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유(中有)를 성취하는 과정
다음으로 중유(中有 -파르도)의 몸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설명하겠다.
윤회의 주체인 마음(心)은 위에서 언급한 그러한 "죽음의 광명"에서 어느 일정기간을 움직이지 않고 머문 다음, 어느 정도 지나면 떨면서 조금씩 흔들림과 동시에 마음의 광명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 때, 가슴에 있는 흰 공기그릇과 붉은 공기그릇을 합친 물방울 형태(滴 : 티그리)의 알맹이(粒狀)의 입구가 열리고 그 가운데에서 아주 미세한 풍과 마음이 밖으로 나온다.
그 때에 즈음하여, 육체(시체)는 버려지고 중유의 몸이 형성된다. 이와 동시에 가슴에 있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흰 정액은 아래로 내려가서 성기(性器)의 끝으로, 또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붉은 정액은 상승하여 콧구멍으로 각각 밖으로 나간다.
또한 , "죽음의 광명"의 이동 수단인 옥색의 광채를 가진 풍은 중유의 몸을 구성하는 질료인(質料因 -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중유의 마음(을 형성하는)의 공동연(共尘緣- 보조적인 원인)이 된다. 또 이와는 역(逆)으로, "죽음의 광명"의 마음은 중유의 몸을 구성하는 共尘緣이 되고 중유의 마음의 質料因이 되어 어딘가에 태어날 인간의 모습을 가진 중유의 풍과는 별도로 분리됨으로써 실제로 성취되는 것이다. 이 때, "顯明", "增輝", "近得"등이 "죽음의 장"에서 설명한 순서의 역순(逆順)으로 "암흑에 가까운 마음"이 나타나고, 그것과 동시에 "죽음의 광명"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중유가 성취된다.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 阿毘達磨集論)", "구사론(俱舍論)", "오부지론(五部地論)"등의 많은 문헌에도 "죽음의 광명"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과 중유가 되는 이 두 가지는 저울의 양단의 고저처럼 동시에 이루어진다고 쓰여져 있다. 중유는 화생(化生)이기 때문에 지분(支分 - 손발), 분지(分枝 - 손가락, 손톱)등 모든 근(根)이 동시에 생겨난다. 따라서, 중유가 된 직후의 마음은 "역행(逆行)의 근득(近得 - 르도키네토프)"(의 순서를 따름)이라고 한다.
먼저, 역행의 "증휘"를 다음은 "현명"을, 그 다음은 "현명"에 의한 "팔십자성의 분별"이 생겨나며 , 해당 중유는 태어나는 장소와 향(香 - 새로운 환경)을 찾기 위하여 활발하게 움직이며 다닌다. 이때, 이전에 설명했던 것과는 순서가 거꾸로 되어 "近得"으로 부터 "아지랑이"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징조가 순서대로 생겨나게 된다. 살(肉),피(血),뼈(骨)등으로 이루어진 거친 몸을 버리고 풍(風)만으로 이루어진 극도로 미세한 마음과 신체를 가진 중유를 기본 수용신(受用身) 또는 식향(食香)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이러한 중유가 존재한다는 것을 비유로 들자면 다음과 같다.
지금, 우리가 잠들었을 때, 수면상태를 나타내는 네 가지 징표와 사공(四空)으로부터 죽음을 맞이했을 때와 같은 "잠(眠)의 광명"이 일순(一瞬) 나타난 순간, 그로부터 일어나려고 할 때 "꿈(夢)속의 몸(미람키르)"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잠의 광명"으로부터 일어난 후에는 "꿈속의 몸"을 성취하여(몸밖으로 이탈하여)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
그 후, 잠으로부터 깨어나기 시작할 즈음, "꿈의 風(幽體)"이 거울에 입김을 불었을 때처럼, 가장자리부터 사라져(수축되어) 가슴에 모여 오래된 온(蘊)의 중앙맥관(中央脈管)에 있는 본성(本性)을 나눌 수 없는 아주 미세한 풍에 용해된다. 이렇게 해서 잠에서 깨어나고 각종의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중유의 본성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체(一切)의 근(根)이 갖추어져있다.
둘째, 화생(化生)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支分과 分枝가 한꺼번에 형태를 갖춘다.
셋째, 미세한 몸을 가졌기 때문에 금강석으로도 깨뜨릴 수가 없다.
넷째, 자신이 태어날 어머니의 자궁 같은 태어날 장소 이외의 수미산(須彌山)등 어디라도 자유스럽게 갈 수 있다. 업에 의한 신통력으로 일순간에 어디라도 원하는 곳에 갈 수 있으며 부처님도 이것을 막지 못한다.
또한, 또한 "구사론"에는 "중생은 어떤 형태의 중유로 되었다면 , 그 이외의 다른 형태의 중생으로 바뀔 수는 없다." 라고 설명되어있다. 반면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에서는 "어떤 형태의 중유가 되더라도 그 때 다음 생(來世)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중생으로 바뀌는 수가 있다." 라고 하고있다.
그러나 아비달마(阿毘達磨)의 두 파(派)에서도 "중유의 몸은 아라한(阿羅漢)을 이룬 중선열반(中船涅槃)의 경지가 있기 때문에 중유가 반드시 내세의 생을 받아야한다는 조건이 성립한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고있다.
중유를 다른 말로는 "의성(意成)", "求生", 食香"으로 부른다고 "구사론"에 적혀있다. 중유의 수명은 최고 칠일이지만 생(生)의 연(緣)을 모은다면 중유가 되고나서 즉시 생을 받는 경우도 있으므로 반드시 결정된 것은 아니다. 만약, 칠일동안에 生 의 緣이 모이지 않는 다면 칠일마다 작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며 다시 새로운 중유가 되어 중유 상태에 머무른다. 이렇게 해서 칠 주가 경과하면 반드시 生의 緣이 갖추어져 생을 받을 수 있다고 쓰여져 있다.
"본지분(本地分)"에 쓰여져 있는 칠일마다 조그만 죽음을 맞이할 때의 상황은 거울에 입김을 불었을 때, 거울의 가장자리부터 입김이 사라지는(즐어들어가는) 것 중유의 풍이 상하에서 가슴에 모여 중유의 "팔십 자성의 분별"과 그 이동수단인 풍에 용해된다.
다음에는 중유에게 죽음의 네 가지 징후와 사공(四空)이 순간적으로 획하고 나타나서 중유의 "죽음의 광명"을 실현한다. 그리고 나서 그 광명을 실은 풍을 質料因으로 하여 역(逆)으로 일어난 "近得"을 이룸과 동시에 중유의 풍의 몸을 다시 원래처럼 이룬다. 중유의 몸에 작은 죽음이 몇 번 찾아오던지 간에 중유는 몸만 바꿔서 다시 태어난다. 그 중유가 전세의 자신의 사체를 보더라도 업과의 관계가 단절된 힘에 의해 그 쓸모 없게 된 육체를 자신의 신체로 생각하는 것과 거기에 다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라고 "本地分"에 적혀있다.
누군가가 "중유의 수명은 칠일이라고 쓴 것은 육도(六道) 각각의 하루의 길이를 중심으로 설한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는 불합리한 주장이다. 만약 그렇다면, 지구상의 사람과 천상계의 제천(諸天)에 가는 중유는 각각의 해당 육도의 시간의 단위에 맞춘 칠일동안 중유 상태로 있어야하며 이 말은 수천만 년간의 아주 긴 시간동안 생의 연이 갖추어질 때까지 중유의 상태에 있어야한다는 것을 말하므로 이는 커다란 오류를 범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생을 받을 때의 체외(體外)로의 이동에 있어서는, 지옥(地獄)에 태어나는 경우에는 항문(肛門)으로 이동하며, 아귀(餓鬼)로 태어나는 경우에는 입(口)으로부터, 축생으로 태어날 경우에는 요도(尿道)로부터 , 사람(人間)으로 태어나는 경우에는 눈(眼)으로부터, 욕천(欲天)에 태어나는 경우에는 배꼽(臍)으로부터, 야차(夜叉)로 태어날 때에는 코(鼻)로부터, 또한, 하늘(天上界)이나 인비인(人非人)으로 태어날 경우에는 귀(耳)로, 색계(色界)에 태어날 경우에는 미간(眉間)으로부터, 무색계(無色界)에 태어나는 경우에는 머리꼭대기(頭頂)에서 라고 "산프타 탄트라"의 제 8 장에 적혀 있다.
그러면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등에 "(옛날의) 몸을 버릴 때 가슴으로부터 의식이 이동한다"라고 라는 설명이 모순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신체내부에서 의식이 이동하는 경우에는 최초에는 가슴으로부터 이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체의 외부로 이동하는 경우에는 여럿 곳으로부터 체외로 나간다고 설명되어있다. 또한 "俱舍論"에서는 "돌연사(突然死)가 아닌 서서히 죽어 가는 경우에는 배꼽에서 가슴으로 마음이 죽음을 향해 이동한다"라고 한 것과 또한 "구사론석(俱舍論釋)에서는 "악취(惡趣)로 태어나는 경우에는 발에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경우에는 배꼽에서, 하늘에 태어나는 경우와 아라한이 죽는 경우에는 가슴에서부터 의식이 쇠약해져간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하면, 그것은 그 해당 장소에서 의식이 쇠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발(足) 등의 장소에서 신근(身根)의 감각이 쇠약해짐으로서 그 의식이 없어지는 상황을 그냥 그렇게 표현한 것뿐이다. 이 말은 그러한 해당되는 곳에서 의식이 몸밖으로 나가는 상황을 나타낸 것이 아니므로 전에 설명한 것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중유가 사물을 보는 방법을 보면, 먼저 중유는 같은 수준(同類)의 중유들을 볼 수가 있다. 또한 청정한 천안(天眼)으로도 중유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고 "구사론"에 적혀있으며 태어나면서부터 지닌 천안을 "不淨한 天眼", 수련의 힘에 의해 얻은 천안을 "淸淨한 天眼" 이라고 한다. 또 수준이 높은 중유가 수준이 낮은 중유를 볼 수 있다고 "俱舍論釋" 에 적혀있다.
중유의 크기는 "염부제 인간의 중유의 몸은 5-6세 정도의 아동 만하다"라고 "구사론석(俱舍論釋)"에 설명 되어있지만 일률적으로 크기가 모두 그렇다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중유의 상(相)의 특징을 보면 악취(惡趣)의 중유는 검은 천을 펼친 듯한 것 또는 깜깜한 밤의 어둠이 가득한 모양이라고 되어있다. 또한 선취(善趣)의 중유는 흰 모직물을 펼친 듯한 것 또는 달빛이 가득한 듯한 느낌을 준다고 "本地分" 에 적혀있다.
색깔상의 특징을 보면, 지옥의 중유는 그루터기를 불에 그을린 듯하며, 아귀의 중유는 물의, 생의 중유는 연기의, 욕계의 천인의 중유는 금색의, 색계의 중유는 흰색 등을 띄고 있다"라고 "선환희(善歡喜)가 자궁(子宮)에 이르는 경(經)" 에 설명되어 있다.
또한 모습상의 특징을 보면, 태어날 유정(有情)의 本有(本有 - 곤토와키스파)의 형태를 띄고 있다고 "俱舍論"에 적혀있다. 생유(生有 - 키에시)는 사유(死有 - 쉬파시)의 수태의 제 일 순간을 말하며 生有와 제 이 순간에 의해 死有로 될 때까지의 有를 本有라고 한다. 또한, 죽음의 최후의 순간, 또는 "죽음의 광명"을 경험할 때까지의 有를 死有, 死有와 生有의 중간에 생겨나는 것을 中有라 한다. 本有(前의 有)라는 어구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여 중유는 생전의 모습을 하고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또한 "다음 생의 모습을 한다"라고 설명된 것을 보고 사흘 반은 전세의 모습을 나머지 사흘 반은 후세의 모습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대보리도차제(大普提道次第 - 라마림)"에서 말하고있다. 그러므로 前世의 有(本有)에서의 前의 의미는 後世의 死有에 대하여 前을 의미하는 것이지 中有를 대상으로 했을 때의 前이 아니다. "俱舍論"에서의 "본유를 생기게 하는 형태를 가진 것"에서의 "생기게 하는"의 의미는 미래형의 어구이지 과거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모습을 하고있더라도 다음 생에 태어날 모습을 하고 있다"라고 설명한 것을 보고 만약 그렇다면 根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신체에 결함이 있는) 중생은 그 중유 또한 根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맞지 않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태내(胎內)에서 생겨나서부터 눈(眼)등의 근에 결함이 생겨는 것이지 중유에게 이미 根에 결함이 있다고는 어디에도 설명되어 있지 않다. 이 말은 중유가 어딘가 내세에 태어날 중생의 모습을 하고있다는 것을 설명하고자한 것이지 중유의 모습이 처음부터 정해진 상태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중유가 나아가는 방향의 특징을 보면, 하늘에 있는 중유는 위를, 인간의 중유는 정면을 惡趣의 중유는 머리를 앞으로 하여 밑으로 간다라고 "本地分"에 적혀있다. 혹 또는 욕계, 색계에 태어나는 사람은 반드시 중유의 상태를 거쳐야하므로 선한 무간(無間)의 業과 나쁜 무간(無間)의 業등 이 두 가지를 이룬 사람에게는 중유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大普提道次第"에 적혀있다. 무색계에 태어나는 자는 중유를 거치치 않으며 그 어딘가 죽었던 공간, 바로 거기에 무색계의 경지(境涯)에 존재하는 네 가지 蘊(색온 이외의 수, 상, 행, 식의 四蘊)이 성취된다.
따라서 무색계에 태어나는 자는 "죽음의 광명"에서부터 직접 무색계의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가므로, 광명으로부터 역행해서 생겨나는 "近得"의 마음이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근득"의 마음은 어디까지나 중유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무색계에는 존재하지만 욕계와 색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특별한 중유에 대하여 "최후의 생을 받고자하는 보살이 도솔천에서 이동하여 왕비의 태내로 들어가는 중유의 몸은 장엄한 상호(相好)를 갖춘 청년의 모습이며 광명에 의해 十億四州를 환하게 밝힐 자"라고 "俱舍論釋"과 "秘密集會成就法安立次第"에 적혀있다. 그러면 수보리 존자(尊者)가 석가모니께서 여섯 개의 상아를 가진 흰 코끼리의 모습으로 어머니의 태내에 들어갔다고 설명한 것과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 모순되느냐하면은 그 설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것은 단지, 왕비의 꿈과 세존의 출생이 공통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뿐, 사람으로 태어나는 중유가 축생의 상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많은 바른 비량(比量)을 갖춘 론(論)과 모순된다.
이와 같이, 부파계(部派系)의 파들은 어구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대승(大乘)파들은 가상의 모습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
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중유의 이러한 과정은 무상 유가 탄트라의 生起次第라는 중유를 수용신으로 간주하여 승화변천(昇華變遷)시키는 수도론과 구경차제라는 비유와 승의(勝義)의 광명의 이 두 가지와 이에 동반되는 청정(淸淨)과 부정(不淨)의 두 가지 幻身(환신)으로 정화시키기 위한 기본이 되기 때문에 상세히 알아두는 것이 중요하다.
중유(中有)의 장(章) - 해설부분
- 중유가 되는 과정
중유의 상태를 표현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살아서 행하는 수행 중에 중유의 체험(구경차제에서의 환신, 나로 육법에서의 환신, 포와에서의 체외이탈)과는 달리 실제로 죽음에 있어서의 중유에게는 이미 돌아갈 몸이 없기 때문이다.
"구경차제(究境次第)"의 수도자는 이러한 과정에서 "비유의 광명 ㅾ 죽음의 광명"을 계기로 하여 완전무결한 진리인 "승의(勝義)의 광명"을 체험한다. 수도자는 이윽고 그 순수한 광명 속으로 들어가 동화되는 것 같은 체험을 함으로써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인 "공성관(空性觀)"을 체득하게 된다. 부처의 공성을 체득한 수도자는 이윽고 수용신(受用身)인 "환신(幻身)"을 창조하여 다음 생의 단계에서 그 환신의 주체가 되는 "변화신(變化身)"을 출현시키게 된다.
한편, 삼차원적인 육체가 소멸하여 죽음의 단계까지(살아있는 중에)의 수행울 소홀히 하여 "공(空)"이나 "비유(譬)의 광명"의 체험을 해보지 못한 보통의 사자(死者)들은 그 습기(習氣)와 업(業) 때문에 윤회의 주체가 정화되지 못하고 "죽음의 광명"에서 일어나는 중유의 신체는 고통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 때문에 중유로 변한 윤회의 주체는 한시라도 빨리 그러한 고통스러운(이라고 말해지는) 어중간한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들어갈 만한 연(緣)이 있는 양친과 새로운 육체를 찾으려고 한다.
이 장에서는 윤회의 주체가 되는 존재가 죽음을 맞이하여 체외로 이탈한 뒤, 다음 생을 모색하며 방황을 거듭하여 최종적으로 새로운 생을 받을 때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설명함으로써 고통스러운 어중간한 중유의 상태를 극복하여 구속받지 않는 자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불멸의 티그리"로부터 빠져나와 중유가 되는 상황에 대하여
"죽음의 광명"에 머무르는 기간은 사흘이거나 칠일 또는 수초 등,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다는 것을 이미 말한 대로다. 이런 일정 기간을 보낸 다음 죽은 육체에 남아있는 근원적인 의식과 함께 있는 풍이 조금씩 떨린다. 이렇게 떨림으로 인해 그 순간 광명이 파괴되어 가슴의 중앙 맥관에 있는 "불멸의 티그리"는 흰 반구체(半球體)와 붉은 반구체를 합친 구형(球形) 의 입구가 열리고 근원(根源)적인 의식과 풍이 밖으로 나온다. 이때 낡은 육체(시체)는 버려지고 새로운 중유가 탄생한다. 이와 동시에 머리 꼭대기로부터 내려와서 "불멸의 티그리"에 용해되어있던 흰 정액이 중앙 맥관을 타고 내려가서 성기의 끝에서 밖으로 방출된다. 또한, 배꼽의 차크라로부터 올라와서 불멸의 티그리에 용해되어있던 붉은 정액은 그대로 중앙 맥관을 타고 올라가서 콧구멍을 통해 각각 밖으로 나간다. 이러한 과정이 완료되면 삼차원적인 물질적으로 낡은(죽어버린) 육체는 부패하기 시작한다.
한편, 새로이 창조된 중유의 몸은 "죽음의 광명"에서 깨어난 아주 미세한 의식이 보조연(補助緣 : 共尘緣 - 보조적인 원인)이 되고, 아주 미세한 풍이 중유의 몸을 구성하는 직접적인 원인(質料因)이 되어 태어난 의식(意識)과 풍(風)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중유의 몸은 來世에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인간의 몸을, 동물로 태어난다면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 시점에서 이미 내세에 태어날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의 광명"이 끝나는 것과 이 중유의 몸이 되는 것이 거의 동시에 완료된다.
이러한 상황을 티벳에서는 "잔잔한 수면위로 물고기가 튀어 오르듯이 갑자기 신체의 모든 부분이 갖추어지게 되는 상황이 나타난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의식상으로 볼 때, 죽을 때의 역순(逆順)으로 ⸁ 암흑에 가까운 마음 → ⸂ 새빨갛게 빛나는 마음 → ⸃ 새 하얗게 나타나는 마음의 영상이 나타나고, 최후로는 팔십 자성의 분별이 생겨난다. 그리고 내세에 태어나야할 장소와 음식물인 향(香)을 찾아서 날아다닌다. 중유를 "식향(食香)" 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중유를 잘 비유한 예로서는 수면(睡眠) 중의 "체외이탈체험(體外離脫體驗)"을 들 수 있다. 우리들이 잠들었을 때 설사 의식하지 않더라도 "아지랑이 같은 것"에서부터 "잠의 광명"에 이르는 마음속의 영상이 일순(一瞬) 나타난 순간부터 잠에 들며,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러한 "잠의 광명"으로부터 "꿈의 신체"를 일으켜 세워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고 한다. 이윽고 잠에서 깨려고 할 때에는 그 "꿈의 신체"는 거울에 입김을 불었을 때처럼,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사라져 수면상태에 있는 몸으로 돌아와서 中央脈管에 있는 아주 미세한 의식과 풍에 용해되어 잠에서 깨어난다.
"꿈의 몸"의 과정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꿈과 같으며 그 본질은 공(空)과 같다" 라는 일차원적인 견해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보다 실천적인 체외 이탈 체험에 의해 적극적으로 유사체험을 하여 더욱더 그것을 정화시켜 환신(幻身)으로 결부시켜나가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다.
중유의 특징에 관하여
중유의 특징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체(一切)의 근(根)이 갖추어져 있다.
둘째, 모친의 태내(胎內)나 알(卵)등을 근거(根據)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홀연히 태어나는 화생(化生)의 형태이기 때문에 신체의 모든 부분이 한꺼번에 형태를 갖춘다.
셋째, 미세한 몸을 가졌기 때문에 금강석으로도 깨뜨릴 수가 없다. 미세(微細)하다는 의미는 크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거친 육체처럼 피, 살 등의 형태를 가진 덩어리가 아니라 의식과 풍으로만 이루어진 신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넷째, 어머니의 자궁 같은 자신이 태어날 장소 이외의 어디라도 방해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갈 수 있다(일부 설에 의하면 이외에도 붓다가야의 보리수 밑의 금강좌金剛座에도 갈 수 없다고 전해오고 있다).
다섯째, 자연히 얻어진 신통력으로 순식간에 어디라도 원하는 곳에 갈 수 있으며 부처님도 이것을 막지 못한다(부처님도 이것을 방해할 수 없다고 한다. 예를 들면 우리들이 좋지 않은 것을 생각하여 그 결과 악업을 쌓게 되더라도 그 의식과 풍의 움직임을 정지시킬 수 없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부처라도 의식과 풍의 본성으로 하는 중유의 움직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상은 중유의 특징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으며 "구사론(俱舍論)"에서는 "중생은 누구라도 일단 중유로 된 다음에는 , 반드시 그 종류의 중유로 태어나야하며 다른 종류의 중유로 태어날 수는 없다"라고 설명되어있다. 그러나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에는 "어떤 형태의 중유가 되더라도 그것으로 來世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중생으로 바뀌는 수가 있다"라고 되어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 중에서 후자의 설을 택하고 있다. 예를 들면 來世에 지옥에 가야할 중유가 된 사자(死者)에 대해서 친족(親族)들이 정성을 다해 열심히 기도를 올린다면 그 덕(德)의 힘으로 지옥에 가지 않을 수도 있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티벳불교에서는 공양(供養)과 업(業)의 관계에 관하여 목련존자(目蓮尊者)에 관한 전해져 내려오는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하겠다.
목련존자가 신통력을 사용하여 지옥에 갔더니 외도(外道)의 교조(敎祖)가 거기서 태어나 아주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 교조는 목련존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상(地上)에서는 제자들이 자신을 깨달은 자, 윤회로부터 벗어난 자로서 취급하여 공양물을 올리거나 자신의 사체에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러나 자신은 그러한 대접을 받을 만한 덕을 전혀 갖추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할 때마다 지옥에서 받는 고통이 점점 심해진다."
그래서 목련존자에게 지상에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그러한 예배 행위를 그만둘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목련존자는 즉시 돌아가서 그 외도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전하였다.
"당신네들의 교조는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으므로 예배를 그만 두시오". 그러자 제자들은 "우리들의 신앙을 비판할 뿐 아니라 교조가 지옥에 있다고 하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놈"이라고 화를 내며 모두들 목련존자에게 뭇매를 때렸다. 뒤에 목련존자는 왜 신통력을 사용하여 그들의 폭력을 피하지 않았는가 하고 물었더니 그 물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재난을 받는 것은 전세부터의 업이므로 그 업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냥 있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중유의 수명에 관하여
중유의 수명은 최고 칠일이지만 죽고나서 바로 다음 생에 태어날곳을 발견한 중유는 그 단계에서 중유의 상태가 끝나므로 최장(最長) 칠일이라는 것이지 날짜 수가 정해진 것이 아니다. 만약, 칠일동안에 태어날 곳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칠 일째마다 작은 죽음을 맞게된다. 앞에서 친족들이 성심으로 기도하면 중유의 상태가 바뀐다라고 했듯이 친족들이 덕을 굳건히 쌓는다면 그 칠 일째의 작은 죽음으로부터 다른 중유의 신체를 받게된다.
중유의 그 작은 죽음은 거울에 입김을 불었을 때, 거울의 가장자리부터 입김이 사라지는(즐어들어가는) 것처럼 신체의 가장자리부터 수축되어 들어가 가슴의 한 점에 모이게 된다. 그 때 "아지랑이 같은 것"으로부터 "광명"에 이르기까지의 영상이 일 순간에 나타나고 또한, 태어날 때는 그 중유의 죽음의 풍(風)과 의식이 인(因)이 되어 새로운 중유의 마음이 생겨난다. 중유는 새로이 태어날 곳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작은 죽음을 반복하더라도 중유 이외의 다른 것으로 태어나는 일은 없다. 이렇게 하여 최장 칠일간 49일간 중유의 상태가 계속된다. 중유는 업이 이미 숙성(熟成)되어 연결이 끊어져 버렸기 때문에 이전의 육체를 보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육체로 생각하여 그곳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는다.
덧붙여서 이야기하면 "꿈의 신체"를 사용하여 체외이탈을 한 사람은 반드시 원래의 육체에 돌아가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판첸 라마 1세 로산 쵸겔은 원래의 몸과 미세한 몸(이 경우에는 "꿈의 몸을 말함)의 연결이 끊어져버릴 정도의 업이 아직 숙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꿈의 몸"이 된 자가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 자체가 아직 연결을 끊을만한 업이 숙성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이야기가 옆으로 약간 새는지 모르겠지만, 천상계와 인간계와는 시간의 단위의 차이가 있다고 알려져있다. 티벳에는 이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어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옛날에 무착(無着)이 미륵보살을 만나기 위해 산중에 틀어박혀 혹독한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삼 년이 지나도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아 무착은 행(行)을 포기하고 산을 내려왔다.
마을에서 한사람의 노인이 아주 커다란 쇠뭉치를 깎아서 바늘을 만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무착은 자신의 노력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고 산에 다시 올라가서 수행을 다시 시작하였다.
다시 삼 년이 흘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미륵보살이 출현할 기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착은 다시 수행을 포기하고 마을로 내려왔다. 그러자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어느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 때,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바위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보고 번뜩, 자신의 노력부족을 깨달아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삼 년후 다시, 무착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그만둔다는 생각으로 수행을 포기하고 산을 내려갔다.
마을에서 이상한 모습을 한 상처에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개를 만났다.
무착은 그 개를 가엽게 여겨 구더기를 손으로 떼 줄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손으로 벌레를 떼자, 그 작은 벌레는 찌부러져 죽고 말았다. 그래서 무착은 용기를 내어 혀로 그 구더기를 한 마리 한 마리 떼어내려 하였다. 그리하여 마지막 한 마리를 떼어내려는 순간 개의 모습은 사라지고 거기에는 미륵보살이 나타났다.
무착은 미륵보살에게 슬며시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다.
"어째서 지금에야 나타나시는 것입니까 ?"
여기에 미륵보살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나는 항상 너의 곁에 있었다. 그러나 너는 자신의 수행에만 사로잡혀 내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것 좀 봐라. 네가 수행 도중에 침을 뱉었기 때문에 나의 옷은 너의 침 투성이가 아니냐 ?"
이런 말을 듣고 무착은 자신의 부덕(不德)을 심히 부끄러워하였다. 그리고 그때 무착은 미륵보살을 따라 도솔천에 가서 거기서 한참을 머무르면서 미륵보살로부터 친히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의 가르침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 "현관 장엄론(現觀 莊嚴論)"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가르침을 받은 무착은 포교를 위해 인간세계에 돌아왔지만 그 사이에 인간세계에는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이와 같이 도솔천으로 불리는 천상계와 인간세계와는 시간의 길이의 단위가 다르다. 그러나 중유의 수명은 육취(六趣)중 어디에 있더라도 인간세계에서의 칠일에 해당한다. 천상계에서 태어난 자처럼 인간계의 시간으로 수 십년, 수천 년을 중유의 상태로 계속 있어야 하지는 않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 법왕의 전생자(前生者) 찾기의 경우 수년이 걸리는 것을 두고 49일 이라는 기간을 상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그러나 티벳인들에게 있어서 달라이 라마 법왕은 관세음보살이며 "무주처 열반(無住處 涅槃)"을 이룬 분으로 여겨지고 있다. "무주처 열반(無住處 涅槃)"이란 열반의 최고의 경지로써 자신만이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소승의 적정열반(寂靜涅槃)에도, 방황하는 윤회에도 머무르지 않고 대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하려는 경지를 말한다. 이러한 경지에 있는 달라이 라마 법왕은 적멸(寂滅)되더라도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중유가 아닌 환신의 경지에 머무르고싶은 만큼 머무르며, 인간 구제에 가장 도움이 되는 적절한 시기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깨닫지 못한 중생들에게는 49일간이 절대적인 기간이 된다.
중유가 지닌 여러 가지 특징에 대하여
중유의 움직임
중유가 원래의 몸에서 밖으로 나올 때의 상태는 다음에 태어날 곳에 따라 다음과 같이 다르다. 지옥에 태어나는 경우에는 항문으로부터, 아귀로 태어나는 경우에는 입으로부터, 축생으로 태어날 경우에는 요도(尿道)로부터, 사람으로 태어나는 경우에는 눈으로부터, 욕천(欲天)에 태어나는 경우에는 배꼽으로부터, 야차(夜叉 - 수라)로 태어날 때에는 코로부터, 성취천(成就天)과 건달바(乾嫰婆) 태어날 경우에는 귀로, 색계(色界)에 태어날 경우에는 미간으로부터, 무색계(無色界)에 태어나는 경우에는 머리꼭대기(頭頂)로부터 나온다.
이상에서 전해지는 것처럼 티벳에서는 사자(死者)가 육체로부터 나오는 순간 머리 꼭대기(頭頂)에 의식과 풍이 가도록 머리 꼭대기의 머리털을 잡아당겨주는 경우가 있다. 닝마파(派)나 카규파(派)에서 중요시되어지고 있는 "포와 명상법(瞑想法)"등은 바로 이러한 개념을 전제로 한 수도법이다.
중유가 보는 방법
수준이 높은 중유는 그 수준보다 낮은 곳에 있는 중유, 같은 수준에 있는 중유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인간으로 태어날 중유는 역시 인간으로 태어날 중유의 모습과 그 수준 보다 낮은 경지의 중유 즉, 지옥에 태어나는 중유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신 보다 수준이 높은 천상계에 태어나는 중유의 모습은 볼 수가 없다. 이 밖에도 천안(天眼)을 가진 자도 중유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천안이라는 것은 신통력의 하나로써 보통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며, 말하자면 천안통(天眼通)인 것이다. 이러한 천안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 하나가 태어나면서부터 지닌 천안인 "부정(不淨)한 天眼"이며 또 하나는 수도(修道)의 힘에 의해 얻은 천안인 "청정(淸淨)한 天眼"이다. "부정한 천안"의 경우 태어나면서부터 영능자(靈能者)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이지만 통상적으로는 색계에 태어난 모든 천인이 지닌 천안의 능력을 발한다.
중유의 크기
판첸 라마 1세 로잔 쵸겔은 인간의 중유의 몸의 크기는 5 ~ 6세 정도의 아동의 크기라고 구사론석(俱舍論釋)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얀첸 가로 스승은 사람에 따라 각각 크기가 다르며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중유의 크기에 대해서는 게룩파내에서는 일치하지 않는다.
중유의 상(相)의 특징
상(相)이라는 것은 중유의 마음에 나타나는 이미지 같은 것으로써 다음과 같은 두 종류로 분류된다.
악취(惡趣)의 중유 - 검은 천을 펼친 듯한 상. 또는 밤에 밤의 어둠이 암흑처럼 가득한둣한 상.
선취(善趣)의 중유 - 흰 모직물을 펼친 듯한 상. 또는 허공에 달빛이 가득한 듯한 상.
중유의 모습의 특징
모습의 특징을 보면 어느 것으로 태어나더라도 태어나는 유정(有情)의 本有(본유)의 신체의 형태를 하고 있다고 "구사론(俱舍論)"에 적혀있다. 이 본유라는 것은 사유(四有)의 하나이다. 유(有)라는 것은 윤회의 결과 우리들이 받아야만 되는 우리들의 거처(居處)이며 먼저 사유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사유는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한다.
생유(生有) - 어머니의 자궁에서 수태된 제 일 순간을 말한다.
본유(本有) - 수태된 제 이 순간에서부터 다음의 사유로 될 때까지의 有를 말함.
사유(四有) - 죽음의 최후의 순간, 또는 "죽음의 광명"의 상태의 有를 말함.
중유(中有) - 死有와 生有의 중간에 생겨나는 有를 말한다.
그런데 티벳밀교 학자 중에는 이상의 本有의 어구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여 중유는 이전의 유(有)의 상(相) 즉, 前世의 모습을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또한 "後世의 모습을 한다"라고 설명된 것을 보고 중유의 수명인 일주일 가운데 사흘 반은 이전 생(前世)의 모습을 나머지 사흘 반은 다음 생(來世)의 모습을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주장들은 본래의 의미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총 카파는 주장하였다. 본유의 경우의 "以前의 時節"에서의 前의 의미는 後世의 死有에 대하여 前의 모습 즉, 來世의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써 中有보다 그 이전의 모습을 두고 이야기 한 것은 아니다.
또한 "무엇으로 태어나더라도 그 태어나는 本有의 모습을 하고 있다"라고 설명한 것에 대해 신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중유의 단계에서 이미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실은 어머니의 태내에서 들어가면서부터 근(根)에 장애가 생기는 것이며 중유의 신체적인 형태는 어디까지나 내세에 태어날 모습과 유사하다는 것이지 완전히 똑같다는 것은 아니다.
중유가 나아가는 방향
중유가 여러 장소로 가기 위하여 나아가는 방향에도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천상으로 향하는 중유 - 위를 향하여 나아간다.
인간계를 향한 중유 - 정면을 향하여 나아간다.
악취(惡趣)를 향한 중유 - 머리를 밑으로 하고 나아간다.
중유는 반드시 거쳐야 할 필요 과정인가에 관해서
욕계(欲界)와 색계(色界)라는 소위 무색계(無色界)를 제외한 윤회의 경지 어느 경우에 태어나게 되더라도 거기가 지옥이든, 육욕천(六欲天)이든, 반드시 중유를 거쳐야한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두 가지 무간업(無間業)을 달성한 사람은 중유를 거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 이 두 가지 무간업이라는 것은 좋은 무간업과 나쁜 무간업의 두 가지를 말하며 먼저 이 두 가지 무간업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좋은 무간업(無間業)
좋은 무간업이란 금세에서의 보살의 두 번째 단계인 "가행 도(加行 道)"까지 도달하여 내세에는 반드시 보살의 제 삼 단계인 "견도(見道)"에 이르는 업을 말한다. 이러한 견도에 까지 이른 자를 "성자(聖者)"라고 한다.
우리들은 공성(空性 - 부처가 도달한 진리)을 이해하고자 할 때, 여러 가지 이론이나 이미지(影像)를 떠올리며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성자는 공성을 이미지가 아닌 직관적(直觀的)적으로 이해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물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듣고 이미지를 떠올릴 때와 실제로 눈앞에 놓여있는 것을 보는 것과 차이가 있다. 이와 같이 사물을 직접 보는 것처럼 공성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성자라고 한다. 내세에서 필히 성자의 경지에 이르는 뛰어난 업(業)을 좋은 무간업이라 한다.
나쁜 무간업(無間業)
나쁜 무간업이란 다섯 가지 무간죄를 범하는 것을 말한다.
다섯 가지 무간죄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어머니를 죽이는 일.
아버지를 죽이는 일.
아라한(阿羅漢 - 부처의 경지에 다다른 성자)을 죽이는 일.
부처를 이룬 자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
불교 교단의 단결을 해치는 일.
이상의 다섯 가지 죄를 범함으로써 바로 지옥에 가는 업을 나쁜 무간업이라 한다.
일반적으로는 이상의 선(善), 악(惡)의 두 가지 무간업을 이룬 경우에 한하여 중유를 거치지 않고 직접 내세에 가게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총 카파는 무간업의 "무간(無間)"의 의미는 이와 같이 중유를 거치지 않고 내세에 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또한 몇 번인가 생을 바꿔 태어나서 그 곳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라고 하였다. 즉, 이 말은 금세의 업이 바로 내세의 결과로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욕계, 색계에 태어나는 한, 무간업에는 관계없이 반드시 중유를 거쳐야 한다고 한다.
무색계의 경우
그렇다면 무색계의 경우는 어떠한가 ? 무색계에 태어나는 사람은 죽은 그 장소에서 즉시 무색계의 요소 즉, 오온(五蘊) 가운데 색(色)을 제외한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네 가지 요소가 성취된다. 따라서, 죽은 직후의 "근득(近得)"등의 사공(四空)이 마음에 나타나지 않고 직접 무색계의 마음의 상태에 이른다. 그러므로 무색계에 태어나는 경우는 색계, 욕계에 태어나는 경우와는 달리 중유를 거치지 않는다. 덧붙여서 말하면 무색계라는 것은 중유에 의해 그 이외의 다른 장소에 이동하지 않고 사람이 죽은 그 장소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를 진리로 생각할 경우, 석가의 탄생담(誕生譚)에서 "도솔천에서 강림한 마야부인(석가의 生母)의 태내에 들어온 보살은 꿈에 나타난 여섯 개의 상아를 가진 흰 코끼리의 모습을 하고 수태되었다" 라고 수보리 존자가 설(說)하신 전설과 모순이 된다. 이러한 것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여기에 관해서는 왕비의 꿈은 석가모니의 출현에 부합하는 길스러운 조짐으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사람으로 태어날 중유가 축생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교의 많은 설과 모순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 관해서는 부파(部派 - 원시불교)계의 불교에서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고 있지만 대승파에서는 단지 길상(吉祥)의 징조로써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환신(幻身)에 관해서
마지막으로 죽음의 장의 끝에서 조금 언급한 중유를 정화함으로써 얻어지는 "환신(幻身)"에 관하여 상술하고자 한다. 얀첸 가로는 이 환신의 구조를 알고 강한 동경심을 품는 것만으로도 "生起次第(입문과정)"의 행(行)을 완성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환신"은 게룩파의 무상 유가 탄트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므로 이 환신에 대하여 여기서 좀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환신(幻身)이란 무엇인가 ?
먼저, 환신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프톤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그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일으켜 최종적으로 거울에 나타나는 영상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써 인식하는 행법(行法)을 "환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총 카파는 그것으로서는 "환신"의 정확하게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하였다.
또한 판첸 라마 1세인 로산 쵸겔은 "일체법(一切法)이 실체(實體)가 있는 것으로서는 공(空)이며, 환영(幻)과 같다" 라고 관상(觀想)하는 방법과 "존신(尊身)은 환영과 같은 것"으로 관상하는 것으로서는 "환신"의 의미를 설명하기에는 불완전한 데가 있다고 설(說)하였다.
환신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은 무상 유가 탄트라의 최종적인 수도론인 "구경차제(究境次第)"의 두 번째 단계인 "정적심 차제(定寂心 次第)"의 최후에 나타나는 "비유의 광명"과 그 광명의 이동수단인 풍(風) 이다. 이 광명은 죽음의 장에서 설명한 "모자의 광명의 혼합"을 말한다. "죽음의 광명"에서 역행하여 중유의 몸을 얻게됨과 동시에 "모자의 광명의 혼합" 즉, "정적심차제(定寂心次第)"의 최종 단계인 "비유의 광명"에서 역행하여 일어나는 것이 "환신"이다.
이에 관해, 세라프 갬초 스승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정적심 차제"의 최종 단계에 나타나는 "비유의 광명"에 의해 의식의 상태가 원래의 거친 상태로 되돌아가기 시작하면, 그 광명에 실려있는 풍(風)이 직접적인 원인(質料因)이 되어 "광명의 마음"이 共尘緣(공동연 - 補助緣)이 되어 "비유의 광명"이 사라지고("비유의 광명"의 경지를 초월하여) 역행의 "근득"을 성취한다. 이와 동시에 마음으로 뿐만 아니라 오래된 온(蘊)에서 별도의 장소로 이동하여 만다라(曼茶羅)를 동반하는 수용신(受用身 - 報身)의 지금강(持金剛)의 존신(尊身 - 부처의 몸)을 실제로 일으키는(창조하는)일이 제 3 차제의"환신"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환신"이라는 것은 "죽음의 광명"으로부터 "중유의 몸"을 일으키는 것처럼, "비유의 광명"으로부터,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외부의 물질적인 현상으로서의 존신을 성취, 창조하는 것을 말한다.
좀 쉽게 설명하기 위해 여기서 "환신"과 "중유"의 몸의 차이점에 관해서 논해보고자 한다.
"중유의 몸"은 생성되는 원인이 "죽음의 광명"과 그 광명에 실려있는 풍(風)이다.
"죽음의 광명"의 의식은 일시적으로는 여러 가지 분별(기억, 판단력 등의 여러 가지 감각)이 사라져 언뜻 보기에는 청정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번뇌를 버린 것이 아니므로 중유의 몸이 된 다음에는 당연히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이렇게 되는 원인은 모든 번뇌의 원인이 되는 "무명(無明)"을 버리지 않는데 에 있다.
무명은 모든 대상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마음으로써 이러한 마음이 모든 성냄이나 집착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자신에게 유익한 사물을 마치 전세부터 특별히 좋아한 것으로 여겨 내세에도 똑같이 좋아하는 것 같이 절대불변으로 "좋아하는 것"이라는 자성(自性 - 본성)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취급하여 여기에 대해 점점 더 탐욕을 일으키는 것 둥이다. "죽음의 광명에서는 실체가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공(空)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므로 "근득"을 성취하여 거친 의식이 일어나면 뿌리를 제거하지 않은 잡초처럼 이전과 다름없이 번뇌가 일어난다. 이러한 청정하지 못한 의식과 이러한 의식과 동일한 본성의 풍(風)을 원인으로 하여 성립한 "중유의 몸"도 부정(不淨)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에 비하여 "환신"의 경우는 "비유의 광명" 즉, 공성이라는 진리의 이해에 "죽음의 광명"을 서로 포개고 또한 이러한 것의 이동 수단인 풍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난다. 이것은 무명이 받아들이는 실체가 있는 것으로서의 존재를 부정하는 의식이므로 말하자면 깨끗한 의식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 경우의 풍도 당연히 깨끗한 것이 된다.
다음에는 환신의 마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다. 전술(前述)한 대로 종성을 직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에 "공(空)"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눈앞에 놓인 사물을 보듯이 이미지가 아닌 "공성(空性)을 직접 아는"것을 가리킨다. 이때 사람들은 인식의 대상인 "空性"과 인식의 주체가 되는 의식(意識)이 물과 우유를 혼합한 것처럼 혼연일체가 되는 체험을 한다. 이러한 체험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부처님조차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명상체험을 "등인지(等引智)"라고 하며 이런 체험에서 돌아온 의식을 "후득지(後得智)라고 부른다.
"후득(後得)"이라는 것은 뒤에 얻은 경지 즉, "공성을 직관적으로 이해한 체험을 한 뒤에 얻는 경지를 일컫는 것으로써 이 "후득지(後得智)"로는 부처의 경지에 들어가지 않는 한 모든 사물이 실체가 있어 그 자체의 힘 이외의 다른 것과는 상관관계 없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단지 그렇게 보인다는 것 뿐, 마음이 그와 같이 집착하는 일은 없어진다. 마치 요술하는 방법의 설명을 듣고 난 뒤에 그 요술을 보는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 모든 사물이 실체가 없이 그 자체의 힘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강렬한 체험으로 이해한 뒤에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여러 가지 대상을 보더라도 그것들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써 집착하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정적심차제"의 최종단계에 나타나는 "비유의 광명"으로 공성을 이해하는 강렬한 체험을 한 "幻身(으로 변한 상태였던)의 사람"은 "근득(近得)"에 역행하여 서서히 모든 의식이 돌아오더라도 그때까지와 같은 마음으로 사물을 보는 일은 더 이상 없다. 이와 같이 중유가 되는 방법을 그대로 이용함에도 불구하고 "환신"은 중유"와는 달리 마음도 몸도 깨끗한 존재이다.
환신의 열 다섯가지 특징
판첸 라마 1 세인 로산 쵸겔에 의하면 "환신"은 다음과 같은 열 다섯 가지의 특징을 갖추고 있어야한다.
① 인(因)의 특징 - 정적심 차제의 최종 단계에 나타나는 "비유의 광명의 마음"과 이것이 실려가는 풍(風)만으로 이루어지는 것.
② 성취할 때의 특징 - "비유의 광명"에서 역행한 "근득"이 마음에 나타남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
③ 장소의 특징 - 최초에는 거친 신체(이 경우에는 불멸의 티그리)의 내측(內側)이나 외측(外側)의 어느 쪽엔가 환신을 출현시키는 것.
④ 본성의 특징 - 풍(風)과 마음(心)만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투명하고 저항감이 없는 무지개 형태의 몸.
⑤ 색의 특징 - 원인이 되는 미세한 지명풍(持命風)은 흰색이므로 "환신"의 중심존(中心尊)은 신체의 색깔이 흰색이다.
⑥ 모습상의 특징 - 일면육비(一面六臂 - 얼굴이 하나에 손이 여섯 개)의 아름다운 모습.
⑦ 보는 방법상의 특징 - "환신"을 이루지 못한 일반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
⑧ 빛의 특징 - 몸의 광채(光彩)에 의해 수없이 많은 세계를 비출 수 있는 것.
⑨ 대상을 받아들이는 특징 - 모든 근식(根識)이 갖추어져 있어 "支分의 五風"을 동반하는 일.
⑩ 생겨나는 방법의 특징 - 수도자의 의지의 힘에 의해 "광명"에서 일어나는 것.
여기서 이러한 일어나는 방법의 특징에 관해서 조금 설명하고자 한다.
일반인의 경우의 "죽음의 광명"에 들어가는 것과는 달리 숙달한 무상유가 탄트라의 수도자는 "광명"속에서 자기가 원하는 만큼 머무를 수가 있다. 그러나 너무 장시간 머무른다면 중생을 구제 할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의지에 의해 다시 돌아오려고 시도를 하지만 "광명"의 경우는 아주 미세한 풍(風)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광명"의 경우처럼 업력(業力)에 의해 자연적으로 "광명"에서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자신 스스로 미리 "광명"에서 단시간 내에 돌아오기를 마음속으로 다짐을 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일상적인 일을 예로 들자면,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처리해야할 일이 있음을 스스로에게 다짐을 해두면 아주 자연스럽게 비교적 일찍 잠에서 깨어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이런 경우와 유사하다. "광명"에 들어가기 전에 필히 그 "광명"에서 일찍 일어나서 중생을 구제할 수 있도록" 이라고 단단히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면 그 힘에 의해 "광명의 의식"으로부터 일어날 수가 있다는 것이다.
⑪ 공덕의 특징 - "환신"은 여러 가지 공덕을 가지고 있다.
"환신"은 부처의 신체와 아주 유사한 상호(相好 - 특징)를 갖추고 있으므로 허공에서 자유로이 무엇이든지 만들어 낼 수가 있다. 이러한 것은 공성을 완전히 체득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현상으로써 이에 관한 하나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챤드라키르티가 절에 있을 무렵, 그가 가져와서 모두에게 나누어주는 우유가 아주 맛이 좋다는 평판이 자자했다. 어디에서 저 맛있는 우유를 가져오는 걸까 하고 호기심을 가진 한 승려가 그의 뒤를 쫓았다. 그랬더니 그는 사막 위에다가 소의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서 우유를 짜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공성을 완전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공(空)에서 사물을 생겨날 수 있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많은 부처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아 육체를 가진 이 생애(現世)에서 성불하는 공덕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환신"을 실제로 실현시키지 않고도 "환신"의 특징을 알고 그것을 동경하는 것만으로도 "生起次第"의 행을 완성한 것과 같은 공덕이 생긴다고 판첸 라마 1 세 로산 쵸겔도 말하고 있다. 덧붙여서 말하면, "生起次第"의 완성과 만다라의 극히 미세한 부분까지 결코 혼합하는 일없이 네 시간 이상 계속하여 확실히 관상(觀想)할 수 있다고 한다.
⑫ 비유로 상징되는 특징 - "환신"이 12가지 비유에 의해 상징되어지는 것.
12 가지의 비유는 환영(幻), 물(水), 달(月), 그림자(影), 신기루, 메아리, 건달바(乾嫰婆), 마술(魔術), 무지개, 번개, 물거품, 거울의 상을 말한다. 이러한 비유의 의미를 몇 개 들어보자.
구제를 바라는 중생이 어디에 있더라도 수용신(과 그것에 수반되는 변화신)을 그쪽에 출현시킬 수 있는 것은 물에 비치는 달과 같은 것이다. "비유의 광명"에 의해 돌연 일어나는 것은 물거픔과 같다. 불을 사용한 무기 등으로 태운다든지 부순다든지 하지 못하는 것은 그림자와 같다. 하나에서 여러 개를, 거꾸로 여러 개에서 하나를 만드는 것은 마술과 같다. 돌연히 나타나는 것은 물거품과 같다.
⑬ 이름의 특징 - "환신"은 자가지(自加持) 또는 수용원만신(受用圓滿身), 금강신(金剛身)등의 별명으로 불린다.
⑭ 自加持로 불리는 특징 - 自加持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예를 들면, "나"라고 할 때, 나라고 부르는 대상의 근원적인 본성은 아주 미세한 풍과 의식이다. 이것을 가지(加持)라고 한다. 즉, 존신(尊身)으로 생기(生起 - 환신으로서 출현시키는 것)하는 것으로부터 "自加持"로 불린다.
⑮ 기간의 특징 - 최초의 성취에서부터 제 4 단계의 "승의(勝義)의 광명(光明)"이 출현하기까지 존재하며 "승의의 광명"이 출현했을 때, 저 하늘에 무지개가 사라지는 것처럼 사라지기까지를 말한다.
이와 관련해 조금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비유의 광명"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수도자의 수도에 의해 출현하는 "공성이해(空性理解)의 광명"과 "죽음의 광명"을 겹치어 합일화한 것이다. 이러한 광명은 청정한 광명으로써 공성을 직관적으로 이해했을 때의 의식의 상태와 흡사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같지는 않다. 공성을 직관적으로 이해한 지혜에 불순물이 들어간 상태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태의 광명을 실제의 공성체험에 가까운 광명이라는 의미로 "비유의 광명"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이러한 "비유의 광명을 계기로 하여 생기(生起 - 일어남)되는 "가상의 환신"을 "불멸의 환신" 이라고 하며 이 상태는 아직 번뇌를 완전히 떨쳐버린 상태가 아니다. 여기서 "부정의 환신을 체득한 수도자는 다시 환신의 몸상태인 채로 수행을 계속하여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공성을 직관하는 체험을 한다. 이 단계에서 얻어지는 체험이 "승의(勝義)의 광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승의(勝義)"는 승의체(勝義諦) 즉, 공성을 가리키는 말로써 이러한 광명을 실현한 순간 "부정의 환신"은 허공에 무지개가 사라지듯이 사라지고 광명으로부터 역행하여 팔십자성의 분별 중에 일곱 가지 마음의 원인이 되는 "암흑의 영상", "근득"이 마음에 나타난 시점에서 그것과 동시에 이번에는 "청정한 화신"을 획득하게 되며 이 시점에 이르면 번뇌도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청정(淸淨)한 화신"에서의 "청정(淸淨)"의 의미는 원인이 되는 광명의 의식과 이동수단인 풍이 한 점의 더렵혀짐도 없는 완전히 청정한 공성(空性)의 의식과 그 풍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청정한 화신"과 "승의(勝義)의 광명"의 두 가지 즉, 완전무결한 몸과 마음을 얻게된다. 이러한 것을 무상유가 탄트라의 최종단계인 "쌍입(梔入 - 슨쥬크)"라고 부르며 이 쌍입의 경지가 이윽고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로 이어져 성불(成佛)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환신"을 간단하게 설명하려고 했지만 초심자에게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환신"의 진실한 모습을 이해해두는 것은 무상유가 탄트라를 성취하여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과정이다. 여기서는 지금까지 한번도 명확하게 밝힌 적이 없었던 게룩파의 부처가 되는 과정을 좀 상세히 설명하여보았다. 이 장을 깊이 이해하여두는 것은 부처의 지혜를 획득하는 방법을 알게된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그러나 정식으로 수행하고자 생각한다면 필히 관정(灌頂)을 받고 라마(스승)로부터 올바른 전수(傳受)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부연해두고 싶다.
"환신"을 이룬 사람은 그 환신 그대로의 모습으로는 구제를 요청하는 일반 중생을 구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환신을 이룬 수도자는 일반 중생들도 인식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모습을 할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존재가 "변화신(變化身)"이라고 불리는 존재이다. 변화신이 나타나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는 근원이 되는 것이 윤회에서의 전생(轉生)하여 새로운 몸을 받는 과정이다. 계속되는 생(生)의 장(章)에서는 이러한 생을 받는 과정에 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