니, 根性과 樂欲이 전부 殊勝하여 一
聞하면 千悟하여 大摠持를 證得하여서 一念도 不生하여 前後際가 頓斷한다.
障惑을 斷除함은 一려絲를 斬斷하는 것과 같아서 萬條를 일시에 頓斷하며, 聖
德을 圓修함은 一려絲를 염색, 萬條를 일시에 頓色한다. 이 사람의 三業은 유
독히 明了하여 他人은 엿보지 못하나니, 또한 事跡上에서 논하면 牛頭融大師
의 類이다.
* 頓悟頓修는 一念不生 前後際斷을 내용으로 한다. 達磨相傳의 見性은 妄滅
證眞에 있으므로, 達磨門孫의 正眼宗師中에 一念不生의 無心三昧를 實證하
지 않은 자 없다. 그 뿐만 아니라 설사 一念不生이 되어도 一念不生의 淨裸
裸處에 住著하면 大死不活의 勝妙境界로서 이를 배제하나니, 一念不生의 깊
은 굴을 뛰쳐 나온 一念不生의 究竟無心이 正眼인 것이다.
그리하여 達磨禪은 一念不生의 頓修에 있거늘, 起滅不停하는 解悟의 漸修
를 達磨禪이라 주장함은 千古의 대과오이다. 그리고 또한 頓修는 牛頭같은
傑出에만 속하고 達磨相傳은 전부 漸修라 하니, 達磨門下는 전부 牛頭보다
하열하다는 결론이 되니 가일층 가소로운 일이다. 達磨正傳中에 牛頭보다
하열한 者는 없을 뿐 아니라, 黃檗은 말하기를 牛頭가 횡설수설하나 向上一
竅는 꿈에도 보지 못한다고 지탄하였다. 이로써 達磨禪이 漸修에 있다 함은
억설임을 알 것이다.
各各反照하야 有病卽治요 無病勿藥이니라(都序)
각각 反照하여 보아서 有病하면 치료하여야 하고 無病하면 用藥할 필요가
없느니라.
* 解悟는 有妄有病이므로 漸修의 法藥이 필요하다. 그러나 見性은 無妄無病
인 圓證이므로 用藥하지 않는다.
彼宗(馬祖)은 於頓悟門엔 雖近而未的이요 於漸修門엔 有誤而全乖니라(承襲圖)
馬祖는 頓悟門에는 비록 근사하나 적당치 못하고 漸修門에는 착오하여 전연
乖戾되었다.
* 圭峯의 頓悟는 十信인 解悟며 馬祖의 頓悟는 佛地인 圓證이다. 圭峯은 병
이 있으니 고쳐야 하며 馬祖는 無病하니 약이 필요없다. 그리하여 圭峯은
客塵煩惱가 여전히 다름이 없으므로 漸修가 필요하나, 馬祖는 妄念을 頓除
하여 無生法忍을 徹證하였으므로 頓修도 無用이다.
解悟인 圭峯의 淺見으로서는 馬祖의 圓證深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
실이나, 환자인 圭峯이 완쾌한 馬祖를 用藥하지 않는다고 비난 공격함은 소
아의 盲戱로서 천하가 폭소할 일이다. 達磨正傳은 妄滅證眞하여 病差藥除하
였으므로 환자인 圭峯은 상대의 가치도 없다.
且悟證之跡도 尙不容於心이어늘 何況信解리오 純是情見이니 其於至道之體에
愈親而愈疎하고 益近而益遠하야 自不能會于道어니 安能使人會道之理哉아(中峯
錄 十一之下)
또한 徹悟하여 實證한 形跡도 오히려 心中에 용납하지 않거든 하물며 信解
리오. 순전히 이는 識情妄見이니 그 至道의 本體에 親하려 할수록 더욱 疎하
여지고, 近하려 할수록 더 遠隔하여진다. 그리하여 자신도 大道를 會通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타인으로 하여금 會通케 하리오.
* 禪門의 正統思想은 이것이다. 中峯國師는 臨濟直傳의 正眼으로 禪門의 표
준이다.
究竟無心地를 徹證하였어도 그 證得한 形跡이라도 있으면 正眼이 아니다.
解悟는 大道에 완전히 배치되니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뿐만 아니라, 正眼을
障蔽하는 最大病痛이므로 先覺들이 극력 배격한 것이다.
悟解之者는 語益工而旨益昏하고 言愈奇而理益昧이니라(中峯錄 十八之上)
悟解한 者는 語言이 더욱 工巧할수록 本旨는 더 暗昏하고, 言語가 더욱 더
奇妙할수록 性理는 더 昏昧하니라.
* 信解 悟解 解悟는 동일한 내용이니, 解悟가 大道에 이렇게 상반되니 참으
로 가공할 일이다.
若從根本上做工夫하야 打破八識 臼하고 頓飜無明窟穴하면 一超直入하야 更無
剩法하나니 此乃上上利根所證者이라 八識根本을 未破하면 縱有作爲하나 皆識
神邊事니 若以此爲眞하면 大似認賊爲子니라 古人이 云 學道之人이 不識眞은
只爲從前認識神이라 無量劫來生死本이어늘 痴人은 喚作本來身이라하니 於此一
關을 最爲要透니라(감山夢遊集 二)
만약 근본상으로부터 공부를 하여서 八識의 臼를 타파하고 無明의 窟穴을
頓飜하면, 一超하여서 佛地에 直入하여 다시는 남은 法이 없나니 이는 上上利
根의 實證한 바이다. 八識의 근본을 未破하면 비록 得力한 作爲가 있어도 이
는 전혀 識神의 妄邊事이니, 만약에 이로써 眞正을 삼는다면 참으로 도적을
오인하여 친자식으로 삼는 것과 같다. 古人이 말하기를 學道하는 人士가 眞을
알지 못함은 다만 종전의 識神을 誤認하기 때문이다. 이는 無量劫來의 生死
根本이어늘 우치한 인간은 불러서 本來身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 一關을 透過
하는 것이 가장 긴요하다.
* 八識의 根本微細無明을 永斷하여 究竟을 實證하지 않으면 이는 전혀 妄識
의 幻境이요 眞悟가 아니니 解悟는 참으로 도적을 오인하여 친자식으로 삼
는 것과 같은 착각이다.
正悟者는 如久暗遇明하며 大夢俄覺하야 一了一切了하야 更無纖毫憎愛取捨之習
이 滯于胸中이니라(中峯錄 五之上 示王居士)
若有纖毫라도 情習이 未盡하면 卽是悟心不圓而然也라 或悟心不圓이면 須是掃
其未圓之跡이니 別立生涯하야 以期大徹이 可也니라 或謂悟心이 未盡이어든 以
履踐盡之라하니 如抱薪救火하야 益其熾矣로다(中峯錄 十一之中)
正悟한 者는 장구한 암흑에서 광명을 만나며 大夢을 홀연히 覺惺함과 같아
서, 一을 了達하매 一切를 了達하여 纖毫도 憎愛와 取捨하는 情習이 胸中에
체류하지 않느니라.
만약에 조금이라도 情習이 다하지 못함이 있으면 곧 心性을 悟達함이 圓滿
치 못한 緣由이다. 혹 心性을 圓滿히 悟達치 못하면 모름지기 그 圓滿치 못한
當處를 소탕할지니, 특별히 생애를 세워서 廓徹大悟하여야 한다. 혹자는 心性
을 悟達하되 未盡하였거든 履踐修行하여 未盡함을 窮盡한다 하니, 이는 薪草
를 안고 火災를 消滅하려 함과 같아서 더욱 더 그 불꽃만 더 하게 한다.
* 一念不生 前後際斷하였어도 그 淨裸裸處에 住著하면, 死了未活이니 不疑
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여 印可하지 않는 것이 宗門의 正眼이다. 만약에 解
悟에서 漸修함과 같이 이 未盡한 것을 履修로써 窮盡하려 하면, 이는 섶을
안고 불을 끄려는 것과 같아서 역효과만 발생하니 解悟漸修의 害는 이렇게
극심하다.
從語言中作解하야 未得徹悟者는 流出無邊狂解하느니라 嗟呼라 醍호上味는 爲
世所珍이어늘 遇斯等人하야는 反成毒藥이로다 良以正法이 傾頹하고 邪魔가 熾
盛相續하야 眷屬이 彌滿世間하니 於生死界에 留心者는 可不先破此虛境也리오
(博山錄 十三)
語言으로부터 見解를 作하여 徹悟를 體得하지 못한 者는 無邊한 狂妄見解를
流出한다. 嗟呼라, 醍호의 上味는 世上의 珍寶이어늘 如斯狂解人을 만나면 반
대로 독약이 되는도다. 참으로 正法이 傾頹하고 邪魔가 熾盛相續하여 권속들
이 世間에 彌滿하니, 生死解脫에 留心하는 者는 可히 솔선하여 이 허망한 狂
解의 境界를 破碎하지 않으리오.
* 曹洞正脈이며 明末 巨匠인 博山은 이렇게 통탄하였다. 實證치 못한 解悟
는 전부 狂解에 속한다. 그러므로 自古로 正眼宗師들은 徹證 이외는 모두
魔說魔屬으로 痛斥하였다. 이는 邪顯正하는 大慈悲이니 이렇게 하지 않으
면 正法은 파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節要의 編末에서 解悟를 依言生解라고 함은 즉 從語言中作解이다.
都序에 悟後修證의 十重次第를 열거하였는 바 初一은 解悟요 終十은 心旣無
念하니 名大覺尊이라 하였는데, 이는 先悟後修하여 因修乃證하는 解悟漸修
의 表現이다. 敎家의 頓悟는 初一의 解悟요 禪門의 見性은 終十의 無念이니
근본적으로 상반된 내용인 解悟와 見性을 혼합하려 함은 무모한 시도일 뿐
아니라 천추의 妄說이다.
詳述하면 禪門의 見性은 圓證無念이요 敎家의 頓悟는 解悟有妄이다. 따라
서 見性은 永斷三細 解悟는 未盡六楸, 見性은 妄滅證眞 解悟는 煩惱如前,
見性은 氷消水融 解悟는 識氷全水, 見性은 永劫不昧 解悟는 日常間斷, 見性
은 妙覺後果 解悟는 十信初心, 見性은 頓超地位 解悟는 漸歷階級, 見性은
保任無心 解悟는 漸除妄想, 이렇게 내용이 상반된 禪門의 圓證見性과 敎家
의 解悟頓悟를 동일하다고 주장함은 논리의 자살이다.
그리하여 解悟를 근본으로 하는 頓悟漸修는 敎家의 修行方便이요, 禪門에
서는 통용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를 抱薪救火 認賊爲子 狂解魔屬으로서
통렬히 배제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頓悟頓修는 牛頭같은 特出에만 한하고
達磨相傳은 頓悟漸修라고 주장함은 達磨禪을 전연 이해하지 못한데서 기인
된 일대착오이니, 禪門을 이탈하고 敎家의 大宗인 華嚴澄觀의 法嗣가 된 圭
峯의 見地는 평가의 필요조차 없다.
參學高流는 오직 宗門의 正傳을 準則하여, 기타의 異端雜說에 현혹되지
말고 豁開正眼하여 佛祖의 慧命을 계승하여 廣濟迷淪하여야 할 것이다.
今錯承禪旨者는 或以頓漸之門으로 爲正脈하고 或以圓頓之敎로 爲宗乘하나니
其謗法之愆을 余何敢言고(禪敎訣 淸虛示惟政)
只今 禪의 宗旨를 錯覺하여 繼承하는 者는 或은 頓悟漸修門으로써 正脈을
삼고, 或은 圓頓信解의 敎理를 宗旨로 삼나니, 그 正法을 誹謗하는 過愆은 余
가 어찌 敢히 말하리오.
* 頓悟漸修와 圓頓信解는 禪旨가 아님을 分明히 한 淸虛의 名言이다. 淸虛
는 頓悟漸修와 圓頓信解가 禪旨 아님을 斷言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禪敎訣
에서 圓頓死句로써 學者를 指導함은 할人眼 不少요 痴狂外邊走라고 嚴訓하
였다.
一四, 分破分證
入初住하야 破無明하고 見佛性하나니 華嚴에 云 初發心時에 便成正覺이라하니
卽此意也라 如是次第四十二位하야 究竟妙覺하니라(摩訶止觀 七下)
入銅輪位하야 證無生法忍하나니 亦名見佛性이며 亦名法身顯하야 八相作佛이니
라(摩訶止觀 七上)
初住에 進入하여 無明을 깨뜨리고 佛性을 보나니, 華嚴에 云하되 初發心할
때에 正覺을 便成한다 하니 즉 此意니라. 이와 같이 四十二位를 次第하여 究
竟에 妙覺하느니라.
銅輪位에 進入하여 無生法忍을 證得하나니 見性이라 이름하며 또한 八相으
로 作佛한다 하니라.
* 銅輪位 卽 初住에서 無生法忍을 證得하여 佛性을 得見하고, 十住 十行 十
廻向 十地 等覺 妙覺等으로 四十二品 無明을 進破함은 天台敎家의 成佛 과
정이다.
入初住하야 斷一品無明하고 證一分三德하나니 所謂解脫般若法身이라 八相成道
하야 廣濟群生하나니 華嚴에 云 初發心時便成正覺이라하니라 解曰初發心者는
初住也요 便成正覺者는 成八相佛也라 是分證果니 卽此敎眞因이요 謂成妙覺하
면 謬之甚矣니라(天台四敎儀 圓敎章)
初住에 進入하여 一品의 無明을 斷除하고 一分의 三德을 證得하니 解脫과
般若와 法身인지라 八相으로 成道하여 群生을 廣濟하나니, 華嚴經에 이르되
初發心時에 正覺을 便成한다 하니라. 解釋하면 初發心이라 함은 初住요 便成
正覺이라 함은 八相佛을 成就함이다. 이는 分證한 結果이니, 즉 此敎의 眞因
이요 妙覺을 成就함이라 하면 誤謬의 極甚이니라.
* 初住에서 一品의 無明을 斷除하고 一分의 三德을 證得하나니 이는 分證하
는 四十二位의 始發眞因이요, 究竟의 極果가 아님은 天台 自家의 規定이다.
그러므로 住初正覺은 天台 自說에 依하여도 四十餘品의 無明 즉 煩惱가 중
첩하여 있으므로 因佛이요 果佛이 아니다. 住初正覺은 無明夢中의 夢覺이요
眞覺이 아니며, 住初無生은 無明이 未盡한 假無生이요 無明이 永盡한 眞無
生이 아니다. 따라서 住初見性도 大涅槃經의 不生煩惱한 見性, 起信論의 遠
離微細한 見性이 아니니, 이는 見性의 眞因이요 佛祖가 正傳하는 妙覺 즉
究竟覺의 見性이 아니다.
進破微細無明하고 入妙覺位하야 永別無明父母하고 究竟에 登涅槃山頂하나니
謂諸法不生이며 般若不生이라 不生不生일새 名大涅槃이니 成淸淨法身하야 居
常寂光土하나니 卽 圓敎佛相也니라(天台四敎儀 圓敎章)
微細無明을 進破하고 妙覺位에 得入하여 無明의 父母를 永別하고 究竟으로
涅槃山頂에 登到하나니, 諸法이 不生이며 般若가 不生인지라 不生도 不生이
므로 大涅槃이라 稱名하며, 淸淨法身을 성취하여 常寂光土에 居處하나니 즉
圓敎의 佛相이니라.
* 初住에서 修道眞因을 體得하여 四十一品 無明을 進破하고, 最後에 微細無
明을 斷除하여 不生不生인 無餘涅槃을 성취하나니 이것이 眞無生이다. 그리
고 이것이 또한 分段과 變易의 生死大夢을 正覺한 妙覺의 眞正覺이며 佛祖
正傳인 常寂照의 見性이다.
分破分見은 爲分證卽이니 從初住至等覺이요 智斷이 圓滿은 爲究竟卽이니 妙覺
位니라(天台四敎儀 圓敎章)
分破하여 分見함은 分證卽이니 初住로부터 等覺까지요, 眞智와 斷惑이 圓滿
함은 究竟卽이니 妙覺位이다.
* 無明을 分破하고 眞如를 分證하여 妙覺을 성취함은 台敎의 主張이다. 그
러나 四十二品 無明中에 最初一品을 得破한 初住를 見性이라고 하고, 이로
써 修道眞因을 삼아 最後에 微細無明을 永斷하여 大涅槃이며 常寂光인 妙覺
을 성취한다 함은 佛祖正傳의 見性이 아니다.
佛祖正傳은 自性을 障蔽한 최후 微細無明을 永斷하고 眞如無心이며 究竟妙
覺인 常寂常照의 大涅槃에서 見性을 稱許함은 앞에 말한 바와 같이 大涅槃
經 起信論 宗鏡錄等에서 證言하고 禪宗正脈의 大宗匠들이 고창한 바이다.
즉 台敎에서는 分破分證의 始初를 見性이라 하고, 佛祖正傳에서는 全破圓證
을 見性이라고 한다. 台敎에서 見性이라고 하는 分破分證의 始發인 初住에
는 天台의 敎理에 依하여도 妙覺인 大涅槃에 이르기까지 四十一品의 無明이
自性을 障蔽하고 있어 自性을 正見할 수 없다. 그러므로 台敎 自體에서도
住初를 眞因이라고 한 것이다.
佛祖正傳은 無明을 全破하여 眞如를 圓證한 究竟無心인 常寂常照의 大涅
槃이 見性이니 이를 無生 無念 大圓鏡智等으로 이름한다. 그리하여 추호의
微細無明이 남아 있어도 이는 妄見情解로서 痛斥하고 全破全證이 아니면 절
대로 見性이라고 허용하지 않으니, 分破分證의 初住는 佛祖正傳의 見性이
아니다.
그리고 台敎의 初住無生은 分證始發의 假無生이어서, 正傳見性의 기본인
全破圓證의 妙覺의 眞無生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으니 혼동하여서는 아
니된다. 台敎의 初住見性이 佛祖正傳은 아니나 台敎의 三惑인 見思 塵沙 無
明中에서 見思와 塵沙의 兩惑을 斷除하고 一品無明을 分破한 分證無生을 내
용으로 하였으니, 見思도 未脫한 初信의 解悟로써 見性이라고 주장함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事事融通하야 重重無盡하니 悟此則全同佛果라 方是圓因이니라(圭峯上淸凉書-
大正39 P577 B6行)
十住初首에 便卽見性하야 起法身智慧하야 便成正覺하느니라(新華嚴論 二)
十住初心에 正證如來佛果智法門하느니라(新華嚴論 四)
十住之首에 位齊佛果니라(新華嚴論 二)
一一滴中에 皆得大海요 一一位內에 皆有佛果니라(新華嚴論 二)
七地以前엔 皆有功用이요 八地已去에 得無功用이니라(新華嚴論 二十六)
初地已來로 至於七地는 有爲無爲를 皆有修學이요 此八地에 二行이 已終이니라
(新華嚴論 二十七)
事事融通하여 重重無盡하니 此를 깨친 즉 佛果와 같은지라, 바야흐로 圓敎
의 因이니이다.
十住初首에 문득 見性을 하여 法身의 智慧를 發起하여 正覺을 성취하느니
라.
十住初心에서 正히 如來의 佛果智法門을 證得하느니라.
十住初首에 그 地位가 佛果와 齊等하느니라.
一一滴中에 다 大海를 얻고, 一一位內에 다 佛果가 있느니라.
七地 以前에는 전부 功用이 있고, 八地 已後에서 無功用을 얻느니라.
初地로부터 七地까지는 有爲와 無爲를 다 修學하고, 八地에서 二行이 終了
하느니라.
* 無碍緣起의 華嚴性海에서는 生佛이 圓融하고 因果가 交徹하여, 塵塵刹刹
이 如來 아님이 없고 事事物物이 眞如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大圓覺道場에
는 一切衆生이 皆證圓覺이다. 비록 因佛果佛이 一性佛이나 因佛은 因圓果滿
한 妙覺이 아니니, 功用에 있어서는 八地 이후에서 無功用이므로 住初 正覺
은 因佛이며 住初 見性도 因見이다. 그리하여 無功用의 十地도 正傳宗師는
見性으로 인정 않는 것이니, 有功用 즉 有修有學의 七地 以下는 재언할 필
요도 없다.
十住 十行 十廻向에 得一分如來同體大智하며 得一分如來同體大行이니라(新華
嚴論 二十六)
初地已來로 至七地는 是順無生忍이요 八地에 方名得無生忍이니 八地已前엔 皆
有覺觀修學이나 至此八地하야 二行이 方終이니라(新華嚴論 二十七)
從初地至第九地히 以分分白淨法으로 修道助行하느니라(新華嚴論 二十八)
從十住初心하야 直至十地히 皆名分眞이니라(華嚴疏苕 五十七)
十住와 十行과 十廻向에서 一分의 如來同體大智를 修習하며, 一分의 如來同
體大行을 修得하느니라.
初地 이래로 七地까지는 無生忍에 順向함이요 八地에서 바야흐로 無生忍을
體得하였다고 이름하나니, 八地 이전에는 覺察과 觀行의 修學이 다 있으나
八地에 이르러서 二行을 바야흐로 종식하느니라.
初地로부터 第九地에 이르기까지 分分의 白淨法으로써 修道하며 助行하느니
라.
十住初心으로부터 十地에 直至하기까지 전부 分得眞如 즉 分眞이라 하느니
라.
* 頓證圓證을 高唱하는 華嚴大敎도 결국은 分修分得이다. 住初正覺을 眞因
으로 하여 三賢 十聖을 分修分得하여 因圓果滿하여 究竟妙覺을 成就하는 것
이 華嚴圓敎이니 台敎의 分破分證과 동일하다. 그리하여 八地 以前에는 有
修有學이요, 八地 以後는 賴耶無記의 假無生忍의 無分別智와 無功用行으로
任運流入薩婆若海하나, 無功用行 역시 斷惑昇進하므로 分修分得이며 따라서
絶學無爲인 正傳의 見性이 아니다.
離一切心意識의 分別妄想하면 是名得無生忍이니 成就此忍하면 得入第八不動地
니라(華嚴經 十地品)
滅一切心意識의 分別妄想은 但是滅障法想이니 障法想者는 卽分別觀解之想이
요 有治想하니 卽無分別智니라(華嚴疏苕 六十九)
治想은 至佛方滅하나니 故로 入八地하면 雖無障想而有治想하니라(華嚴疏苕 六
十九)
一切心意識의 分別妄想을 永離하면 無生忍을 體得하였다고 하나니, 이 無生
忍을 成就하면 第八不動地에 得入하느니라.
一切心意識의 分別妄想을 滅한다 함은 단지 障法相을 滅함이니, 障法想은
즉 分別觀解하는 想念이요 治想이 있나니 즉 無分別智니라.
治想은 佛地에 이르러야 滅하나니, 故로 八地에 得入하면 비록 障想은 없으
나 治想은 있느니라.
* 八地無生은 無分別智인 治想이 남아 있으므로 佛以無生爲生하는 佛地의
眞無生이 아니다.
또한 彌勒菩薩의 瑜伽論 有心無心 二地品에서 分位建立에 있어서는 睡眠悶
絶 無想定 無想生 滅盡定의 五位가 名無心地이나, 第一義에서는 阿賴耶가
永滅한 無餘依涅槃만이 無心이요 其他는 阿賴耶가 未滅한 有餘依이므로 非
無心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므로 瑜伽釋에서 五位는 假名無心이나 有心地
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有餘依인 八地無生도 第一義에서는 非無生이요
有生이다.
七地엔 有加行方便之功用이요 八地已去로는 無方便功用이니라(賢首 起信義記
下本)
三細中境界相은 八地中色自在地에 能離니라(賢首 起信義記 下本)
三細中能見相은 九地中心自在地에 能離니라(賢首 起信義記 下本)
十地終心인 金剛喩定 無垢地中에 微細習氣心念이 都盡故로 云得見心性이니라
(賢首 起信義記 下本)
七地에는 加行하는 方便의 功用이 있고, 八地 以後로는 方便의 功用이 없느
니라.
三細中에 境界相은 八地中 色自在地에서 能離하느니라.
三細中에 能見相은 九地中 心自在地에서 能離하느니라.
菩薩地가 皆盡한 十地終心인 金剛喩定과 無垢地中에서 微細한 習氣心念인
業相이 전부 滅盡한 故로 得見心性이라고 하니라.
* 八地無生은 第八賴耶의 微細妄想인 無分別智中에 있어서 第一義인 佛地의
眞無生이 아니니, 大涅槃의 寂照가 될 수 없다. 賴耶의 極微妄想은 菩薩地
盡 以後 等覺의 金剛喩定에서 永滅하나니, 이것이 見性이며 佛地인 究竟覺
이다. 그러므로 起信論에서 菩薩地盡하여 永離微細하면 得見心性이니 名究
竟覺이라고 하였으며, 賢首도 그의 起信義記에서 究竟覺 이외는 三賢十聖이
전부 見性 아님을 단언하였으니 이는 佛祖正傳의 鐵則이다.
그러니 通玄의 住初見性은 八地賴耶의 無記假無生인 無功用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台敎의 住初見性과 같이 正傳의 見性이 아니다. 起信論뿐만
아니라 第八賴耶를 永滅한 究竟覺이라야 佛性을 正見함은 宗門正眼의 生命
이니 華嚴의 宗祖인 賢首도 異說이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賴耶가 滅盡한
眞如無心의 無餘大涅槃 즉 究竟覺만이 見性임은 涅槃 起信 宗鏡等에서 證言
하고 宗門正眼이 相承한 佛祖正傳의 원칙이니, 賴耶假無生인 無功用에도 미
치지 못한 住初를 見性이라고 함은 절대로 용인할 수 없다.
그리고 天台는 住初에서 無生이라 하고 通玄은 八地에서 無生이라 하여
所論이 各異하나, 모두 賴耶가 永滅한 第一義인 佛地의 眞無生이 아니다.
天台의 分破分證과 通玄의 分修分得이 全破圓證하여 藥病이 俱消하고 敎觀
을 咸息한 眞如無心의 見性이 아님에는 일반이니 正傳의 見性에는 상관이
없으며,
또한 解悟와 分證이 내용은 판이하나 見性이 아님에는 동일하다.
그러니 오직 佛祖의 正傳을 표방하여 佛性을 障蔽하는 最大難關인 賴耶의
極微를 打破하고 三賢十聖을 초월하여 大涅槃의 眞無生을 證得하여 常寂常
照의 諸佛淨土에서 眞如本性을 正見하여 佛祖의 慧命을 계승하여야 한다.
天台와 方山은 果後大聖으로 推仰되는 大先覺이니 그 所說에 반대함은 後學
의 狂妄이라고 비난할지 모른다. 그러나 天台와 方山의 住初見性論은, 만세
의 大祖師인 馬鳴의 所著로서 宗派를 超越하여 全佛敎에 公認된 大乘의 總
論인 起信論의 見性 즉 究竟覺과, 金口親宣인 大涅槃經의 見性 즉 大涅槃
과, 龍樹 이후 제일인자의 칭송을 받는 永明 宗鏡錄의 見性 卽 如來地와,
瑜伽論의 究竟菩薩如隔輕곡의 大原則에 위배되니, 절대로 추종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禪門의 超群 正眼宗師들은 如出一口로 十地未見性과 佛地
無生 佛地無念만이 見性임을 宣說하였으니, 아무리 天台와 方山의 所論이라
하여도 初住見性은 佛祖의 慧命을 위하여 宗門의 異端으로서 단연코 이를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또한 初住見性은 五位無心과 八地無生이 第一義의 無心無生이 아님
과 같이, 無餘依인 究竟覺을 내용으로 하는 佛祖正傳의 見性이 아님은 명약
관화하다.
藏通別圓의 四敎가 각각 成佛을 주장하나 그 내용은 판이하니, 天台 四敎儀
圓敎行位에서 말하기를, 至七信하야 斷思惑盡하면 與藏通二佛과 같고 入二
行하면 與別敎妙覺과 같다고 하였다. 즉 圓敎의 十信 十住 十行 十廻向 十
地 等妙二覺의 五十二位中, 第七位인 七信은 藏通二敎의 佛果와 모두 같고
第二十二位인 二行은 別敎佛果와 동일하다 함이다. 藏通二敎의 佛果는 圓敎
의 第七位이요 別敎의 佛果는 圓敎의 第二十二位이니, 圓敎佛果를 성취하려
면 別敎佛果에서도 三十位를 더 進修하여야 되므로 佛果의 名稱은 동일하나
그 내용은 천지의 차가 있다. 그러므로 藏通別三敎의 佛果는 圓敎에서 보면
修行過程에 있고 佛果로 용인할 수는 절대로 없다.
이와 같이 天台는 初住에서 無生忍을 證하여 見性한다고 말하나, 天台自說
에 의하여도 初住에서는 四十一品의 無明을 進斷하고 最後 微細無明을 永離
하여야 佛果를 성취한다고 하였으니, 初住에는 無明業惑이 중중첩첩하였으
므로 極微細無明까지 斷盡하여야 見性을 허락한 起信所論과 禪門正傳의 見
性은 아니다.
또한 方山도 初住에서 見性을 稱論하였으나, 天台와는 달리 八地에서 無生
忍을 證하고 進修하여 妙覺에서 佛果를 성취한다고 하였으니, 賴耶의 極微
까지 斷盡한 正傳의 見性은 될 수 없다.
이와 같이 藏通別三敎의 佛果가 圓敎의 佛果가 아님과 같이 天台·方山의
初住見性은 見性을 向한 過程에 불과하고 極微細無明을 斷盡한 起信의 究竟
覺과 無餘涅槃의 無心無念과 妙覺寂照의 大般涅槃과 大圓鏡智의 圓證佛果
등을 내용으로 하는 宗門正傳의 見性은 아니니 金沙를 혼동하여서는 아니된
다.
一五, 多聞知解
譬人이 大惠施하되 種種諸肴膳이어늘 不食自餓死하니 多聞亦如是니라(六十華
嚴經 五)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만반 진수를 山積하여 주거늘 먹지 않고 그 스스로
굶어 죽음과 같이 博學多聞도 또한 이와 같느니라.
* 說食終不飽라, 설사 八萬法藏을 讀習講說하여도 佛性을 實悟하지 못하면
하등 소용이 없다. 그뿐 아니라 廣學多智하면 神識이 轉暗이라 함과 같이
淸淨無垢한 本有의 心鏡에는 金口聖言도 오히려 塵垢가 된다. 그리하여 廣
學多聞은 悟道에 제일 큰 장애로 이를 극력 배척하는 것이다. 그러니 山積
한 진수를 면전에 두고 굶어 죽는 가련한 신세가 되어서는 아니된다. 오직
實參 實悟하여 眞如本性을 洞見하여 大解脫 大自在人이 되어야 한다.
譬如貧窮人이 日夜數他寶하되 自無半錢分이니 多聞도 亦如是니라(六十華嚴經
五)
비유컨대 貧窮한 사람이 晝夜로 他人의 珍寶를 헤아리되 자기에게는 반푼어
치도 없는 것과 같이, 廣學多聞도 또한 이와 같느니라.
* 自己 心中의 無盡寶庫는 개발하지 않고 佛祖의 언설만 학습하면 남의 보
배만 헤아리는 것을 면치 못한다. 修道上 第一障碍인 經論習誦을 단연 폐기
하고 勇猛精進하여 自己寶藏을 豁開하면, 미래겁이 다 하도록 활용하여도
무궁무진하나니 佛法은 不可思議中의 不可思議이다.
是法은 非思量分別之所能解니라(法華經 一 方便品)
佛法의 深奧한 玄旨는 思量分別로 능히 이해 못하느니라.
* 洞山价禪師도 擬將心意學玄宗하면 大似西行却東行이라 하였으니, 思量分
別의 心意識으로써 현묘한 佛法을 성취하려면 이는 서쪽으로 갈려는 사람이
동쪽으로 가는 것과 같이 도리어 역효과만 낸다.
但諸聲聞의 境界는 身心語言이 皆悉斷滅하여도 終不至彼之親證한 所見涅槃
이어늘 何況能以有思惟心으로 測度大圓覺境界리오 如取螢火하야 燒須彌山하
야 終不能著이니라(圓覺經 金剛章)
無學인 聲聞의 경계는 身心과 語言이 전부 斷滅하여 現行의 思量分別이 永
盡하여도, 如來가 親證한 無餘涅槃에는 도달 못한다. 그러하거늘 하물며 思惟
分別로써 大圓覺의 深玄境界를 어찌 알 수 있으리오. 이는 微蟲인 螢火로써
須彌巨山을 소각하려는 것과 같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 二乘無學의 경계는 三界煩惱를 永斷한 滅盡定이다. 그러나 灰心滅智한 有
餘涅槃에 住著하여 있으므로 無上正覺인 無餘涅槃은 망연히 알지 못하는 것
이다.
佛言하사되 學我法者는 唯證乃知니라(宗鏡錄 二十二)
世尊께서 말씀하시되 佛法을 修學코자 하는 者는 오직 證悟하여야만 了知하
느니라.
* 實證이 아니면 佛法에 문외한이라 함은 禪門만의 특징이 아니요 一切佛法
에 통용된다. 佛法은 원래부터 如來所證의 甚深玄境에 입각하여 있으므로
頓證의 예지가 아니면 장님이 해를 보는 것과 같다.
雖卽心卽佛이나 唯證者라사 方知니라(淸凉澄觀 傳燈錄 三十)
비록 卽心卽佛이라 한 것도 오직 證悟한 者라야만 비로소 了知하느니라.
* 佛敎에서 가장 상식적이고 용이한 표현이 卽心卽佛이란 말이다. 마음이
곧 부처라 함은, 유치한 어린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지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는 가장 용이한 言句같아도 언어문자와 사량분별로서는 모
르는 것이요 究竟正覺인 圓證에서만 了知하는 것이다.
淸凉은 華嚴敎宗의 최고봉이다. 多聞摠持를 위주로 하는 敎家에서도 실지에
있어서는 證知를 표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離言絶慮인 實證을
本命으로 삼는 敎外別傳인 禪宗에서 解로써 주장한다면 이는 자살 이상
의 자살이다.
法性은 圓融無二相하니 諸法이 不動本來寂이라 無名無相絶一切하야 證知所知
요 非餘境이로다(義湘 法性偈)
一切萬法의 근원인 眞如自性은 圓融無碍하여 有無善惡等의 二相을 초월하였
다. 이 절대적인 諸法이 凝然不動하여 본래로 空空寂寂하다. 이 法性은 名言
과 形相이 全無하여 一切 頓絶하였으니, 究竟無心의 證知로써 도달할 것이요
기타의 어떤 境界로서도 측량하지 못한다.
* 法性 즉 佛性은 圓證見性한 證知 이외는 了達할 수 없으니 이는 불교의
통설이다. 그러니 圓證 아닌 分證과 解悟를 見性이라 함은 佛法 이외의 顚
倒妄見이다. 證知는 唯佛所知라고 義湘이 그의 法界圖에서 自述하였다.
阿難아 汝雖歷劫토록 憶持如來秘密妙嚴하여도 不如一日에 修無漏業이니라(首
楞嚴經 四)
佛陀가 阿難에게 苦口呵責하였다. 네가 아무리 억만겁토록 如來의 秘密妙嚴
인 金言玉音을 독송하여도, 잠시인 一日間에 無漏業인 禪定을 修習함만 못하
니라.
* 阿難이 항상 苦口정녕한 佛陀의 策勵를 받았으나 숙세의 業障인 多聞摠持
의 고질은 치유치 못하였다. 그러다가 佛滅 後에는 迦葉에게 疥瘙野干으로
축출당한 것이다. 이 多聞의 고질은 世尊께서도 속수무책이었으니 얼마나
가공할 병통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천만 노력하여 多聞의 중환
에서 벗어나야 心眼을 洞開하여 佛法을 바로 본다.
旣不住善惡二邊하야 亦不作不依住知解를 名菩薩覺이요 旣不依住하야 亦不作無
依住知解하야사 始得名爲佛覺이니라(百丈廣語)
벌써 善惡의 二邊에 住著하지 않아서, 또한 依住하지 않는다는 知解까지도
作持하지 않음을 菩薩覺이라 한다. 벌써 依住하지 않고, 또한 依住함이 없다
는 知解도 作持하지 않아야 비로소 佛覺이라 한다.
* 菩薩들은 不依住知解는 없지마는, 無依住知解에 얽매어 正覺을 성취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深淺은 다름이 있으나 三賢은 고사하고 十地도 知解를
벗어나지 못하여 見性 즉 成佛을 못하는 것이니, 번연히 覺惺하여 無依住知
解를 파기하면 究竟地에 頓入한다. 그러하니 圭峯 普照의 解悟가 知解의 宗
家임은 물론이요, 天台·方山의 分證도 知解의 一脈이다.
佛地는 斷二愚하나니 一은 微細所知愚요 二는 極微細所知愚이라(百丈廣語)
佛地는 二種의 愚知를 斷하였으니, 一은 微細한 所知愚見이요 二는 極微細
한 所知愚見이니라.
* 微細와 極微의 愚知妄解는 微細妄念인 第八阿梨耶에 의존한다. 阿梨耶의
極微細妄識을 打破하고 佛地를 親證하면 二種의 愚知妄見은 자연히 해소되
니 이것이 宗門의 圓證이며 見性이다.
但不住一切有無諸法하고 亦不住無依住하야 亦不作不依住知解하면 是名大善知
識이며 亦名唯佛一人이 是大善知識이니 爲無兩人이요 餘者는 盡名外道며 亦名
魔說이니라(百丈廣語)
다만 일체 有無의 諸法에 依住하지 않고 또한 無依住에도 依住하지 않아서
또한 不依住하는 知解도 짓지 않으면 이를 大善知識이라 이름하며 또한 오직
佛陀一人이 大善知識이라 이름하나니, 兩人이 없기 때문이요, 그 나머지의 者
는 전부 外道며 또한 魔說이라 이름하느니라.
* 不住와 無住, 微細와 極微의 愚知妄解를 超然獨脫하면 圓證見性이며 無上
正覺이다. 이 知解에 얽매이게 되면 十地等覺도 外道魔說이니 解悟漸修는
거론할 가치도 없다.
古人의 授記는 終不錯하니 如今에 立知解爲宗者는 卽荷澤이 是也라(法眼錄)
古人의 授記는 전혀 錯誤가 없으니 지금 知解를 廣立하여 宗旨로 삼는 者는
곧 荷澤神會이다.
* 荷澤은 解悟漸修를 제창한 本源이다. 知解宗徒라고 꾸짖어 책망한 六祖의
授記는 확실히 적중하였다. 大法眼뿐만 아니라 達磨 直傳의 正眼들은 如出
一口로 荷澤을 知解라고 배제하였으며, 圭峯은 荷澤의 嫡統이니 이 知解宗
旨에 혹란되어서는 아니된다.
神光이 不昧하야 萬古徽猷하니 入此門來하야는 莫存知解어다(平田岸 傳燈錄
九)
神妙한 光明이 항상 비춰서 만고에 輝煌하니, 이 玄門에 들어와서는 邪知惡
解를 두지 말아라.
* 眞如自性의 무한한 광명은 영원불멸하여 우주에 충만하고도 남는다. 이
절대적 대광명을 障蔽하는 것은 妄想情念의 邪知惡解이니 이 知解의 黑雲만
탕진하면 本有의 광명은 자연히 나타난다.
八萬法寶의 金言聖句도 十地等覺의 玄知妙解도 전혀 正法을 매몰하는 塵堆
이다.
生鐵로 鑄就한 痴鈍으로써 일체만사를 頓忘하고, 오직 佛祖公案을 參究하여
주야로 게을리 하지 않으면 寤寐一如의 깊은 경지에서 豁然大悟하여 眞如本
性을 洞見하리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리오. 이것이 圓證인 證悟이며 見性이
며 成佛이다.
牧牛子曰 荷澤은 是知解宗師라 雖未爲曹溪嫡子나 然이나 悟解高明하고 決擇이
了然하니 密師宗承其旨故로 今爲因敎悟心之者하야 除去繁詞하고 苕出綱要하
야 以爲觀行龜鑑焉하노라(節要)
牧牛子가 말하였다. 荷澤은 이 知解宗師인지라 비록 曹溪의 嫡子는 되지 못
하였으나, 悟解가 高明하고 決擇이 了然하니 圭峯이 그 宗旨를 繼承하였으므
로 이제 敎를 因하여 心을 悟한 者를 위하여 繁詞를 除去하고 綱要를 苕出하
여 觀行의 龜鑑을 삼게하노라.
* 荷澤·圭峯의 頓悟漸修思想을 基幹으로 하여 結社文과 修心訣을 저술하여
達磨禪이 즉 頓悟漸修라고 高唱하던 普照가, 頓悟漸修를 詳論한 그의 節要
劈頭에서는 荷澤을 知解宗師라고 斷言하였다. 그리고 頓悟漸修를 敍述함은
因敎悟心者를 爲함이요 禪宗이 아니라고 前提하였다.
今且約圓頓信解者言之爾요 敎外別傳은 不在此限이니라(節要)
只今 圓頓信解者를 위하여 말함이요 敎外別傳은 此限에 있지 않느니라.
* 이는 節要中 頓悟漸修 解釋의 結言이다. 즉 頓悟漸修는 敎家인 圓頓信解
者를 表現한 것이요 禪宗인 敎外別傳 思想이 아니라 함이다.
上來所擧法門은 竝是爲依言生解悟入者하야 委辨法有隨緣不變二義하고 人有頓
悟漸修兩門이라 然이나 若依言生解하야 不知轉身之路하면 雖終日觀察하나 轉
爲知解所縛하야 未有休歇時일새 故로 更爲今時衲僧門下의 離言得入하야 頓亡
知解之者하야 雖非密師所尙이나 略引祖師善知識이 以徑截方便으로 提接學者의
所有言句하야 係於此後하야 令參禪峻流로
知有出身一條活路耳로다(節要)
上來 所擧의 法門은 전혀 依言生解하여 悟入한 者를 위하여, 法에 隨緣과
不變의 二義가 있고 人에 頓悟와 漸修의 兩門이 있음을 委辨하니라. 그러나
만약에 依言生解하여 轉身하는 活路를 不知하면 비록 終日 觀察하나 轉轉히
知解에 얽히어 休歇時가 없으므로 다시 衲僧門下의 離言得入하여 知解를 頓亡
한 者를 위하여 비록 圭峯이 崇尙하는 바는 아니나 간략히 祖師와 善知識이
徑截方便으로 學者를 提接한 所有言句를 引證하여 此後에 係列하여 參禪峻流
로 하여금 出身하는 一條 活路가 있음을 알게 하노라.
* 이는 節要의 結尾이다. 全篇을 통하여 頓悟漸修를 詳說하였으나 이는 依
言生解하는 知解를 조장할 뿐이므로 離言得入하여 頓亡知解하는 參禪峻流의
徑截門이 있어서 知解大病을 제거하는 轉身活路를 소개한다 함이다. 이로써
知解宗徒인 荷澤·圭峯의 頓悟漸修는 依言生解하는 敎家의 圓頓思想이요,
離言亡解한 禪門의 徑截活路가 아님을 해명하였다. 원래로 知解는 禪門의
최대의 禁忌이니 圓頓知解가 敎外別傳이 될 수 없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結社文과 修心訣에서는 荷澤·圭峯의 頓悟漸修를 達磨正傳이라고 力說하
다가, 節要에 와서는 荷澤·圭峯은 知解宗徒로서 曹溪嫡統이 아님과 동시에
그의 사상인 頓悟漸修는 依言生解하는 敎家요 離言亡解하는 禪門이 아님을
분명히 말하였으니 이는 思想의 전환이다.
普照의 저술 연차를 보면 結社文은 三十三歲이요, 節要는 入寂하기 전해인
五十二歲이다. 修道過程은 四十一歲 上無住菴에서 物不碍膺하고 讐不同所하
야 當下安樂하야 慧解增高라고 碑文에 明記하였으니 修道의 진전에 따라 思
想의 향상을 볼 수 있다. 修心訣은 撰述年代가 없으나 그 내용이 結社文과
동일하므로 초년에 지은 것임이 분명하다.
結社文과 修心訣을 지은 때에는 禪敎를 혼동하여 敎家의 頓悟漸修를 達磨
禪宗이라고 주장하다가, 慧解가 增高함에 따라 만년에는 앞의 잘못을 惺悟
하여 禪宗은 徑截門임을 宣說한 것이다.
다행히도 普照가 만년에 와서는 頓悟漸修思想을 依言生解하는 知解임을 분
명히 한 것만은 사실이니, 普照 當年에도 頓悟漸修가 禪宗 아님을 명백히
하였거늘 팔백년 후 오늘에 와서 普照를 馮資하여 頓悟漸修를 禪宗이라고
주장함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頓悟漸修를 祖述한 普照
自身이 頓悟漸修의 元祖인 荷澤·圭峯을 知解宗師라고 斷言하였으니 그 누
구를 막론하고 頓悟漸修思想을 신봉하는 사람은 전부 知解宗徒이다.
圓頓信解門則以有語路義路聞解思想故요 徑截門則無有語路義路하며 未容聞解思
想故니라(看話決疑論)
此中所論悟者는 乃解悟也라(圓頓成佛論)
話頭疑破하야 噴地一發者는 乃能親證無障碍法界矣라(看話決疑)
圓頓信解門인즉 語路義路와 聞解思想이 있는 緣故요, 徑截門인즉 語路義路
가 없으며 聞解思想을 용납하지 않는 연고니라.
此圓頓成佛論中에 所論한 悟는 이에 解悟니라.
話頭에 疑心을 打破하여 噴地一發한 者는 이에 無障碍法界를 親證하느니라.
* 圓頓門의 頓悟는 十信初心인 解悟이므로 聞解思想을 제거하는 漸修가 필
요하다.
然此義理雖最圓妙나 總是識情聞解思想邊量故로 於禪門徑截門엔 一一全揀佛法
知解之病也라(看話決疑)
그와같이 義理가 비록 가장 圓妙하나 摠히 識情인 聞解와 思想邊의 量인 故
로, 禪門의 徑截門에서는 一一히 온전히 揀擇하여 佛法知解의 병이 되느니라.
* 至圓極妙한 圓頓玄門도 禪宗徑截門에서는 전혀 知解大病이 되므로, 普照
도 證悟中心인 看話決疑에서는 이를 배제하고 敎家를 위하여 解悟思想인 圓
頓成佛論을 別撰하였으니 離言妄解한 證悟에 있어서 依言生解하는 解悟는
전체가 병이 아닐 수 없다.
圓頓信解인 如實言敎가 如恒河沙數나 謂之死句니 以令人으로 生解碍故라 竝是
爲初心學者於徑截門活句에 未能參詳故로 示以稱性圓談하야 令其信解不退轉故
니라(看話決疑)
禪宗敎外別傳徑截門은 超越格量故로 非但敎學者難信難入이요 亦乃當宗의 下
根淺識도 茫然不知니라(看話決疑)
故云 敎外別傳은 逈出敎乘이라하니라(看話決疑)
夫參學者는 須參活句요 莫參死句니 活句下에 薦得하면 永劫不忘이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不了니라(看話決疑)
圓頓信解인 如實言敎가 恒河沙數 같으나 死句라 하나니 學人으로 하여금 解
碍를 내게 함이다. 아울러 이 初心學者가 徑截門活句에 能히 參詳치 못하게
되는 故로 自性에 稱合한 圓談으로 보여서 그로 하여금 信解하여 退轉치 못하
게 한 緣故이다.
禪宗의 敎外別傳인 徑截門은 格量을 초월하므로, 다못 敎學者만 難信難入할
뿐 아니라 또한 禪宗의 下根淺識도 망연히 알지 못하느니라.
故로 이르기를 敎外別傳은 敎乘을 逈出한다고 하니라.
大抵 參學하는 者는 모름지기 活句를 參할 것이요 死句를 參하지 말지니,
活句下에 薦得하면 영겁토록 不忘이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 普照는 寂後에 발견된 그의 看話決疑에서 頓悟漸修를 내용으로 하는 圓頓
信解는 전혀 知解이므로 死句라 規定하고 敎外別傳인 禪宗의 徑截門은 活句
라 結論하여 參學者는 離言忘解하여 永劫不忘하는 活句를 모름지기 參究하
고 依言生解하여 自救不了하는 死句를 參究하지 말 것을 거듭거듭 말하였
다.
禪敎를 혼동한 초년의 저술인 結社文과 修心訣로써 頓悟漸修의 大宗으로 추
앙되는 普照自身도 만년에는 敎外別傳은 逈出敎乘이라 宣說하여 頓悟漸修를
知解인 死句임을 규정하고 禪宗의 徑截門活句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였거
늘, 만약에 頓悟漸修를 禪宗이라고 다시 云謂한다면 이는 禪宗正傳의 반역
일 뿐만 아니라 普照에 대하여도 몰이해한 어리석은 견해이다. 그러므로 敎
外別傳인 達磨兒孫은 禪門의 最大 禁忌인 荷澤·圭峯의 知解宗徒가 되어서
는 아니된다.
頓悟漸修를 내용으로 하는 解悟인 圓頓信解가 禪門의 최대의 禁忌인 知解임
을 明知하였으면 이를 완전히 포기함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禪門正
傳의 本分宗師들은 추호의 知解도 이를 佛祖의 慧命을 단절하는 邪知惡解라
하여 철저히 배격할 뿐 一言半句도 知解를 권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普照
는 圭峯의 解悟思想을 知解라고 비판하면서도 節要·圓頓成佛論等에서 解悟
思想을 연연하여 버리지 못하고 항상 이를 고취하였다. 그러니 普照는 만년
에 圓頓解悟가 禪門이 아님은 분명히 하였으나, 시종 圓頓思想을 고수하였
으니 普照는 禪門의 표적인 直旨單傳의 本分宗師가 아니요, 그 思想의 主體
는 華嚴禪이다.
禪門은 證智임을 主張한 決疑論의 結尾에서 敎宗의 圓頓信解인 參意門을
宣揚하였으니, 普照의 內敎外禪의 思想이 여기에서도 歷然하다.
十六, 豁然漏盡
大迦葉이 衆中에 手牽阿難出하야 言하되 今淸淨衆中에 結集經藏하노니 汝結이
未盡하니 不應住此니라 又語阿難言하되 斷汝漏盡然後에 來入하라 殘結이 未盡
이어든 汝勿來也어다 如是語竟하고 便自閉門하니라 是時中間에 阿難이 思惟諸
法하야 求盡殘漏하야 晝夜坐禪經行하야 愍勤求道하니라 是阿難은 智慧多하고
定力少할새 是故로 不卽得道러라 後夜에 欲臥하니 過疲極偃息하야 卽臥就寢할
새 頭未至枕하야 廓然得悟하니라 阿難이 如是入金剛定하야 破一切諸煩惱山하
고 得三明六通과 共解脫하야 作大力阿羅漢하야 卽夜에 到僧堂言하되 我今夜에
得盡諸漏하니라(大智度論 二)
大迦葉이 大衆中에서 親히 阿難을 牽出하여 말하되, 지금 淸淨衆中에서 經
藏을 結集하려 하노니 汝는 妄結이 未盡하니 此處에 住居치 못하느니라. 또
阿難에게 말하되 汝의 妄結有漏를 斷盡한 然後에 來하라, 殘餘한 妄結이 未盡
하거든 汝는 來入하지 말지어다. 이렇게 말하고는 문득 손수 門을 닫아 버렸
다. 이때 中間에 있어서 阿難이 諸法을 思惟하여 殘漏를 斷盡코저 하여 晝夜
로 坐禪하며 經行하여 勤實히 大道를 求하였다. 그러나 阿難은 智慧는 過多하
고 定力은 甚少하여 卽是에 大道를 體得하지 못하였다. 後夜에 寢臥코저 할
때 過度히 피곤하여 쉬고자 하여 就枕하니 頭部가 枕子에 未至하여 廓然히 大
悟하였다. 阿難이 이와 같이 金剛大定에 深入하여 一切의 모든 煩惱山을 破滅
하고 三明六通과 大解脫을 證得하여 大力阿羅漢이 되었느니라. 그리하여 當夜
에 僧堂에 이르러 내가 今夜에 諸漏의 滅盡함을 證得하였다고 말하니라.
* 阿難尊者는 佛陀의 十代弟子中에 多聞第一이다. 그 記憶力은 古今未曾有
로서 錄音器 以上으로 正確하였다. 三十年間 佛陀의 侍者로서 모든 法會에
참석하여 佛陀 說法의 大部分을 漏落없이 傳持하고 있었다. 그러나 佛陀가
滅度한 후에 그 說法을 結集하려할 때 迦葉尊者에게 逐出 당하였다. 阿難이
없이는 結集이 不可能하니 逐出하지 말라는 大衆의 懇曲한 挽留와 阿難의
悲痛한 哀乞에도 불구하고, 疥瘙野干(僧祗律 三十二中의 말)이라고 痛罵하
여 期於히 逐出하였다.
그 理由인 즉, 佛法은 言語文字의 記憶解說에 있지 않다. 오직 心中의 一
切煩惱妄漏를 斷盡하여 참다운 解脫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阿難은 비록 佛
陀의 說法을 細密히 기억하고 있었으나 煩惱妄想의 有漏結使를 脫盡치 못하
고 있었다. 有漏妄結이 未盡한 者는 佛法中人이 아니다. 獅子群中의 疥瘙野
干이니 結集의 聖會에 참여할 자격이 절대로 없다. 그러니 決死精進하여 有
漏煩惱를 斷盡하고 오너라, 그때는 聖會의 參席을 欣然히 許諾하겠다고 한
것이다.
阿難이 平時에 自己의 聰明記憶만 믿고 實地修道는 하지 않다가, 결국은
疥瘙野干이라한 烙印下에 逐出되고 마니 그 心情은 悲痛을 極하였던 것이
다. 여기에서 크게 반성하지 못하면 이는 木石 以下의 人間이라 도저히 救
濟하
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阿難은 宿世善根이 至重하므로 猛然히 반성하고 大
憤發하여 刻苦精進하였다. 그리하여 未久에 豁然大悟하여 諸漏가 永盡함을
얻어서 迦葉으로부터 聖會 參席의 榮譽를 얻었다.
이 事實은 五分律三十四, 四分律五十四, 僧祗律三十二, 根本毘那耶雜事三十
九, 南傳律部四, 大智度論二, 阿育王傳四, 付法藏因緣傳二 等의 典籍에 大
同小異하게 記載되어 있다.
이와 같이 阿難의 得道內容에 對하여서 五分에는 豁然漏盡이라 하였고,
心得無漏(四分律), 得盡有漏(僧祗律), 斷盡諸漏(根本雜事), 得盡諸漏(智度
論), 諸漏를 脫하여 心解脫하였다(南傳律)라고 表現하였으니, 豁然大悟하여
斷盡諸漏하여 小乘羅漢 아닌 大力阿羅漢 즉 佛果를 成就한 것이다. 이것이
圓證見性이다. 여기서 諸漏라 結使라 하는 것은 無明인 煩惱妄想의 異名이
니 三細六楸를 내용으로 한 것이다. 이 煩惱漏結을 근본적으로 斷盡하면 無
餘涅槃 즉 佛地를 證하는 것이니 佛果中의 漏盡無所畏이다.
小乘律部 記錄에 阿難을 阿羅漢果라 하였다고 小乘羅漢으로 斷定함은 錯誤
이다. [若菩薩이 得菩提時엔 頓斷煩惱及所知障하야 成阿羅漢及如來니라](成
唯識論 三)함과 같이, 原始佛敎에서는 釋尊도 阿羅漢이라 表現한 바 있으니
智度論의 大力阿羅漢 즉 佛果이다. 그러므로 如來十號의 一인 應供은 阿羅
漢이며, 龍樹가 阿難을 大力阿羅漢이라 한 것이다.
阿難이 迦葉에게 痛罵逐出의 羞侮를 당하였으나 轉禍爲福하여 無上道果를
성취하였다. 그리하여 結集의 中樞役割을 하여 佛陀의 遺敎를 後世에 傳하
였다. 그뿐 아니라 佛陀의 正法眼藏을 傳持한 大迦葉의 法嗣가 되어 佛陀의
慧命을 繼承하였다. 그 法脈은 燈燈相續하여 印度로 中國으로 綿綿不絶하여
千秋萬世에 不滅의 功勳을 樹立하였다. 그리하여 阿難이 佛十大弟子中 多聞
第一이지마는, 結局 佛陀 아닌 迦葉의 法弟子가 된 것이다. 이것은 佛法이
多聞解會에 있지 않고 悟心實證 卽 圓證見性에 있다는 標徵이다. 만약 阿難
의 悟處가 有餘涅槃인 小乘羅漢이었다면, 無上正法을 傳受한 迦葉(我今所有
한 無上正法을 悉以付囑摩訶迦葉하노니 是迦葉者는 當爲汝等하야 作大衣止
호되 猶如如來니라--大涅槃經 二)이 阿難에게 傳法하지 않았을 것이다. 迦
葉이 阿難에게 傳法한 것은 阿難이 如來의 無上正法 즉 無餘涅槃인 佛性을
徹見한 大力阿羅漢이기 때문이다.
八萬大藏을 誦出한 阿難도 豁然漏盡하여 極果를 圓證 以前에는, 疥瘙野干
으로 逐出을 免하지 못하였으니, 佛敎의 生命이 여기에 있다. 누구든지 妄
滅證眞하여 頓見本性하지 않으면 佛法中人이 아니요 疥瘙野干이라 함은 古
今을 통한 不變의 原則이니, 多聞知解는 蛇蝎같이 멀리 하고 實證에만 노력
하여 圓證見性하여야 할 것이다.
能은 不識字하니 請上人은 爲讀하라(壇經 悟法傳依篇)
字卽不識이나 義卽請問하라(壇經 參請機緣篇)
吾不識字하니 汝試就經하야 誦一篇하라(壇經 參請機緣篇)
慧能은 文字를 모르니 청컨대 上人은 나를 위하여 읽어달라.
文字는 모르나 청컨대 그 뜻을 물어라.
나는 文字를 모르니 네가 經을 한편 朗誦하라.
* 이는 壇經에 기록된 六祖의 親語이니 六祖가 一字不識인 文盲임이 證明된
다.
老莊의 玄旨와 書易大義와 三乘經論과 四分律儀에 說通訓誥하고 音參吳晋하야
爛乎如襲孔翠하며 玲然如振金玉이라(張說撰 神秀碑文)
老子·莊子의 深玄한 意旨와 書經·周易의 廣大한 眞義와 三乘의 經論과 四
分의 律儀에 說法은 訓誥에 통달하고 音韻은 吳晉에 參詳하여 璨爛하기 孔翠
를 衣襲함과 같고 玲瓏하여 金玉을 振動함과 같다.
* 神秀의 博學多聞이 碑文에 昭詳하다.
朕請安秀二師하야 宮中에 供養하고 萬機之暇에 每究一乘하노이다 二師가 竝推
讓云하되 南方에 有能禪師하야 密受忍大師衣法하였으니 可就問他하소서하니
今遣內侍薛簡하여 馳詔請迎하노니 願師는 慈念으로 速赴上京하소서(全唐文 十
七 壇經 唐朝徵詔篇)
朕이 慧安과 神秀 二師를 招請하여 宮中에서 供養드리고, 萬機의 餘暇에 每
樣 一乘을 窮究하노이다. 二師가 竝皆推讓하여 말하되 南方에 慧能禪師가 있
어서 秘密히 五祖弘忍大師의 衣法을 傳受하였으니 彼師에게 請問하소서 하여,
이제 內侍 薛簡을 보내 詔書를 받들어 迎請하오니, 원컨대 大師는 慈悲한 心
念으로 速速히 떠나서 京都에 上來하소서.
* 佛法은 多聞摠智인 解悟에 있지 않고 悟心見性 즉 圓證에 있다. 그러므로
五祖는 解悟인 神秀를 물리치고 圓證인 六祖에게 傳法하여 萬世의 표준이
되어 있다. 神秀가 아무리 博學多聞하여 天下에 그 比類가 없지마는, 圓證
(원증)見性하지 못하여 妄念이 相續不斷하니 佛法의 門外漢이다. 六祖는 一
字不識의 文盲이나 豁然漏盡하여 心眼이 洞開하여 頓證本性하여 深入堂奧하
였다. 그
러므로 五祖는 碩學인 神秀를 斷然히 排除하고 無識한 六祖에게 欣然히 傳
法한 것이다.
後世에 이르러 多聞한 神秀의 法統은 오래지 않아 斷滅되고, 無識한 六祖의
法孫은 繼繼繩繩하여 天下를 風靡하여 지금까지 相續不絶이다. 아무리 博學
多聞하여도 豁然漏盡하여 自性을 實證하지 못하면 이는 生命이 없는 死法이
다. 그러나 一字無識이라도 徹見心性하여 解脫道를 성취하면, 生命이 약동
하는 一大活法이라 부패한 種子에 어찌 生命이 繼續되리오. 그 法孫이 斷絶
함은 당연한 歸結이다.
그러니 佛法에 就向하는 者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死法인 言語文字의 多
聞聰智인 解悟에 현혹되어 영원한 破滅을 自招하지 말고 豁然漏盡의 大解脫
道인 圓證으로써 活路를 개척하여 未來劫이 다하도록 佛祖의 心燈을 밝혀서
法界를 비추어야 할 것이다. 死法이 豈能活人이리오. 正法의 死活이 여기에
있으니 千萬覺惺하여야 한다.
佛敎의 目標는 成佛에 있다. 成佛은 圓證見性에 있고 圓證見性은 妄滅證眞
한 究竟無心에 있다. 圓證見性의 第一障碍는 多聞知解 즉 解悟이다. 설사
曠世의 多聞과 拔群의 知解를 具備하였어도 圓證見性하지 못하면 茫茫業海
의 迷淪衆生이어서 佛法中의 靑盲이며 解脫道의 逆行이다. 이는 阿難의 逐
出과 神秀의 失格으로 歷歷分明하다.
說食終不飽어니 畵餠이 豈充飢리오. 오직 實參實悟에 있을 뿐이니 佛祖의
公案을 盡心力究하여 이에 透徹無餘하여야 한다. 佛祖의 公案은 大寂光三昧
中의 玄機大用이니, 無心無念하고 常寂常照하여 圓證見性한 大圓鏡智의 金
剛正眼이 아니면 公案의 落處는 茫然不知하는 것이니, 思量分別로써 公案을
忖度하려 하면 正히 螢火燒山이다. 그러므로 一念不生하고 前後際斷하여 位
階七地한 大慧에게 [可惜다 死了不得活이니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여
有句無句公案으로 痛下針錐한 것은 圓悟古佛의 正眼이다. 그러니 寤寐恒一
의 深深處에 到達하였어도 公案을 未透한 것이니, 一層 憤發하여 所參公案
을 洞然究明하여야 大死大活하여 大休歇 大解脫의 究竟無心을 徹證할 것이
다. 그리하여 任運自在한 保任履踐이 發足되나니, 이는 頓證圓證後에 一悟
永悟하여 盡劫不昧하는 金剛大定의 不思議境이다.
그러니 客塵煩惱가 如前無數한 有妄有漏의 解悟를 頓悟라 見性이라 하여
漸除妄念하는 生滅幻夢을 保任이라 長養이라 함은, 認賊爲子하고 抱薪救火
하는 一大錯誤이어서 古人은 이를 狂解魔衆이라고 痛罵하였으니 참으로
邪顯正하는 大慈悲이다.
大慧가 前後際斷한 寤寐一如處에서 忽然朗悟하였어도, 圓悟는 恐爾透公案
不得이라 하여 深玄한 公案으로 累次 試驗 然後에 臨濟正宗을 付授한 것이
다. 그러니 豁然漏盡하여 無念無心하고 常寂常照하여 圓證見性한 大圓鏡智
를 성취하기 이전에는, 公案參究의 透關一路뿐이니 이것이 圓證見性하는 捷
徑이며 正路이다. 만약 이에 違背되면 逐出과 失格의 慘劇을 면치못하는 것
이니 疥瘙野干으로 千秋에 遺恨하지 말고 頂門正眼으로 萬世의 師表가 되어
야 한다.
十七, 正眼宗師
馬大師下에 有八十八人이 坐道場하되 得馬師正眼者는 止三兩人이니 廬山和尙
이 是其一人이니라 夫出家人은 須知有從上來事分이니 且如四祖下牛頭融大師가
橫說竪說하야도 猶未知向上關려子니 有此眼腦하야사 方辨得邪正이니라(黃檗運
傳燈錄 九)
馬大師의 法下에 八十八人이 出世하야 道場에서 敎化하지마는, 馬師의 正眼
을 證得한 者는 三兩人뿐이니 廬山和尙이 其中에 一人이다. 大抵 出家學道人
은 從上來의 本分事가 있음을 明知하여야 한다. 四祖下의 牛頭山 法融大師가
佛法을 橫說竪說하지마는 究竟處인 向上關려子는 모르니, 이것을 明見하는 眼
腦가 있어야 비로소 邪와 正을 分辨할 수 있다.
* 自古로 宗門中에서 法弟子가 많기로는 馬祖가 第一이라 한다. 八十餘人의
法子가 天下에 蟠居하여 佛法을 宣揚하였으니 참으로 稀有한 盛事이다. 그
러나 正眼宗師는 數三人뿐이었으니 正眼은 참으로 極難한 것이다. 黃檗과
같이 이렇게 邪正과 深淺을 分明히 揀擇할 수 있는 超群正眼을 傳持하여서
만 비로소 宗門種草이니 勉之勉之하여야 한다.
靈源淸이 常謂學者曰 宗門正人難得이니 自離晦堂以後로 所見眞正宗師는 唯東
山法兄一人而已로다(雪堂 拾遺錄)
靈源淸이 항상 學道者에게 말하였다. 宗門에 正眼人을 얻기가 甚難하니 晦
堂先師를 離別한 후로부터 相見한 眞正宗師는 唯獨 東山法兄(五祖法演)一人뿐
이다.
* 靈源은 黃龍의 嫡孫이요 東山은 楊岐의 正脈이다. 聖人이라야 能知聖人格
으로 東山의 正眼을 鑑別할 수 있는 靈源 또한 正眼宗師이다.
佛眼이 謂靈源曰 比見都下一尊宿하니 語句似有緣이로다 靈源曰 演公은 天下
第一等宗師어늘 何故로 捨而事遠遊오 所謂有緣者는 蓋知解之師라 與公初心
相應이니라(續傳燈錄 二十五)
佛眼이 靈源에게 말하였다. 都下의 一尊宿을 參見하니 그 言句가 나에게 因
緣이 있는 것 같다. 靈源이 말하기를 演公(五祖法演)은 天下第一等의 宗師이
어늘 何故로 捨離하고 遠遊하는고. 所謂 因緣이 있다는 者는 대개가 知解邪師
로서 公의 初心에 相應함이니라.
* 百丈은 大菩薩들을 不作不依住知解라고 하였다. 自在位인 第八賴耶界의
無分別智도 知解여서 正眼이 아니니 其餘는 不問可知이다. 佛眼이 靈源의
指示에 따라 五祖에 歸還하여 正悟嗣法하였다.
大慧고云 老南會下尊宿을 五祖는 只肯晦堂과 歸宗二老而已요 自餘는 皆不肯他
也니라(宗門武庫 上)
大慧宗고가 말했다. 黃龍南會下의 尊宿들을 五祖演은 다만 晦堂과 歸宗(眞
淨) 二人만 肯定할 뿐이요 그밖에는 모두 肯定하지 않았다.
* 黃龍下의 晦堂과 歸宗은 宗門의 千里馬이다.
大慧고가 謂敎忠光曰 今諸方이 浩浩說禪하되 其楊岐正傳은 三四人而已니라(續
傳燈錄 三十二)
大慧가 敎忠에게 말했다. 只今 諸方에서 浩浩히 禪法을 廣說하지마는 그 楊
岐의 正傳은 三四人뿐이다.
* 出世說法한다고 全部가 正眼宗師는 아니니, 金沙混雜은 今古同然할 뿐 아
니라 眞金은 實로 稀貴하다. 敎忠이 楊岐正傳은 三四人뿐이라 함을 듣고 忿
怒하였으나 결국 回心하여 大慧에게 得道嗣法하였다.
應菴華가 住歸宗日에 大慧在梅楊이러니 有僧이 傳師垂示語句어늘 慧見之하고
極口稱歎하야 後以偈寄曰 坐斷金輪第一峯하니 千妖百怪盡潛 이라 年來에 又
得眞消息하니 報道楊岐正
脈通이로다하야 其歸重이 如此니라(續傳燈錄 三 十一)
應菴華가 歸宗에 出世하였을 때에 大慧는 梅楊에 있었다. 一僧이 應菴의 垂
示語句를 傳하니 大慧가 極口稱歎하였다. 後日에 偈頌을 보내되 [金輪의 第一
峯을 坐斷하니, 千妖百怪가 全部 跡을 潛匿했다. 年來에 또한 眞消息을 得
聞하니, 楊岐의 正脈에 通達했음을 報道하더라]고 하니 그 貴重함이 如此하니
라.
* 應菴은 虎丘의 嫡子며 大慧의 法姪이다. 宋·元·明·淸을 通하여 臨濟直
傳인 楊岐正脈은 應菴法孫이 維持하였으니, 大慧의 讚歎이 偶然 아님을 可
히 알 수 있다. [차라리 全身을 粉碎하여 地獄에 陷入할지언정 佛法으로써
人情을 팔지 않겠다(寧可碎身入地獄이언정 不以佛法當人情이라)]고 말한 大
慧의 眞面目이 약동한다.
黃龍南이 初參慈明하야 聞其貶剝諸方하되 而件件數以爲邪解者가 皆늑潭密付旨
決일새 氣 索而歸하니라(續傳燈錄 七)
黃龍南이 처음으로 慈明에게 往參하여 그 諸方을 貶剝함을 들으매, 件件이
邪解라고 排斥하는 것이 擧皆 늑潭이 密付한 旨訣이므로 氣索하여 歸還하니
라.
* 黃龍南은 臨濟宗黃龍派의 開祖이다. 慈明에게 往參已前에 늑潭澄의 印可
를 받고 得道를 自負하여 說法接人하여 그 高名이 諸方에 振動하였다. 그
後 雲峯悅이 늑潭을 否定함에 大怒하여 木枕으로 亂打하였으나, 然 改心
하고 豁然正悟하여 臨濟正傳이 되니 學道者의 百世龜鑑이다.
圓悟謂大慧고曰 能有幾箇하야 得到爾田地오 舊時에 只有璟上座하야 與爾一般
이러니 却已死了也로다(續傳燈錄 二十七)
圓悟가 大慧에게 말했다. 能히 몇 사람이나 그대의 田地에 到達하였는고.
예전에 다못 璟上座가 있어서 그대와 同一하더니 벌써 死去하였다.
* 大慧가 二十年間이나 假知識에게 誤導되어 邪路에서 彷徨하다가, 多幸히
圓悟 같은 正眼을 만나서 一念不生 前後際斷處에 頓入하여 一念不生의 勝妙
境界에서 豁然大悟하니 圓悟가 이와 같이 稱揚한 것이다.
前後際斷處만 하여도 五祖演이 諸方 如今에 能有幾箇得到這田地오 하였거
늘, 前後際斷處를 超過한 究竟無心地는 難中難事인 것이다. 그러나 一念不
生의 大死地에서 豁然大活하지 않으면 宗門正眼이 아니니, 努力하고 더욱
努力하여 究竟正覺을 성취하여야만 佛祖의 慧命을 계승하는 것이다.
先聖이 云 寧可破戒를 如須彌山이언정 不可被邪師의 薰一邪念하야 如芥子許도
在情識中이니 如油入麵하야 永不可出이니라(大慧書 上)
先聖이 말했다. 차라리 破戒하기를 須彌山같이 할지언정, 邪師에게 邪念으
로 薰習되어 芥子만큼이라도 情識中에 侵入하여서는 아니된다. 食油가 麵中에
混入됨과 같아서 영원히 出離하지 못한다.
* 惡知邪見의 被害가 如斯히 可恐하다. 邪師에 逢著하여 邪路에 引導되면
이것이 痼疾化하여, 설사 正師를 相面하여도 邪見에 障蔽되어 正路를 分辨
치 못하며, 邪見을 永永 포기하지 못하고 결국은 邪魔外道가 되고 마는 것
이다. 宗門正眼은 이와 같이 極難하지마는 五家七宗의 正脈相傳으로써 究竟
無心의 極深玄處를 證得하지 않고서 宗師를 自處한 者는 全無하다. 그러니
寤寐一如하여 內外明徹하며 無心無念하고 常寂常照한 明暗雙雙의 大休歇地
즉 無上大涅槃을 實證하여야만 少林正傳이다.
十八, 玄要正偏
問 如何是臨濟下事오 師云 五逆이 聞雷니라 如何是雲門下事오 云 紅旗閃삭이
니라 如何是曹洞下事오 云 馳書不到家니라 如何是위仰下事오 云 斷碑橫古路니
라 僧이 禮拜어늘 師云何不問法眼下事오 僧이 云 留與和尙이니다 師云 巡人이
犯夜니라하고 乃云 會則事同一家요 不會則萬別千差로다(法演錄 上)
若是 石頭馬師와 百丈黃檗과 臨濟雲門과 玄沙岩頭와 法眼위仰曹洞之流는 皆是
向上宗師니라(圓悟錄 九)
不問雲門下 臨濟下하며 曹洞下 法眼下 위仰下하고 大法을 若未明하면 各宗其
宗하고 各師其師니라(大慧錄 十五)
山僧이 在衆日에 위仰曹洞과 雲門法眼下에 都去做工夫來하고 臨濟下則故是니
後來에 方
知道하되 悟則事同一家요 不悟則萬別千差니라(大慧錄 十八)
묻기를, 어떤 것이 臨濟下의 法事오. 師가 답하되, 五逆이 雷聲을 聞하느니
라.
어떤 것이 雲門下의 法事오. 답하되 紅旗가 閃삭하도다.
어떤 것이 曹洞下의 法事오. 답하되 馳書에 到家치 못하니라.
어떤 것이 위仰下의 法事오. 답하되 斷碑가 古路에 橫身하니라.
僧이 禮拜하거늘 師云 무슨 일로 法眼下事를 묻지 않는고. 僧云 殘留하여
和尙께 드립니다. 師云 巡人이 犯夜하니라 하고 이에 말하되, 會悟하면 法事
가 一家와 同一하고 會悟치 못하면 萬別과 千差로다.
이와 같이 石頭·馬師와 百丈·黃檗과 臨濟·雲門과 玄沙·岩頭와 法眼·위
仰·曹洞의 等流는 全部 向上宗師니라.
雲門下와 臨濟下와 曹洞下와 法眼下와 위仰下를 不問하고, 大法을 明徹치
못하면 各各 그 宗을 宗崇하고 各各 그 師를 師仰하느니라.
山僧이 大衆에 있을 때에 위仰曹洞과 雲門法眼의 會下에서 두루 工夫하고
臨濟下에는 未參하였더니, 後來에 廓徹하여 會悟하면 法事가 一家와 同一하고
會悟치 못하면 萬別千差라 함을 明知하니라.
* 法演·圓悟·大慧 三代는 臨濟中興의 超群正眼들이다. 臨濟·雲門·曹洞
·위仰·法眼 等의 五家宗師가 全部 馬祖·百丈과 같은 向上大祖師이어서
五宗家風이 同等하거늘, 만약에 優劣과 深淺을 云謂한다면 이는 大法에 未
明함이라고 斷言하였다. 그러니 大法에 明徹하여 事同一家한 古人田地에 到
達하여야 五家宗師와 五宗家風을 正見한다.
隨處作主하고 遇緣卽宗하야 展臨濟三玄戈甲하고 會曹洞五位君臣하야 敲唱
雙行하며 殺活自在로다(應菴錄 六)
禪禪이여 曹洞五位와 臨濟三玄이로다(應菴錄 六)
以拂子로 擊一下하고 三玄三要로다 又擊一下하고 五位君臣이로다 又擊一下하
고 一鏃破三關하니
分明箭後路로다 又擊一下하고 三界唯心이요 萬法唯識
이로다 又擊一下하고 線去線來하야 明暗이 相投로다하니라(雪岩錄 二)
處所를 따라 主宰를 짓고 因緣을 만나 宗風을 세워 臨濟의 三玄戈甲을 展開
하고, 曹洞의 五位君臣을 會合하여 敲唱이 雙行하여 殺活이 自在하도다.
禪禪이여, 曹洞의 五位와 臨濟의 三玄이로다.
拂子로써 法床을 一擊하고 말하되 臨濟의 三玄三要로다. 또 一擊하고 曹洞
의 五位君臣이로다. 또 一擊하고 雲門의 一鏃으로 三關을 破碎하니 分明한 箭
後路로다. 또 一擊하고 法眼의 三界唯心이요 萬法唯識이로다. 또 一擊하고 위
仰의 線去하고 線來하여 明暗이 相投로다 하니라.
* 臨濟正傳인 應菴과 雪岩도 五宗에 優劣과 深淺이 全無함을 明示하였으니
正眼宗師에게는 二見이 있을 수 없다.
五家者는 乃五家其人이요 非五家其道也니라 如위仰之謹嚴과 曹洞之細密과 臨
濟之痛快
와 雲門之高古와 法眼之簡明은 各出其天性而父子之間에 不失故步하여 語言機
境이 似相踏習은 要皆不期然而然也라 今之禪流가 泥乎宗旨而起夾截虛空之妄見
하야 互相長短하니 余知五家之師가 於大寂定中에 莫不掩鼻矣로다(中峯錄 十一
之上)
五家라 함은 其人이 五家各異함이요 其道가 五家各異함이 아니다. 위仰의
謹嚴과 曹洞의 細密과 臨濟의 痛快와 雲門의 高古와 法眼의 簡明함은 各各 그
天性에서 나왔으니, 父子間에 故步를 不失하여 語言과 機境이 相互踏習함과
相似함은 要컨대 期必치 않은 當然이다. 只今의 禪流들이 各 宗旨에 泥蔽되
어 虛空을 夾截하는 妄見을 起하여 長短을 相互 云謂하니, 五宗의 祖師들이
大寂定中에서 掩鼻치 않을 수 없음을 余는 明知하는도다.
* 五家의 優劣長短을 妄論함은 大法을 未明한 할眼群盲들의 古今通病이다.
그러므로 正眼宗師들은 이를 痛歎 深誡하였으니, 中峯의 法嗣인 天如도 그
의 宗乘要義(天如錄 九)에서 五宗의 優劣深淺을 妄論함은 錯中之錯이라고
詳駁하였다.
一句中에 有三玄三要하야 賓主歷然하면 平生事辦이요 參尋事畢이니 所以로 永
嘉云 粉骨碎身未足酬니 一句了然超百億이라하니라(汾陽錄 上)
三玄三要事難分이여 得意忘言道易親이라 一句明明該萬象하니 重陽九月에 菊花
新이로다(汾陽錄 上)
報汝通玄士하노니 棒喝을 要臨時니라 若明親的旨면 半夜에 太陽暉로다(慈明錄
三玄三要都頌)
臨濟下에 有三玄三要하야 凡一句中에 須具三玄하고 一玄門에 須具三要니라(碧
岩錄 三十八則)
一句中에 具三玄門하고 一玄門에 具三要路니라(大慧錄 八)
豁開三玄三要路하니 坐斷須彌第一峯이로다(大慧錄 九)
一句中에 必須히 三玄門을 具備하고 一玄門에 必須히 三要를 具備할지니라.
一句中에 三玄三要가 具有하여 賓主가 歷然하면 平生事를 了辦하고 參尋事
를 終畢하나니, 그러므로 永嘉가 이르되 粉骨碎身하여도 未足酬니 一句가 了
然히 百億을 초월한다고 하니라.
三玄三要의 事理를 分別하기 極難함이여, 意旨를 悟得하고 語言을 忘却하면
大道에 親合하기 容易하니라. 一句가 明明히 萬象을 總該하니 重陽九月에 菊
花가 新하도다.
汝等의 通玄한 高士들에게 報告하노니 棒喝을 臨時하여 要用할지니라. 만약
에 親的한 深旨를 明得하면 半夜에 太陽이 暉煌하도다.
臨濟宗下에 三玄三要가 있어서 一句中에 三玄이 必具하고 一玄中에 三要를
必具니라.
一句中에 三玄門이 具足하고 一玄門에 三要路가 具備하니라.
三玄三要의 大路를 豁開하니 須彌의 第一峯을 坐斷하도다.
* 三玄三要는 臨濟宗風인 大機大用의 骨髓여서, 垂示語句中에 三玄三要가
具備하지 않으면 正眼宗師가 아니다. 往往에 할眼衲僧이 一句中에 具三玄하
고 一玄中에 具三要한 이 全機大用을 혹은 悟入次第로, 혹은 法門深淺으로
錯認 하는 바 있으니 可悲可痛이다.
僧問五祖하되 如何是佛고 祖云露胸跣足이니라 如何是法고 云 大赦不放이니라
如何是僧고 云 釣漁船上謝三郞이라하니 此三轉語에 一轉이 具三玄三要와 四料
簡四賓主와 洞山五位와 雲門三句니라(大慧錄 八)
濟北之道는 出乎常情하야 語默動靜에 脫體全彰하니 三玄三要는 松直棘曲이요
四賓四主는 鳧短鶴長이니라(雪岩錄 一)
當知遮一句子는 便是金剛圈이며 栗棘蓬이니 一句中에 具三玄하고 一玄中에 具
三要니라 狗子還有佛性也無아 只遮無字는 是三玄三要之戈甲이요 四賓四主之喉
衿이니라(雪岩錄 四)
僧이 五祖法演에게 묻기를 如何是佛고. 祖云 露胸하고 跣足이니라. 如何是
法고 祖云 大赦하되 不放이니라. 如何是僧고. 祖云 釣漁船上의 謝三郞이니라
하니, 此三轉語가 一轉語마다 各各 三玄三要와 四料簡과 四賓主와 洞山五位와
雲門三句를 俱備하니라.
濟北의 道는 常情을 超出하여 語默動靜에 脫體全彰하니, 三玄三要는 松直棘
曲이요. 四賓四主는 鳧短鶴長이니라.
當知하라, 遮一句子는 문득 이 金剛圈이며 栗棘蓬이니 一句中에 三玄을 具
備하고 一玄中에 三要가 具足하니라. 狗子가 佛性이 있는가 없는가. 다못 이
無字는 三玄三要의 戈甲이요 四賓四主의 喉衿이니라.
* 어느 宗派를 막론하고 正眼宗師의 垂示語句는 臨濟의 三玄뿐 아니라, 洞
山의 五位와 雲門의 三句를 圓滿具備하였으니 참으로 一句了然超百億이며
坐斷須彌第一峯이다.
先師本意는 不爲明功進修之位와 兼涉敎句요 直是格外玄談이라 要絶妙旨니라
(曹山 五位顯訣)
洞山下는 五位回互하야 正偏接人하니 不妨奇特이라 到這向上境界하야사 方能
如此로다 洞山이 道하되 何不向無寒署處去오하니 此是 偏中正이요 僧云 如何
是無寒署處오 山云 寒時엔 寒
殺도梨하고 熱時엔 熱殺도梨라하니 此是 正
中偏이나 雖正却偏하고 雖偏却正이니 浮山遠錄公이 以此公案으로 爲五位之格
이니라(碧岩錄 四十三)
正中偏 偏中正과 正中來와 兼中至 兼中到는 只是一位니 一位中에 藏五位니라
(雪岩錄 三)
雲門은 尋常一句中에 須具三句하니 謂函盖乾坤句며 隨波逐浪句요 截斷衆流句
니 放去收來하야 不妨奇特이니라(碧岩錄 五十則)
先師의 本意는 功勳을 밝혀 進修하는 位次와 敎句를 兼涉함을 위함이 아니
요, 直是 格外의 玄談이라 要絶한 妙旨니라.
洞山下는 五位가 回互하여 正偏으로 接人하니 참으로 奇特하니라. 這向上境
界에 도달하여야 비로소 能히 如此하도다. 洞山이 이르되 어찌 寒署가 없는
곳을 向하여 가지 않는고 하니 이는 偏中正이요, 僧이 이르되 어떤 것이 無寒
署處오. 山이 云 寒時에는 도梨를 寒冷케 하고 熱時에는 도梨를 熱炎케 한다
하니, 이는 正中偏이라 雖正이나 却偏하고 雖偏이나 却正하나니 浮山遠錄公이
이 公案으로써 五位의 標格으로 삼았느니라.
正中偏 偏中正과 正中來와 兼中至 兼中到의 五位는 只是一位니 一位中에 各
各 五位를 具藏하니라.
雲門은 尋常 一句中에 必須히 三句를 具備하니 乾坤을 函盖하는 句요, 隨波
하며 逐浪하는 句요, 衆流를 截斷하는 句니 放去하며 收來하여 實로 奇特하니
라.
* 臨濟의 三玄三要만 一句中에 具備할 뿐 아니라, 洞山의 五位도 一位中에
具足하고 雲門의 三句도 一句中에 具有하여, 正眼宗師의 機用은 殺活從奪과
明暗收放이 無碍自在하니 佛祖命脈인 이 全機大用을 法門의 深淺이나 悟入
의 次第에 配定함은 妄中大妄이다.
三玄三要와 四料簡 四賓主와 金剛王寶劒과 踞地師子와 一喝不作一喝用과 探竿
影草와 一喝分賓主와 照用一時行의 許多絡索을 多少學家가 搏量註解하니 殊不
知我王庫內엔 無如是刀이니라 及弄將來하면 看底只是貶眼이로다 須他上流는
契證驗認에 正按旁提하야 還本分
草料어니 豈假梯媒리오(圓悟心要 上)
三玄三要와 四料簡 四賓主와 金剛王寶劒과 踞地師子와 一喝不作一喝用과 探
竿影草와 一喝分賓主와 照用一時行의 許多한 絡索을 多少學家가 搏量으로 註
解하니, 我王庫中에는 如是刀가 本無함을 不知하는지라 弄將弄來하면 看觀하
는 者가 只是貶眼하는도다. 저 超群上流는 契證하고 驗認할새 正按하고 旁提
하여 本分草料만 쓰거니 어찌 梯媒를 假借하리오.
* 三玄三要와 乃至 照用一時等의 全機大用도 眼裏撒沙요 平地落節이니, 此
等의 深玄妙法을 頓然 抛却하고 脫籠羅出 臼하여야 佛祖를 殺活하는 超宗
絶類한 正眼宗師이다.
十九, 消滅佛種
世界衆生이 雖則身心에 無殺盜淫하야 三行이 已圓하야도 若大妄語하면 卽三摩
地에 不得淸淨하야 成愛見魔하야 失如來種하나니 所謂未得謂得하며 未證言證
이니라 或求世間의 尊勝第一하야 謂前人言하되 我今已得果라하야 求彼禮懺하
며 貪其供養하나니라 是一顚迦는 銷滅佛種하되 如人이 以刀로 斷多羅木하야
佛記是人은 永殞善根이니 無復知見하야 沈三苦海하야 不成三昧하나니 若不斷
其妄語者는 如刻糞爲전檀形하야 欲求香氣하나 無有是處니라 我敎比丘하되 直
心이 道場이니 於四威儀一切行中에 尙無虛假어니 云何自稱上人法이리오 譬如
窮人이 妄號帝王하야 自取誅滅이니 況復法王을 如何妄竊이리오(楞嚴經 卷六)
世界의 衆生이 비록 身心에 殺生 偸盜 邪淫이 없어서 三行이 이미 圓滿하여
도, 만약에 大妄語를 하며는 곧 三摩地에 청정하지 못하며 愛見魔를 성취하여
如來의 聖種을 亡失하나니, 所謂 得道하지 못하고 得道하였다 하며 證悟하지
못하고 證悟하였다 함이니라. 혹은 世間의 尊勝第一을 求하여 衆人에게 말하
되, 내가 이미 道果를 證得하였다 하여 그들의 禮懺을 求하며 그 供養을 貪하
느니라. 이 一顚迦는 佛種을 銷滅하되 사람이 利刀로써 多羅木을 斷絶함과 같
아서 부처님이 이 사람은 善根을 永永히 殞亡한다고 授記하니 다시는 正見이
없어서 三途苦海에 沈淪하여 三昧를 성취 못하느니라. 만약에 그 大妄語를 斷
絶하지 못하는 者는 糞塊를 彫刻하여 전檀의 形狀을 만듬과 같아서 香氣를 求
하고자 하나 끝내 얻지 못하느니라. 내가 比丘들에게 正直한 眞心이 道場임을
가르쳤나니, 行住坐臥의 四威儀인 一切行動 가운데도 오히려 虛僞와 假作이
없어야 하거늘, 어찌 上人法을 證得하였다고 自稱하리오. 비유하건대, 貧窮한
賤人이 帝王이라고 망녕되이 號稱하여 스스로 誅滅을 取함과 같으니, 하물며
大法의 聖王을 어찌 망녕되이 竊稱하리오.
* 貪名愛利는 修道上의 第一魔障이다. 修道人이 夢幻空華인 虛名浮利를 貪
著하여 未得謂得하고 未證言證하는 大妄語罪를 범하면, 자기를 파멸하고 佛
種을 斷絶하여 佛法上의 大惡魔가 되나니 大妄語는 참으로 可恐한 것이다.
그러하니 寤寐一如하며 內外明徹하고 無念無生하며 常寂常照하는 究竟無心
을 徹證하기 이전에는 得道라 見性이라고 할 수는 절대로 없다. 만약에 名
利를 위하여 最後의 實境에 도달하지 못하고서 得道와 見性을 詐稱하여 世
人을 현혹하면 이는 佛祖의 慧命을 斷絶하여 無上正法의 영원한 反逆이 되
나니 千萬策勵하여 이러한 大妄語罪人 大愛見魔衆이 되어 파멸을 자초하여
서는 아니된다.
近代之人이 多所慢易하야 叢林에 雖入하나 懶慕參究하며 縱成留心하야도 不擇
宗匠하야 邪師過謬하야 同失指歸라 未了根塵하고 輒有邪解하야 入他魔界하야
全失正因이로다 但知急務住持하며 濫稱知識하야 且貴虛名住世어니 寧論襲惡於
身이리오 不惟聾 後人이요 抑亦凋弊風敎로다 登法王高廣之座론 寧臥鐵床이요
受純陀最後之羞로는 乍飮銅汁이어다 大須戰慄하야 無
宜自安이니 謗大乘愆 은 非小罪報니라(法眼 十規論)
近來에는 오만하고 경솔한 者가 많아서 비록 叢林에 들어오나 參究에 懶怠
하며 大道에 留心하여도 正眼宗匠을 선택하지 않아서 邪師가 잘못 敎導하여
같이 指向과 歸就를 亡失하는지라, 六根六塵도 了脫치 못하고 문득 邪解를 가
져서 魔界에 誤入하여 正因을 전부 破滅하는도다. 그리하여 다만 住持(方丈)
에만 急急하여 猥濫되이 善知識이라 詐稱하며, 또한 世上의 虛名만 貴重히 여
기거니 어찌 罪惡이 自身에 來襲함을 알리오. 이는 後人을 聾할 뿐 아니라
또한 風敎를 凋弊하는도다. 法王의 高廣寶座에 오르는 것보다 차라리 熱鐵火
床에 누울 것이요, 純陀의 최후 珍羞를 받는 것보다는 잠시 赤鎔銅汁을 마실
지어다. 크게 恐懼戰慄하여 마땅히 自安하지 말지니 大法을 비방한 허물은 些
少한 罪報가 아니니라.
* 大法眼은 그의 宗門十規論 劈頭인 未明心地妄爲人師 第一에서 이렇게 痛
切히 呵責하였으니 實로 萬古의 龜鑑이다. 虛名浮利에 兩眼이 掩蔽되어 實
悟實證치 못한 邪解惡見으로써 後學을 破滅하며 自身을 敗亡한 者는 自古로
數多하니 참으로 長歎할 바이다. 名利를 毒箭같이 避하고 鐵石信心으로 勇
猛精進하지 않으면 大道는 성취할 수 없다.
豈不見가 敎中에 道하되 未得謂得은 是增上慢이라 謗大般若니 不通懺悔니라
譬如窮人이 妄號帝王타가 自取誅滅이니 況復法王을 如何妄竊이리오 (大慧錄
十二)
어찌 보지 못하였는가. 敎中에서 말씀하셨다. 得道하지 못하고 得道하였다
함은 增上慢인지라 大般若를 비방함이니 懺悔로도 통하지 못한다. 비유하건
대 貧窮한 賤人이 帝王이라고 妄稱하다가 誅滅을 自取함과 같나니 하물며 大
法王을 어찌 妄竊하리오.
* 窮人이 帝王을 妄稱하면 自己一身만 誅滅되지마는, 得道를 假裝하여 法王
이라 詐稱하여 無數衆生을 欺瞞하여 邪路에 誤導하면 그 罪狀은 千佛이 出
世하여도 용서를 받지 못한다.
殺父殺母는 猶通懺悔어니와 謗大般若는 誠難懺悔니라(大法眼 從容錄 四)
父母를 殺害한 大逆重罪는 오히려 참회할 수 있으나, 大般若를 비방한 罪는
참으로 참회하기 極難하다.
* 得道를 詐稱하여 般若를 誹謗한 罪過는 이렇게 至重하니 地獄을 千萬번
갈지언정 得道를 詐稱하여서는 안된다.
其實參實悟之士는 不惟鮮遇於今日이요 在往昔하야도 亦未嘗多見也니라(中峯錄
十八之上)
그 如實히 參究하여 實地로 悟達한 道人은 今日에만 相逢하기 드문 것이 아
니요, 往昔에 있어서도 또한 일찌기 多數를 볼 수 없느니라.
* 實參實悟하여 究竟無心을 圓證함은 古今을 통하여 極難事이다. 그러나 後
人이 得道無窮數라 한 永嘉 證道歌의 證言과 같이 佛祖 이래로 무수한 正眼
宗師가 繼續輩出하여 正法을 天下에 宣揚하였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彼旣丈夫라 我亦已矣니 甚深한 自信으로써 勇猛精進하면 그 누구를 막론
하고 一超直入如來地하는 것이다. 참으로 但不爲也언정 非不能也니 다만 未
得謂得은 절대 禁物이다.
苟無其實則不異離形而論影하며 捨粟帛而議衣食이니 言說愈多而實效愈遠이요
心機愈密而大用이 愈乖요 攀緣愈熾而正因이 愈廢矣니라 使 棄之하면 猶有可
禦之方이어니와 或流而忘返則 不至泥犁면 不已也니라(中峯廣錄 十一下)
萬一에 實地로 悟達함이 없으면 形體를 捨離하고 影像을 論議하며 粟帛을
棄捨하고 衣食을 論議함과 差異가 없다. 그러므로 言語說明이 數多할수록 그
實效는 더욱더 遙遠하고, 心識機能이 細密할수록 그 大用은 더욱더 乖戾하며,
攀緣이 熾盛할수록 그 正因은 더욱더 荒廢된다. 早速히 이것을 버리면 오히려
防禦하는 방법이 되지마는, 혹 流去하여 돌아옴을 忘却하면 地獄에 至到하지
않고는 그치지 않는다.
* 實地로 得道하지 못하면 如何한 활동을 하여도 결국은 逆效果만 초래하고
만다. 그러니 虛妄한 名利의 奴隷가 되어서 生地獄에 떨어져 영원히 悔恨하
지 말고 오직 實參實悟하여야 한다.
未悟者는 難與言已悟之境이니 如生而盲者語以天日之淸明하면 彼雖聞而不可辨
也요 已悟者는 無復踏未悟之跡이니 如寐而覺者使其爲夢中事하나 彼雖憶而不可
追也니라 參學之士는 要當以悟爲準이니 此悟之所以爲難也라(佛印元痛諭文 中
峯雜錄 上)
悟達치 못한 者에게는 已悟한 實境을 말할 수 없으니, 비유하건대 出生부터
盲目된 者에게 晴天白日의 淸明을 말하면 그가 비록 들어도 分辨하지 못함과
같다. 悟達한 者는 未悟한 跡을 다시는 踏著하지 않으니 夢寐에서 覺惺한
者에게 그 夢中事를 再演하라 하면 그가 비록 記憶은 하되 追跡할 수 없는것
과 같다. 參學하는 高士는 당연히 悟達로써 標準을 삼을 것이니 此는 悟達함
이 甚難한 까닭이다.
* 迷한 者는 白晝에 失明한 盲者와 같고 悟한 者는 雙眼으로 靑天을 仰視함
과 같이 근본적으로 正反對의 입장에 있다. 無限한 心性의 大光明이 항상
無邊法界를 비추고 있지만 迷盲衆生은 이를 보지 못하고 暗黑을 恨歎한다.
一朝에 忽然히 大悟하여 本有의 心眼을 豁開하면 盡墨劫前부터 元來로 自身
이 此大光明을 發出함을 洞見할 것이다. 一但 이 心眼이 洞開하면 未來劫이
窮盡토록 이 大光明藏에서 遊戱自在하는 것이니 참으로 快事中의 快事이다.
그러므로 위山은 硏窮法理는 以悟爲則이라고 항상 高唱한 것이다.
以悟爲落第二頭하며 以悟爲枝葉事하나니 盖渠初發步時에 便錯了하야 亦不知是
錯하고 以悟爲建立하니라 旣自無悟門일새 亦不信有悟者하나니 遮般底를 謂之
謗大般若라 斷佛慧命하야 千佛이 出世하야도 不通懺悔니라(大慧書 下)
悟로써 第二頭에 轉落하였다 하며 悟로써 枝葉事라 하나니, 大槪 그는 始初
出發할 때에 문득 錯誤하여 또한 그 錯誤를 覺知하지 못하고 悟로써 建立이라
고 한다. 벌써 自己가 悟達치 못하였으므로 또한 悟達者가 있음을 信憑치 않
나니, 이러한 者를 大般若를 비방한다고 한다. 이는 佛陀의 慧命을 斷絶하는
것이므로 千佛이 出世하여도 참회하지 못한다.
* 眞如本性을 正覺 또는 大悟하면 佛陀 祖師라 하나니 이 悟門은 佛敎의 생
명이다. 만약에 이 悟門을 부정하면 佛敎를 파멸하는 최대 過誤가 되므로
千萬 佛陀의 大慈悲로써도 영원히 구제하지 못한다.
心佛及衆生이 是三無差別이라 한 華嚴經文과 一切衆生이 皆證圓覺이라고 한
圓覺經文等을 誤解하여, 衆生이 本來是佛이니 다시 正覺을 要求함은 頭上에
案頭라 하는 邪知惡見에 陷落하여 悟門을 否定排擊하면 이는 斷佛慧命의 惡
魔이다.
華嚴·圓覺等의 一乘妙典은 金剛大定의 普光三昧에서 法界를 觀照한 佛智
의 顯現이니 오직 大圓覺의 究竟無心을 圓證하여야만 相應하는 것이요, 迷
盲衆生이 生滅分別로써 妄意憶測하면 이는 自殺行爲를 면치 못한다. 그리고
古人은 萬古長江水로도 惡名은 洗不得이라고 痛歎하였다.
또한 生我名者는 殺我身이라고 深責하였으니 名聞利養을 蛇蝎과 같이 멀리
피하지 않으면 大道는 성취할 수 없으며 阿鼻의 殘滓를 면치못한다. 그러므
로 萬乘의 尊貴도 蔽履같이 唾棄하고 襤縷와 乞食으로써 平生을 莊嚴한 釋
尊의 勝을 追隨하지 않으면 發心修道할 수 없다. 만약 名利에 현혹되어
未證言證의 大妄語를 범하면 이는 佛法萬代의 怨賊이니 眞正한 修道人은 猛
然히 覺惺하여야 한다.
噫라, 貪他一粒米하야 失却萬劫糧하니 豈不哀哉리오.
오직 公案을 力參하여 豁然徹悟하여 大死大活 常寂常照하는 大涅槃인 眞無
心을 親證하여 참다운 見性達道人이 되어야 한다.
圓悟出蜀하야 謁大위喆과 黃龍心하니 僉爲法器 而晦堂은 稱他日에 臨濟一脈이
屬于子矣라하니라 最後에 見五祖演하야 盡其機用하되 祖皆不諾이어늘 出不遜
語하고 忿然而去하니 祖曰 待爾著一頓熱病打時에 方思量我在라하니라 到金山
하야 染傷寒困極하야 以平日見處로 試之하니
無得力者라 追繹五祖之語하고 乃自誓曰 我病이 稍間하면 卽歸五祖하리라 病
尋歸하니 祖一見而喜하야 令卽參堂하니라(續傳燈錄 二十五 其他)
圓悟가 西蜀을 출발하여 大위喆과 黃龍心을 謁見하니 다 法器라 하고, 晦堂
은 후일에 臨濟의 一脈이 그대에게 달렸다고 하니라. 최후에 五祖演을 親見하
여 그 機用을 다하되 五祖가 허락하지 않거늘 不遜한 말을 하고 忿然히 離去
하니, 祖가 말하기를 그대가 심한 熱病을 앓게 되면 그때에야 나를 생각하리
라 하니라. 金山에 이르러 과연 傷寒으로 극히 위독하여 平日에 誇示하던 工
夫로써 試驗하니 아무 힘도 없는지라 五祖의 말을 추억하고, 나의 病苦가 조
금 치유되면 즉시 五祖에 歸還하겠다고 맹서하니라. 그리하여 病이 쾌차하여
歸還하니 五祖가 一見大喜하여 參禪케 하니라.
* 曠劫生死를 超脫하는 解脫路上에는 추호도 虛假가 없어서 實地道力이 華
嚴七地인 夢中一如가 되어야 如何히 極甚한 病苦에도 變動이 없이 一如하고
熟眠一如하면 生死에도 一如한 것이다. 그러므로 夢中一如도 못되는 知見解
會로서는 아무리 超佛越祖하는 豪言壯談을 如甁注水같이 하여도 涅槃堂裏에
서 衆苦가 熾然할 때에는 전부 氷消瓦解되어 一分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이는 古今을 통한 修道人의 根本 病痛이니 설사 夢中一如하여 病中에 一如
하여도 熟眠에 一如하지 못하면 曠世의 知識과 懸河의 雄辯도 生死岸頭에서
는 風前燈火로 前途가 暗黑할 뿐이다. 그 뿐만 아니라 夢中一如도 안되는
邪知惡解로써 一時의 虛幻한 名利를 貪하여 衆生을 현혹하면 이는 自誤誤人
하여 銷滅佛種하는 一大魔群이므로 宗門正傳들은 이를 極力排除한 것이다.
그러나 이 過誤를 然히 自覺하여 邪知惡解를 斷然 抛棄하고 回心精進하면
永劫不昧하여 自在無碍하는 佛祖의 不思議解脫道를 성취할 수 있다. 圓悟와
같은 拔群의 大根器로서도 五祖가 그 病痛을 點破是正하여 주지 않았으면
결국은 茫茫業海의 邪見衆生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圓悟는 五祖의 엄중
한 鉗鎚下에 大道를 완성하여 臨濟嫡傳의 正眼宗師로서 佛法의 棟樑이 되었
으니 참으로 修道上의 標準이다. 그리고 또한 夢中一如後 熟眠에도 一如하
면 分段生死는 超脫하여 生死에 昧却하지는 않으나 아직 阿梨耶位인 自在菩
薩의 變易生死中에 있어서 宗門에서는 이를 第八魔界로 呵斥하는 바 大法은
未夢見在이니 熟眠一如에서 豁然大徹하여 梨耶의 根本無明을 단절하여야 見
性達道人이다.
透頂透底하야 明證佛性하면 長時無間하야 一得永得이니라(圓悟心要)
一得永得하면 無有變異하나니 乃謂之見性成佛이니라(圓悟心要)
生死幻永消하고 金剛正體獨露하면 一得永得하야 無有間斷이니라(圓悟心要)
一得永得하면 盡未來際하야 於無得而得하야 得亦無得이니 乃眞得也니라(圓悟
心要)
見性成佛하면 一得永得하야 據自寶藏하야 運自家珍하나니 受用이 豈有窮極이
리오(圓悟心要)
無爲無事道人의 行履는 千生萬劫토록 亦只如如니라(圓悟心要)
頂上에 通透하고 深底에 透徹하여 佛性을 分明히 확증하면 長久한 時日에도
間斷이 없어서 一次 透得하면 영원히 自得하느니라.
一得永得하면 變動과 異遷이 없나니 見性成佛이라 하느니라.
生死의 幻 가 영원히 소멸되고 金剛正體가 唯獨히 現露하면 一得永得하여
間斷이 없느니라.
一得永得하면 未來際를 窮盡하여 所得이 없이 自得하여 自得도 또한 取得하
지 못하나니 이것이 眞得이니라.
見性成佛하면 一得永得하여 自家의 寶藏에 依據하여 自己의 家珍을 運用하
나니 그 受用이 어찌 窮極이 있으리오.
無爲無事한 道人의 行履는 千生萬劫토록 또한 如如할 뿐이니라.
* 熟眠一如에서 廓徹大悟하여 自己本性을 洞然正見하면 卽是成佛이어서 解
脫深坑을 跳出하고 毘盧頂녕을 踏破하여 一得永得하여 未來劫이 다하도록
無碍自在하여 毫末의 間斷과 變異가 없어 如如도 또한 不立하나니 豈不妙哉
리오. 實로 寤寐一如하고 內外明徹하며 無心無念하고 常寂常照하여 獨尊無
比의 大法王으로서 千秋萬世에 佛祖의 師表가 되나니 出格大丈夫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究竟深玄處를 未證言證하고 未得謂得하면 妄竊法王
하고 銷滅佛種하는 그 過患은 千佛이 出興하여도 懺悔無路이니, 古人이 말
하기를 知而故犯하면 生陷地獄이라 하였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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