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이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붓다가 수행자들에게 이러한 내적 통찰의 수행을 강조한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 "항상 방편을 써서 선정(禪定)을 닦아 익혀 안으로 그 마음을 고요히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비구는 항상 방편을 써서 선정을 닦아 익혀 그 마음을 고요히 하면 참다이 관찰(觀察)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참다이 관찰하는가. '이것은 色이다. 이것은 색(色)의 모임이요, 이것은 색(色)의 멸함이다. 이것은 애(受)·상(想)·행(行)·식(識)이다. 이것은 그것들의 모임이요. 이것은 그것들의 멸함이다'라고 관찰하는 것이니라…… 참다이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에 느낌을 즐겨하고 집착하여 잡음[取]이 생긴다. ……어떤 것이 색의 멸함이며, 수·상·행·식의 멸함인가.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들은 모든 괴롭고 즐거우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받으면, '이것은 느낌의 모임이요 느낌의 멸함이며 느낌의 맛이요 느낌의 근심이며 느낌을 떠남이다'라고 참다이 관찰하나니 참다이 관찰하기 때문에 느낌에 대한 즐거움과 집착이 멸한다. ……그러므로 비구는 항상 방편을 써서 선정을 닦아 익히어 안으로 그 마음을 고요히 하여야 한다. 비구가 선정에 머물러 안으로 그 마음을 고요히 하여 꾸준히 힘쓰고 방편을 쓰면 참다이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니라."
위의 경문에서 붓다는 어리석은 범부들은 오온의 이미지에 대해 참다이 관찰하지 못하므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다문성제자(多聞聲弟子)들은 선정수행으로써 의식의 연기적 발생과정을 참다이 관찰(如實觀察)하여 집착이 멸하고 마침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설하고 있다.
또한 붓다는 비구들에게 선정수행을 힘써 닦아 그 마음의 고요함을 성취하면 십이연기와 사성제(四聖諦)의 진리가 참다이 밝게 나타난다고도 설한다.
이와 같이 선정수행의 목적은 존재의 요소(五蘊 色·受·想·行·識)와 그것의 생멸 변화하는 다양한 모습을 여실히 관찰하는 데 있으며 수행자들은 끊임없는 내적 통찰 수행으로 여실지견을 성취하게 된다.
다시 말해 여실관찰(如實觀察, 定)은 여실지견(如實知見) 즉 지혜(智慧)를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것은 그 직접적 원인이 무엇이었든 선정중의 일이었고 성도 후에도 붓다는 항상 선정수행을 계속한 것을 경문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입멸시(入滅時)에도 제사선(第四禪)에서 반열반(般跡槃)하였다고 하니 초기 불교에 있어 선정수행의 중요성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한편 초기 불교 당시 수행승들의 일상생활을 살펴보면 선정수행의 비중을 잘 알 수 있다.
비구(比丘)들의 정명(正命)으로서의 일상은, 하루를 네 시간 단위로 구분하여 비구가 잠을 자는 시간은 중분(中分, 밤 10시부터 새벽 2시) 4시간뿐이고, 후분(後分, 새벽 2시에서 6시)에는 일어나 좌선(坐禪)에 힘쓰고 조분(朝分, 오전 6시에서 10시)에는 선정에서 나와 세면·청소·탁발(托鉢) 등을 행하고, 오분(午分, 오전 10시에서 오후 2시)에는 오전까지 식사를 마치고 식후의 휴식 및 좌선을 행하며, 석분(夕分, 오후 2시에서 6시)에는 좌선을 하거나 또는 저녁에 좌선에서 나와 다른 비구들이나 신자들을 위한 설법을 하고 초분(初分, 저녁 6시에서 10시)에는 다시 좌선에 힘쓰는 것이다.
이처럼 수행승들의 일상생활은 대부분이 선정수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정수행 자체가 깨달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선정에 의한 참다운 관찰 그리고 여실지견(如實知見)이 성취되었을 때 비로소 선정이 완결된다고 생각된다. 또한 철저한 계율수행이 함께 할 때 진정한 선정수행이 가능하리라 본다.
어쨌든 초기 불교의 수행도에서 선정수행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고 모든 수행의 기초가 되었으며 정각을 이루기 위한 중요한 방편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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