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유가심인 정본수능엄경 환해산보기 4(수도에서 득도까지)
발췌31.
原註 五十六=무릇 인(因)과 연(緣)은, 직접 낳은 것은 인이 되고, 간접으로 돕는 것이 연이 된다. 욕(慾)은 직접적이고, 업(業)은 간접적인 것이니, 인(因)⋅연(緣)의 뜻이 명백하다. 여기에 이르러서 다만 업과(業果)가 서로 계속하는 속에 삼연(三緣)과 삼인(三因)을 취하여 부루나의 「어찌하여 윤몰(淪沒)이 있읍니까?」한데 대한 물음에 대답한 것이다. 분별은 식(識)인데, 번뇌(煩惱)를 생기게 하는 것이다. 분별이이미 없으면 업인(業因)이 생기지 않는다. 삼연(三緣)은 곧 업과(業果) 중에 음(吟살(殺)⋅도(盜)이고, 삼인(三因)은 곧 음⋅살⋅도의 탐욕(貪慾)이다. 음⋅살⋅도는 신근(身根)의 소조(所造)한 업(業)이고, 세 종류의 탐욕은 의근(意根)의 능조(能造)한 의혹이다. 무릇 중생이 윤익(淪溺)되는 이유는 그 음⋅살⋅도 때문이고, 음⋅살⋅도를 행하는 것은 그 세가지 탐욕 때문이고, 세가지 탐욕이 생기는 것은 그 무명(無名)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세상에 불을 끄는 사람이 다만 섶만 더 넣지 않으면 불꽃이 생기지 않는데, 불꽃이 생기지 않으므로 불은 스스로 꺼지는 것과 같아서 무명(無名)을 없애고자 한다면 먼저 음(음)⋅살(殺) 등을 끊어야 한다. 음⋅살 등을 끊으므로 탐욕과 의혹이 생기지 않는 것이고 탐욕이 생기지 아니하면 무명이 자연 없어질 것이다. 무명이 없어지므로 이것이 곧 보리(菩提)이다.
발췌32.
原註 六十六下=그러니 자연과 자연이 아닌 것,
화합과 화합이 아닌 것을 일체 멀리 벗어나며, 또한 벗어나고 벗어날 것도 없는 마음이 없어야 이것이 곧 참으로 공용(功用)이 없는 도(道)며 희론(戱論)이 없는 법이다.
발췌33.
原註 七十=아난(阿難)을 꾸짖어서 고(苦)의 근본을 버리고 무루도(無漏道)를 닦아서 탐애(貪愛)로써 마음과 눈에 머물러 두지 말게 한 것이다.
처음부터 진(眞)과 망(妄)을 가려서 각성(覺性)을 발명(發明)하였고 이에 만법(萬法)을 깊이 궁구하여 의심으로 막힌 것을 터놓아 통하게 하는데 이르기까지 다 최초의 방편(方便)이 된다. 이는 그 진수(眞修)로 하며 금 신(信)과 해(解)가 진정(眞正)하여 인지(因地)의 마음을 삼게한 것이다. 인지의 마음이 이미 진실해야 과지(果地)<30>의 수증(修證)을 원만하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앞의 법은 여기에서 끝내고 별도로 다음 글을 시작한 것이다.
이상은 견도분(見道分)의 마지막이다.
【譯註】
<30> 여기서 말한 인지(因地)는 성불(成佛)하려고 수행하는 지위를 말함이고, 과지(果地)는 수행에 의하여 깨닫는 결과를 얻는 지위를 말함.
발췌34.
原註 七十三=실성(失性)은 나그네 생활과 같고 견성(見性)은 호화로운 주택과 같다. 견성을 했더라도 닦지 아니하면 이는 마치 저택을 얻고서도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같으므로 여래(如來)께서 본래 발심(發心)했던 길을 청하여 불타의 진견(知見)에 들어가기를 희망한 것이다. 「남김없는 열반(涅槃)」은 원만(圓滿)한 과(果)이고, 「본래 발심(發心)한 길」은 원만한 인(因)이고, 「다라니(陀羅尼)」는 원만한 문(門)이고, 「불타의 지견(知見)」은 원만한 지혜다. 이미 견성(見性)하고 또다시 불타의 지견에 들어 가기를 구하는 것은 과(果)를 증득(證得)한 것이다.
발췌35.
原註 八十五=이는 곧 현규(玄竅)가 드러나자 본각(本覺)이 나타난 것이다. 「저기 잇다.」는 것은 곧 나를 객체(客體)로 삼고, 상대를 주체(主體)를 삼아 분명하게 지적한 것이고, 「서쪽으로 향하라.」는 것은 본각(本覺)의 방위를 보인 것이다. 「아(阿)는 무(無)이고 「미(彌)」는 양(量)이고, 「타(陀)」는 지혜(智慧)⋅용력(勇力)⋅수명(壽命)⋅복록(福祿)⋅광명(光明)⋅공덕(功德)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곧 법계장(法界藏)의 주인옹(主人翁)이므로 시방(十方) 삼세(三世)의 일체 제불(諸佛)이 그 성(性)을 돈오(頓悟)해서 불타(佛陀)를 수증(受證)하고, 일체 벽지불(벽支佛)도 그 성을 깨달아서 벽지불을 수증하였고, 일체 보살(菩薩)도 그 성을 깨달아 보살을 수증하였고, 일체 성문(聲聞)도 그 성을 깨달아 성문을 수증하였으며, 아미타불도 아미타불을 닦아서 아미타불을 증득(證得)하였다. 배우는 사람이 음(음)⋅노(怒)⋅치(癡)를 범하면 아미타불은 십만억(十萬億)이나 먼 국토(國土)에 막힐 것이고, 계(戒)⋅정(定)⋅혜(慧)를 닦으면 아미타불이 곧 자기(自己)의 법신(法身)이 되는 것이니, 배우는 사람은 계(戒)를 지키지 않을 수 없느니라.
발췌36.
原註 八十五下=불성(佛性)을 보고자하면 마땅히 시절형상(時節形相)을 관찰해야 한다.
第五卷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修楞嚴經
발췌37.
原註 十七=「六」은 추혹(추惑)이 망령되게 맺힌 것이고, 「一」은 법집(法執)의 미세(微細)한 식(識)이다. 수다원(須陀洹)은 이미 추혹(추惑)함을 끊어서,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이는 六이 소멸된 것이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법집(法執)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이는 아직 一은 없어지지 않은 것이다. 다음의 글로서 증험하건데 이는 곧 바야흐로 인공(人空)<10>을 얻었으나 아직 법해탈(法解脫)은 이루지 못한 것인데 구공(俱空)<11>도 생기지 않는 경지에 도달해야만 이에 一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소승(小乘)은 반드시 六이 소멸 되어야만 一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소승(小乘)은 반드시 六이 소멸 되어야 一이 없어지지만 대승(大乘)은 곧 바로 一이 없어져서 六으로 하여금 스스로 없어 지게 하는 것이다. 숙세(叔世)에서 도(道)를 탐구하는 이가 비록 「오묘함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마침내 이미(離微)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 참으로 一까지 없어진 자를 구해보면 많지가 않은데, 다시 성인(聖人)의 말씀을 살펴보면 모두가 깊이 밝힌 바가있다. 「이미(離微)」는 생(生)⋅사(死)⋅출(出)⋅입(入)을 가리킨 것이다.
【譯註】
<10> 인공(人空):오온(五蘊)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몸을 마치 실아(實我)가 있는 듯이 새각하는 아집(我執)을 공(空)한 것이라고하는 것, 아공(我空)
<11> 구공(俱空):삼공(三空)의 하나. 나라는 관념과 나의 소유물이라는 주관적 미집(迷執)과 물질과 마음의 여러가지에 대한 객관적인 미집을 벗어나 아공(我空)⋅법공(法空)까지 멋어나 제법(諸法)의 본성(本性)에 계합함을 말함.
발췌38.
原註 三十三中=제불(諸佛)이 증득(證得)한 것을 「보리(菩提)」라 하고, 적정(寂靜)하여 상락(常樂)함을 「열반(涅槃)」이라 하고, 허망하지도 않고 벼하지도 않음을 「진여(眞如)」라 하고 허물을 벗어나고 그것을 끊은 것을 「불성(佛性)」이라고 하고, 일체(一切)를 분별하되 불들거나 집착함이 없음을 「암마라식(菴摩羅識)이라 하고, 한가지 법도 성립시키지 않고서 번뇌(煩惱)가 다 없어진 것을 「공여래장(空如來藏)」이라 하고, 만법(萬法)을 환하게 비쳐보되 분별함이 없음을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한다.
발췌39.
이것을 이름하여, 「묘연화(妙蓮華)」⋅「금강왕보각(金剛王寶覺)」⋅「여여불삼매(如如佛三昧)」라 하는데, 손가락을 퉁기는 사이에 무학(無學)을 초월하리라.
오직 이 무비법(無比法)은 시방(十方) 박아법(薄俄梵)의 한 길로 열반(涅槃)에 이르는 문(門)이니라.
原註 五十五=진요(眞要)를 매듭지워 송(頌)한 것이다. 이 법문(法門)은 맑은 데도 집착하지 않고 물들여도 물들지 않으므로 「묘연화(妙蓮華)」라고 하였고, 근(根)과 경(境)에 맺힌 미혹이 견주기만하면 사라지므로 「금강왕보각(金剛王寶覺)」이라 하였고, 아무런 작위(作爲)가 없어서 생각도 잊고 앎도 끊겼으므로 여여정수(如如正受)라고 한 것이다. 이에의해 닦아 나아가면 한 번 손가락을 퉁기는 사이에 무학(無學)을 초월하여 원통(圓通)한 지위에 들어갈 것이다. 시방의 여래(如來)가 생(生)⋅사(死)에서 멀리 벗어나 묘상(妙常)함을 속히 증득(證得)함이 이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 박아범(薄我梵)의 존호(尊號)가 여섯가지 뜻을 갖추었는데, 자재(自在)⋅치성(熾盛)⋅단엄(端嚴)⋅명칭(名稱)⋅길상(吉祥)⋅존귀(尊貴)이다.
발췌40.
原註 六十一上=아리야식(阿梨耶識)에 의해서 무명(無名)이 있게 되며 불각(不覺)이 일어나서 볼 수도 있으며 나타낼 수도 있고 경계(境界)를 취할 수도 있어서 일어나는 생각이 상속(相續)되므로 「의식」이라고 한 것이다. 그 의식에는 또다시 다섯가지 이름이 있다. 하나는 업식(業識)」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무명의 힘으로 불각심(佛覺心)이 움직이는 것이고, 둘은 「전식(轉識)」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움직여진 마음에 의해서 상(相)을 볼 수 있는 것이고, 셋은 「현식(現識)」이라고 하는데, 극서은 일체의 경계를 나타낼 수 있음이 마치 밝은 거울에 모든 색상(色像)이 나타남과 같은 것이고, 다섯은 「상속식(相續識)」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생각이 상응(相應)하여 끊기지 않는 것이다.」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발췌31.
原註 五十六=무릇 인(因)과 연(緣)은, 직접 낳은 것은 인이 되고, 간접으로 돕는 것이 연이 된다. 욕(慾)은 직접적이고, 업(業)은 간접적인 것이니, 인(因)⋅연(緣)의 뜻이 명백하다. 여기에 이르러서 다만 업과(業果)가 서로 계속하는 속에 삼연(三緣)과 삼인(三因)을 취하여 부루나의 「어찌하여 윤몰(淪沒)이 있읍니까?」한데 대한 물음에 대답한 것이다. 분별은 식(識)인데, 번뇌(煩惱)를 생기게 하는 것이다. 분별이이미 없으면 업인(業因)이 생기지 않는다. 삼연(三緣)은 곧 업과(業果) 중에 음(吟살(殺)⋅도(盜)이고, 삼인(三因)은 곧 음⋅살⋅도의 탐욕(貪慾)이다. 음⋅살⋅도는 신근(身根)의 소조(所造)한 업(業)이고, 세 종류의 탐욕은 의근(意根)의 능조(能造)한 의혹이다. 무릇 중생이 윤익(淪溺)되는 이유는 그 음⋅살⋅도 때문이고, 음⋅살⋅도를 행하는 것은 그 세가지 탐욕 때문이고, 세가지 탐욕이 생기는 것은 그 무명(無名)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세상에 불을 끄는 사람이 다만 섶만 더 넣지 않으면 불꽃이 생기지 않는데, 불꽃이 생기지 않으므로 불은 스스로 꺼지는 것과 같아서 무명(無名)을 없애고자 한다면 먼저 음(음)⋅살(殺) 등을 끊어야 한다. 음⋅살 등을 끊으므로 탐욕과 의혹이 생기지 않는 것이고 탐욕이 생기지 아니하면 무명이 자연 없어질 것이다. 무명이 없어지므로 이것이 곧 보리(菩提)이다.
발췌32.
原註 六十六下=그러니 자연과 자연이 아닌 것,
화합과 화합이 아닌 것을 일체 멀리 벗어나며, 또한 벗어나고 벗어날 것도 없는 마음이 없어야 이것이 곧 참으로 공용(功用)이 없는 도(道)며 희론(戱論)이 없는 법이다.
발췌33.
原註 七十=아난(阿難)을 꾸짖어서 고(苦)의 근본을 버리고 무루도(無漏道)를 닦아서 탐애(貪愛)로써 마음과 눈에 머물러 두지 말게 한 것이다.
처음부터 진(眞)과 망(妄)을 가려서 각성(覺性)을 발명(發明)하였고 이에 만법(萬法)을 깊이 궁구하여 의심으로 막힌 것을 터놓아 통하게 하는데 이르기까지 다 최초의 방편(方便)이 된다. 이는 그 진수(眞修)로 하며 금 신(信)과 해(解)가 진정(眞正)하여 인지(因地)의 마음을 삼게한 것이다. 인지의 마음이 이미 진실해야 과지(果地)<30>의 수증(修證)을 원만하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앞의 법은 여기에서 끝내고 별도로 다음 글을 시작한 것이다.
이상은 견도분(見道分)의 마지막이다.
【譯註】
<30> 여기서 말한 인지(因地)는 성불(成佛)하려고 수행하는 지위를 말함이고, 과지(果地)는 수행에 의하여 깨닫는 결과를 얻는 지위를 말함.
발췌34.
原註 七十三=실성(失性)은 나그네 생활과 같고 견성(見性)은 호화로운 주택과 같다. 견성을 했더라도 닦지 아니하면 이는 마치 저택을 얻고서도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같으므로 여래(如來)께서 본래 발심(發心)했던 길을 청하여 불타의 진견(知見)에 들어가기를 희망한 것이다. 「남김없는 열반(涅槃)」은 원만(圓滿)한 과(果)이고, 「본래 발심(發心)한 길」은 원만한 인(因)이고, 「다라니(陀羅尼)」는 원만한 문(門)이고, 「불타의 지견(知見)」은 원만한 지혜다. 이미 견성(見性)하고 또다시 불타의 지견에 들어 가기를 구하는 것은 과(果)를 증득(證得)한 것이다.
발췌35.
原註 八十五=이는 곧 현규(玄竅)가 드러나자 본각(本覺)이 나타난 것이다. 「저기 잇다.」는 것은 곧 나를 객체(客體)로 삼고, 상대를 주체(主體)를 삼아 분명하게 지적한 것이고, 「서쪽으로 향하라.」는 것은 본각(本覺)의 방위를 보인 것이다. 「아(阿)는 무(無)이고 「미(彌)」는 양(量)이고, 「타(陀)」는 지혜(智慧)⋅용력(勇力)⋅수명(壽命)⋅복록(福祿)⋅광명(光明)⋅공덕(功德)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곧 법계장(法界藏)의 주인옹(主人翁)이므로 시방(十方) 삼세(三世)의 일체 제불(諸佛)이 그 성(性)을 돈오(頓悟)해서 불타(佛陀)를 수증(受證)하고, 일체 벽지불(벽支佛)도 그 성을 깨달아서 벽지불을 수증하였고, 일체 보살(菩薩)도 그 성을 깨달아 보살을 수증하였고, 일체 성문(聲聞)도 그 성을 깨달아 성문을 수증하였으며, 아미타불도 아미타불을 닦아서 아미타불을 증득(證得)하였다. 배우는 사람이 음(음)⋅노(怒)⋅치(癡)를 범하면 아미타불은 십만억(十萬億)이나 먼 국토(國土)에 막힐 것이고, 계(戒)⋅정(定)⋅혜(慧)를 닦으면 아미타불이 곧 자기(自己)의 법신(法身)이 되는 것이니, 배우는 사람은 계(戒)를 지키지 않을 수 없느니라.
발췌36.
原註 八十五下=불성(佛性)을 보고자하면 마땅히 시절형상(時節形相)을 관찰해야 한다.
第五卷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修楞嚴經
발췌37.
原註 十七=「六」은 추혹(추惑)이 망령되게 맺힌 것이고, 「一」은 법집(法執)의 미세(微細)한 식(識)이다. 수다원(須陀洹)은 이미 추혹(추惑)함을 끊어서,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이는 六이 소멸된 것이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법집(法執)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이는 아직 一은 없어지지 않은 것이다. 다음의 글로서 증험하건데 이는 곧 바야흐로 인공(人空)<10>을 얻었으나 아직 법해탈(法解脫)은 이루지 못한 것인데 구공(俱空)<11>도 생기지 않는 경지에 도달해야만 이에 一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소승(小乘)은 반드시 六이 소멸 되어야만 一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소승(小乘)은 반드시 六이 소멸 되어야 一이 없어지지만 대승(大乘)은 곧 바로 一이 없어져서 六으로 하여금 스스로 없어 지게 하는 것이다. 숙세(叔世)에서 도(道)를 탐구하는 이가 비록 「오묘함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마침내 이미(離微)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 참으로 一까지 없어진 자를 구해보면 많지가 않은데, 다시 성인(聖人)의 말씀을 살펴보면 모두가 깊이 밝힌 바가있다. 「이미(離微)」는 생(生)⋅사(死)⋅출(出)⋅입(入)을 가리킨 것이다.
【譯註】
<10> 인공(人空):오온(五蘊)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몸을 마치 실아(實我)가 있는 듯이 새각하는 아집(我執)을 공(空)한 것이라고하는 것, 아공(我空)
<11> 구공(俱空):삼공(三空)의 하나. 나라는 관념과 나의 소유물이라는 주관적 미집(迷執)과 물질과 마음의 여러가지에 대한 객관적인 미집을 벗어나 아공(我空)⋅법공(法空)까지 멋어나 제법(諸法)의 본성(本性)에 계합함을 말함.
발췌38.
原註 三十三中=제불(諸佛)이 증득(證得)한 것을 「보리(菩提)」라 하고, 적정(寂靜)하여 상락(常樂)함을 「열반(涅槃)」이라 하고, 허망하지도 않고 벼하지도 않음을 「진여(眞如)」라 하고 허물을 벗어나고 그것을 끊은 것을 「불성(佛性)」이라고 하고, 일체(一切)를 분별하되 불들거나 집착함이 없음을 「암마라식(菴摩羅識)이라 하고, 한가지 법도 성립시키지 않고서 번뇌(煩惱)가 다 없어진 것을 「공여래장(空如來藏)」이라 하고, 만법(萬法)을 환하게 비쳐보되 분별함이 없음을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한다.
발췌39.
이것을 이름하여, 「묘연화(妙蓮華)」⋅「금강왕보각(金剛王寶覺)」⋅「여여불삼매(如如佛三昧)」라 하는데, 손가락을 퉁기는 사이에 무학(無學)을 초월하리라.
오직 이 무비법(無比法)은 시방(十方) 박아법(薄俄梵)의 한 길로 열반(涅槃)에 이르는 문(門)이니라.
原註 五十五=진요(眞要)를 매듭지워 송(頌)한 것이다. 이 법문(法門)은 맑은 데도 집착하지 않고 물들여도 물들지 않으므로 「묘연화(妙蓮華)」라고 하였고, 근(根)과 경(境)에 맺힌 미혹이 견주기만하면 사라지므로 「금강왕보각(金剛王寶覺)」이라 하였고, 아무런 작위(作爲)가 없어서 생각도 잊고 앎도 끊겼으므로 여여정수(如如正受)라고 한 것이다. 이에의해 닦아 나아가면 한 번 손가락을 퉁기는 사이에 무학(無學)을 초월하여 원통(圓通)한 지위에 들어갈 것이다. 시방의 여래(如來)가 생(生)⋅사(死)에서 멀리 벗어나 묘상(妙常)함을 속히 증득(證得)함이 이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 박아범(薄我梵)의 존호(尊號)가 여섯가지 뜻을 갖추었는데, 자재(自在)⋅치성(熾盛)⋅단엄(端嚴)⋅명칭(名稱)⋅길상(吉祥)⋅존귀(尊貴)이다.
발췌40.
原註 六十一上=아리야식(阿梨耶識)에 의해서 무명(無名)이 있게 되며 불각(不覺)이 일어나서 볼 수도 있으며 나타낼 수도 있고 경계(境界)를 취할 수도 있어서 일어나는 생각이 상속(相續)되므로 「의식」이라고 한 것이다. 그 의식에는 또다시 다섯가지 이름이 있다. 하나는 업식(業識)」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무명의 힘으로 불각심(佛覺心)이 움직이는 것이고, 둘은 「전식(轉識)」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움직여진 마음에 의해서 상(相)을 볼 수 있는 것이고, 셋은 「현식(現識)」이라고 하는데, 극서은 일체의 경계를 나타낼 수 있음이 마치 밝은 거울에 모든 색상(色像)이 나타남과 같은 것이고, 다섯은 「상속식(相續識)」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생각이 상응(相應)하여 끊기지 않는 것이다.」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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