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길을 걷는다는 것은 대단히 미묘한 일이다.
단순히 뛰어든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비뚤어지고 이기적인 영적길에 연결되는
수없이 많은 옆길이 있다.
실제로는 정신적인 지식과 기술을 사용해서
이기주의를 증대 시키면서,
자기는 정신성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자신을 속일 수도 있다.
이런 에고의 근본적인 왜곡을
'정신적 물질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트룽빠는 '정신의 물질줄의'를 잘라내는 데에 특히 힘을 기울이고 있다.
정신의 물질주의란,
정신적 극복을 통하여 자신(에고)을 강화 시키려고 하는 자아의 책략이다.
문제는 자아(에고)가,
모든 문제를 자신의 필요에 맞게 조작 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정신적인'것 조차도 그 예외가 아니다.
자아(에고)는 정신적 가르침을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하려고 늘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때 가르침은 외적인 것,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 의지 할 수 있는 철학으로 취급된다.
우리들은 진정으로 그 가르침과 일체가 되어,
또는 그 가르침 그 자체가 될 것을 원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은 자신의 행위와 가르침 사이에 모순이나 갈등을 느낄 때마다,
그 비틀림을 부드럽게 하기 위하여 상황을 적당히 변명하려 한다.
그 변명의 주체란,
정신적 어드바이서를 치부하는 자아(에고)가 역할을 하는것이다.
그것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국가의 상황과 비슷하다.
정책이 교회의 가르침에 맞지 않을 때,
반드시 국왕은 그의 정신적 어드바이서인 법왕에게 가서 축복을 구한다.
법왕은 국왕이 종교의 보호자라는 것을 구실로 삼아
국왕의 정책을 정당화하고 축복을 내린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서도 이과 같이 교묘하게 일이 진행된다.
자아가 국왕과 법왕의 두 가지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모든 정신수행의 중요한 포인트가
자아(에고)의 지배로 부터의 탈출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지식, 종교, 도덕, 분별, 위안 등
무엇이든지 자신이 구하는 것에 관한 보다 높고,
보다 초월적인,
보다 정신적인 번역(서적,경전)을 끊임없이 찾아 헤메는
자아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 정신의 물질주의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이러한 정신적 물질주의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면,
최후에 우리들이 발견하는 것은
정신적 길에 대한 거대한 컬렉션(수집)의 포로가 된 자신의 모습의 다름 아닐 것이다.
정신적 컬렉션은 매우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 된다.
그러나 사실은 골동품 상점을 차린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정신성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이러한 욕구는,
길을 나아감에 따라 탈락해 가는 것입니까?'
라고 트룽빠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다.
트룽빠의 대답은 이러하다.
최초의 충동이 가라앉기를 기다릴 것.
충동의 힘으로 당신은 어떤 종교적인 환경에 자신을 둘 수 있을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충동을 잘 살펴보면,
그것은 점차로 조용해지고,
드디어 단조롭고 지겨운 것이 되어 버린다.
이것은 좋은 징후이다.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체험과 실제로 관련시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의 관련성을 얻지 못하고서는,
정신의 길은 본질적인 자기의 체험이 아닌 순수한 외적 위안물이 되며,
그것은 위험하기조차 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 관계해 가는 것이 귀의의 한 형태이다.
귀의라는 언어는 사람에 따라서는 다소 히스테릭한 감정이 포함되어 있고,
그리스도교와 수피의 성자가 쓴 황홀한 저서와 관계 지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트룽파의 정의에 의하면
귀의란 마음을 여는 것이며,
자아(에고)의 방어를 포기하고,
완전히 평범한 지금 여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귀의'란 부드러운 발판을 마련하는 일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그것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단단한 지면,
바윗돌이 널려져 있는 자연의 토지에 발을 붙이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귀의를 상징하는 것은 행위로서 오체투지가 행해진다.
귀의하는 것의 의사표시로써 마루에 몸을 던지는 행위를 반복한다.
동시에 그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자신을 두고,
자신 속에 있는 미숙하고 조잡한 요소를 솔직히 받아들임으로 인하여
자기를 열어 두고, 완전히 귀의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가장 낮은 곳에 몸을 던지면 무엇을 잃어버릴 두려움도 사라진다.
그러한 행위에 의해 우리들은 자신을 텅 빈 그릇으로 준비해 두고,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귀의의 회피는 자기 만족에 연결되는 것이라고 트룽빠는 말한다.
우리들이 지복이나 열락, 공상이나 꿈의 실현을 구하는 이상,
그것이 실현되지 않을 경우의 절망이나 실패의 고통도 동시에 맛보는 것이 된다.
간단히 말해 혼자 떨어져 나가는 것에 대한 공포,
일체화에의 희망,
이러한 것들은 자아나 자기 기만의 현현,
또는 행위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자아가 어떤 행위를 영위하는 실체인 것처럼 파악하는 방식일 뿐이다.
자아란 행위 그 자체는 , 심리적인 사건 그 자체이다.
자아란 해방(자유)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공포 그 자체이며,
무아의 경지를 잃어버린 것,
성취의 꿈을 잃어버린 것을 한탄하고 통곡하고 절규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 기만이 의미하는 바이다.
공포나 희망,
상실이나 획득은
모두 자기 보존이나 자기 유지를 위한 기구인
자아의 꿈의 끊임없는 작용이며,
그리고 그것은 자기 기만이다.
그렇다면 꿈을 넘어선 진정한 체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상의 생활 속에서 언제나 지금의 아름다움, 색조,
그리고 감동을 진정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상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보다 좋은 상황에 대한 희망을 버린다.
우리들은 낙담으로부터 벗어나라 하고
자기 자신에게 명령할 수 없다.
마법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탐욕, 무지, 정서 - 우리들이 체험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모두 리얼한 것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진실을 포함하고 있다.
진실을 체험하는 것을 배우고 이해하려 한다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라는 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이 단 하나의 모래 알갱이가 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20세기의 신비사상가들>
(앤 밴크로프트 / 양억관 옮딤, 정신세계사 펴냄) 에서 발췌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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