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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성 성도에 있는 전촉왕 왕건의 영릉은 고려개국왕 왕건이었다는 주장[스크랩]

영원오늘 2020. 7. 30. 20:22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사천성 성도에 있는 전촉왕 왕건의 영릉은 고려개국왕 왕건이었다는 주장

 

 

 

 

 

 

 



이 사진은 필자(안원전)가 현지에 가 직접 찍어온 사진이다. 당시는 디지털 사진이 없어 아날로그로 찍은 관계로 선명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쓰촨(사천성) 청뚜(성도)의 영릉로에 있는 5대 10국의 혼란기의 전촉(前蜀) 왕(847년∼918년)을 지낸 영릉 왕건묘(王建墓) 묘의 규모는 높이 15m, 직경이 약 80m이고 묘실은 약 23m이다. 왕건은 전촉을 세운 후 성도를 도읍으로 정하였었다. 능묘의 문에 들어서면 3m 높이의 적인상과 중앙 관좌측면에 각각 표정이 다른 24명의 주자(奏者)로 이루어진 궁전 악대와 골격이 우람한 12인의 역사상의 석조가 있다.

촉한시대의 음악 예술적 귀중한 자료 중 하나.영릉에 있는 영릉 박물관에 소장된 왕건이 찼던 옥대와 왕건이 사용한 옥쇄함. 현재 반도 식민사학의 강단사학계에서는 사천성의 전촉왕 왕건과 반도 고려왕건을 동명이인으로 보고 있으나 방촌 임균택, 율곤 이중재, 원휘 오재성(특히 대륙백제, 대륙신라설 주장), 정용석을 위시한 재야 민족사학계에서는 개성은 고려의 허도이며 고려는 대륙까지 근거가 있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고 임승국 교수도 대륙백제를 언급:대륙백제는 말한다Click here!)

특히 단재 신채호 선생, 백암 박은식 선생을 비롯, 해방 이후 한암당 이유립, 문정창, 복초 최인 등의 민족사학자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방촌 임균택(대전대 설립자, 철학박사. 대전대 부총장 역임.세계아카데미 추천 세계저명 석학 500명중의 하나로 추대. 하바드 동양학 연구소 옌칭연구소 초대 및 본 연구소에서 한민족 대륙사에 대한 그의 저서 <한경대전> 9부작 심층 연구중.대륙 지나사학자들도 그의 저서를 연구중이라 함) 선생은 사천성 성도 영릉의 왕건묘가 바로 우리의 고려왕조 왕건묘라 한마디로 잘라 일축하고 고려는 한반도에 없었고 그 수도는 쓰촨의 청뚜(성도)였으며, 섬서성 서안(서경)으로 옮겼다가 지금의 산서성 임분(요,순의 수도)인 평양으로 천도했다가 북경인 연경(북평:평양)으로 다시 옮겼으며 다시 선양(심양:25대 충렬왕때 천도)으로 가서  고려말 주원장에게 반도로 쫓겨들어가 마침내 이성계에게 멸망했다고 주장한다.(후일 자세히 소개한다) <몽고왕조실록>에 25대 충렬왕 이후 공민왕까지 심양왕으로 노국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였다고 왕실계보에 나타나 있으며 공민왕자신이 노국대장 공주를 왕비로 맞아 심양왕으로 통치했었다 한다. 그 후에 고려는 명의 주원장에 의해 망하고 반도 개경으로 쫓겨들어가 이성계에 의해 반도 제후정권으로 교체되었다 한다.

실제 조선왕조실록 세종조를 살펴보면 마치 세종의 필생의 사명이 고려사 개찬작업인듯이 세종 제위 전 기간에 걸쳐 고려사 개찬작업을 벌였음이 나타나 있으며, 고려사가 조선사의 반도사에 맞추어 모든 지명이 조정된 듯한 느낌을 준다.이방원이 아들 충녕(세종)에게 유언으로 문치시대를 열라 했다는 말은 일일이 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많은 정황증거와 함께 바로 고려의 북벌파 최영을 제거하고 세운 이씨조선의 비정통 반도정권을 사관으로 정립해 정당화하라는 주문으로 재해석될 수 있으며,  고려사의 편찬과정 또한 이성계의 1급 참모 정도전으로부터 정총, 양성지, 하륜 등을 거쳐 대를 이어 개찬되었음이 드러나고 있고 (김정권 저서, 참조 안원전 21세기 담론 참조) 현재 수없이 개찬되어 진위를 알 수 없는 <고려사>(인멸되어 양성지의 고려사가 아니다)에도 왕건은 작제건 신화와 함께 당왕실의 숙종의 혈손(고로 이씨)으로 분명히 나오고 있으니, 알고보면 참으로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국내에서 정사로 여겨지는 고려사에서 고려왕건은 대륙과 연관이 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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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명사[明史], 권320. 외국전[外國傳], 외국[外國]1, 조선[朝鮮]  원문 - 후당시왕건대고씨겸병신라백제지도[後唐時王建代高氏兼倂新羅百濟地徒]  후당때 왕건이 고씨대신 신라, 백제의 땅과 백성을 모두 취했다.  거송악왈동경이이평양위서경[居松嶽曰東京而以平壤爲西京]  [왕건이] 살았던 송악은 동경이며 평양이며 서경이다.
*삼국사기 37권-지6-지리4-00  雜志第六. 잡지 제 6. 地理四. 지리4. <高句麗>·<百濟>. 고구려*백제
  #37卷-志6-地理4-01  전략.........以此言之, 今<大同江>爲<浿水>대동강이 패수 , 明矣. 則西京之爲<平壤>, 亦可知矣. .... 則西京之爲<平壤>, 亦可知矣.서경이 평양이란 것을 역시 알수있지 않는가
*경인문화사 간행 해동역사 하권 627쪽 기록 해동역사 속 권 제 십(海東繹史 續卷 第 十) 烈水 韓 致奫 術(열수 한치윤 술) 지리고 십 (地理考 十) 高麗 一 (고려 일) 彊域總論 (강역총론) 高麗圖經(고려도경);高麗南隔遼海西距夭水北接契丹舊地東距大金又與日本流球耽羅黑水毛人等國(고려남격요해서거요수북접거란구지동거대금우여일본유구탐라흑수모인등국)-고려는 남쪽으로 요해에 막혀있고, 서쪽으로 요수에 접하고,북쪽으로 거란의 옛땅에 접하고,동쪽으로는 금나라 그리고 일본, 유구, 탐라, 흑수모인등의 나라에 접해[본문;거距;떨어져 ]있다.
*그 나라에 있는 서울의 1.동북은 연산으로부터 육지로 연결되어 있는 도로를 쭉 따라 요[遼]의 동쪽까지의 경계가 무려 3790리이고 만약 바다로 나간다면 하북성으로 나가야 한다.(하북성은 북경밑임.) 京東淮南兩浙廣南福建皆可旺(경동회남양절광남북건개가왕)(그 나라)서울 2.동쪽은 회지방의 남쪽인 절강성과 광동성의 두성(省)이며 3.남으로는 복건성으로 모두 갈 수 있다. 今所建國正與登來濱隸相望舊封境東西二千里南北一千五百餘里(금소건국정여등래빈예상망구봉경동서이천리남북일천오백여리)지금 건국한 곳에서 평정한 등주와 봉래, 빈이 속하여 서로 보이는 옛 봉토의 경계까지 동서 2000리, 남북 1500여리로今旣병新羅百濟東北稍廣(금기병신라백제동북초광) 지금은 이미 나란히 있는 신라 백제의 동북보다 약간 넓다. 其西北與契丹相接昔以大遼爲界後爲所侵迫乃築來遠城以爲 固然亦恃押綠以爲險也(기서북여글란상접석이대요위계위후위소침박내축래원성이위저고연역시압록이위험야)위촉오3국과 동이5국 고대지도 우적도Click here!

중국 송본지리지장도 및 정사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한
- 지나(중국) 3국(위, 오, 촉) - 동이 5국(고구려, 백제, 사로, 가라, 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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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촌은 공양왕때 부터 고려왕조의 주력세력이 약화되어 고려말에 중심세력이 반도 개경으로 쫓겨가 정몽주 역시  반도 개경의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죽은 것이라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한(지나) 중심의 손문이 동이 중심의 왕조(청,명,원,고려,금,요,발해,통일신라,당,송,고구려,백제,기자조선 등 혈통상 동이 중심왕조) 멸망이후, 국민당의 민국정부를 세웠으나, 국민당 정부의 장개석이 공산당의 모택동에게 쫓겨 그 정통성을 빼앗긴것과 같이 천자국 고려왕조도 홍건적을 이끈 주원장에 의한 "명(조선)"에 의해 수도 선양(심양)에서 멸망하니 고려왕실과 중신은 반도 개경(개성;따라서 허도)으로 망명하여 마침내 주원장에게 머리굽힌 협량한 반도파 이성계에게 멸망당했다는 것이다.(방촌은 당시 원나라는 동이 천자국 고려왕실과 함께 같은 동이 주류국으로 일종의 형제국 관계로 주원장의 방계(비정통) "(유)명(조선)"에 의해 동시에 망했다고 보고있으며 천자국 고려의 멸망은 천자국의 정통을 명에게 넘기고 이성계에 의해 조선제후국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천자국의 지위는 청으로 계승되어 광서제까지 이어진다(증산도 도전 황극신 공사 참조))

천자국의 정통성을 가진 고려가 망하고 마침내 주원장 세력휘하로 자진해 들어간 이성계 조선에 의해 정통성이 왜곡되었다는 얘기다. 이성계는 여진족이었지만 대륙사관으로 보면 같은 동이 한 민족이라 문제될 것 없으며 주원장 역시 우리 한겨레 핏줄로 아예 명나라를 명조선이라 칭호하는 방촌은 종교적인 금산사가 아닌 정치사적으로 견훤이 신검에 의해 유폐된 금산사는 감숙성 고란현 서북쪽 백탑 산중에 있다 하고(금산사는 남경 위 양자강가에도 있음또다른 대륙 전주 금산사 Click here!),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이 있었던곳은(강감찬의 "감"도 실은 일본식 표기로 원래는 강한찬이 옳다. 여기서는 그대로 표기함) 사천성 부능현 동쪽이라 하고(강동6주도 사천성, 산서성 등 대륙소재), 고려의 강화 천도는 반도내 강화도가 아닌 호남성 맨아래 왼쪽에 있는 강화현으로 당시 서경은 반도내 평양이 아닌 섬서성 서안으로 개경 역시 반도의 개경(현재(개성)이 아닌 산서성 평양 분주(현재의 임분)라 하고 당시의 한양성은 반도내 지금의 서울 한양이 아닌 복건성 포성현이라 말한다.

 

 

 



방촌 임균택이 고증하는 인류 문명 발상근원지(천산곤륜 문명이동경유도)와 백제 최전성기 및 대륙고려 최전성기 강역도

  방촌 임균택이 집대성한 <한경대전> 9부작의 대륙사 대강을 그리면 다음과 같다.




대륙 상고사 대강 연표Click here!최근의 지나 대륙사학자들은 화하족의 조상으로 삼아온 기존의 황제헌원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껴서인지 대륙을 동이, 묘만,화하로나누고 이들의 조상을 각기 신농(동이), 치우(묘만), 황제(화하)로 분류해 지나족의 공동조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동이계가 석권한 대륙상고사에 묘만계, 화하계의 3분법 "물타기 분류"를 시도하는 이러한 화하사관에 방촌 임균택은  " 자치통감(資治通鑑) 193권 당기(唐紀) 9권에 "중국여근본사이(中國如根本四夷)-중국의 근본은 사이(四夷)"라는 기록과 또한 자치통감 195권 당기(唐紀) 11권에 기록된 "중국근간야사이지엽야(中國根幹也四夷枝葉也)-중국사람들의 뿌리는 사이(四夷)의 가지와 잎에 해당한다" 라는 율곤 이중재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상고대륙을 뒤덮고 있었던 그 근본은 모두 동이족 묘민이었다"고  말한다. 방촌 임균택은 현실적인 지나 화샤의 시작을 남방계 객가인 출신의 손문의 민국정부로 보고 있으며(북방 동이족 주류 왕조를 꺾고 남방 비주류 동이족 국가의 현대사적 최초출현) 그 정통을 이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마저도 모택동으로부터 대만으로 쫓겨들어가 그 정통을 공산당 모택동 정부에게 빼앗기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즉 한(지나) 중심의 손문은 소위 청,명,원,고려,금,요,발해,통일신라,당,송,고구려,백제,기자조선 등 혈통상 동이 중심의 왕조 멸망이후, 민국정부를 수립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방촌은 지나 중국을 한족이라 규정하는 것이 아주 잘못된 것이라 지적한다.

즉 지나 한족(漢族) 이외의 여타민족을 소수민족으로 분류해 55개 소수민족으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상고 대륙사를 크게 양분하면 대륙 전체는 동이 제족이 석권하고 있다가 하우 (夏禹)의 아들 계(啓)에 이르러 주류와 비주류로 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중원대륙은 조이족인 동이 주류계이며 동이 남방 지류 지나계란 진나라 말기에서 유방의 한나라에 이르러 구강(九江)이 도읍지로 정착하게 된 후, 그곳을 중심한 남방계 삼국인 촉(蜀),오(吳),위(魏) 그리고 진(晋)-수(隋)-당(唐)-오대(五代)-송(宋)-명(明)이 인도지나계로 연결됨으로써 남방 지나계의 시조가 동이족인 하우 (夏禹)의 아들 계(啓)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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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오재성의 대륙사 고증 역저들이다.

 



30년간의 연구결과를 집대성한 방촌 임균택 저서 한경대전 9부작은 상고 대륙사의 근원이 환단 동이구려족이었음을 밝히고 현재 대륙의 모든 소수민족이 실은 상고 동이 제 족의 형제족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고려는 반도에 없었고 대륙에 있었다는 주장을 대륙의 상고사료를 총동원하여 조목조목 입증해 체계화한 그는 9부작 <한경대전) 중 그 정수를 뽑아모아 검인정 교과서 시대를 대비 <우리역사(한국사)>를 따로 내놓아 주목을 받고 있다. 한편, <高麗는 三國과 더불어 한국땅에 없었다!   支那大陸과 한반도 그리고 日本열도는 高麗가 통일했다. 그래서 '코리아'라는 단어가 태어났다.>는 율곤 이중재의 저서<새고려사>는 다음내용을 담고있다   1. 왕건은 877년 정유년 음력 1월 14일에, 중국 사천성 성도(成都)  남쪽인 한주(漢州) 송악군(松嶽郡)에서 태어났다(高麗史節要 참조).  2. 왕건(王建)의 조상은 고구려인(高句麗人)이다. 漢, 梁, 後晋 唐나라가 王建의 조상나라다. 3. 고려가 들어서자 신라유민들이, 서역(西域)인 돌궐로 도망. 4. 왕건의 묘는 사천성 성도에 지금도 있다.(현지답사 결과 사진으로 제시) 5. 고려의 도읍지, 엄청난 강역. 6. 강감찬 장군은 강한찬(姜邯贊)이다.  7. 고려의 흥망과 몽고의 침탈. 8. 왜구(倭寇)들의 침탈과 한양 천도설.9. 조선왕조가 건국되는 과정.이성계(李成桂)의 고향은 함주(咸州)이다.함주는 함경도 함흥이 아니라 하남성(河南省) 통허현 의주(義州)이다. 오재성은 숨겨진 역사를 찾아서 / 리역사 쇠집 / 동이문자의 옛음과 작법 / 광개토평안호태왕비연구/ 지도로 보는 우리의 역사 / 백제는 중국에 있었다 / 우리는 동이민족이다 / 삼국지 동이전은 황해서쪽의 기록 / 중국에 사로신라가 있었다 등의 저서를 통해 한민족 대륙사의 실체를 고증하고 있다.
고려도경의 놀라운 기록Click here!



필자는 역사를 파면 팔수록 이러한 대륙사에 대한 실체들이 강력한 진실로 다가와 종교적 충격에 버금가는 엄청난 충격으로 인해 자랑스런 조상의 감동스런 과거 역사와 일제식민지 반도 노예사학을 뿌린 이병도 신석호의 죄악에 희비가 엇갈려 소스라칠 수밖에 없었으며 한민족이 경험하고 있는 이러한 모순적 현실에 몸둘 바 몰랐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 보라. 모든 이가 성군으로만 여기고 있는 소위 세종대왕이 고려사 왜곡의 주범이라는 아이러니한 사실을! 역사는 실로 아이러니하게도 선악,명암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차라리 유장한 동시에 냉엄하고도 비장한 것이다. 어떠한 역사시기가 되었든 당대의 특정한 약점을 숨기고 체제와 권력을 정당화하기위해 역사적 진실을 수면아래 영원히 감추려 한다는 점에서 모든 시기의 역사는 동일할지 모른다. 조선왕조실록은 이씨조선 왕조 초기 고려왕실 후예와 수많은 고려 유민을 잡는 족족 서해안에 배를 띄워 한밤에 산 채로 수장시켰음을 보여주고 있다.(와중에 살아남은 자가 구슬 옥씨와 온전 전씨가 되었다는 건 족보학에도 나온다)  동서고금 역사상 어느 정권도 동족인 전 왕실의 후예와 유민을 이처럼 철저하게 이잡듯이 잡아 송두리째 수장시킨 예가 없다. 이는 고려역사의 완벽한 역사왜곡을 위한 서막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생각케 하는 대목이다.

하여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한국사의 중추인 고려사가 통째로 허구였으며 어느 특정시기의 통치자들에 의해(태조 이성계로부터 태종 이방원 세종 이충녕) 수 십년간 조직적으로 조작되고 은폐, 왜곡되었다는 사실은 실로 가공할 충격의 차원을 능히 넘어서는 것이며 이를 왜곡한 장본인이 우리가 성군으로 여겨왔던 어느 특정인이라고 생각하면 실로 그 충격의 크기는 능히 평생 자애로운 의지처였던 친부모가 장년이 되어서 양부모였다는 사실을 갑자기 접한 만큼이나 충격과 혼란일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러한 대륙사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한, 해방후 이병도 신석호가 길러낸 반도 식민지 노예 사학자들이 뿌려놓은 역사왜곡에 의해 소위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이루어지고 있어도 말한마디 벙긋못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참고;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이란 시 탄생의 진짜내용:이시는 타고르가 일본에 왔을 때 한국의 모 신문사 기자의 부탁으로 쓴 시이다. /타고르는 인도의 시성이다  그는 역사 학자며 초창기 부터 전해 내려오는 흰두교 경전 베다 연구의 거목이며, 철학자며, 교육자며,정치가며,외교가였다.그가 베다를 연구 하다가 발견 한 아리안족의 인도 진입 과정을 읽게 된다. 아라랏 고개를 넘어 검은 바다를 지나 우랄산맥을 넘어 타림분지 를 지나 흰두쿠시 산맥을 넘어 왔는 아리안족의 행적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함께 길떠난 무리의 주류를 추적하게 된것이다. 처음에는 일본이라 생각 했는데 한국의 단군 신화를 접하고 베다의 나타난 단군의 나라와의 수많은 교류와 그들의 가르침을 발견하고 그게 우리나라라는 사실을 일본에 오기 전에 알게 되었다.그래서 그는 참으로 힘 없고 인구도 얼마 안 되고 한 우리 나라를 창조주가 계획한 숨겨논 앞날을 바라보고 이나라를 그토록 극찬 할수  있었다 한다./ (타고르의 자서전에서 발췌) 필자는 타고르의 사관이 일만년 한 민족 대륙사의 핵심을 꿰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방촌의 사관은 대국적으로 타고르의 관점을 밝힌 대동이 사관이며 율곤 이중재의 사관 역시 이러한 관점에 서 있다고 보고 있다. 현재 모든 동이족의 상고 고고학 유적지가 대륙에 있는 상황에서 상고시절 한반도는 동이족 문명의 숨결이 빛깔만 비추어진 외진 구석에 불과했던 곳이다. 대륙사관은 일제의 반도 노예사관의 관점으로 보면 사료부족으로 인해 많은 문제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진리의 광명은 반드시 어둠을 몰아낼 것이다.

*고지도1http://www.coo2.net/bbs/zboard.php?id=oldmap&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5&PHPSESSID=b46713169ca0674ed625ccae114f1abd
*고지도2http://www.coo2.net/bbs/zboard.php?id=oldmap&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PHPSESSID=b46713169ca0674ed625ccae114f1abd
*고지도3http://www.coo2.net/bbs/zboard.php?id=oldmap&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7&PHPSESSID=b46713169ca0674ed625ccae114f1abd
*일요 스페셜 동영상-20031012    한·중 역사 전쟁 - 고구려는 중국사인가 Click here!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Click here! *중국 光明日報의 ‘고구려 역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試論’(원제 試論高句麗歷史硏究的幾個問題)Click here!*반도사와 대륙사의 의문Click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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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진실은 우리의 대륙사가 너무나 엄청나서 현재의 상황에서 이를 주장하면 머리가 반쯤 돈 정신병자가 되거나 완전히 바보가 된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장개석이 독립운동을 하던 이시영(전 부통령) 에게 자신의 조국 상고사는 제대로 알고 계시냐는 그 알듯 모를듯한 화두같은 말한마디가 항상 우리의 현실과 대비되어 나타나는데 그 대답은 장개석 스스로 모택동에게 쫓겨 대만으로 도망갈때 북경의 모든 상고사서와 보물을 싹쓸이해 가져간 것을 통해 해답이 내려졌다고 본다. 항우가 아방궁의 보물만을 먼저 손에 넣었다면 유방은 가장 먼저 손에 넣은 것이 역사를 비롯한 각종 문서였다.(이것이 한무제때 동이족 주류의 역사를 마름질해 왜곡한 사마천의 사기가 된다. 필자가 섬서성 연안 황허(황하) 호구폭포에서 황허변을 따라 서안으로 내려오며 보니 황허 강변에 세종로 이순신 장군 동상의 10여배 크기(은진미륵 크기)의 사마천 동상이 있음을 보고 묘한 묵상에 잠긴 기억이 있다) 장개석은 아마 당시 이시영씨에게 겉으로 표현은 안했지만 다음과 같이 물었는지도 모른다.

-대륙의 주인이었던 당신 겨레의 과거를 알고 독립운동을 하는게요? 당신들의 일본 식민지 역사교육은 반도 사학인데 동포들은 후대에 뭐가 되겠소. 어서 나라를 독립시켜 제대로 교육이나 시키시오. 역사는 역시 힘이 있어야 하오. 우리 대륙의 역사는 다 동이의 역사인데 크게 둘로 나누면 북방 조이족 정통 동이 주류와 하우의 아들 계에 의해 시작된 남방계 동이족 지류가 남방 객가인 출신 손문 선생의 민국건설로 비로소 현대사에 있어 우리 화샤(화하) 역사의 실질적인 시작을 했소. 정치적으로는 우리가 대일본 식민지 제국주의 전쟁의 동지이지만 내피역사로 보아 실상을 알면, 우리 민국과 당신 조상의 왕실과의 관계는 남의 둥우리에 알을 까는 뻐꾸기의 관계요. 그나마 모택동은 북방 동이족 주류역사에 쐐기를 박은 손문선생이 씨뿌린 화샤의 국민당 역사를 방해하고 있으니 결론적으로는 모택동과 북방동이의 주인공인 당신나라는 메두사의 두 얼굴이요. 당신들의 섭리사 속에는 모택동이 받은 무슨 역사의 섭리, 즉 먼 훗날 동이의 주체적 역사 종주권을 쥐는 프로그램이라도  있는 것이요?(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이것이 증산도의 위대한 북한 공산화의 금강산 공사이며 프리메이슨 세력의 기획에 의한(막스 레닌은 유대인이었으며러시아 혁명 참여자 유대인 족보 현황Click here! 로베스삐에르 역시 프리메이슨 얼굴마담이었다)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헝가리 혁명에 의한 공산화 프로그램이다)-

*주은래 중조관계 역사관Click here!
현재 해방이후 역사교육을 받은 세대는 고구려,백제, 신라,가야하면 그야말로 고식적으로 또는 공식외우듯 상상하면서 역사를 대하며 한반도에 그리는 것이 기본베이직이라는 사실에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음을 안다. 각설

동북공정(녹둔도 문제-사할린)Click here!

삼별초가 도망 간 제주는 산동성 거야현인데 우리의 제주도와 한문이 똑같은 제주 제북군이라 했다 하며(방촌의 사관으로 상고사를 보면 서긍의 고려도경에서 송의 사신이 임안(항주)의 전단강을 배타고 지나며 풍광좋은 고려의 땅을 지나고 있다는 서술이 곧바로 이해된다. 따라서 삼별초난이라는 것은 반도내 강화도에서 지금의 제주도로 간 것이 아니라 실은 호남성 남쪽에 있는 강화에서 산동성 거야로 도망갔다는 얘기가 되겠다.(최후의 저항자 김통정 사당을 제주도에 세운 것도 얼마 안된다)  고려의 정사인 정인지 고려사는 왕건이 당나라 숙종의 혈통임을 기록하고 있으며 세종의 학우이자 신료로 세종의 명을 받아 극비리에 사서를 대대적으로 소각한 김문기 가문의 유훈은 개성이 허도임을 밝히고 있고

북벌파 최영을 친 이신벌군의 역적 이성계부자가 주원장의 유교를 들여와 존주사대를 통해 지나를 천자로 모시는 대신 제후로서의 통치적 명분을 얻고(민족 사학자 복초 최인은 이신벌군의 역적이자 북벌파 최영을 친 사대주의자 이성계가 북벌파를 치고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세운 조선왕조의 통치명분을 얻기 위해 주원장에게 넙죽 엎드려 조아리고 천자국의 지위를 내팽개치고 중화 사대주의의 썩은 망건을 받아써 중화의 노예가 되었노라 말하고 있다)동이족 혈통인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저지른 것 처럼 여진족인 이성계 가문을 숨기기 위해 대대적인 분서갱유를 저질렀다고 한다. 정용석은 이성계의 출생지 및 성장지에 대해 이성계는 타타르인이라는 제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http://www.cheramia.net/board/data/bbs9/歷代王朝領土變遷圖.ppt
대륙사를 보여주는 고지도Click here!
http://www.lib.meiji.ac.jp/perl/ashida/search_db?loc=7&from=loc
현 중화부도에서 밝히고 있는 실로 충격적인 상고 고구려 강역 실체도와 통일신라 강역도 및 조선 청나라 국경. 고구려와 병립했을때 당의 강역과 고구려를 없애고 소위 통일신라를 건설했을때 당의 위치와 통일신라의 강역을 비교해 보면 된다. 고구려의 강역이 이와 같을때 율곤 이중재가 지적하듯이 비로소 삼국사기 고구려편에 보이는 고구려 24대 양원왕 8년때 장안성에 성을 쌓고(축장안성) 25대 평원왕 28년에 장안성으로 수도를 옮겼다(이도장안성)는 기록이 진실이 될 수 있다.또 현 중화부도에서 밝히고 있는 상고 고구려 강역 실체도의 시각에서 당태종과 연개소문에 대한 갓쉰동전의 내용 즉, 규염객, 장삼랑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면 아! 그래서 지금까지의 반도사관으로는 이 이야기의 실체를 이해할 수 없었구나 하고 그 내막을 알 수 있다.Click here!
*아래 지도;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집필당시 고려땅에서는 알수 없는 지명이라고 기록한 것이 300개가 넘는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살수" 조차도 알수 없는 지명이라 하였는데 언제 한반도 "청천강"으로 둔갑이 되었는가 ?숭산, 독산, 항성, 잠산, 사비, 석성, 덕안, 평원 등등 김부식이 모른다고 한 지명이 중국대륙에서 상당수가 확인되고 있다 다음 지도는 삼국유 미상지분 중 중국대륙에서 발견한 일부지명이다(송준희)


-사학도는 역사의 사실(史實)들을 연구 발굴함에 있어 지금껏 조명(照明)되앉던 쪽에 중점을 물 필요가 있다. 특히 국가나 민족의 기원(起源) 및 왕조(王朝)의 시원 문제에 대해서는 각별한 살핌이 있어야한다고 보여진다.역사에 있어 국가와 민족의 기원에 대한 사화(史話)나 왕조의 시말(始末)에 대한 기록들에는 다른 분야에서 보다 심각한 조작(造作)이 자의 타의로 수반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가(史家)들이 나름대로의 의미 있는 사관(史觀)을 보고자 한다면 역사 속의 긍정과 부정을 모두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기록에 있어 곡필(曲筆)이 필요에 의해 어떻게 생기었으며 해설 속의 에고이즘 존재 이유도 알게된다. 어쩌면 사가(史家)들이 선행할 의무는 역사서라는 기록물들의 실체를 긍정과 부정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닌 모두를 이해하는 것이어야 할 것으로 보여진다. 필자는 여기서 14C말 이성계(李成桂)란 군벌(軍關)에 의해 시작되는 조선왕조(朝蘇:李民)에 대한 시원(始原)을 새로운 관점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근세(近世)에 해당하는 왕조의 사건이자 인물들이기 때문에 왕조의 개국성격과 인물들에 대한 긍정과부정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많은 개진(開陳)이 있었기 때문에 이미 밝혀져 있는 내용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고자 한다.

단지 이성계란 폭력 군벌이 창건했다는 조선국지(朝解國地)의 시원지와 창국장소에 중점을 두어 14C말 조선의 개국을 말하고 싶고, 이성계(李成桂)일족의 고향 땅과 출향지(出椰地)을 기준으로 14C말 이후의 조선역사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역사의 성격은 연속성을 논하고 싶어하지 토막 토막의 원리를 가지고 있지않다. 토막이라는 부분(部分)은 결국 전체(全體)속에 녹아있기 때문에 역사에 있어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문제와 의문을 해소하는데 주안점으로 작용한다.

[1] 개국 태조 이성계(李成桂)에 대한 내용올 보면, 그를 '3척검두안사직(三尺劍頭安社樓)이라고 쓰고 있다. 안사(安社)는 이성계의 고조부로써 (元)의 다루하치(達種花亦)였으며 고려의 화주(和州)이자 원(元)의 쌍성(홈총관부의 총독(집정관)을 했던 인물이라고 쓰여져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이성계는 삼척검(三尺劍)올 휘두르는 무관집안 이안사(李安社)후손으로, 조를 세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성계의 부친 환조 이자춘(李子春)까지 몽고인(고려인이 아님)으로써 원(元)나라에서 부여한 관직(삭방도병마사)을 했었다. 이성계의 아버지 몽고식 이름은 오노사불화(吾暑思不花)였다.
이성계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李安社)가 몽고인으로써 몽고(원)에서 고전지역에 파견한 72명의 달로화적(다루하치)의 한사람이었다. 그가 집정관(점령지 총독)으로 부임한 곳이 쌍성(雙城)이였고 고려의 화주(和州)였던 것이다.이성계에 이르기까지 5대(五代)가 쌍성의 군벌 및 호족(豪族)으로 군립하고 있었고, 이성계의 외가(外家)는 쌍성부 소속의 영홍진(永興鎭)에 있었다.

이성계의 출생지는 영홍(永興)이고 집안의 거점지는 쌍성(雙城)이란 두말할 펼요가 없으며 이성계 직계 선조들의(고부모까지)묘소도 모두 쌍성과 영홍에 있다고 세종실록지리지는 쓰고 있는 것이다.기존의 이성계 씨족사도 여기까지는 다른 씨족사와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현격한 차이를 두고서 용의 눈물 이성계 집안의 웅지의 날개와 광대한 스케일은 해설자(20C 식민통치 정부의 사학자 및 그들의 후예 관변사학자)들의 고약한 편견과 편집으로 반도로 곤두박질 치면서 일개의 역성혁명(易姓草命)정부 정도로 전락시킨다.고려의 웅대한 영혼과 1만리의 광대한 영역을 역사해설가들에 의해 반도에 입력된 이상 고려정부를 이양 받은 14C말의 역성혁명정부 성격의 조선국이도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성계 집안의 주 활동지역과 거점지 쌍성(雙城)과 영홍(永興)은 길도(成吉道)가 된 것까지는 좋았으나 한반도 함경남도(成鏡南道)지방이어 버렸고, 이성계 출생지를 포함하여 조선 범위를 축소하면서 함경남도 후과 영홍으로 축소 되여 반도 동해안 함홍만(成興體)지역에 자리 매김 하도록 만들었다.이말은 곧 이성계의 고조부(高祖父)는 몽고가 고려를 점령한 후 72지역에 둔 72명의 달로화적(직업통치 섭정관, 점령지 총독) 중 한사람이 되어 반도의 함흥에서 쌍성총관부 총독이 되었으며 후손들이 군벌과 호족의 위치로 있을 권력을 쟁취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다.

이성계의 출생과 활동 고조부 이안사에서 출발하는 이성계벌들의 주점기지가 쌍성(화주)과 영홍인 것만은 틀림이 없지만 영흥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다. 이성계를 비롯한 선대(先代)가 역사곳의 동북면(東北面) 또는 삭방동(朔方道)의 만호(萬戶)와 병마사를 역임한 사실은 분명히 있지만 그 장소는 한반도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모두 대륙의 고려땅과 조선 땅에서 있었던 주연배우의 교체 과정중의 한 내용들이었다. 이성계 고조부의 쌍성(雙城:고려의 화주)의 중심은 지금의 중국대륙의 호화호특시(呼和浩特서j:화림지역)가 되고 주 활동지역은 찰합이(察合爾) 지방이 된다.

이성계의 출생지 영홍(永興) 도호부이자 진(鎭)의 지역은 현서성 우림(械林: 연안, 횡산이 포함되는 보안주(保安州)지역에 되고, 내부와 산서성 북서부(보덕 하곡)섭서성 북부가 포함된다.바로 이 지역에서 이성계의 선조들은 기반을 닦았고 이성계의 출생도 이루어져 남벌(南佳)과 북정(北任)을 거듭하여 성공함으로써 고려의 막강한 군벌이자 세력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이성계의 고조부모의 능(隆)인 덕릉(德陸)과 안롱(安陸)은 타타르인이 주 활동 거점지 달단동(鍵輯洞)에 있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쓰고있고 이성계의 출생지이자 성장지였던 영홍에는 성(萬里長城)이 통과하고 있었으며 부(府)의 북쪽에는 만리장성의 관문(關門)이 있었다고 정사서가 쓰고 있다는 것도 새롭게 알아두자.

태조 이성계는27세(1362년, 공민왕11년)때 사병(私兵:군벌의 개인군대)2천명으로 홍건적(紅巾賊)이 점령한 고려의 도성(都城)올 회복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고, 28세(1363년)가 되는 해에 동북면(東北面)병마사가 된다. 35세(1370년)가 되던 해에는 원(元)나라의 동녕부(東寧府:고구려의 명양지역 현재의 섬서성 서안지역)를 평정해 버리는 전공도 세운다.

그 후 왜(優)의 침략을 방어하는 공도 세우다가 53세가 되는 해(1388) 4월(음력)에 요동(遭東)정벌, 즉 북벌(北파)군 우군(右軍)도통사가 되어 5월에 회군한 후 최영(崔瑩)과의 권력싸움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장악한다. 그 후 삼군도총제사(三軍都總制使)와 문하시중(門下待中)을 거쳐 선위(輝位)의 형식을 벌려 14C말의 조선국의 태조로 등극하는 인물이 이성계다.

영웅주의 사관에서는 늘 영웅을 배출하기 때문에 역사의 사건이 있을 때마다 영웅이 출현한다. 이성계가 홍건적을 평정 퇴치하고 28세 때 대장군이 되어 동북면(東北面)을 총관하는 병마사(兵,馬使)가 된다는 것은 28세 때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을 평정한 공로로 병조판서가 된다는 남이(南펌)의 등장과 다를것이 없다. 또한 전한의 위청(衛춤)과 곽거병(뚫去病)이 흉노(예娘)를 정별한 공로로 20대 초반과 중반에 표기대장군(종2품)이 되었다는 내용의 성격과도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성계가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고 권력을 장악하여 역성혁명(易姓草命:왕조의 성씨를 바꾸는 무력 쿠데타)을 이루는데 기초 발판이 되었던 홍건적의 고려도성 전투에서의 승리와 회복, 사병(私兵)을 이용한 혁혁한 공로에 있다는 것이다.


이성계의 아버지 자춘(子春:환조)은 공민왕 4년(13$년)에 와서야 처음으로 고려사에 등장하는 인물로 동북면의 쌍성(雙城) 천호 자격으로 고려조정에 인사(來朝)를 차리러 온다. 고려정부에 이때 처음 래조 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공민왕4년 이전에는 쌍성지역이 고려의 통치가 미쳤던 지역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고려시대에 있어 이성계의 출세 발판은 홍건적의 평정에 있고 권력쟁취는 요동(遭東)정벌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공민왕과 최영 홍건적과 요동 때문에 14C말 이씨(李民)의 조선국 정부가 출현할 수 있었다고 보아도 되는 것이다.

14C중반 원(元)나라 말기(末期)역사서에 등장하는 홍건적(紅巾城:홍건군)봉기의 시작과 활극의 무대는 고려(高麗)의 강역과는 관련이 있어도 한반도와는 관련이 없다. 역사에 있어 강역이라 하는 지리(地理)는 연극배우로 말하면 무대에 해당하기 때문에 지리의 판정은 중요하다. 역사서(배우들과 연극 무대의 각본)에 쓰여진 지리(기후 및 토질 등 땅의 구조)를 모르고서 역사를 논할수 없고 말할 수도 없다. 그것은 땅에 대한 정보와 확인도 없이 농부가 농사를 지어 품질 좋은 농산물을 미리 생각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홍건적들의 봉기 원인은 몽고인올 비롯한 서역과 북방의 색목인(色目人:눈에 색깔이 있는 종족)우대 정책에 따라 격하 소외된 종족들에 대한 억압 및 차별 정책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원(元)나라에 의해 가장 멸시를 받고 소외되었던 지역과 종족들은 양자강(楊子江)지대의 남북(南北)지역과 남송(南宋:절강성 항주, 소홍)의 민족을 비롯한 남만{南蠻)인들이었다.

몽고(원)정부는 중앙과 지방주요 정부의 중추요직올 몽고인과 섹목인이 차지하여 정치와 군사력올 통한 지배권 확립올 도모했기 때문에 그 밖의 종족과 민족들에게는 돌아갈 요직이 없을 정도로 전횡의 시대를 구축했다.

물도 고여있어 오래되면 부패하듯이 정권을 장악한지 150년이 지나자 원나라 내부로부터 부패하여 권력싸웅이 벌어지고 외부(外部)에 신경올 쓰지 않는때가 되자 드디어 차별과 억압에 대한 저항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것이 홍건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홍건적의 봉기는 처음부터 고려에 목표를 두지도 않았으며 반도와는 더욱 관련이 없었던 것이다.

반도는 홍건적의 반란 시원지와 지리적으로 까마득한 거리에 있고 반도에 있던 모종의 권력부가 원(元)나라 중심부가 아닌 이상, 홍건적이 목표와 어긋나게 반도애 들어와 반도의 고려 백성들올 도륙해야 할 이유와 근거는 없었던 것이다. 홍건적들의 봉기 진원지는 양자강 유역이며 시작은 원의 순제(1342년)가 재위에 있을 때이고 본격적인 활거는 지정 11년(至正, 1351)부터다.

하남(河南)에서 환산동(韓ll|童)과 한교아(韓映兒), 유복통(劉復通)등이 일어나고, 관선생(關先生), 파두반(破뼈灌), 사류(沙劉), 장사성(張土誠)동은 산동에서 봉기하여 중원(中原)을 몽략하기에 이른다. 원사(元史)에 의하면 지정15년(1355년)에 한림아(한교아, 한산동의 아들)가 박주( 州:안휘성)부양(옐陽)에서 송(宋)나라의 황제(皇帝)로 동극하는 둥 정부조직 형태를 갖추어 하남(河南)일대를 장악한 것으로 쓰고 있다. 홍건적은 남송정부의 부흥을 목표로 했고 남(南)쪽올 상징하는 오행의 화덕(火德:붉은생)이 곧 남송 정부를 부홍하는 것이 되었다. 홍건적 무리들은 식별을 단순화하기 위해 머리에 남방화(南方火:붉은색)를 상징하는 붉은색 수건을 머리에 둘러 홍건적(군)의 표시로 했던 것이다.

이들은 봉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수휘(徐秀輝), 곽자홍(郭子興)동의 호웅을 받았고, 백련교(白運敎:마니교에서 파생한 천태<大台>의 명교<明敎>)도의 적극적인 호용으로 10만의 대군(大軍)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때의 홍건군은 하남의 전지역과 회수(推水)와 산동(山東)지역올 장악하는 등 그 기새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고 역사서는 쓰고 있다.

그러나 홍건적이 안휘성 부양(車陽)에 송왕조를 세운 지 얼마 안되어 자리분배에 따른 내분이 일어나 결속이 약화된 틈을 타 원(元)의 정부는 토벌군을 파견하여 홍건적올 고립시킨다.

이때의 원사(元史)와 고려새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 지정 15년(1355년) 홍건적 토벌군 사령관은 원(元)의 숭상 탈탈{脫脫)이였고 고려에서도 유탁(柳灌), 염제신(薦懷臣)등 2천명 규모의 홍건적 토벌군을 안휘성 부양(박주)에 보냈다고 쓰여져 있다. 홍건적 토벌에 참전했다 돌아온 고려의 만호(萬戶) 권겸(權議), 원호(元顯), 인당(印瓚)등이 고려조정에 보고하기를 고려의 군사들이 회안로(堆安路:안휘성 회남시 지역)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고 쓰여져있는 것이다.

내부 분열과 원(元)의 다국적 토벌군에 의해 고립된 홍건적은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홍건적올 분산시켜 포위망올 벗어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겨 성공적으로 분산이동올 개시한다.

홍건적은 군대를 3군으로 나누어,‘1군은 관선생(關先生), 파두반(破頭播)등을 장군으로 하여 기주(寶州:낙양과 산서성 하동지역)로 진출하고,  2군은 백불신(白不信)을 대장으로 하여 섬서성 동관(違關)을 지나 관중(關中)지방으로 이동하여 세력을 넓히고,  3군은 모귀(毛貴)의 지휘하에 익도(益都:산동성 교주)방향으로 진출하여가는 곳마다 승리했다.라고 원사는 쓰고 있고 고려사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이중에 홍건적의 1군에 해당하는 관선생과 파두반의 지휘하에 있던 반란군은 황하를 건너 북으로 진군하여 산서성(山西省)올 유련한 후 원의 상도(上都) 개평부(開平府:내몽고 남부 찰합시)를 함락 점령해 버린다. 개평부(開平府)는 원의 정동행성으로써 하절기의 수도이며 지금의 호화호특시(呼和浩特市:양성포함)에 해당한다. 이들은 다시 요양(遺陽:遺東)으로 진출했다고 원사와 명사(明史)에서는 쓰고 있다.

이렇게 내몽고와 산서성올 공략하고 섬서성 중북부의 요동(還東:요양)올 공략했던 관선생과 파두반, 사류(沙聲) 휘하의 홍건적 제1군은 고려 공민왕 11년(1361년) 10월에 10여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삭주(期州)를 침략하는 것으로 고려사에 쓰여진다.

이때가 홍건적이 홍기한 지 만 1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 이전에 야미 홍건적 3천명이 압록강(觸綠江)올 건너와 약탈한 적이 있었고(1359년 11월),이해 12월에는 4만의 홍건적 군대가 고려의 의주(義州), 정주(靜州), 연주(購州)를 함락하여 고려는 인심이 흉흉해졌다. 고려의 도성은 피난할 계획을 세우고 곡식 값이 폭락을 하는 불안한 정세 속에 있었다고 고려사는 쓰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1359년 12월에는 고려(高麗)의 서경이 홍건적에 의해 힘없이 함락되어 버린다. 이듬해(1360년) 1월에 홍건적은 고려백성 포로 수만 명올 삼해하여 죽음의 시체가 산처럼 쌓이게 했고, 풍주(豊州), 봉주(鳳州), 안악(安많), 황주(黃州)도 홍건적의 수중에 띨어진다. 더하여 가뭄과 전쟁으로 고려백성들이 수없이 굶어 죽는 사회현상이 고려에서 발생하고, 이러한 현상은 이듬해(1361년) 봄으로 계속 이어진다.

삭주(期州)를 점령한 홍건적은 니성(파城)과 무주(無州)를 점령하고 개주(까州), 인주(延州), 안주(安州)를 유린해 버린다.

이때는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와 고려의 안주(安州)를 점령하기까지 만 2년이 지난 1361년 11월에 해당한다. 홍건적에 의해 원(元)의 대도(太都)가 위험에 처했을 때 원(元)의 마지막 순제(順帝)가 천도를 계획했었던 내용도 고려에 와서는 고려의 왕의 피난으로 결정된다. 말이 좋아 몽진이지 조정과 도성올 버리고 나만 살겠다고 도망가는 것이다.

이것은 16C말 임진년 왜침(慶優)시 선조(宣祖)가 한 행위와 다를 바가 없는 선형(先行)의 사례다. 고려에 있어서의 왕의 도망은 헌종(顯宗)시대의 키타이(찢판)의 침략에서 이미 있었던 일이었기도 하다.공민왕 일행이 홍건적의 첨략에 따른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화급한 나머지 수레(輩:가마)조차 버리고 말을 타고 이천현(利川縣)에 이르러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 고려의 도성(京城)은 저항 없이 홍건적의 소유가 되어버리고 소굴이 되어 버린다.

이때 고려 공민왕(公民王)이 피신한 이천(利)||)은 물론 반도가 아닌 대륙의 호북성 은시현(恩施縣:利川市)이다.왕을 비롯한 중앙정부의 대신들이 도망가고 없는 경성(京城:都城), 적(城)의 점령지이자 소굴로 변한 고려의 도성이란 곳의 형편과 상황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전쟁에 있어서의 목표가 영토확장에 따른 채물 약탈과 노예확보에 있는 것이지만 승자에 의해 목표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서로간에 상대(相對)가 있는 것이니 만큼 선행되어야 할 전쟁에서의 행위는‘인간사냥 인 것이다.-      

다음은 율곤 이중재 홈피에 게재된 이씨 뿌리에 대한 글이다. 참고로 보기로 한다.

-오늘날의 전주이씨(全州李氏) 대종보(大宗譜)에는 新羅의 35대 경덕왕(景德王)때 사공(司空)을 지낸 이한(李翰)을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신라의 35대 경덕왕(景德王 AD. 739~761년)때 사공(司空) 벼슬을 하였던 이한(李翰)이 중국인명대사전(中國人名大辭典)에 실려있다.중국인명대사전(中國人名大辭典)은 1958년 장여화(藏勵 )가 편저한 중국지명대사전과 맥을 같이 하는 책이다.

이한(李翰)은 신라(新羅)인 으로 신라가 대륙에 있을 때 사관(史官)으로서 사공(司空)의 벼슬을 한 인물이다. 그러기에 중국인명대사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사실은 신라(新羅)가 대륙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볼 수 있다.주요내용을 요약하면 중국인명대사전(中國人名大辭典) 447쪽에는 이한(李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한(李翰)의 아버지는 이화종(李華宗)이다. 李翰은 일찍 문과에 급제하여 사공(司空)의 직급을 받았다. 당(唐)나라 천보(天寶 AD. 742~756년)말 때 방관(房琯)의 벼슬을 했다고 적고 있다. 태어난 곳은 휴양( 陽)이라 했다.

*방관(房琯)은 방관(房官)으로써 동방관(同房官)과 같은 직책으로 향시동고관(鄕試同考官)이다. 향시동고관과 합시동고관(合試同考官)을 겸임하여 시험관의 직급이다.

*사관(史官)은 나라에서 귀중한 자료를 왕명을 받아 기록하고 저술하는 직책을 뜻한다. 죽기 전에는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휴양은 하남성(河南省) 상구현(商丘縣)남쪽이다.(중국고금지명대사전)

이한(李翰)의 22세손이 이성계(李成桂)이고 이성계의 父母는 여진(女眞) 사람이다. 그러면 신라 사람의 후손이 여진국에서 태어나는 이유를 설명 하겠다. 이성계(李成桂)가 태어난 곳과 동기는 다음과 같다. 太祖 이성계는 함주(咸州)에서 태어났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603쪽에는 함주(咸州)를 요(遼)나라가 두었는데 그곳은 함평(咸平)이라고 적고 있다.

함평현(咸平縣)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통허현(通許縣)이라고 되어있다. 이곳은 금(金)나라 때 地名을 함평로(咸平路)라고 적고있다. 함주(咸州)인 함평(咸平)은 하남성(河南省) 의주(義州)가 있던 급현(汲縣)땅이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는 이인인(李仁人)이며 환조(桓祖)로 되어있다. 이인인(李仁人)이 환조(桓祖)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혈통의 계보로는 태조의 아버지가 환조(桓祖)로 되어있다. 환조의 아버지는 도조(度祖)이며 도조의 아버지는 익조(翼祖)이며 익조의 아버지는 목조(穆祖)라고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공양왕(恭讓王)편과 고려도경(高麗圖經)편에 기록하고 있다.

이성계(李成桂)의 혈통은 여진족(女眞族)이며 여진국(女眞國)은 글란(契丹)과 요(遼)나라때 제후국이었으므로 女眞國의 역사년대표는 누락되어 보이지 않는다.女眞國이 있었던 곳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동북부에 있었다. 본시 여진국(女眞國)에서 부장으로 있던 아골타(阿骨打)는 高麗의 스님과 女眞의 여자 몸에서 태어난 사람이며 여진국(女眞國)에서 반란을 일으켜 금(金)나라를 세워 이름을 완안민(完顔旻)이라 하였다.

여기서 글란(契丹)의 뿌리에 대하여 기록해본다.진(秦)나라가 망한 후 일부 군신(君臣)의 무리는 진한(秦韓)에서 진한(辰韓)으로 갈라져 나가고 일부 군신(君臣)은 말갈(靺鞨)로 떨어져 갔다.

말갈(靺鞨)은 발해(渤海)를 패망시킨 후 글란(契丹)국이 되었다. 글란국은 다시 요(遼)나라가 되어 女眞國을 제후국으로 두었다. 그후 金나라 아골타(阿骨打)는 金나라를 세워 완안민(完顔旻)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러니깐 新羅와 말갈(靺鞨)은 같은 혈통이기에 新羅 사공(司空)이었던 이한(李翰)의 후손은 女眞國에서 남게 되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같은 뿌리의 혈통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성계(李成桂)의 부모가 女眞國의 사람이라 하여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歷史的인 사실이다.

오늘날의 족보는 상업화의 바람을 타고 많이 변질 되어 가짜 족보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조선 후기부터 시작되었는데 원래 왕족만 가지던 족보가 명문세가를 거쳐 조선후기 평민들의 지위가 상승하면서 명예를 소중히 하던 서민들도 점차 족보를 만들게 되었고 이로부터 많은 성씨 들이 생겨났다. 가짜 족보도 이때부터 생겨났다. 그리고 족보의 상징성은 점차 퇴색해 갔다. 들리는 말로는 조선후기에 너무 많은 족보가 만들어져서 지금 남아있는 대다수의 족보는 거짓이 반정도 썪여 있다고 한다.  

요즘은 출세를 하고도 족보가 형편없는 사람들 중 일부가 자녀의 장래를 위해서 일부러 옛날 유명한 집안의 족보에 자신의 조상 이름을 끼워넣는 수법으로 가짜 족보를 생산하고 있다.현재 중국에 1억명, 우리나라에 약 300만명 정도가 있을것으로 추산되는 이씨는 단일 성씨로는 세계최고 이지만 성씨의 뿌리라는 사실이 어쩌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끝으로 율곤 이중재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성씨와 본관에 대한 짧은 한마디를 싣고 이 글을 맺는다.

"한국의 경우 족보가 생긴 이래 혈족(血族) 간의 격차는 더욱 심화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이씨(李氏)나 김씨(金氏) 박씨(朴氏) 장씨(張氏), 조씨(趙氏)등 할 것 없이 모두가 환인씨(桓因氏)에 의해 한일(一)자의 성씨에서 유래된 단일민족이라 할 수 있다. 고로 굳이 같은 본관(本貫) 같은 성씨(姓氏)를 고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씨족(氏族)간의 李氏니 金氏니 朴氏니 하여 혈족 간에 지나친 경쟁심리를 유발하여 급기야는 상쟁(相爭)의 불씨를 유발하는 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말하는 전주(全州)의 위치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287쪽에 全州를 찾아보았다. 全州는 全縣을 참고하라 했으므로 全縣을 살펴보니 漢나라때 영릉현(零陵縣)이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영릉현(零陵縣)을 찾으니 漢나라때 호남성(湖南省) 영주부(永州府)라고 되어있다. 영주부를 중화인민공화국의 분성지도집(分省地圖集)에서 찾아보니 호남성(湖南省) 남쪽에 있었다.다시 말해 광서성(廣西省)과 호남성 접경지대에 있었는데/현대 지도에는 광서성(廣西省) 북쪽 계림(桂林) 위에 全州가 있다.
위 글은 "이씨의 뿌리역사" 에서 도움 받은 글 입니다.-


  *율곤 이중재 고려 개봉Click here!  

  *율곤 이중재의 하남 위례성Click here!  

* 충녕 세종의 학우 김문기 가문의 후손 김*태 비전 가훈Click here!  


실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은 수없이 고려사 개찬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기록의 이성계 고향 함주를 함흥이라 한 것 까지는 좋은데 개경으로 풀이한 개주는 원문에 함주의 서북에 있다 한  모순은 합리화 할 아무런 명분이 없다. 바로 대륙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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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는 ‘백제 서부인’이며 그는 지금의 廣西 ‘백제향’ 지역에서 출생한 것으로 기록(원광대 소진철) Click here!

   1996년 9월 15일 KBS 1TV「일요스페셜」에서는 신라중심의 역사기술로 소홀히 다뤄져온 백제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됐다.「속 무령왕릉, 잊혀진 땅 ─ 백제22담로의 비밀」이란 이 다큐멘터리는 백제 특유의 지방 통치체제인 '담로'를 화제로 삼아 6세기 당시 활발한 해상활동을 벌였던 백제의 구역을 추적한 것이다.  담로(擔魯)란 백제의 지방 행정 구역의 하나로서, 왕자나 왕족을 보내어 다스리게 한 행정 구역을 말한다. 백제는 22담로를 두었으나 시대와 지역의 대소에 따라 수효의 변천이 있었다.  과연 '담로'는 어떤 모습의 통치체제였고, 어디에 존재했는지 또, 해외에까지 뻗어 있었던 것인가! ─ 이런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기위해 제작진은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 일대를 섭렵하며 8개월 동안 백제의 흔적을 추적했는데 가장 큰 성과는 중국에서 백제의 지명을 찾아낸 것 일 것이다. 제작진은 베이징에서 3천km나 떨어진 베트남 인접지역 광시좡족(廣西壯族)자치구에서 '백제향(百濟鄕)'이란 이름을 찾아냈고, 이곳이 바로 중국의 사서인《송서(宋書)》에 등장했던 백제의 옛 영토 '진평군'이란 것을 알아냈다. 백제향의 중심마을 이름이 백제허(百濟墟ㆍ백제 옛터)란 것도 눈길을 끄는데 이곳에는 전남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맷돌과 외다리 방아 등이 발견돼 백제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또한 지금의 중국 베이징과 톈진, 스자좡(石家莊)지역에까지 백제의 흔적이 퍼져있음을 확인했고, 더 나아가 중국사서에 기록된 백제 태수들의 임지가 중국 동해안을 따라 선을 잇듯 분포한다는 것도 밝혀, 중국 속의 백제 지배지가 베이징과 톈진지역으로부터 지금의 저장성(浙江省)지역까지 남하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줬다. 특히 제작진이 발견한 흑치상지의 묘지명(남경 박물관 소장)에서 흑치상지가 흑치지역에 봉해지면서 원래 백제의 왕성(王姓)인 부여씨를 버리고 흑치씨를 사용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는데 결국 흑치지역이 동남아시아를 뜻하기 때문에 백제의 통치지역은 동남아시아 일대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백제의 남방경영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 어떻게 전개 되었을까.    백제의 남방경영은 지금의 제주도 경영부터 시작되는데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필리핀 군도로 뻗어나갔다. 즉 백제는 제주도를 기항지로하여 이전부터 진출해 있던 북규슈(北九州, 기타큐슈)를 잇는 상설 항로를 열었다. 그리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금의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삼고 대만(타이완)해협을 지나 필리핀 군도까지 항로를 연장시켰다. 필리핀 군도(群島)는 흑치국(黑齒國)으로 일컬었던 곳인데 이곳이 백제와 연관이 있음은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백제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묘지석이 말하고 있다. Click here!


이름:박달 ( 남 )
2003/1/27(월) 17:41 (MSIE5.01,Windows98) 61.248.28.60 1024x768

(펀글)明太祖 朱元璋은 과연 고려인인가?(대명일통지의 원문을 찾아주세요!)  

운영자님~ 대명일통지에서 주원장이 한 말 '짐의 조상은 조선인이다. 짐의 조상의 묘소가 조선에 있다' 정말 사실인지 궁금합니다. 대명일통지의 기록에서 원문을 찾아내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민족의 뿌리와 미래(cafe.daum.net/hanfuture)에서 퍼온 글입니다.

역사의문: 주원장은 과연 고려인인가?

번호:1200 글쓴이: 도경당 조회:222 날짜:2003/01/24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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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부터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설이 있었는데, 그것을 뒷받침 해주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에 있는 주원장에 관한 전설이다.
우리나라에는 주원장에 관련된 전설이 너무나 많다.
특히 주원장과 동시대인물이자 주원장보다 6세 적은 조선태조 이성계와 연관된 전설이 많다.
주원장이 등장하는 전설에는 거의 어김없이 이성계 또한 등장한다.
대체 왜 그런 것일까?
과연 정말 주원장은 고려사람인 걸까?
일설에 의하면 주원장은 원래 도적출신으로 고려에서 죄를 짓다가 중원대륙으로 도망을 가서 홍건적을 일으켜 명나라를 건국했다고 한다.
주원장의 고향이 사전에는 안휘성이라고는 되어 있지만 정확하지 않다는 점을 생각할때 그가 고려인이었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명나라의 통지 [대명일통지]에는 주원장이 이르기를 '짐의 조상은 조선인이다. 짐의 조상의 묘소가 조선에 있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고 하며 그는 朱씨로서 주자의 후손, 신안주씨일 가능성도 많다.
그러니 주원장을 여러정황으로 살펴보았을때 중화족[漢族:한족]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다음은 주원장과 관련된 전설이다.


천자봉 전설


경상남도 진해시 자은동과 웅천 1동에 걸쳐 있는 산.
위치 : 경남 진해시 자은동, 웅천 1동
높이 : 502m

높이 502m로, 시루봉(웅산:693.8m) 능선이 남쪽으로 벋어내리며 솟은 산이다. 산기슭이 가파르고 자갈이 많아 성채나 돌산처럼 보인다. 웅장한 산세 때문에 조선 태조(이성계), 명나라 태조(주원장), 주(朱)씨, 이(李)씨, 천자(天子) 등과 관련된 전설이 여럿 전한다.

옛날 천자봉 연못의 이무기가 용이 못 되자 마을 사람을 못살게 굴었다. 이에 염라대왕이 이무기에게 용대신 천자가 되라고 권하여 연못 아래 백일마을의 주(朱)씨 가문 아기로 태어났다. 이 아기가 뒷날 중국으로 건너가 명나라 태조인 주원장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전설도 전한다. 함경도 사람 이씨가 하인인 주씨를 데리고 명당을 찾으러 천자봉에 올랐더니 바다에서 반인반어(半人半漁)의 괴물이 나타나 바닷속에 굴이 둘 있는데 오른쪽 굴이 천자가 태어날 명당이라고 점지해 주었다. 하인 주씨가 욕심이 나서 자기 선친은 오른쪽에 묻고 주인 이씨의 유골은 왼쪽에 묻었다. 그래서 주씨 가문에서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태어났고, 이씨 가문에서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태어났다고 한다.


명나라황제가 등장하는 무협드라마 신용문객잔이 방영될 시간을
기다리며.....도경당 서함.


[한민족 고대사] 고대사 X파일 2부 [ 신라와 고려의 후예 조선과 청 ]  

  번호:14  글쓴이: 가리온 조회:1647  날짜:2002/08/23 13:11    
..  
고대사 X파일 2부 명나라 건국의 비밀  
중세때를 살펴보자 고려말에 조선에서는 태조 이성계와 이지란이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웠다. 중국에는 그와 동시대 인물인 주원장이 명(明)나라를 세우게 된다.그런데 이 주원장이 출생지가 어디인지는 중국에서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놀라운 것은 주원장의 출생지라고 회자되는곳이 우리나라의 전라남도 해남 마을로 전해 내려온다.

주원장은 털복숭이 바다수달의 아들이라는 전설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천하 명당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메다가 전라남도 해남에서 바닷가 어딘가에 천하제일의 명당이 있음을 알아 냈다. 그곳에다 조상의 묘를 쓰게 되면 자신의 아들이 천자가 되는 천고제일의 명당이었다. 그러나 정작 관을 안착시킬 묘터는 찾지를 못하고 한달을 내리 보내다가 마침 해남 마을의 털복숭이 소년이 헤엄을 잘치고 해남 이곳저곳 안가본데 없이 지리에 환하다 해서 그에게 길안내를 부탁했다. 물론 명당을 찾는다는 목적은 숨기고 길안내를 부탁했다. 그렇게 또다시 한달을 명당을 찾아헤멘 끝에 마침내 천하제일 명당의 위치를 발견해냈다. 그곳은 해남의 육지가 아닌 바다 한가운데의 바위섬에 위치해 있었다.  

위치를 확인한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는 묘를 쓴뒤에 혹시나 털복숭이 소년이 그묘자리를 훔칠까봐 죽이려 했다. 그러나 길안내를 해준뒤 그 털복숭이 소년은 온데간데가 없었다. 묘터를 쓰고 난뒤 털복숭이 소년을 죽여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  며칠간을 그 소년을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어느날 밤 하늘에 벼락이 치고 상서로운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는 드디어 자신이 쓴 천하제일의 명당의 기운이 움직였다고 생각하고 크게 기뻐 했으나 그순간 저멀리 털복숭이 소년이 나타나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 나는 당신이 천하 명당을 찾아 이곳에 온 것을 알고 있다. 나역시 오랫동안 이곳 어딘가에 천하제일 명당을 찾아 헤메고 있었는데 묘를 쓰는 정확한 위치와 시간을 몰랐던 것 뿐이다. 그런데 그대가 와서 마침내 묘의 위치와 방향 그리고 시간을 알 게 되어 그 묘터에 나의 조상님의 묘를 썼다 그대는 묘의 위치를 알 게 해주었으므로 그 옆에 그보다는 못하지만 작은 나라의 왕이 되는 혈자리가 있기에 그곳에 당신 조상의 묘를 썼으니 그리알라. 이제 나는 중원 대륙으로 간다. 그곳에서 나는 나라를 세울 것이다." 하고 떠났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천고의 명당은 그 주인이 있기 마련이니 복연이 없는걸 어찌 하겠나? " 이미 발동된 명당의 혈자리를 건들였다가는 오히려 화를 당하기 때문에 이성계의 아버지는 그 자리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만약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천고의 명당에 묘를 제대로 써더라면 어쩌면 역사의 바뀌어 있을지도 모른다. 명태조가 이성계로 조선왕조가 주씨왕조로 바뀌는 해괴한(?) 경우가 생겼을지도... 해남 어딘가에 주원장의 출생지라고 전해지는 곳은 이 전설 말고도 다른 이야기가 또 전해진다. 주원장의 출생지가 중국 어디에도 없고 출생지가 밝혀지지 않음은 주목할 만한 처사이다. 대개 천자가 태어난 땅이라면 중국내의 어딘가라면 그 마을 사람들은 난리가 난다. 천자가 출생한 곳이라 하여 자손대대로 자랑을 하기 마련인데 주원장의 출생지는 중국대륙내에는 없다. 전해내려오는 설화대로 주원장은 전라남도 해남 출신이 아닐까?

  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는 복희, 염제, 신농씨, 黃帝, 소호금천씨, 전욱고양씨, 제곡고신씨, 요, 순, 하, 은, 주, 진(秦), 한(漢), 서한(西漢), 동한(東漢), 후한(後漢), 삼국(三國), 위(魏), 촉(蜀), 오(吳), 진(晋), 서진(西晋), 동진(東晋), 남조(南趙)는 송(宋), 제(齊), 양(梁), 진(秦), 후양(後粱), 북조(北趙)는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그리고 수(隋), 당(唐), 무주(武周), 오대시(五代時), 북송(北宋), 남송(南宋), 거란(契丹), 요(遼), 서요(西遼), 금(金), 몽고(蒙古), 원(元), 명(明), 후금(後金), 청(淸) 등은 모두 고조선(古朝鮮)이 뿌리라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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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한민족은 예맥족이 아니다.Click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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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Click here!
joins.Click here!

고려 도경 기록 ;놀라운 고려도경의기록;고려도경의 놀라운 기록Click here!
 
이글 아래의 論旨논지, 고려도경의 기록과 똑같은 기록은 이미 필자가 여러번 이 홈의 여러곳에 올린바  있듯이,원사 元史, 원사지리지, 수서 열전 동이고려, 북사 고구려전에서도 똑 같은 기록인 바, 명사[明史]만 여기에 올리면서, 그 다음 삼국사기 기록을 발췌하여 비교해보고서는, 당연히 김부식의 기록이 맞는 것으로하여, 고려도경의 고려 서울의 위치 기록은 개경이라는 결정을 내리고, 서경=평양=장안=서안은 따로 존재한다고 매듭지었습니다.여기까지 생각해보니 개경=촉막군=경주라고 기록했던 고금지명사전이나 한주=송악=개주= 사천성 성도라 기록했던 고려사, 고려사절요가 맞다고 하겠습니다.

1.명사[明史], 권320. 외국전[外國傳], 외국[外國]1, 조선[朝鮮]

  원문 - 후당시왕건대고씨겸병신라백제지도[後唐時王建代高氏兼倂新羅百濟地徒]  후당때 왕건이 고씨대신 신라, 백제의 땅과 백성을 모두 취했다.

  거송악왈동경이이평양위서경[居松嶽曰東京而以平壤爲西京] [왕건이] 살았던 송악은 동경이며 평양이며 서경이다.

2.#37卷-志6-地理4-00;삼국사기 37권-지6-지리4-00
  雜志第六. 잡지 제 6. 地理四. 지리4. <高句麗>·<百濟>. 고구려*백제
  #37卷-志6-地理4-01

  전략.........以此言之, 今<大同江>爲<浿水>, 明矣. 則西京之爲<平壤>, 亦可知矣.
  ...후략
  이말이 지금의 대동강이 패수라는 명백한 말이다. 즉   서경이 평양이란 것을 역시 알수있지 않는가.... 則西京之爲<平壤>, 亦可知矣.

위 1,2를 비교하면서 특히 서경은 평양이라는 김부식의 말을 보면, 평양=개경이라는 말은 안했으므로 개경과 서경=평양은 따로 존재한것이지 개경=평양=장안이라고 기록한 수서,원사등등은 외국이라서 착각해서 기록했다고 사료됩니다.

경인문화사 간행 해동역사 하권 627쪽 기록

해동역사 속 권 제 십(海東繹史 續卷 第 十)

烈水 韓 致奫 術(열수 한치윤 술)

지리고 십 (地理考 十)
高麗 一 (고려 일)
彊域總論 (강역총론)
高麗圖經(고려도경)

高麗南隔遼海西距夭水北接契丹舊地東距大金又與日本流球耽羅黑水毛人等國.
(고려남격요해서거요수북접거란구지동거대금우여일본유구탐라흑수모인등국.)

고려는 남쪽으로 요해에 막혀있고, 서쪽으로 요수에 접하고,북쪽으로 거란의 옛땅에 접하고,동쪽으로는 금나라 그리고 일본, 유구, 탐라, 흑수모인등의 나라에 접해[본문;거距;떨어져 ]있다.

-->이 동거대금우여일본東距大金又與日本의 문구 ;

반도 고려라면 일본이 동쪽에 있는 것은 맞으나, 금나라가 고려의 동쪽에 있다는 소리는 분명한 대륙 고려라는 소리 아닌가?!반도 고려의 동쪽은 동해 바다인데?!

犬牙相制唯新羅百濟不能自固其於爲麗人所倂今羅州廣州道是也.
(견아상제유신라백제불능자고기어위여인소병금나주광주도시야.)

개 이빨처럼 서로 오로지 견제하여 나란히 있는 지금의 나주 광주도廣州道에 있는
고려인들은 스스로 속박되어 그 머무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其國在京師之東北自燕山道陸走渡遼而東之其境凡三千七百九十里若海道卽河北
(기국재경사지동북자연산도육주도요이동지기경범삼천칠백구십라약해도즉하북)


그 나라에 있는 서울의

1.동북은 연산으로부터 육지로 연결되어 있는 도로를 쭉 따라 요[遼]의 동쪽까지의 경계가 무려 3790리이고 만약 바다로 나간다면 하북성으로 나가야 한다.(하북성은 북경밑임.)

京東淮南兩浙廣南福建皆可旺(경동회남양절광남북건개가왕)
(그 나라)서울
2.동쪽은 회지방의 남쪽인 절강성과 광동성의 두성(省)이며

3.남으로는 복건성으로 모두 갈 수 있다.

今所建國正與登來濱隸相望舊封境東西二千里南北一千五百餘里
(금소건국정여등래빈예상망구봉경동서이천리남북일천오백여리)


지금 건국한 곳에서 평정한 등주와 봉래, 빈이 속하여 서로 보이는 옛 봉토의 경계까지 동서 2000리, 남북 1500여리로

今旣병新羅百濟東北稍廣(금기병신라백제동북초광)
지금은 이미 나란히 있는 신라 백제의 동북보다 약간 넓다.

其西北與契丹相接昔以大遼爲界後爲所侵迫乃築來遠城以爲 固然亦恃押綠以爲險也
(기서북여글란상접석이대요위계위후위소침박내축래원성이위저고연역시압록이위험야)

그 4.서북은 거란과 상접한 옛날 대요(대요)와의 경계로 후에 (요나라가) 이 곳으로  침략 해 와 내원성을 쌓았는데 압록강의 험하고 견고한, 막힌 곳을 의지해 쌓았다.



위 글의 요약은 고려 서울로부터

1. 동북쪽은 연산으로부터 길 따라 육로를 쭉 가면 경계까지 3790리,바다로 나가려면 하북 성을 지나야 하고[주,하북성은 북경밑임]
2. 동쪽은 회지방 남쪽의 절강, 광동성, 2성이고
3. 남쪽은 복건성으로 모두 갈 수 있고, 지금 건국한 곳에서 평정한 등주, 봉래,  빈이 속하는 서로 보이는 옛 봉토의 경계까지는 동서 2000리 남북 1500여리.  지금의 고려영토는 기존 신라 백제의 동북 경계보다 조금 더 넓다.
4. 그 서북쪽은 서로 접한 거란이 침략해온 곳에 압록강에 막힌,
    험하고 견고한 곳에 내원성을 쌓았다

**여기에서 거란이 위치한 곳이 규명되면,자연 고려는 대륙에 있었는 지, 반도에 있었는 지가  규명되니,여기에서 조안벱티스가 제작한 지도와   Asia" from Brookes, R., The General Gazetteer; or Compendious Geographical Dictionary. Eighth Edition. Dublin, 1808. 소장(所藏)지도를    아래에 올리므로, 거란=키타이는 분명 신강성 =>서안  서쪽에 위치해 있음을 확인하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기존 사학계에서 말하는 북한의 압록강을 건너와 반도 고려에 거란이 쳐들어 왔다는 소리는 말짱한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서역지역인 신강성에 있던 거란이 한반도에까지 쳐들어 온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인 것. 섬서성 서안인 개경으로 쳐들어 오는 거란을 고려도경은 기록한 것입니다.그러므로 내원성은 아래의 기록대로 섬서성 서안 정서正西쪽 400KM지점인 무산현이 맞는다는 말...

아래는 1704년 조안베티스가 제작한 지도.


문 무 (2005-02-18 22:30:46, Hit : 19, Vote : 0)  



  * <삼국지 위서 8> 공손씨들이 활거했던 요동은 어디인가 ?


▶ <삼국지 위서 8> 공손씨들이 활거했던 요동은 어디인가 ?

   247-7)  三 國 志 卷 八 魏 書 八

   [ 아래의 글은 개인 또는 특정 단체등을 비난,비방키 위해 작성된 글이 아니며, 중간의 해설에는 경어가 빠져 있습니다 ]

   열전편을 보고 과연 “공손씨”들이 활동 했던 요동, 요서가 하북성 또는 그 동쪽지방에 있었는가에 대해 알아 보기로 하십시다.

(1)  公 孫 瓚 字 伯 珪 , 遼 西 令 支 人 也 。 令 音 郎 定 反 。 支 音 其 兒  光 和 中 , 涼 州 賊 起 , 發 幽 州 突 騎 三 千 人 , 假 瓚 都 督 行 事 傳, 使 將 之 。 軍 到 薊 中 , 漁 陽 張 純 誘 遼 西 烏 丸 丘 力 居 等 叛, 劫 略 薊 中 , 自 號 將 軍 , 〔 二 〕 略 吏 民 攻 右 北 平 、 遼 西 屬 國 諸 城 , 所 至 殘 破 。 瓚 將 所 領 , 追 討 純 等 有 功 , 遷 騎 都 尉 。 屬 國 烏 丸 貪 至 王 率 種 人 詣 瓚 降 。 遷 中 郎 將 , 封 都 亭 侯 , 進 屯 屬 國 , 與 胡 相 攻 擊 五 六 年 。 丘 力 居 等 鈔 略 青、 徐 、 幽 、 冀 , 四 州 被 其 害 , 瓚 不 能 禦 。

☞ 공손찬은 요서(遼西) 령지(令支)인이다.

▶ 광화중에 량주(涼州 : 감숙성 진안현, 복강현地)에서 賊들이 일어났다, 유주의 돌격기마대 3천인을 보냈으며, 공손찬은 장(將)으로 출정, 돌격기마대가 계(薊)에 도착할 때 어양태수 “장순”의 꾀임에 빠져 <요서오환>구력거등이 반란을 일으켜 <계>를 위협하고 약탈하는 중이었다.     이에 계의 관리들 및 민등이 <우북평> 및 요서의 속국으로 있는 여러 성들을 공격, 남아있던 적들을 파했는데, 공손찬이 우두머리로, 추격하여 토벌하는데 “순”의 공이 있었다. 이때 “순”은 스스로 장군이라 했는데 “九州春秋曰” : “純自號彌天將軍 、安定王”이라 했다. 여기서 <안정왕>은 <안정군>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속국의 오환왕이 무리들을 인솔하고 와서 <공손찬>에게 항복했다.

   ①<안정왕 : 안정군의 태수 즉 왕을 말하며, 안정군은 감숙성 고평현에서 다스렸고, 따라서 현 하북성에 있을수 없는 지명입니다>

   ②<요서 령지현 ; 령지현은 춘추시대 산융의 속국의 땅이다. 사기를 보면 “離支”로 기록되어 있으며, 晉(진)나라 초에 선비에게 함락당한 곳이다. 따라서 령지현이 현 하북성 지역에 있다는 현 해설은 엉터리다. 晉나라 시의 선비는 현 하북성 지역에 없었다. 말 그대로 요서(遼西)지방은 선비들이 동진하여 활동하던 본시 음산(하투서북방 황하연안)의 남쪽지대가 요서지방인 것이다>
    천중랑장, 도정후에 봉해졌다. 군대는 속국에 진주, 주둔했다. 이곳에서 胡(호)들과 상호,공격과 수비를 한지 5, 6년이다. 오환등이 변경을 鈔略(초략)하여 피해가 심했으나, <공손찬>은 이들을 제어할수 없었다.

    ③량주라면 감숙성 진안현 및 복강현등지를 말하고 있다. 이곳에서 이 지역의 胡 또는 강족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가까이에 있던 유주(幽州)관내의 돌격기마대(선봉 기마대)의 파견을 요청하자 <공손찬>과 함게 3,000 여명이 “량주”로 가는 도중에 “계(薊)”에 도착했을 때의 상황이 위의 설명이다. 문제는 <량주>라는 곳이 <유주>와 근접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④만약에 유주가 현재 한국의 학자님들 해설대로 하북성 동쪽 요녕성 및 반도 북부가 유주였다고 했을때 감숙성 량주에 반란이 일어났다 하면 그 주위에 있던 다른 군현들의 군병을 보내면 될 터인데 거의 만리 쯤 떨어져 있던 유주의 돌격기마대를 요청해서 그들이 “량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인민은 다 죽고, 상황은 이미 종료되었을 것은 뻔한 것이다.     따라서 <량주>에서 요청한 돌격기마대가 있던 “유주”는 량주와 근접 즉 가까이 있었으니 요청한 것이지, 만리쯤 떨어져 있던 한반도 북부의 유주에 요청한 것이 아니다. ( 즉 한반도 북부 및 하북성 동쪽지방을 유주지방이라고 해설하는 국내 사학자님들은 한 마디로 “무식이 유식하다”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기록을 보면 “량주”에서 반란이 일어나 다급하게 진압병력을 요청해서 그곳으로 말채칙을 가하던 유주의 돌격기마대가 “계” 즉 “어양”에 도착 했을 때 오환들이 또 난을 일으켜 약탈하는 중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을 토벌하고 수비하고, 공격하고 거듭하기를 5, 6년이나 했는데도 “공손찬”이 이들을 다스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이다.
    이렇다면 “량주”에서 다급히 요청한 돌격기마대는 “계 즉 어양”에서 엉뚱한 지역에서 적들과 한판을 붙었다는 이야기이다. “량주”는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량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기록도 없다는 것은 “량주”나 “우북평” 이나 “계 즉 어양”이라는 곳들이 감숙성 “량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결론 ;  원문Click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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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씨의 유래 * http://www.khaan.net/cgi-bin/technote/read.cgi?board=SURNAME_ORIGIN&y_number=25
*이성계가문에 대하여,고조부 이안사는 몽골인http://blog.naver.com/free_less?Redirect=Log&logNo=100019948815
몽골인에 대한 보고서 http://blog.naver.com/free_less?Redirect=Log&logNo=100019948815
우리 나라의 이씨는 한국 자생(自生)의 이씨와 외국에서 귀화한 외래(外來)의 이씨로 나눌 수가 있다.즉 현재 우리 나라 이씨의 본관은 237본인데, 그전의 「증보문헌비고」에서는 451본으로, 「조선씨족통보」에서는 546본으로 나타났던 일이 있다. 이를 견주어 보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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